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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2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죄의 본질은 ‘하마르티아’로써 나의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에 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저 내가 지은 죄 하나 둘, 그것은 단순히 사건화 된 목록적인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의 죄를 들추어내시고자 이런 시험을 하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삿 3:1-2)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이러한 시험 곧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를 이겨낼 천하에 장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오늘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새로이 빚어지길 원하며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여 주사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길 원합니다.
나는 무지몽매한 자이오니 나의 연약함을 하감하옵시고 주의 긍휼을 베푸사 은혜를 더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21:1-14
제목 :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로 살기를...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랴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 나의 묵상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헤어진 후에 배를 타고 고스 로도 바다라 베니게로 가는데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수리아로 가서 두로에 상륙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배가 짐을 풀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로에서 믿는 제자들을 만나서 일주일 정도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성령께서 알려 주신 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일주일을 함께 지낸 후에 떠나려고 하자 그들이 가족들까지 나와서 도시 외곽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서로 작별한 다음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두로를 출발하여 돌레마이에서 모든 항해를 마쳤다.
그곳의 형제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하루를 그들과 지냈다.
다음 날 그들과 헤어진 후에 가이사랴로 갔다.
가이사랴에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에게는 4명의 딸이 있었는데 모두가 처녀로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그곳에 며칠간 머물고 있는데 유대로부터 온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 말하기를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우리 일행들 역시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을 하였다.
“여러분이 왜 울면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는 것뿐 아니라 주를 위해 죽는 것까지도 각오를 하고 있소.”
이렇게 바울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오직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예루살렘으로 가기까지 들르는 각 성에서 어떤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성령께서 강권하시며 이끄시는 길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달려갈 길인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더 이상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한 일행들이 마음에 수심이 가득하다.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한다.
(행 20:37-38)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그 이후로 몇 차례 더 사람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그만둘 것을 강권하였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서 일주일을 머물 때 그들에게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환난당할 것을 알게 되면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한 것이다.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또한 바울이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왔을 때 빌립의 집에 머물렀다.
거기에 유대로부터 온 한 선지자 아가보가 있었는데 그 역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당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자 바울 일행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또 만류하였다.
(행 21:11-12)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가 할 일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그 울음이 나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한다. 나는 주를 위하여 결박당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주를 위하여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였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그들은 모든 일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하면서 권유를 그쳤다.
주님의 뜻은 영생에 있다.
창세전 언약이 바로 그 영생이며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택하시고 예정하신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사용하신다.
심지어 그들의 목숨까지도 자녀들의 영생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육신의 죽음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같이 이미 영생을 얻은 이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나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시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이 복음을 듣고 영생을 얻어야 할 자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울만 혼자서 천 년 만 년 살면서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이어서 나와 같은 복음 전도자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바울의 이 고백이 비수가 되어 나의 심장을 찌른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1:13b)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죽을 줄 알면서도 사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바울의 마음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지길 소망한다.
주님께서는 창세전 아버지 품에서 거하셨다.
그런데 그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 곧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 영생을 주기 위하여 피할 수 없는 길이 곧 십자가의 길이다.
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십자가형은 인간이 당하는 사형의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고통이 심한 형틀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달린다고 바로 죽는 것도 아니다.
온 몸의 진액이 다 빠질 때까지 십자가에 박힌 못에 의지해 있어야 하며, 힘을 빼면 뺄수록 몸에 무게감이 더 실려 몸은 아래로 더 축 쳐지기에 마냥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독충들이나 파리 등 온갖 곤충들의 공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독수리나 매 같은 맹금류가 십자가 꼭대기에 앉아서 달려 있는 사람의 눈을 파먹기도 한다.
주님은 이미 이런 고통을 아시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성육신 하셨으며 십자가를 향하여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셨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이 곧 택함 받은 자들의 영생의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주님께서는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결박과 환난을 당하셨는가?
나 같은 것, 죽으면 그만인 것을.....
내가 뭣이라고,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런데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살리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양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친 아들이 오신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세상에 양자를 살리려고 자기의 친 아들을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고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이성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나는 툭하면 죄를 먹고 마시는 자요, 죄를 나의 양식 삼아 살아왔던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나를 살린 목적은 나에게 아들의 생명을 주어 당신의 아들을 삼으시고 영생을 누리는 자로 곧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나를 살리시고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따라서 나 또한 주님이나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드리기를 원한다.
그 첫 걸음이 바로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길이요 영생인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가지는 사귐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교제와 사귐)이니이다.
나도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 바울이 걸어간 순교자의 삶을 본받아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이 한 목숨 연명하는데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주의 자녀들이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여 나를 드린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주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비록 육신으로는 쉬이 흔들리지만 내 영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처럼 견고하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죄를 먹고 마시는 죄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약한 자임을 알기에 우리 주님이 필요하며 그래서 더욱 우리 주님을 의지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표피적인 눈으로 볼 때 얼마나 흔들리고 중심을 잃어버리는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나이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깊이 뿌리내린 빙하가 어떠한 폭풍우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내 영혼 또한 깃털처럼 가볍기가 한량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그 나라에 뿌리내리고 있으니 나는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주님만이 나의 가장 안전한 품속임을 아나이다.
오늘도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게 하시고 거룩한 불구자 되어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