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1세기의 디아스포라, 그들에게 조국을...①
필자의 말 1980년대 후반기에 비로소 고려인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88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어렴풋이 전해졌고, 1990년대 초, 소 연방의 붕괴와 그 위성국들이 독립을 선포할 무렵 역사적인 fact로서 우리 역사의 아픈 편린(片鱗)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필자는 2018년 연해주 기행을 통해 고려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고인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앞서 보내드린 기행문 『고려인, 그 슬픈 궤적을 쫓아』를 발표한바 있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려인의 슬픔과 고난은 우리 역사 본류(本流)에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제이며, 함께 고민하고 같이 해결의 길을 모색해야 될 절실한 과제라고 믿습니다. 본고는 기행문의 후속으로 발표한 칼럼 『21세기의 디아스포라, 그들에게 조국을』입니다. 5회에 걸쳐 나누어 송고하고자 하오니 일독하시면서 함께 생각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칼럼- 21세기의 디아스포라, 그들에게 조국을...
筆 華 (수필가, 시인, 번역가)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조는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가 세도 정치의 그늘아래 극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함경도는 경지가 좁은데다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로 주민들의 생계는 더욱 핍박 하였다. 굶주린 서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두만강을 건너갔다. 물길이 좁고 얕아 겨울에 얼면 건너기가 수월했고, 여름에는 뗏목을 띄워 건너갈 수도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넓은 땅은 제정러시아의 원동, 연해주(러시아어:프리모프스키/한반도의 약1.6배)였다. 연해주는 원래 19세기 중엽까지 청나라 봉금령(封禁令)으로 무인지경이었고,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소수의 만주족과 토착 유목민인 타즈족, 오로치족이 드문드문 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하여 러시아 령이 된 땅이다. 초목이 욱어졌으나 땅이 기름져 경지로 개간하기만 하면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어 기근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백성을 짓누르던 봉건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보장되는 신천지였다. 그들은 물길을 찾아 강가에 땅을 차지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원년은 1863년이 정설로 되어있다. 함경도 국경지방의 조선인 13가구가 도강하여 은밀히 지신허 강 유역에 정착하였든 것이다. 이 주장을 처음 내놓은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인 B.I 바긴이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해조신문(海朝新聞)은 창간사에서 1863년 이주 설을 뒷받침 했고, 최근 국내의 소장 학자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정설이 되었다. 1869년, 조선의 관북과 관서지방에 큰 홍수와 강한 서리가 겹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다. 이른바 기사(己巳)흉년이었다. 함경도 육진지방의 농민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밤사이 한 마을 전체가 이주하여 빈 마을이 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조선 정부는 불법월경을 묵인하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월경자를 추방하자 조선 병사들은 이들을 잡아 무더기로 처형해, 한동안 두만강 변에는 시체가 즐비했다는 것이다. 월경자가 잡히면 시장 거리에서 공개효수를 하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숨을 건 백성들의 월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연해주 군무지사 푸루겔름제독은 갖 도착한 이주민 640여 가구가 체재하고 있는 지신허(현, 비노그라드노예)에 가서 이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돌아갈 수 없다며 단호하게 귀국을 거부하였다. 푸루겔름 제독은 결국 이들에게 연해주 체재를 허락하여, 3.500명가량의 조선인이 토지를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척하게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당국은 이주민들에게 식량지원과 조세감면 혜택을 베풀었다. 1869~72년 사이에 수이푼(秋豊)강변에 정착한 7개 조선인 마을에는 군 비축양식 570톤이 지급되었고, 20년간의 인두세(人頭稅)와 3년간의 토지세가 면제되었다. 이 소문이 조선으로 전해지자 이주민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1863년 지신허를 시발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주민 마을은 해가 갈수록 연해주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적응과 극복의 인고(忍苦)
이주민들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카우리(kauli)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러시아 탐험가 N.M푸르제발스키가 1869년 지신허를 방문하고 남긴 기행문) 카우리란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라는 뜻이다.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지칭 한 것이다. 생지옥 같은 고국 땅, 「조선」이라는 이름을 결코 붙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기근으로 죽음에 이르는 지경이 되어도 진휼(賑恤)하거나 보듬어 주는 조정이 없었던 「조선」이었다. 남의 땅에 왔다가 추방당해 다시 월강하여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릴 뿐인 나라, 그 나라 이름을 자기 조국이라 부르고 싶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조국에서 밀려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월강한 ‘고려인’과 ‘조선족’ 을 ‘버려진 사람들(棄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옛날 만주와 연해주에서 호기를 떨쳤던 고구려를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고구려 사람”또는 “고려사람(高麗人)”으로 칭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본다면 고려인들은 처음부터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연해주 땅, 허허벌판 황무지를 바라보면서,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내고 옥토로 개척한 고려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초기에 토지 점유와 조세감면을 허락하고 군대의 비축 양식까지 공급해 주는 등, 러시아 당국의 고마운 호의(好意)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못한 조선 조정과 대비되기도 한다. 1884년 경흥 개시(開市)조약으로 금강(禁江)이 해제됨에 따라 비로소 왕래가 자유로워졌다. 농사뿐만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모여드는 노동자도 늘어 나갔다. 탄광, 부두건설현장, 철도공사장, 벌목장, 어로, 미역체취 등 일터는 다양했다. 고려인들의 임금은 높지 않았다. 아마도 기아와 빈곤을 벗어나려는 헝그리(hungry) 정신으로 버티고 극복하였을 것이다. 고려인 이주민은 계속 증가하여 1882년 연해주의 인구는 러시아인(8.385명) 보다 고려인(10.137명)이 더 많았다. 1904년 연해주의 고려인촌은 32개 마을에 달하게 되었다. 증가되어 가는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당국의 시각은 양면성을 띄웠다. 고려인의 우수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원동지역을 개발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고려인의 과도한 유입으로 국경지방 안보에 위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상반되는 두 가지 시각은 이후, 원동지역의 국제 정세와 러시아의 국익에 민감하게 반영되었다. 고려인의 성실성과 영농실적 및 노동성과는 러시아인 및 당국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족하였다. 1870년대 고려인들의 곡물 과잉생산으로 러시아 군은 중국 훈춘으로부터 군량미(귀리, 보리 등)수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러시아인 지주들은 값싼 고려인 노동력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으며 소유전답을 경작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교통 통신수단 건설과 군수물자 수송에 고려인 노동력을 광범하게 활용하였다. 드넓은 연해주 땅에 고려인의 피와 땀이 깊이 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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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정자를 잘못 만나면 국가는 물론ㅁ 국민들까지 쇄락하기 마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