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행9.1-19 &20-31
시 작 기 도
정결한 마음 주소서. 한 마음 주소서. 그 마음을 견고하게 계속 지니게 하소서. 아 이 혼탁하고 변덕스런 마음이여, 주님을 바라는 한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나, 그걸 갖고 싶습니다.
주님의 얼굴 구하는 사람되게 하소서.
본 문 내 용
사울은 위협과 살기를 품고 ‘그 길’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소환할 수 있도록 대제사장에게 요청하여 다마스쿠스 지역 여러 회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부신 빛이 비쳐 엎어졌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다. 사울은 3일 동안 앞을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마시지고 않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아나니아에게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서 부르셨습니다. 그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서 ’곧은 길‘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그는 네가 와서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자 그는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그곳 다마스쿠스까지 와서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가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 왕들, 그리고 이스라엘 앞에 가져가려고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을 내가 보여주려한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서, ‘형제여, 당신께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 당신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라고 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사울은 점점 힘을 얻어 다마스쿠스의 회당들과 아라비아지역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며 여러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죽이려던 사람이었던 것을 알고 놀랐고,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당황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지역 유대인들이 지역 왕과 공모하여 그를 죽이려하였으나(고후11.32-33) 제자들이 그를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바깥으로 내려 피신시켰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그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그리스도인)과 어울릴 수 없었으나, 바나바가 사울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에게 소개하여, 그가 길에서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다마스쿠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한 것을 변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꾀하였으나 제자들이 그것을 알고 피신시켜 가이사랴로 가서 거기서 다소(길리기아 Cillicia지역)로 보냈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온 지역에서 평화 속에서 튼튼히 서 갔고,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넘쳐나서 수가 늘어 갔습니다.
주 해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사울의 회심과 계시, 선포와 저항(위협)의 과정을 지나면서, 땅 끝까지 증인되리라는 말씀, 교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의 준비가 완성되는 과정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하게되고, 죽었다가 살아난 자처럼 회복되었고 그 일에 아나니아를 보내셨고 그는 힘을 얻어서 예수가 하나님 이심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거기서 지역정부와 해외 유대인의 살해 위협에서 피신하고 예루 살렘에 들러서 거기서 그리스도인들에도 받아들여지고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게 되었고 그 일에 바나바를 사용하셨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인의 살해 위협에서 피신하여 전략적 도시 다소로 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약3년, 그리고 그 이후 시리아-길리기아(다소) 사역에 약8-9년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 교회를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요14.6 예수=길,진리,생명, 행16.17 구원의 길, 18.25-26,19.9등 주님의 길). 아버지께로 가는 생명의 길을 믿고 전하는 사람이 또 하나의 교회를 성격을 설명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그 길이 크게 열리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의 ‘곧은 길’에서 사울이 회심을 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내바티안 왕국이었던 아라비아 전체와 메소포타미아-이집트로 가는 길의 경계의 주된 통로였습니다. 그 교통의 요충지의 곧은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길에 빛이 비추었고 하나님의 생명과 계시가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의 사건처럼 죽었던 것이나 다름없는 사울은 어둠 속에서 사흘을 보낸 뒤 주님이 보내시어 다시 살리게 하는 자, 아나이아에 의해 살아나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소명을 받아 담대히 바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신 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다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교회)의 정죄로 인격적 죽음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위로의 아들의 바나바의 살림으로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생명의 교제로 그의 신앙과 인격이 부활합니다. 이것도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생명의 길에는 소명이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생명을 받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생명을 받아 태어난 이유를 거기서 발견하였습니다. 아이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받음에도 반드시 소명이 따릅니다. 생명의 길에서는 비늘같이 가리는 것이 벗겨져 하나님과 그 분의 목적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 소명이 또한 생명의 힘을 더하게 되어 열정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명은 항상 예수님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주시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님, 그 이름과 연관된 소명이 그 생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실로(진리) 생명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요14.6). 그리고 생명과 소명을 전하는 분은 보내주신 성령님으로서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와 바나바가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고, 우리도 동일하게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땅끝까지 증인되는 길로 나타납니다. 초대교회는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과정을 걸어야 합니다.
묵상
제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박해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사실은 사울과 똑같은 박해자 살인자입니다. 교회내에서 그리고 교회전체를 향해서 지은 죄가 그렇습니다. 내 삶으로 안팎으로 여러 가지 죄를 지어 교회를 무너뜨리고, 정죄하여 부인하고, 교만하여 무시하고 무관심하여 버렸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 했건, 교회 전체를 향했건 동일한 박해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랬습니다. 한 나는 생명이 없이 교회에 소속하여서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없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교회를 무력화시키는지요?
그러나 빛되신 주님이 나에게도 생명을 비춰 살리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셨고 소명을 주시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몸소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기에 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들을 통해 주신 생명이 나를 아버지께대해 살고 하나님 나라와 소명에 대해서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으니 그 생명이 주님의 길을 걷게 합니다. 생명의 길에서 주님과 동행함이 좋습니다. 먼저 아버지께 나아가는 힘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열정을 심어주심을 감사합니다.
기 도
주님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하게 선포할 생명과 힘을 불어 넣어 주소서.
온 세상 땅끝까지 이어지는 곧은 길을 뚫어주시사, 모든 민족이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하소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빛을 비추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