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32: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32:3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2:4 그들 가운데서 엘리후가 가장 젊은 사람이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32:5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모두 욥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화가 났다.
32: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말하였다. 나는 어리고, 세 분께서는 이미 연로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께 선뜻 나서서 내 견해를 밝히기를 망설였습니다.
32:7 나는 듣기만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래 사신 분들은 살아오신 것만큼 지혜도 쌓으셨으니까, 세 분들께서만 말씀하시도록 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32:8 그러나 깨닫고 보니, 사람에게 슬기를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 곧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32:9 사람은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 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32:10 그래서 나도,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32:11 세 분이 말씀하시는 동안에, 나는 참으며 듣기만 하였습니다. 세 분이 지혜로운 말씀을 찾으시는 동안에, 나는 줄곧 기다렸습니다.
32:12 나는 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느 한 분도, 욥 어른의 말을 반증하거나 어른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
32:13 그러고서도 어떻게 지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 분께서 이 일에 실패하셨으니, 내가 이제 욥 어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도록 하겠습니다.
32:14 욥 어른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것이 아니므로, 나는 세 분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욥 어른께 대답하겠습니다.
32:15 욥 어른께서는 들으십시오. 세 분 친구가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은 어른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32:16 그런데도 내가 그들이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 그들은 할 말도 없으면서, 그냥 서 있기만 합니다.
32:17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32:18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말을 참을 수도 없습니다.
32:19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가 터지듯이, 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32:20 참을 수 없습니다.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32:21 이 논쟁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습니다.
32:22 본래 나는 아첨할 줄도 모르지만, 나를 지으신 분이 지체하지 않고 나를 데려가실까 두려워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주해
1. 사람들이 욥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것이 사실이지만 욥은 이런 진흙가운데 던지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단정한다(욥 30:18-21).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1) 욥은 빈민, 고아, 맹인, 다리 저는 자, 빈궁한 자, 모르는 자를 도와주었고,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2) 하나님도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했다(1:8).
2. 욥은 부자였지만 돈을 의지하지 않았다. 많은 재산을 자랑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31: 24-25). 무엇보다 아담처럼 자기 죄를 감추고 숨기지 않았다(31: 33).
1) 욥의 신앙은 완전한 것 같고, 흠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욥의 문제는 바로 흠이 없는 의로움이었다. 욥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자신의 “의(죄 안 짓고 선을 행함)를 의지한 것”이다.
2) 자신의 의로 인하여 재앙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과 행복을 기대했다.
3)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교제 중심이 아니라, 의로운 삶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4)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다는 실체를 드러내 주는 통로가 된다. 자기 의를 의지하는 욥의 영적 실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3. 세 친구들은 욥이 의인임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서명까지 하자, 욥을 설득시키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긴다.
1) 그러자 엘리후가 참다 못하여 발언하기 시작한다.
2) 엘리후는 크게는 세 친구들의 보상신학의 틀 안에서 욥을 정죄한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는 깊은 통찰로 세 친구보다 뛰어난 주장을 한다.
3) 세 친구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주장하였다.
4) 엘리후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이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죄라고 말한다.
4. 32장은 엘리후가 말하는 33-37장의 서론으로 자신이 대화에 참여하게 된 경위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1) 엘리후가 발언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보고” 답답해서 화가 난 것이다. 개역개정에는 4번, 새번역에는 3번이나 엘리후가 “화를 내며” 발언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분노를 더 이상 참조 못하고 화를 내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새번역] 32:1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32: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32:3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32:4 그들 가운데서 엘리후가 가장 젊은 사람이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32:5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모두 욥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화가 났다.
2) 엘리후는 통찰이 좋고 똑똑한 사람이요. 동시에 답답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도 상당히 치밀한 논리로 논박하는 사람이다.
5. 엘리후는 똑똑하고 통찰이 좋아서 대화를 잘 듣고 욥의 문제와 친구들의 문제를 파악한다.
1) 욥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2) 친구들의 문제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하지, 욥의 말에 변변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 새번역 성경의 각주에는 엘리후가 친구들에게 화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 친구가 욥이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3)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여김과 세 친구들이 대답을 못함으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된 것에 대하여 욥과 친구들에게 모두 화가 난 것이다.
6. 6-22절에서, 엘리후는 본론에 앞서 자신이 발언하게 된 경위를 길게 설명한다.
1) 엘리후는 매우 통찰이 좋고, 똑똑하며, 논리적인 사람이다.
2) 그 논리로 하나님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잘못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발언 동기만 말하는데 1장을 소요한다.
3) 즉 “너는 연소한 사람이 어찌 발언에 뛰어들며, 연장자인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는 비난을 듣기가 싫어서 자신이 발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 엘리후는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완벽주의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7. 엘리후는 지금까지 발언하지 않은 이유는 연장자를 존중하는 예의를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1) 자신은 연장자들의 지혜를 존중하기에 세 친구들의 말을 듣기만 하려고 생각하였다고 밝힌다(6-7).
2) 그렇지만 세 친구가 욥에게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자, 나이가 많다고 해서 꼭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사람에게 지혜나 깨달음을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 곧 전능자의 입김이므로 자신이 연소하지만 전능자가 주시는 지혜를 근거로 발언할 것이라고 공손하게 말한다(8-10절)
3) 엘리후는 화가 매우 많이 났지만, 예의를 지켜 침묵하였고, 발언하는 것도 예의를 갖추며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연장자들의 지혜를 존중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자신이 말함을 알아달라고 말한다.
8. 엘리후는 세 친구의 변론을 주의 깊게 듣고 통찰한 결과로 친구들을 책망한다.
1) 친구들 중에 그 누구도 욥의 주장을 반박하여 욥을 꺽지 못하였다(12절).
[새번역] 욥 32:12 나는 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느 한 분도, 욥 어른의 말을 반증하거나 어른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
욥 32:13 그러고서도 어떻게 지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 분께서 이 일에 실패하셨으니, 내가 이제 욥 어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도록 하겠습니다.
2) 개역개정에서는 “욥을 꺽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다”고 했다. 친구들은 욥의 말을 논증으로 반박하여 욥의 주장을 꺽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엘리후는 대화를 듣는 내내 “욥의 주장을 꺽을 논리로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4) 그리고 친구들이 실패했으니, 이제 자신이 욥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도록 하겠다고 나선다.
9. 친구들은 자신의 지혜로 욥을 꺽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해야 한다고 여겼다.
“‘우리가 지혜를 찾았다. 욥을 반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13절, 쉬운성경).
“‘우리는 지혜를 찾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논박하게 하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NIV).
1) 엘리후는 변론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세 친구의 처신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세 친구와 다른 방식으로 욥에게 대답하여 욥의 주장을 꺽겠다고 다짐한다(14절).
2)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친구들보다는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그런데 결국엔 어리석은 친구들의 판단이 엘리후보다 더 옳았다.
3)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지 못했고, 반박하지 못했고, 욥을 꺽지 못했다. 왜냐하면 욥이 엘리후보다 더 의롭고 높은 신앙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4) 친구들의 생각처럼 하나님만이 욥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다.
- 욥은 하나님의 반박에 자신의 주장을 꺽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5) 똑똑한 엘리후가 세 친구들보다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그가 너무나 “옳고 그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10. 엘리후는 욥에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욥의 주장을 꺽는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여긴다.
[개역개정] 32:17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 자신의 본분대로 욥을 꺽지 못하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욥 32:18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말을 참을 수도 없습니다.
욥 32:19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가 터지듯이, 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욥 32:20 참을 수 없습니다.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2) 개역개정에는 “내 영이 나를 압박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자신 안에 있는 영의 압박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3) 분노하고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육신의 상태를 영적인 인도함으로 주장한다.
11. 엘리후는 누구의 편을 들거나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21-22).
1) 엘리후는 자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말은 하나님의 숨결에서 나온 지혜라고 주장한다.
2)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의 현존 앞에서 하는 주장이라고 한다.
12. 엘리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어른들을 공경할 줄 아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고, 잘 듣는 사람이고, 통찰이 있는 사람이다.
1) 그는 욥과 친구들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놀라운 통찰을 가지고 있다.
2) 그러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영적 무지에 빠진 교만한 자다.
- 그는 계속해서 화를 내고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생명의 관점으로 생명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자”임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3) 그는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혹시나 사람들이 자신을 무례한 사람이라고 할까봐 엄청 신경 쓴다. 자신을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까봐 무척 방어한다.
13. 엘리후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는 자라면, 그는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욥과 친구들의 말을 반박했을 것이다.
1) 자신을 지키려는 “자아보호”를 위해 길게 변론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고 비난을 받는다면 그 비방을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2)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자아보호”가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을 즐거워 한다. 그리고 억울하게 고통 받는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한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3) 엘리후는 “예의 없는 것, 어린 것, 영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자아 보호를 위해, 이런 비방을 못하도록 “철벽”을 친다.
4) 이런 철벽이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연약한 자인지를 드러낸다는 사실도 모른채 말이다.
14. 엘리후는 세 친구들보다 확실히 통찰이 훌륭하지만, 욥보다 못한 신앙인이면서 욥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나서는 자다.
1) 자신의 통찰과 논리가 욥보더 더 영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다.
2) 엘리후는 “생명의 관점 즉 생명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옳고 그름의 관점, 옳은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대표적인 사람이다.
3) 하나님은 “생명”에 관심이 있고 세상은 “옳음”에 관심이 있다.
- 인간의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음으로” 시작되어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존재가 되었다.
- 그래서 선한 것, 옳은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4)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선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주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주는 것”이지, “옳음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다.
15. 물론 옳음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잠언은 옳은 것을 가르친다.
1) 다만 옳음을 넘어 생명을 주어야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2) 이미 욥은 선을 행하고 옳은 것을 아는 자다. 귀로 듣는 신앙의 최정상에 있다.
3) 하나님은 욥에게 더 풍성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신다. 눈으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
4) 엘리후는 친구들보다 더 좋은 통찰과 논리와 옳은 말로 헛 다리를 짚는다.
- 자신은 생명의 교제를 모르고,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옳은 말과 논리와 통찰”로 욥과 친구들을 가르치려고 한다.
5) 그는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한다”는 문제까지는 파악하지만, 욥을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정죄한다.
6)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쉽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
- 엘리후는 욥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 정죄하는 것을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주장한다.
◈ 나의 묵상
32장을 읽으면서, 황당했다. 자신의 발언의 이유를 말하는데만 1장이 활애된다. 1-31장까지 급박하게 진행되는데, 갑자기 발언의 이유만 1장을 말하더니...이런 무익한 내용을 성경은 뭐하러 기록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한절씩 묵상을 하니, 누군가가 생각났다. 바로 나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좋은 은사는 통찰 같다. 방언도 하고 축사도 하고, 완벽주의고, 찬양인도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통찰이다. 하나님이 주신 통찰이 공학적 사고를 만나서 논리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나의 주 사역이다. 나는 엘리후처럼 화가 나면 더 논리적이 된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반박할 논거를 쌓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논리로 방어한다. 남이 나를 비방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답한 것을 견디지 못하여 화를 잘 낸다. 말도 않되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 답답하다. 그래서 설명이 길다. 설명이 한번 시작되면 한참을 말할 수 있다. 설교가 긴 것도 항상 고민이다. 말을 짧고 함축적으로 하면 좋은데, 논리와 논거를 구축하느라 말이 길다.
엘리후의 착각이 나의 착각이다. 엘리후는 욥의 문제가 잘 보이고, 욥보다 통찰이 좋으므로 자신이 욥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줄로 착각하여 욥을 가르치려고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통찰로 비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욥도 가르치고 싶어한다. 렇지만 나의 영적 무지와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한다. 통찰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문제를 파악하고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나는 엘리후처럼 생명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강하게 붙들려 있다. 그리셔 틀린 것을 참지 못한다. 곧 죽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생명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생명을 주는 것보다는 틀린 것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생명”인데, “옳고 그름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엘리후의 육적인 모습이 나로 나의 모습이다. 남을 지적하고 답답해 하고 화내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십자가의 긍휼과 주님의 인자하심을 알지 못하는 나다. 만물 위의 나라, 예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자다. 만물 안에는 “옳고 그름”이 나름 유효하지만 만물 위에서는 “생명”만이 유효하다. 옳고 그름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그 너머의 생명과 사랑만이 생명을 준다.
나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날마다 주님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으로 나를 대하신다. 그것이 십자가로 확증된 주님의 사랑이요 관점이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나에게 생명을 준다. 옳고 그름을 넘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존귀함을 주신다. 옳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아들안에 생명으로 거하게 하신다. 아들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고 하시며, 아들 안에서 아버지 품속에 거하게 하신다. 그 생명과 영광 앞에 입을 가리고 회개하기 원한다. 욥처럼 내가 티끌과 재임을 알기를 원한다. 옳고 그름의 비늘이 벗겨지고 생명의 눈, 마음의 눈이 열어지길 간구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장황하고 쓸데없는 엘리후의 말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내 영혼과 관절을 찔러 쪼갭니다. 만물 안의 논리와 옳고 그름의 한계를 봅니다. 과학과 논문과 지식의 한계를 봅니다. 놀라운 과학과 문명이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저의 신앙적 경험과 지식과 체험과 통찰이 생명을 주지 못함을 봅니다.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줍니다. 오직 성령의 계시와 가르침만이 생명을 줍니다. 통찰과 논리의 가르침을 넘어서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고, 성령으로 가르침으로 생명을 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생명을 알게 하옵소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어 자아보호를 멈추고, 자아를 십자가에 넘기우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옳고 그름을 넘어 생명을 보고, 생명을 주고, 생명의 교제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할 때, 통찰을 넘어 성령으로 생명을 주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생명을 주는 자만이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성령님, 지옥가는 영혼이 한 명도 교회와 가정에 없게 하소서. 성령께서 친히 성도들을 찾아가셔서 가르쳐 주시고, 가난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고난 받는 자들을 돌보시고, 목자되어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