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아주 근사한 산책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종종 걷는 산책로라 그날도 여유를 부리며
회사로 돌아가고 있는데...
백발에 살짝 굽으신 한 어르신이 저를 앞지르시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히마리 없게 걸어?"
"저요?...그렇게 보이세요?"
"그려..실연당한 것처럼.."
씩~ 웃으시면서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가시더랍니다.
하...귀신같으시네...연륜이 쌓이면 걸음걸이만 보고도 척하고 아시는 건가?
라고 순간 빵~ 터져서 어찌나 씁쓸하게 웃었던지..
저는 표정뿐만 아니라 몸에서도 마음상태가 발산되는 요상한 사람인가 봅니다.
아니아니...제대로 실연당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이건 뭐....
아니아니에요.
사실은 오늘 속이 안 좋아 과자 몇 부스러기와 아이스커피로 점심을 때워서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거랍니다.
게다가 회사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이른지라 시간에 맞춰서 아주 천천히 여유부리며
걷고 있어서 그런 거랍니다.
그렇게 제가 히마리없게 실연당한 여자처럼 걷고 있었던가요? 어르신....ㅠㅠ
영화 '이터널선샤인' 을 보면
원하는 기억만을 지울 수 있는 기계? 주사?(본지 하도 오래돼서 가물가물...)가 나옵니다.
주인공들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그 일을 감행하지요.
(아주 아름다운 영화니 안 보신 분들한테 강추!)
얼마전 문득 그 영화가 생각이 났고
그런 걸 할 수 있는 기계?주사?( 에고 귀찮다 그냥 '기억소멸장치' 라고 할게요)
음... 무튼 그 기억소멸장치가 있다면....어떨까..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조차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모든 걸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딱 원하는 그 기억만 지우고 아무렇지 않게 살고 싶은 마음
지금 너무 힘들어서 행복했던 순간만큼도 지울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
그런 마음들은 아마도 살면서 한 번 이상은 겪어 보셨을 겁니다.
제가 지금 그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럽고 미칠것 같은 건 아니지만
만일 실제로 그런 장치가 있다면
한번 시도는 해보고 싶기는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면서도
딱히 해 보고 싶다고 하지 아니하지 못하느니만 못한 일이 아닌가 싶을 뿐입니다.
(제 맘 아시죠? ㅋㅋ)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알지요....깨달음도 없고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다는 것을.
그저 어린아이로 머무르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생에서 남는 기억은 사실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을.
저를 빵~ 웃겨주신 어르신에게 못다한 심심한 감사의 말씀과 더불어
어르신 말씀 속에 담겨진 또 다른 깊은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깟 일 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 그러니
힘내서 열심히 또 살아 가면 되는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