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마카베오 6,18.21.24-31 요한 12,24-2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공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입니다.
신학교에서 같이 배웠던 1년 선배 신부님이 뉴욕에 와서 3주간 있었습니다.
함께 미사하고, 함께 산보하고, 함께 식사하니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32년, 선배는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한바탕 꿈’과 같은 시간들이
쏜살처럼 지났습니다. 우린 둘 다 어느덧 반백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바둑에는 ‘복기’ 가 있듯이 우리는 산보하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을 회상하였습니다.
학창시절 우리가 존경했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였습니다. 능력과 언변이 뛰어났던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고, 속이 깊고 따뜻한 신부님들의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셨던 아버지 신부님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신부님께서는 은퇴 하신 후에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하셨습니다. 혼자서 장을 보시고,
혼자서 밥을 해서 드시고, 혼자서 청소와 빨래를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앞으로 은퇴 하는 사제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뉴욕에서 저도 홀로 사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지난 세월, 우리에게 기둥과 같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소유를 이야기 하였던 법정 스님이 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였던 성철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멋진 글을 남겨 주었던
함석헌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며,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는 말을 하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겼던 자상하셨던
정진석 추기경님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해 맑은 웃음으로 사랑을 전해 주시는 드봉 주교님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처음을 만났던 때에 그분들은 지금 저의 나이와 비슷하셨습니다. 지금 저를 만나는
후배들에게 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분명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습니다. 번듯한 교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도 예전보다 약해졌습니다. 어쩌면 성장과 발전이라는
허상에 취해서 복음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이 남겨준 열매를 맛있게 먹으면서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데는 게을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대인들의 어른이었던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2000년 동안 떠돌이로 지냈지만 지금 당당하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은 파괴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혼이 살아있다면 성전은 언제든지 새로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고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봉헌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라는 신앙의 별이 있습니다. 오늘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들 또한 후손들이 기쁘게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별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이기락 타대오 신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마카베오 6,18.21.24-31 요한 12,24-26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미사를 봉헌한 이후 오늘 첫 번째로
이 복자들의 기념일을 지냅니다
몇 년 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올린 시복 미사의 감동이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 복자를 조상으로 모신 이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보였고
그들이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묵상한 지혜서의 단락을 보면 세상을 떠난 의인들의 영혼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루카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 신앙을 고백하며 목숨을 바친 이들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순교하고 싶으십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할 수는 없겠지요
시복 조사를 할 때 순교자들은 순교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기 때문에
제1차 기적 심사에서 관면을 받습니다 그만큼 순교는 특별한 은총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을 복자로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복자가 되든 성인이 되든 이미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신 분들에게는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신심행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복 시성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을 마음이 없다면 그 시복 시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하려는 열망이 더없이 컸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지요(요한 15,13 참조)
박해가 그친 다음에도 순교하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삶,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갈망이 있는지요 적어도 복음에 따라 살기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포기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겠지요
주님은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생각하고 싶은 내용은
예수님 말씀대로 나는 나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지 여부가 아니라
내가 의무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십자가를 지는 지,
아니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크고 작은 일에서 나를 버리려는 의지가 내 안에 있는지,
그것입니다
참으로 장한 순교자들으 모범을 뒤따르고 싶으십니까?
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요한 12,24-26
사람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그대로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바라는 예수님을 만들어 냅니다. 잘못된 신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죽어 가는 길을 살고자 하는 길과 대척점에 놓고 늘 죽음을 회피하고는 합니다.
김영민 교수가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라는 칼럼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테지요.
김영민 교수는 살고자 아우성치는 우리 한국 사회가 죽음의 문화에 무참히 갇힌 이유를
역설적이게도 죽지 않으려는 오만과 탐욕의 결과로 봅니다.
오히려 죽었다 생각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살려고 바둥대다 보면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서로 움켜쥐려고 애쓰다 보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미워 보이고 심지어 해치고 싶은 마음까지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밀알이 되어 죽어 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우리 나라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생애가 그러할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세상의 생명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굳이 어려운 일을 찾기보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를
지녔으면 합니다. 이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음을 생각하는 여유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세워 놓은 탐욕을 없애고 다른 이와 함께 나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