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마지막 주 목요일(28일) 밤 9시경. 서울시 서초동 소재 한 음식점 입구에는 운전기사가 딸린 검정색 대형세단 20여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식당 건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2층 안쪽 커다란 방에는 20여명의 정치인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좌장인 ‘말목회’의 8월 정례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말목회는 최경환 부총리가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일할 때 원내대표단에 소속됐던 인사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만나 저녁밥을 먹는다고 해서 이름이 ‘말목회’다. 주요 참석자는 당시 원내수석부대표였던 윤상현 의원을 비롯 김태흠·이헌승·김진태·이우현·이완영·문정림·이채익·홍지만·강은희·류지영·유의동 의원 등이다.
모임 참석자들은 주로 친박계 인사들이며 최 부총리의 지역구(경북 경산청도)와 인접한 TK(대구경북) 출신이 많았다. 최 부총리는 안쪽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모임 내내 대화를 주도했다. 좌석 배치는 국회의원 선수와 나이가 많은 의원들이 안쪽 테이블에, 초선이면서 나이가 적은 의원은 바깥쪽 테이블에 앉았다. 7·30 재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유의동 의원의 경우 바깥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았다.
바깥 테이블에 앉은 초선 의원들이 주로 ‘폭탄주’를 만들었다. 일부 참석자는 건배사로 “최경환을 사랑하고 가슴에 남는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선창하기도 했다. 이날 모임은 1990년대 정치권 계파 수장들이 자신과 가까운 의원들을 불러 세를 과시하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
-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조선일보DB
최 부총리는 이날 모임에서 “정치력이라는 건 마음 통하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며 “자주 만나고 알다 보면 동지애가 생기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최 부총리는 또 “나는 장관직에 미련 없다. 무슨 벼슬을 원했던 것도 아니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보며)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매일 전투하듯 살고 있다. 여의도가 문제인데, 나는 정부에서 뛸 테니까 여의도는 여러분이 지켜달라”고도 했다.
최 부총리는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도 줄곧 정부와 여의도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일부 지역구 의원들이 “다음 모임은 지역구(지방)에서 하자”고 제안하자, 최 부총리는 “좋다.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이날 모임은 1차에서 끝났다.
최 부총리는 말목회 이외에도 친박계 정치인들의 모임과 옛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들의 모임 등에 참석한다. 행정고시(22회) 출신인 최 부총리는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에서 10여년간 근무한 바 있다. 그가 여러 모임을 함께하는 의원은 줄잡아 30~40명 정도. 새누리당 내에서 큰 세력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최 부총리는 기재부가 있는 세종시 정부청사와 서울을 오가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당내 의원들을 수시로 만나 직접 챙기고 있다. 그는 자신과 인연을 맺은 상대는 끝까지 챙기기로 소문난 ‘의리파’이기도 하다. 동료 의원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배경에는 차기 당권에 대한 의지도 담겨 있다고 풀이된다.
시중에서는 요즘 최 부총리의 과감한 경제정책을 ‘초이노믹스’로 부른다. 최 부총리의 열정적 행보를 일본의 ‘아베노믹스’에 빗대 부르는 것인데, “지도에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가겠다”며 경제 회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 그에 대한 기대심리가 반영된 말이다. 정치권에서는 초이노믹스가 성공하면, 최 부총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망론까지 부상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익명의 한 정부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 부총리를 각별하게 아낀다. 최 의원을 기재부 장관에 기용하고 경제정책의 키를 맡긴 건 신뢰의 표시기도 하지만 경제 지도자란 이미지를 만들어 향후에 큰 인물로 키우겠다는 포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당에 복귀한 뒤 대중성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차기도 고려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재부 장관실의, 최 부총리의 한 측근은 주간조선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입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지금은 경제에 올인해야 할 때다. 나중에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있어서 역할을 한다면 모를까 직접 선수로 뛴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최 부총리는 내각에서 물러나 당에 복귀할 경우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다. 정권 중반기로 접어드는 내년에는 당에서 정부를 지원하는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친박 좌장인 최 부총리가 당에 복귀해 구심점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청와대 입장에서도 집권 후반기에 박 대통령을 지원할 ‘친박 인사’를 당내 포진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볼 게 틀림없다. 현재 당내에는 청와대의 의중을 반영할 힘있는 친박 의원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당에 남아 있는 윤상현·이학재 의원 등 일부 친박계 의원은 재선급이고 김무성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그들의 당내 입지는 허약하다. 최 부총리 측 한 참모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미션은 정권 재창출이다. 그 일을 맡을 사람은 현재로선 당내에 최 부총리밖에 없다. 김무성 대표 이후 당권의 향배는 그런 차원에서 보고 있다. 차기 총선에 대비해 친박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 부총리는 요즘 정부와 여당에서 인사추천을 가장 많이 하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국무총리로 내정될 때도 박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이 최 부총리였다. 최근 친박 핵심 중 한 명인 유정복 안전행정부 전 장관이 인천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로는 최 부총리에게 부쩍 인사 민원이 쏠리고 있다는 말도 있다. 최 부총리는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는 당으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6년 4월 총선에서 본인과 친박 인사들의 공천권을 챙기는 역할도 맡아야 한다.
경기회복 여부가 변수가 될 수는 있다. 내년 하반기까지 선거가 없는 이른바 한국 경제의 골든타임이 이어지는 동안 초이노믹스가 가시적 성과를 낸다면 최 부총리의 당 복귀와 향후 당권 확보 등에 파란불이 켜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각종 경제지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최 부총리는 물론 박근혜 정부도 책임론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공교롭게도 최근 한국 경제의 각종 지표가 다시 하락하면서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최 부총리는 친박 실세로 현 정권과 한배를 타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선 정치보다 경제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 부총리는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 의원들의 말에도 경청할 줄 아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성호 전 원내수석부대표는 “최경환 의원은 섬세하면서도 통 크게 일처리를 할 줄 아는 정치인이다. 정당을 달리한다고 해도 상대가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그걸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