볕 고르기 / 류휘석 며칠 눈이 내렸대요. 길게 잠들었다 깨어 이제야 확인합니다. 하얗게 쌓인 눈을 기대했는데 도로 바깥으로 밀려난 검은 덩어리만 보입니다. 내가 잠든 사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눈부셨겠죠. 나는 옷깃을 여미고 창문을 닫는 정도로 이 계절을 보내줄 생각입니다. 탁자에 앉아 오르골을 켭니다. 태엽 맞물리는 소리 두어 번. 멜로디가 재생됩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물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 사람의 온도가 빠져나간 집은 영영 추울 것처럼 굽니다. 나는 아- 발음해 봅니다. 오르골과 수증기와 내가 차가운 창에 부딪쳐 거실 바닥을 구릅니다. 이제야 나는 완벽하게 혼자인 것 같습니다. 지나간 계절에 남겨진 낙엽처럼 조금 바스락거릴 뿐입니다. 나는 남은 것들로 잘살아 볼 생각입니다. 흰 물컵에 따듯한 물을 붓고 옷장 속에 두었던 편지를 꺼내 봅니다. 보관의 매뉴얼은 늘 건조하고 서늘하므로 우리는 빛도 없이 멋지게 갈변해 잘 말라 있습니다. 바깥에 수북이 쌓인 눈도 결국 녹아 마르고 따듯한 날이 오겠지요. 나는 말린 계절을 다 더하면 우리가 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편지를 씹어도 보고 물에 불려도 봅니다. 투명한 유리잔에 검은 잉크가 번져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물에 번진 말 줄임표 서너 개와 흘려 쓴 마지막 인사 같은 것이 둥둥 떠오릅니다. 간혹 창으로 빛이 들어 그것을 보고 있던 나의 몸이 함께 밝아지기도 합니다. 이제 행간에 남은 미래는 없는데 나는 불 꺼진 거실에서 자주 빛을 발견합니다. 싱크대로 너절해진 우리가 물을 토하며 형편없이 굴러떨어집니다. 몇은 찢기고 몇은 생생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라지는 것보다 서서히 잊히는 것이 무섭습니다. 추신 우리가 천천히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나는 옷깃을 여미고 나가 건조하고 서늘한 공터를 찾을 겁니다. 잘 마른 우리를 태울 곳을 찾아 오래 걸을 생각입니다. 바람이 불어 재가 흩어지면 나는 그것들을 다 치우고 집에 돌아갈 겁니다. ㅡ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3년 가을호 --------------------------
* 류휘석 시인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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