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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7일(금)
* 시작 기도
(벧전 4:3-4)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주님...
이와 같이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하셨건만 이 죄인은 여전히 이런 죄에 빠져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아무리 결단을 하고 또 해도 나의 옛 사람이 이를 향하여 달려가고자 합니다.
하여 오늘 하루도 나는 여전히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살게 하여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시어 의의 세마포를 입은 자 되어 주님과 연합하게 하소서.
나는 아무리 옳은 행실을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입혀주시는 그 의의 세마포가 주님이 인정하시는 옳은 행실임을 믿습니다(계 19:7-8).
내가 착하고 선한 일을 해서 주님께 옳다 인정받으려 하지 않게 하시고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림 같이 주인의 의만 바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8:1-15
제목 :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100명을 가지고 50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니이까?
8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100명을 50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 나의 묵상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수 년 간 가뭄을 선포한 후에 그릿 시내를 거쳐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 후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합을 만나기 위해서 아합에게 나아간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뭄을 그치고 비를 내리고자 하신 것이다.
아직은 비가 오지 않았고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러 가는 그 시점에도 사마리아에는 가뭄이 심하였다.
한편 아합은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러서 물 근원을 함께 찾으려 한다.
그 오바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였다.
언젠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무렵 오바댜는 그들 중 100명을 50명씩 두 무리로 나누어 동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궤하기도 했었다.
아합은 이 오바댜에게 말한다.
우리가 전국의 샘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꼴을 찾아보자.
혹시 꼴을 찾으면 우리 노새와 말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짐승을 다 죽일 수는 없다고 한다.
아합과 오바댜는 전국을 둘로 나눈 뒤에 두 사람이 각각 자기의 맡은 곳으로 꼴을 찾아 다녔다.
한편 오바댜가 돌아다니던 중에 엘리야와 마주친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알아보고 당신은 엘리야가 아니냐고 하면서 문안하였다.
엘리야가 그렇다고 하면서 오바댜에게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아합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오바댜는 그의 지시를 행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한다.
자기는 엘리야에게 아무런 죄를 범한 적이 없는데 왜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려 하느냐고 반문을 한다.
아합 왕이 사람을 보내서 당신을 찾지 않은 족속이나 나라가 없는데 그들이 엘리야가 없다고 보고하면 거기에 살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엘리야를 보지 못하였다고 맹세하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당신은 자기더러 아합 왕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엘리야를 떠났을 때 여호와의 영이 당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고 자신이 아합에게 보고하였을 때 아합이 당신을 찾지 못하면 자기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오바댜 자신은 어려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학살할 때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보호하여 공궤한 일을 당신은 듣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지금 당신이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여기에 있다고 전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에 엘리야는 자기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는데 자신이 오늘 아합을 만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합에게 보이려고 갔다고 증언한다.
그가 갈 때조차 사마리아 땅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
성경은 본서 기자가 이 부분을 너무나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때 당시로 돌아가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로 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던 극히 살벌한 시대였기 때문이다(4절).
특히 아합은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합 왕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지만, 그가 가는 그 시점에도 사마리아에는 여전히 극심한 가뭄이 덮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네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사지를 향하여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시려 할 때 그는 온갖 변명과 핑계를 대며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출 4장).
또 요나는 어떠했는가?
니느웨 성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 때 그는 지옥에 떨어져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듣고 구원 얻을 수 있냐면서 그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즉시 아합 왕을 만나러 갔다.
이에 비하면 가는 도중에 만난 오바댜는 하나님의 뜻으로 전한 엘리야의 말에 갖은 이유를 대면서 아합 왕에게로 가기를 거부하였다.
물론 오바댜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다 맞는 말이지만 성경은 그런 오바댜를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고 평가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성경이 욥을 평가한 그 내용 역시 비슷하다.
욥기 1:1절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한다.
물론 욥은 그의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
자녀들의 생일잔치를 마치면 혹여 그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면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런 외적인 모습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욥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시험을 내리신 것은 그보다 더 큰 죄인 ‘자기 의’라는 죄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는 온전하며 악에서 떠난 자임에도 그가 당한 고난의 시험은 10명의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동방의 부자로 소문난 그의 모든 소유물들 또한 한꺼번에 다 날아가고 말았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할 법도 한데 그는 전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욥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이렇게 신실했던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을 했던 이유가 3장에서 고스란히 발각된다.
이런 고난을 견디지 못했던 욥이 자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하는 고백이다.
(욥 3:25-26)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평소 예배를 드리면서 부르는 찬송은 아골 골짝에도 가고 어디든지 보내시는 곳이면 땅 끝이라도 가서 복음의 증인이 되겠노라고 찬송은 정말 잘 부른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주저하기 일쑤인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오히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기는커녕 자녀들이 목회자나 선교사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안색부터 변하는 것이 일반적 상황이다.
대도시에는 교회 십자가가 한 집 걸러 하나가 있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데 농어촌 지역에는 교회 십자가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선교사들 역시 자녀 교육이나 생활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초의 선교사이셨던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시면서도 친히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셨다.
나는 과연 주님이 가신 그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아니올씨다” 이다.
이 땅에서 나의 만족과 뜻을 이루고자 좀 더 좋은 환경을 원하였고 보다 좋은 조건을 취하고자 동분서주 하였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로서 마땅히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을 순종하며 나아갔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죽음이 앞을 가린다 할지라도 거기에 항복하지 않고 오히려 주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순교의 헌신을 보게 된다.
나 역시 세상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내세울 만한 것은 못되지만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이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
온갖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행복임을 믿음으로 받는다.
거기에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그 옛날 교회를 개척할 때, 상가는 안 된다느니 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고려를 했었습니다.
좀 무리를 해서라도 예배당 건물을 지어서 개척을 시작했고 그것은 결국 인간적인 방법으로 판명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했고 결국 나는 그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통해서 정말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복음을 알았기에 지금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세의 눈으로 볼 때는 결국 그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나의 눈으로 보지 않고, 비록 좁고 열악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고 주의 일을 이루어가소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우리 주님의 그 길을 나도 따라가기 원하오니 나를 성령으로 이끄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