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예배주체가 세워지기 위해서...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이 보여주셨던 온전한 교회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증대되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온전한 교회란 천국에서 드려질 예배의 모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형태가 성경에 여러 곳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러분이 모일 때 각각 찬송도 있고 가르침도 있고 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고 통역도 있으니”(고전 14:26)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일 때 그 회중에 있어야 할 것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함’ ‘시와 찬미’ ‘신령한 노래’ ‘방언’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들 외에도 치유와 회복이 있고, 죄의 고백과 사함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예배 속에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풍성한 예배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행하고 있는 예배를 비교해 본다면 지금의 예배는 너무도 단조롭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강조되고 그것을 위해서 찬미를 비롯해서 그 밖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축소되거나 제거되었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에 집중하게 된 까닭은 로마 공교회가 각종 이단들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세운 교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레니우스(Irenaeus;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가 영지주의와의 다툼에서 교회를 지켜내고 세운 성취를 교회가 지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 말씀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불어 교육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성도들을 교회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단순한 교리로 가르칠 필요가 있기에 요리문답이라고 하는 단순화된 교리만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자연적으로 이선으로 밀려났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일들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이런 모순을 발견한 일부 사제들의 반성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은 말씀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시키게 되었고, 개혁교회는 이 부분을 너무 심하게 강조함으로써 예배를 말씀 선포 중심으로 몰아갔습니다.
근래에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 안에 가르침의 실천이라는 요소가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비롯해서 계시가 풀어지는 예배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다수의 무지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배가 발전해야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천상의 예배의 모형으로 나가야 한다는 부분에 관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단점은 스승을 바탕으로 배우고 난 후 스승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루터의 제자들은 루터를 계승하는 것을 그들의 직무로 생각했고, 칼빈이나 웨슬레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전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스승을 뛰어넘는 것은 불경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가르침 안에 모든 것을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에 매이는 것은 그 속에 머물 때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넘는 것은 교회가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교회는 주님께서 원형적으로 보여주셨던 그 모든 것들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다수의 무지한 지도자들은 성경 하나면 족하지 예언이나 방언 같은 것들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얼핏 생각하면 지극히 타당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무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어설픈 지도자들이 성경책 하나면 그만인데 왜 주석이 필요하고 신학교가 필요하며, 다양한 교과 과목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신학교에서 많은 교과과목을 배우는 것은 말씀을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성경을 잘 알기 위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과목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양한 기능들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 신학과정은 정당하고 영성훈련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주장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공부 교제는 필요하지만 예언훈련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성경공부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들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계시를 위해서 그런 연구를 하지 않았던 점에 관해서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에 관한 연구는 ‘레드 오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영성에 관한 연구는 아주 초보단계이므로 ‘부루 오션’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뒷걸음치는 까닭은 교회가 발전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제자훈련까지 오는 과정을 뒷받침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부분이 한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 채워야 할 나머지 부분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와 ‘지혜로 하는 가르침과 권면’ ‘계시와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 등과 같은 요소들이 교회 안에서 풀어지기 위한 연구를 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제가 방언에 관한 자세한 설명들을 이미 게시판에 올려놓았는데, 솔직히 이런 지식을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접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신학을 전공한 지도자들이 이런 지식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방언뿐이겠습니까? 신령한 찬미가 ‘트힐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저에게서 처음 대했을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의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한 이런 부분들에 관한 가르침이 전무한 교회가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무지함 때문에 예배가 한 사람의 인도자 외에는 모두가 방관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이 엄청난 모순에 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계속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너무도 무지했고 안일했음을 반성하기는커녕 이런 영적 예배를 향해서 훼방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여한 회중이 예배의 중심에 서 있는 것에서 오는 혼란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성령에 관해서 너무도 무지하고 낯설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예배 인도자들이 성령의 움직임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묻는다면 자신이 없을 것입니다. 성령에게 전혀 민감하지 못하면서 예배를 인도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민감함이 필요한 부분들을 예배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시와 찬미’ ‘신령한 노래’ ‘계시’ ‘지혜에 의한 가르침과 권면’ 이런 부분들은 성령에 민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내용들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예배 속에 풀어지기 위해서 교회는 이 부분에 관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고 일정한 단계에 이르도록 교육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런 신령한 부분들은 모두 언어를 매개로 작용하는 것들이기에 예배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이 정결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즉 입술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정결해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기에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어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속되고 거칠고 부정적이며 믿음 없는 언어를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배제시키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성훈련은 예배를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의 방관자가 아닌 주체로서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교회에는 ‘예언자 학교’를 비롯해서 ‘중보자 학교’ ‘치유자 학교’ 등과 같은 다양한 학교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주일학교 하나로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많은 학교들이 세워져야 하고 지도자들은 이 부분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다양한 학교에서 훈련된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성령은 다양하게 역사하심으로써 예배에서 기사와 이적과 계시와 예언이 넘쳐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통해서 불신자들이 놀라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부르심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지금처럼 단순히 목사 한 사람의 일방적인 독주로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예배의 주체가 되어 각 사람에게 기름부음을 내려줌으로써 다양하고 역동적인 예배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배에서 행하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기대로 설레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예배 주체로 사용하실 기대를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 장봉운 목사님 글에서 )
http://cafe.godpeople.com/healinghouse - 장봉운목사님카폐
http://theme.godpeople.com/theme/15109 - 손기철장로님 말씀치유집회
첫댓글 이미 이런 교회가 등장하였고 이들로 인해 진짜 교회가 새로운 지평을 열것입니다...가짜에게 이용당하고 속아온 여러분들을 위로하며 진짜가 있는 교회로의 초대를 조용히 해봅니다..하나님의 영광, 쉐카이나의 실제를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신부로 단장하는 형제자매 여러분되시길 진정으로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님 계신 큰믿음교회
맞지요?
지속적으로 광고하시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