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아주 정죄를 남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쉽게말해서 저는 정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만큼 의롭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죠.
탐욕과 질투 그리고 시기와 미움 그리고 쾌락과 욕심....저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죄를 남발했습니다.
그건 겉으로 포장되는 모습인것입니다. 실제는 안그렇지만 실제는 죄인이지만 남앞에서는 죄인인척 하기 싫었던것입니다.
물론 잘난척하는 마음이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잘난척하는 사람이었고 정말 정죄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겸손한 사람은 겸손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요.
우리는 술,담배를 안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술,담배를 안하는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결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순결을 지킨다고 남에게 말할 필요가 없는것입니다.
나는 십일조를 잘내고 주일을 성수하고 빛과 소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말할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것 이것 한다 저것한다 이렇게 말하는것은 정말로 겸손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현정부는 서민을 위해서 이거한다 저거한다 뭐한다고 말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 이것을 유치했다. 외국의 빈국에 뭘한다.
하여튼 뭐한다고 말은 많은데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참여정부는 묵묵히 말안하고 할일을 뚜벅뚜벅 해나갔습니다. 현정부가 경제위기에도 버틴것은 참여정부에서 2700억
달라의 외환보유고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가능한것입니다. 그돈을 강만수는 원없이 써봤다고 떠들어댔지요.
강만수는 소망교회 집사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본질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걸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가르칠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깨닫는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가르쳐주는것을 배워봤자 그것은 자기것이 되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생각대로 가는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이렇게하고
저렇게 하라고 해서 저렇게 하는것은 자기에게 유익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하면 잘못된 길로 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끌고가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내 의견이 이렇다는것입니다. 반론을 하려면 정확하게 이것이 잘못된것이다. 라고
반론을 해야합니다. 저는 반론을 듣는것보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의견보다 오히려
무조건 반대하는 뎃글과 글만 보니 정말 좀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내가 잘하는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땅에서 받을 복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복입니다.
곧 내가 잘하는것을 남에게 말하면 그것은 복을 받는것이 아닙니다. 이미 복을 받아버리는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줄복이 없는것입니다.
십일조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지말라고 하는것도 옳고 하는것도 옳습니다. 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해도 좋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것이니까! 하나님이 주실수도 있고 안주실수도 있습니다. 복받기 위해서 십일조 하는 분들에게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으려는것은 나쁜 태도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가정이 건강하고 아픈 사람이 없고 집에 우환이 없어서 큰돈들어갈일이 없고 일이 잘풀려서
넉넉하게 살게 된다면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지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줄 복을 안주는것도 아닙니다. 하지 않아서
조금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십일조 안해서 그런거라고 말하는 자들이 문제인것입니다. 저는 십일조 안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하든 안하든 그것은 자기가 판단할 문제이지 남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것입니다.
내가 순결하다! 라고 말하는것은 남에게 당신도 순결해라! 라고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나만 순결하면 됩니다.
의를 행하는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의를 행하는것이 하나님께 충성이 되는것입니다. 남에게 의를 강요하는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의를 강요하는 태도는 결코 온당치 않은 태도입니다.
주일 성수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저는 주일날 아이들에게 간식을 많이 사줍니다. 주일날 뭐 사먹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주일날 버스도 타지 말아야하고 지하철도 타지 말아야합니다. 돈쓰지 말라고하면서 왜 주일날 회식하고 돈씁니까?
주일성수의 문제도 나는 주일날 이렇게 거룩하게 보낸다! 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당신에게 해당하는 문제이지
남에게 강요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이 주일날을 어떻게 보내든 그것은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회적으로 불평등해서? 못살아서? 천만에요! 내 욕심을 남에게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욕심을 자식에게 강요하니 자식이 부모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니 죽음으로서 부모에게
사죄하는것입니다. 대한민국 자살원인 제 1위가 가정불화입니다. 집안이 불편하니 자살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것입니다.
이는 부모님의 요구가 너무 크고 자녀들은 그 요구를 채워줄수 없으니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버리는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1등은 1명 뿐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1등을 원합니다. 그러면? 1등빼고 나머지는 다 죽어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비교하다가 세월을 보내는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잘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비교 많이 합니다. 남과 비교하다보니 내 삶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엄청 낮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교입니다. 너무나 비교를 많이 합니다. 옆집아들과
내아들을 비교하니 내아들이 못나보입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아들은 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옆집 남편과 내 남편을 비교하니 정말 내남편 못나보입니다. 그러니 맨날 부부싸움하고 가정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아내를 비교하는 남편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비교하는 자녀는 어떻습니까? 부모의 가슴에 비수가 꽃힙니다.
누가 만들어내는것입니까? 내가 만들어내는것입니다. 내 탓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에 대한 잘못된 견해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런데 내 아내가 틀리고 내 남편이 틀리고 내 자식이 틀렸습니다. 이런 비교는 가정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도 똑같습니다. 직원이 틀립니다. 사장이 틀립니다. 회사가 글러먹었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인수가 1000만입니다. 그런데 왜 행복한 대한민국이 못될까요? 비교입니다. 비교....그 비교가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습관적 비교....이 비교함이 결국 정죄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담배 안피는데 나는 술안먹는데 나는 순결한데 나는 도적질 안하는데 나는 이렇게 의로운데? 왜 너는.................
하나님이 이것 하지말라는것입니다. 나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도덕적 잣대를 대고 행위에 치우치지말라는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도 구원한다는것입니다. 나도 악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비교하지 말라는것입니다. 의를 가지고도 비교하지말고 죄를 가지고도 비교하지말라는 말입니다. 그 비교는 결국 나를 의롭게 하든지 아니면 남을 의롭게하든지 둘중에 하나는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높든지 남이 높든지.............이렇게 되면 이는 자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비교하며 살아야하는 삶은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바울이 어떤경우에 처해도 만족할수 있다는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삶입니다.
제발 정죄하는 그 삶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의롭고? 남은 더럽고? 참여정부는 더러운 정부고? 이명박정부는 깨끗한 정부고? 누가 믿어줍니까? 누가 알아줍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믿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미움만 살뿐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첫댓글 판단한다는 말의 듯 안엔 저울질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요.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 가늠하는...그래서 어느게 더 무겁나 따진다는 뜻이죠. 그게 비교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인간은 판단한다고하지만 그 안에 비판이라는 칼날이 잠재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정죄는 교만함의 극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구요. 김폴님과 여러 분들과는 오해를 푸셨음 좋겠어요 ^^* 제가 볼 땐 오해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은데...ㅅㅅ우리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볼 땐 같은 말인데 소통이 안되서 자꾸 어그러지는...필력의 한계/언어의 한계성이라고 할까요?그리고 전 어느 편도 아니랍니다. 사실 편을 들수가 없죠 걍 안타까울뿐...ㅠ
다른 사람이 되어 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기도해 주고 또 그가 알지 못하게 도와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가 성령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 가게 된다면 그로 인한 기쁨이 또 어디있을까 생각하는 마음이 남을 진정으로 내몸 같이 여김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