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이기는것은 평안입니다.
이전에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 3명은 세계유도선수권전을 3년패한 28세의 다비드 두이예와 프로축구선수 지네딘 지단과 가난한 자의 대변인인 90대의 아베 피에르 신부라고 합니다. 격변의 20세기를 주의 종으로 살아온 그가 프랑스의 인기인이 되기까지 그는 수많은 역경을 거쳤고 가난한 이웃과 늘 함께 하면서 가난하지 않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자서전적 책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라는 글에서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베드로 신부님’이란 뜻의 ‘아베 피에르’는 앙리
그루에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한 사업가가 인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모래사장에 누워있던 그는 한 어부가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물고기 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운이 좋군요. 다시 바다로 나갈 건가요?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갑시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 쳐 주세요.” “바다로 나갈 거냐구요? 뭣하게요?” 어부가 물었습니다. “고기를 더 잡으 러 가는 거죠!” 사업가가 대답했습니다. “고기를 더 잡아서 뭣하게요?”
“그 고기를 팔면 되지 않아요? 그러면 돈을 벌 것 아닙니까?”
“돈을 벌어서 뭣하게요?”“그 돈으로 작은 배를 살 수 있을 것 아니예요?”
“배를 사서 뭣하게요?”“배를 가지면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고기를 더 많이 잡아서 뭣하게요?” “그러면 일꾼들을 고용할 수 있지요.”
“일꾼들을 고용해서 뭣하게요?”“그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잖아요.”
“그들에게 일을 시켜서 뭣하게요?”“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되잖아요.”
“부자가 돼서 뭣하게요?”“그러면 편히 쉴 수 있잖아요?”
그러자 어부가 말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편히 쉬려고 집에 가는 길이오!”
우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분주하고 힘든 일을 벌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에르의 글에서처럼 아주 간단한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르는 어리석음에 빠지기도 합니다. 영의 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많은 법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서기관들이 만들어낸 조항들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해졌고 주님이 오실 무렵에는 그것을 배우는데 시간을 다 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직도 가톨릭에서 그런 흔적들이 나타나지요.
‘요리문답’과 ‘기도문’ 들을 외우고 그것에 의존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교리를 배우고 신학자들의 주석을 배우고 연구하고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나 그 배경들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소모합니다. 주님을 더 잘 알고 싶어서 배우는 신학이 하나님께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극단적 비유로 1학년에는 목사요, 2학년에는 강도사요, 3학년에는 전도사며, 4학년에는 평신도 그리고 졸업하면 불신자가 된다는 조소적인 말이 나돕니다. 정말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배우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많이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피에르 신부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는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이며, 정치가이며, 가난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그는 엠마오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가지지 않은 즐거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불행보다는 가지지 못한 마음으로 인해서 더욱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소유하게 하는 것보다는 소유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소개한 내용이 그런 의미인데 무언가를 가지려는 사업가와 고기 한 마리로 만족하는 어부를 대조시킴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고자 한 것은 먹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평안은 먹고 마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소유의 많고 적음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평가가 절대로 유물적인 가치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면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평안을 우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보이는 것을 좇아감으로써 이 평안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평안을 잃은 우리는 그 평안을 찾으려고 금식도 하고 작정기도도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찾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하고 다양한 실천적 요령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드립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그런 사람을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정말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부유할 수 없고, 다 만족할만한 것을 지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고 마음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늘 괴로워하면서 지내는 가난한 이웃을 본 피에르 신부는 엠마오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닌 평안으로 인해서 만족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중세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살았던 테레사는 깊은 영성을 지닌 여성입니다. 그녀는 평생 많은 수도원을 세웠지만 수도원 정원을 13명으로 제한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과 그를 따르는 제자 12명으로 한정하여 분수를 지켰습니다. 대규모로 사람들을 모아 보기에 거창한 모임은 실상 본질을 잃은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소수의 제자들을 가르쳐 온전하게 세우려고 의도했고 그녀의 가르침을 받은 십자가의 요한은 중세 스페인의 가장 탁월한 영성가로 불려지며 수많은 수도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화려하고 대형화한 것에만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대한 탑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만족을 가져다주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막연히 믿습니다. 서로 서로 그런 것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면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황폐해지고 고단해진다는 사실을 애써서 잊으려고 합니다. 더 크고 더 화려한 ‘르까프’ 정신으로만 치달아 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가난은 물질의 궁핍에서 오는 것보다는 마음의 가난에서 오는 것이 더 아픕니다. 재벌 회장이 투신자살한 것은 바로 마음이 곤궁해서일 것입니다. 엠마오 공동체를 통해서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법을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법을 가르치신 분이며, 그의 제자인 우리도 그것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장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