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mp3 3.92MB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유다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1,1ㄴ-2ㄱ.11-12.25-29 형제 여러분, 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25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26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시온에서 구원자가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함을 치우시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어 줄 나의 계약이다.” 28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7-11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는 진리가 사도 바오로의 동포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더욱 그 의미를 새기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이는 일을 저질렀지만 그 사건들을 역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며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걸려 비틀거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로마 11,11-12)
어떻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역전의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스라엘을 통한 놀라운 관점에서 구원의 신비를 이렇게 기묘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8-29절)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유대인들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생을 바쳤으면서도 동포 유대인을 향한 그의 사랑은 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서 그는 그리스도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존경과 대접받는 윗자리의 매력을 받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서 ‘출세’라는 욕망의 줄은 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자리나 돈의 이 힘을 뿔치기고 힘들고 감당하기가 때로 버거운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대로 산다는 바리사이 지도자들이 음식 자리에 초대받아서 서로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함께 계시던 주님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루카 14,8-9)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변함없이 일어 날 수 있는 흔한 모습들을 주님께서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쉽게 흐르는 모습과는 반대되는 말씀을 이어서 하시는 것입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서 루카는 이야기를 매듭짓는 주님의 교훈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동양의 ‘겸양지덕 謙讓之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겸손하게 사양하는 미덕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무엇을 사양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의미와 비숫하게 남에게 좋은 자리, 좋은 몫을 돌려주고 나 스스로는 빈 자리를 선택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요.
동서고금을 통하여 덕과 지혜의 바탕이 되는 것은 겸손지덕이라 하겠지요. 주님께서도 초대받은 자리에서 거만과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시며 제자들과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는 겸손함을 교훈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