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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 찬영이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면서요?”
“비밀로 해 달라고 하시더니 친구 분이 생각보다 가벼우시네요.”
“아니에요~. 제가 어젯밤에 이사를 한다고 했더니 말리느라.. 그리고 제가 고실장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저보다 3살 어리시죠.”
“요즘은 3살은 연하도 아니죠.”
“재벌 3세이시고요.”
“저희 집은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 가훈이거든요.”
“죄송해요. 저의 집은 <재벌과는 결혼하지 않는다.> 가 가훈이거든요.”
“에? 그런 가훈도 있나요?”
“저희 집은 있어요.”
“에~. 고실장님 언니분도 **그룹 며느리이시잖아요. 아이들을 낳으시고 행복하게 잘 사신다고 들었는데?”
“언니는 언니고, 저는 저죠. 언니보다 제가 조금 더 싫어하거든요.”
“재벌을요?”
“네.”
찬영이 어깨를 축 내렸다.
“찬영씨 부모님께 부탁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가 정말 괜찮은 분들로 소개 시켜 드릴 테니까 정신 차리시고 이번엔 제대로 만나 보세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오는 타입이신가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뿌리 채 뽑아 도망가겠어요.”
찬영이 놀란 표정을 짓자 민영이 한 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무나 소개시켜 드리나요? 제발 진지하게만이라도 임해주세요.”
“네..”
“다음 주 토요일에 이 분을 소개시켜 드릴 생각이에요.”
민영이 사진을 꺼내 찬영에게 보여주었다.
“아.. 모임에서 몇 번 봤어요.”
“착한 분이시더라고요. 제가 이런 칭찬은 안 하시는 거 알고 계시죠? 착한 분 마음에 상처 주시면 저도 어쩔 방법이 없어요.”
“네..”
“이게 다 찬영씨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네?”
“알았어요.”
어깨가 축 내려간 채로 가는 찬영을 보고 있는데 다들 조용히 말했다.
“다들 싫다고 하면 더 달려드는 것 같아요. 오히려 달려들면 싫어할 거면서.”
“그러게 말이에요.”
“실장님도 귀찮으시겠어요.”
“제대로 거절하면 되요.”
“실장님. 내일 차재현 씨와 장혜주씨 만나는 장소 확인하러 가시죠.”
“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
재현의 맞선 장소에 간 민영은 김유정 매니저와 마주앉아 내일 나올 음식을 그대로 주문했다.
“우와.. 여기 너무 근사하네요. 음식 값도 엄청 비싸고.”
“부러워?”
“네. 이상해요?”
“아니? 나도 부러워. 내 돈 내고는 도저히 목에 걸려 못 먹을 것 같아.”
유정이 쿡쿡 웃었다.
“식기도 고급이고, 식사도 깔끔하네. 조명도.. 괜찮고. 여기요.”
직원이 민영에게 다가왔다.
“남자 분은 제가 앉은 자리로 안내해 주시고, 여성분은 저쪽 자리로 안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유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리는 왜요?”
“응. 지금 네가 조명 때문에 엄청 예뻐 보이거든.”
“아~.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하는 구나. 또 배웠어요.”
“뭘..”
그녀는 물 컵을 들어 물을 마셔서 입안의 쓴 맛을 없애려고 했다. 직원들과 조금 더 상의를 한 후에 그녀들이 나왔다.
“오늘도 수고했어. 이대로 퇴근하자고.”
“그래도 되요?”
“내일 부탁해.”
“걱정하지 마세요.”
유정과 헤어진 민영은 집을 향해 출발했다.
****
약속장소에 도착한 재현은 직원이 열어준 문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했다.
“재현아. 아니지. 차재현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회장님.”
“앉지.”
“네.”
재현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젊은 나이에 고공행진은 위험하지 않나?”
“조금 빠른 은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왜?”
“저희 당숙부님처럼 시골에서 살고 싶어서요.”
“그 친구 아직도 정정하지?”
“네.”
“시골이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나도 시골에서 잠깐 살아봤는데 난 안 맞더라고. 너무 심심해서 다시 나왔어.”
“네.”
“본론으로 넘어가서. 이번 합병은 우리한테 넘기지.”
재현이 회장님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먼저 착수한 사업입니다.”
“알지. 하지만 그 회사는 내 친구가 어렵게 일으킨 회사야. 난 그 회사를 보호해 주고 싶네. 자네가 합병을 한다면 모두 물갈이를 할 것이 아닌가.”
“쓸모 있는 것은 남기는 편입니다. 없어서 그렇죠.”
“자네의 날카로운 판단을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어떻게 따라가겠나. 다시 그 회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테니 나한테 넘겨.”
“회장님. 그 회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회장님까지 피해를 보실 겁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이대로 쓰러지는 걸 보고 있으라는 건가?”
재현이 입을 다물고 한 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칙칙한 이야기는 이만하지. 내일 장회장 손녀랑 선을 본다고?”
“소문이 벌써 회장님에게까지 갔습니까? 저의 맞선이 뭐라고.”
“자네를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꽤 많아.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자네한테 시집 보낼 손녀딸들이
없어.”
“다행입니다. 회장님 손주 사위는 피곤할 것 같거든요.”
“뭐?”
“매일 저를 데리고 골프 치러 가자고 하실 거 아닙니까? 언제 일을 하겠습니까?”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현은 조용히 물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저 이 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민영을 품에 안고 싶었다. 오직 그녀 앞에서만 재현은 자신의 가면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면을
쓴 지금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
샤워를 마치고 재현의 집으로 가서 소파에 앉아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1회부터 보고 있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재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영은 소파에서 내려와 종종 뛰어 그의 품에 안겼다.
“왔어요? 오늘도 힘들었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응. 조금.”
“샤워하고 나오면 과일 먹을래요? 오는 길에 오렌지 사 왔는데.”
“그래.”
민영은 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옷 갈아입고 씻고 나올게.”
“응.”
그가 방에 들어가자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접시에 오렌지를 담아내고 껍질을 버리고 손을 씻고 있는데 그가 나왔다.
“앉아요. 포크 줄게.”
그녀가 선반에서 포크를 꺼내려고 손을 들자 그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올렸다. 그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렇게 힘들었어요?”
“그냥.. 이제 좀 답답한 게 없어져서. 숨쉬기가 편해졌는데 네 향기가 나니까 너무 좋아서.”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오렌지.. 먹어야죠..”
“피곤해?”
“오빠가 피곤하죠.”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누르자 그녀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 돌리자 그가 고개
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천천히 그의 키스를 받으며 몸을 돌린 그녀가 그의 목을 안았다.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가까운 식탁 위에 앉혔다. 입술을 떼고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녀가 재현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설마 여기에서 사랑하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음.. 안 될 것 같아.”
“왜?”
“앞으로 밥을.. 못 먹지 않을까?”
그녀가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말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오빠~.”
****
침대에 누워서도 민영은 시트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재현은 창피해 하는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 좀 보여 주지?”
그녀가 이불 아래에서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흔들었다.
“오빠..”
“응?”
웃음을 머금은 그가 대답했다.
“저 식탁은.. 이제 못 쓰는 거야..”
재현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시트를 조금만 내리고 눈을 흘기며 웃고 있는 재현을 바라보고 있는 민영을 그가
품에 안았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자 민영의 가슴이 아려왔다. 시트로 붉어진 눈
을 감추고 그의 가슴에 안겼다. 서서히 그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우는 거야?”
“아니.”
“왜 울어. 난 너무 행복한데.”
“좋아서. 나도.. 너무 좋아서..”
“그럼 웃어야지, 왜 울어.”
그녀는 대답대신 그의 가슴을 눈물로 뜨겁게 적셨다. 그가 울음을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민영아.. 나 너무 행복해. 너 때문에.. 고마워. 내 옆에 있어 줘서.”
그녀가 시트에서 나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도 고마워.”
“응.”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드러난 등을 어루만졌다.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이러다 저녁 맞선 자리에서 졸겠어.”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음식도 맛있고, 자리도 너무 근사하고.. 분명 장혜주 씨가 엄청 예뻐 보일 거야. 하지만 속지 마. 내가 조명을 보고 자리를 정했거든. 반하면 안 돼.. 조명 때문이니까.”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랑스러워서 깨물어 주고 싶어.”
“깨물리는 거 별로야.”
“진짜로 깨물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쿡쿡 웃으며 “나도 알아.” 라고 말하며 그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가 입술을 내밀자 그녀가 다시 쪽 뽀뽀를 했다. 또.. 그리고 또 다시.. 그러다 결국 그들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
그의 맞선을 위해 정장 입는 것을 도와주는 그녀의 표정이 짐짓 심각했다.
“그렇게 싫으면 안 나가.”
“가야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 집을 나가면 다시 숨이 막힐텐데.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해줄 고마담께서는 무얼 하실 건가?”
“고마담은 오랜만에 시장을 좀 보러 마트에 갈 예정이랍니다. 내일 오빠에게 상을 차려줄 식사재료를 사기 위해서.”
“간단히 해. 무거우면 들고 오기 힘들어.”
“응. 오빠는 특별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야 늘..”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민영이 얼굴을 붉혔다.
“어머..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올 때 달달한 디저트 사 올게.”
“그럼 난 그에 어울리는 차를 사 올게.”
“그래. 그럼 이따가 만나자.”
“응. 잘.. 다녀와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해 주었다.
“저녁 내내 네 생각이 날 거야. 특히 식탁 위에 있었던 너.”
민영의 온 몸이 붉어지자 그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
민영은 편안한 원피스 아래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풀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7층에서 멈추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건우가 놀란 표정에 이어 반가운 듯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디 가세요?”
“네. 마트에. 어디 가세요?”
“저녁식사 하러요. 만들어 먹기가 귀찮네요.”
“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연상으로 안 보이시는데.. 찬영이가 엄청 풀이 죽어 있더라고요.”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셨던 분이 스스로 말씀하실 줄 몰랐어요. 저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민영씨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찔려서요. 이실직고 했죠.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맞으셨어요?”
“네. 조만간 이사 올 것 같아요. 시커먼 남자 둘이 살게 되었어요.”
민영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자 그가 문을 잡고 그녀가 먼저 나가도록 했다.
“감사합니다.”
그도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여기로 이사를 온다고요?”
“네. 사실은 여기 오피스텔이 찬영이의 것이거든요. 저는 월세 사는 거예요. 물론 거의 공짜이지만요.”
“변호사라고 하셔서..”
“재벌집 아들인 줄 아셨어요?”
“죄송해요.”
“오히려 칭찬으로 들리는데요? 제가 가난해 보이진 않는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이쪽으로 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그가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같이 드실래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그녀가 다시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자 그가 피식 웃었다.
“찬영이 말이 맞네. 철벽녀네..”
건우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
재현이 맞선 장소에 앉아 혜주와 마주보고 있었다. 민영의 말대로 조명이 혜주를 미인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웃음이 나왔다. 혜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웃으세요?”
“죄송합니다. 고실장님이 자리 배정을 참 잘 하신 것 같아서요.”
“네?”
“제가 앉은 자리에서 혜주씨가 아름답게 보이거든요.”
혜주가 조금 수줍게 미소를 짓자 재현이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셨지만 나오지 않는 건 혜주씨는 물론 장회장님에 대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오긴 했습니다만.”
“알아요. 결혼에 별로 흥미가 없으시죠?”
“네. 그래서 부탁 좀 드릴게요. 대신 거절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가서 보니 별거 없더라.. 소문도 좀 내 주시고요.”
혜주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씨.. 재현씨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는 건 알고 계세요? 그 중에 몇 개가 진실일까 궁금해 하면서 나왔어요.”
“대부분 사실일 겁니다. 아까 혜주씨의 말씀 중에 정정할 부분이 있었네요. 결혼에 별로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 결혼은 안 할 겁니다. 저의 결정에 놀란 어머니께서 혼자 벌이신 일이라 혜주씨께는 죄송합니다.”
“왜 안 하세요?”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루 24시간이 부족해서 72시간 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일하고 연애를 하시나봐요.”
재현이 시선을 조금 내렸다.
“사업에 대한 조언이라면 해드리겠습니다만 사적인 질문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혜주가 피식 웃었다.
“거절하시는 방법이 세련되어서 좋네요. 지난번에 선을 본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서 억지로 끌려나온 남
자였는데 계속 이상한 행동만 해서 짜증이 났었거든요. 좋아요. 제가 이번에 새로 샵을 냈어요. 경영에 대해 궁금
한 것을 질문하면서 식사 할까요?”
“그러죠.”
재현이 직원에게 손짓을 하자 잠시 후에 식사가 나왔다.
‘음식은 맛이 별로네. 쯧.. 민영이랑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재현이 소리 없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
바구니를 들고 장을 본 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Tea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달한 디저트와 어울리는 차라..’
그녀가 입술을 조금 물고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구홍차.. 왠지 맛있어 보여.. 내가 차에 대해 뭘 알겠어. 그냥 이거 사자.”
그녀가 바구니에 홍차를 담고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거실 실내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 털 실내화로 살까?”
그녀는 쪼그려 앉아 한참 후에야 분홍색과 하늘색 털 실내화를 바구니에 담았다.
****
재현과 혜주가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주의 차가 먼저 나왔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네.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제 부탁도 들어주시는 겁니다.”
혜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혜주가 차에 오른 후에 출발하자 재현이 몸을 돌려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혜주가 고개를 돌려 재현을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운전사가 차를 세우자 혜주가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으로 들어간 혜주는 재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디저트 가
게로 들어간 재현은 민영이 좋아할만한 것으로 골라 포장했다. 아이처럼 좋아할 민영을 생각하며 재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에 혜주의 심장이 쿵쾅 거렸다.
****************
혜주는 집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했다.
“일찍 왔네? 별로였어?”
“아니. 괜찮았어요.”
“그래?”
혜주 엄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차재현 사장도 괜찮았던 것 같아?”
“그랬겠지.”
“그래?”
혜주 엄마가 다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저 피곤해서요. 올라가 볼게요.”
“그래~.”
혜주 엄마가 남편을 바라보았다.
“여보. 혜주가 차 재현 사장이랑 잘 될 건가 봐요.”
“일만 하는 놈한테 딸을 주고 싶어?”
“그게 어때서요? 남자는 자고로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여자가 안에서 쓰죠.”
남편이 한심하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지만 혜주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조예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혜주 엄마예요.”
<어머, 송 여사님~. 전 아직 재현이한테 전화를 못 받았는데요. 혹시 무례하게 군 건 아닌지 걱정을 하던 참이었어요.>
“두 사람 다 마음이 들었나 봐요.”
<어머. 정말요?>
“네.”
<잘 되었네요~.>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
재현이 집에 돌아왔다.
“민영아~. 나 왔어.”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간 재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집을 나와 민영의 집 벨을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툭 떨어지
는 것 같더니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건물을
뛰어 나갔다. 그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건우 옆을 지나갔다. 건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
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리에서 양 손에 봉지를 들고 걸어
오는 민영이 보이자 그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민영이 고개를 들자 재
현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여긴 길가라는 것을 떠올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재현은 자신을 지나쳐 걸
어가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닥에 봉지를 내려놓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있는 그녀와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여긴 길이잖아. 누구든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집에서 봐요.>
그녀는 다시 바닥에 봉지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봉지를 들고 걸어갔다. 재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재현이 벤치에 털썩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듯 쥐었다.
****
집에 들어가자 민영이 입구에 서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옆으로 깡총거리며 뛰듯 그의 옆에서 걸으며 민영이 말했다.
“화 많이 났어? 아니 나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혹시 누가 보고 있으면 어쩌나 싶고.. 화.. 많이 났어?”
넥타이를 벗어서 손에 쥐고 벽을 짚고 턱에 힘을 주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개 들어.”
다시 고개를 든 민영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가 한 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그녀의 손바닥을 펼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느라 붉게 부어오른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벽을 짚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나도 안 아파. 보기에 이래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괜찮은데.”
“그러니까 내가!”
그가 몸을 돌리며 큰 소리를 치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왜 움찔 거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니까 그렇지~.”
그녀도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무겁게 장보지 말라고 했잖아. 손이 그게..”
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다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냉동실 문을 열고 얼음을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서 돌
아왔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파로 가서 그녀를 앉히고 자신은 그녀의 맞은편 탁자 위에 앉았다. 그녀의 두 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그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렸다. 그녀가 조금 움찔거리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차가워서 그래. 차가워서.”
그녀가 당당하게 말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그를 흘기듯 바라보았다.
“나 진짜 화났어. 조금 전에 웃었다고 풀린 거 아니야.”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얼마나 놀랐는 지 알아? 네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고.”
“아직 우리 한 달도 안 됐거든? 한 달이 뭐야.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벌써 들키면 어떻게 해. 난 아직.. 헤어지기 싫단 말이야.”
“누군 헤어지고 싶대? 지금 약속해. 나중에 6개월이 지나도 나한테 말없이 사라지기 없어. 없어~?”
“알았어.”
“약속했다.”
“알았다고.”
“너를 보고 안심하고 다가갔더니 모른 척 지나가서 또 얼마나 놀랐는지.”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도 길에선 아는 척 하지 않을 거야.”
“누굴 탓해. 내가.. 미안해서 그렇지.”
그가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자신의 무릎으로 그의 무릎을 슬쩍 문질렀다.
“내가 미안해. 오빤 잘못한 거 없어.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는 비닐봉지를 조금 떼고 그녀의 손바닥을 살핀 후에 얼음봉지를 옆에 내려놓고 그녀의 손바닥을 기도하듯 모으고 그녀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앞으로 장 보는 거 하지 마.”
“이것도 못 보겠어?”
“응. 마음이 아파.”
민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요~.”
“저녁만 먹고 들어온 거야. 그 쪽에서 거절해 달라고 말하고 왔어. 너 좋아할 만한 걸로 디저트 사서 왔는데 없어서 놀라고 화나고.. 그랬던 것 같아.”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싸듯 쥐었다.
“잘 했어.”
그가 입술을 내밀자 그녀가 쪽 뽀뽀를 했다.
“디저트 먹자.”
“응. 나 홍차 사왔어.”
두 사람은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그는 디저트를 접시에 담았고, 민영은 홍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냈다. 민영이 등 뒤로 슬리퍼를 숨기고 그의 손을 잡고 가까운 식탁 의자에 그를 앉혔다.
“뭐하는 거야.”
그녀는 등 뒤에서 실내화를 꺼냈다.
“짜잔~. 커플 슬리퍼 샀지용~.”
그녀가 그의 발에 슬리퍼를 신겨주었다.
“딱 맞네. 내가 눈썰미가 참~ 좋아. 그치?”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그녀를 일으키고는 품에 안았다.
“이런 거 사 오느라 양 손 무겁게 온 거야?”
“사다 보니까..”
“못 살아.”
“속상해?”
“속상하기도 하지만.. 점점 더 사랑스러워 보이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웃지 마. 나 이직 화 덜 풀렸으니까.”
“웃기시네~.”
“진짠데?”
“아닌데? 아까 다 풀렸는데?”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도 쿡쿡 웃으며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참 작아.. 내가 앉아야 뭔가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더 보살펴 주고 싶고, 보호해 주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바람처럼 사라지지 마.”
“알았어. 이별은 제대로 고하고 갈게.”
“부탁해.”
“응. 이제 좀 먹자. 나 배고파.”
“저녁 안 먹었어?”
“장 보러 바로 나갔다 와서는 오빠가 사온 디저트로 때우려고 했는데 예정에 없이 오빠한테 혼나느라.”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 준비해 놓은 디저트와 홍차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디저트를 한 입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짓자 그도 미소를 지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자 그가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뒤집자 벨이 멈추었다.
“누군데?”
“신경쓰지 말고 또 먹어 봐.”
그가 디저트를 손으로 들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손에 묻은 크림을 그가 혀로 핥았다.
“이것도 맛있네.”
“천천히 다~ 먹어.”
“이걸 다? 다 먹으라고?”
“응.”
“살쪄~.”
“포동포동하게 살찌면 잡아먹어야지.”
“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 날 아침에 민영보다 먼저 일어난 재현이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가 핸드폰 벨 소리에 민영이 깰까봐 얼른 받았다.
“왜 자꾸 전화하세요.”
<한 번에 받았으면 여러 번 안 하잖아? 같이 있니?>
“왜 전화 하셨어요.”
<적당히 붙어 다녀. 그 쪽에서 알면 어쩌려고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분명히 제대로 거절했는데.”
<무슨 소리야~. 서로 마음에 들었다면서~. 송여자가 아주 좋아서 전화를 다 했더라? 너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혜주가 마음에 든 거야?>
“아니에요. 싫다고 했는데..”
재현이 턱에 힘을 주었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흥분해서 이상한 일 벌이지 마세요. 저 결혼 안 합니다.”
재현이 전화를 끊고 손을 들어 미간에 주름을 손으로 쓸었다.
침대에 쪼그려 앉은 민영이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표정관리를 하고 재현이 방문을 열자 민영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가 슬픈 표정을 숨기고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 위에 입맞춤을 했다.
“아침 먹자.”
그녀가 실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가 침대위로 올라와 그녀 옆에 누웠다.
“커피랑 따뜻한 토스트 만들었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다 식어..”
“식으라고 해..”
그녀가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찾자 그도 그녀를 품에 안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
한참 후에야 그들은 다 식은 빵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따뜻하게 다시 만들어 준다니까.”
“아깝게 버려? 이것도 바삭하니 맛있네.”
“그만 먹어. 이 나간다.”
그녀가 풉.. 하고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쓸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어. 너랑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너무 짧아.”
“다행이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당겨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그녀가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안고 비스듬히 누웠다.
“밖에 나가서 데이트 안 하고 싶어?”
“피곤해. 오빤 안 피곤해?”
“너랑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
“미안. 난 다음 주에 정말 바쁘거든. 오늘은 오빠랑 이렇게 쉴래.”
“그럼 그러지, 뭐.”
“참. 나 드라마 보던 거 있어. 오빠도 볼래?”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가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TV에서 드라마를 선택해서 예전에 보던 것을 이어서 보기 시작했다. 한 참을 보고 있던 그가 그녀를 흘기듯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나랑 뭐가 달라? 저 남자도 재벌이네~.”
“음..”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남자가 멋있어?”
“멋있지.”
그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안 멋있나? 저 사람은 배우잖아~.”
“나랑 닮은 것 같은데?”
“전혀 아닌데~.”
“그렇지. 내가 훨씬 멋진 것 같은데?”
“저 남자가 운동을 얼마나 했는데~. 싸울 때 잔근육 못 봤어?”
“나도 있어.”
그가 팔을 움직이자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아 내렸다.
“창피해.”
“뭐? 내가.. 내가 창피해?”
그가 그녀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아~.”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탈의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그녀 앞에서 마치 보디빌더들이 취하는 포즈를 취하자 그녀는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
저녁식사는 그녀가 만든 식탁으로 했다. 평범한 국와 밥, 반찬 3가지에 오징어불고기였다.
“맛있어?”
“응. 맛있어. 집 밥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역시 한국인은 집 밥이지.”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민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
“오늘은 집으로 간다고?”
“응. 내일부터 바쁜데 오빠 옆에서는 잠을 충분히 못 자니까 피곤해. 다크서클 장난 아닌 채로 출근하면 다들 오해할 거야.”
“그래. 오늘은 푹 자.”
“잘 자요.”
“잘 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다시
입맞춤을 하고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녀의 집 문 앞에서 조금 서성이던 그도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
간 그는 혜주에게 전화를 걸까했다. 하지만 최대한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
집에 들어간 민영은 한 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팩을 붙이고 침대에 누웠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와의 사랑으로 인한 수면 부족으로 금세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