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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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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모 문학방 고향의 우리 동네
푸른 돌(靑石) 추천 0 조회 17 23.05.25 13:51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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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5.25 14:13

    첫댓글 1. 위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고향의 우리 동네 사진이다. 너무 상세히 잘 나와 깜짝 놀랐다. 옛날에 동네 뒷산에 간혹 올랐다. 땔 나무 하러 가고 소 먹일 꼴 베러 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상일이는 소 먹이러 다녔다. 덩치가 큰 누렁소가 순하고 말도 잘 들었다. 어린 주인이 가자는 대로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바로 선다. 동뫼산은 상일이가 자주 가고 가장 좋아 하는 산이다.
    그 산을 오르면서 보면 우리 동네가 잘 보이고 정상 근처에선 옆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누렁소를 몰고 그 산을 가면 소가 좋아 하는 풀이 많다. 오르는 길도 경사가 완만하다. 전망도 더 없이 좋다. 그래서 동뫼산으로 소먹이러 자주 다녔다. 그러니 동뫼산 산길 들길은 훤하다. 봄엔 진달래가 만발하고 초 여름엔 치자꽃 향기가 코를 찌른다. 가을에는 들국화가 논두렁이나 밭 언덕마다 흐더러지게 핀다. 고향이 한 때 유자 치자 비자가 많이 난다고 해서 삼자도(三子島)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정말(덴마크)이라 한 적도 있다. 척박한 섬이라 가능한 자원을 총 동원해 기름진 논과 밭으로 일궜다. 어디를 가도 노는 땅이 없었다. 그리고 교육 열도 더 없이 높았다..=>

  • 작성자 23.05.25 14:14

    2.중 3 때 짝궁이 지금도 생각난다. 좌석 배치를 하다 보니 어쩌다 같이 앉게 되었다. 좀 긴 책상에 의자 둘을 놓고 앉는 2인 1조식 책상이었다. 그런데 장난 끼가 많은 것이 둘 이 닮았다. 언제가 오후 석회 시간에 둘이 끽끽거리며 장난을 치니 담임 선생님이 불러내 앞에서 무릎 꿇고 두 손들고 석회가 끝날 때까지 벌을 섰다. 그 담임 선생님이 후에 알고 보니 형님과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그 선생님은 미대를 나와 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고향에서 평생을 교직에 계셨다. 중3 때 학교에서 진학율을 높이고자 방과 전 후 과외 수업을 했다. 그 전에는 과외 수업이 없었는데 우리 동기생이 우수한 학생이 많다고 학교에서 특별 관리를 했다.
    입학 시즌이 되니 담임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진학 지도를 시작하면 그 학생의 성적에 맞춰 희망 학교를 정한다. 중학교도 못 갈 뻔 했던 상일이가 서울로 가게 되었다. 형님이 하나인 남동생을 시골 학교를 안 보내고 서울로 유학을 시켜주기로 했다. 당시 상일이 성적은 동기생 5개 반 300여명 중 20위 이내로 괜찮은 편이었다. 10위 권은 주로 부산 K고와 P고를 가고 20위 권이면 부산 D고와 진주 J고를 갔다..=>

  • 작성자 23.05.25 14:16

    3.그 당시 담임 선생님이 서울로 진학하는 상일이를 서울 4대 명문인 Y고를 추천해 주셨다. 서울로 진학한 학생이 많지 않아 2년 전 선배가 그 Y고에 진학한 것이 학교 역사상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그 해 상일이 동기생이 부산 K고에 5명 P고는 1명이 합격했다. 부산 동래 D고 1명, 진주 J고는 8명이나 진학했다. 그 당시 명문교 진학 기록으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학교에서 몇 년 간 특별 관리한 진학 지도가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일이한테 생겼다. 학교에서는 서울 Y고 입학 원서가 올 것이라 믿고 기다렸는데 뜻밖에 성동구에 있는 실업계 S공고 원서가 온 것이다. 상일이는 물론 학교에서도 깜짝 놀랐다. 그 당시는 시외 전화 한 번 하기도 쉽지 않고 1차 원서 마감 일이 촉박해 서울까지 우편물이 오고 가고 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원서 사러 누가 서울까지 갔다 온다는 것도 더 생각 못 할 일이었다. 서울은 천 리 길로 최소한 3~4일이 걸렸다. 경부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고 경비도 꽤 많이 잡아야 했다. 지금이야 시골 사람들 서울 나들이가 식은 죽 먹듯 하지만 당시는 그야말로 한양 천 리가 머나먼 길이었다..=>

  • 작성자 23.05.25 14:18

    4. 담임 선생님이 형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했거니 싶어 두 말 않고 상일이와 의논해 원서를 작성하고 S공고로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형님의 속 뜻은 서울시 5급 공무원이니 동생 대학 진학까지는 어려우니 실업계 나와 일찍 사회에 진출하고 돈 벌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S공고 입학 시험에서 차석으로 합격했다. 입학식 날 수석 합격한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등록을 하고 2차 인문계로 진학을 한 것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일이가 수석이 되어 3년간 등록금 전액을 주는 장학 증서를 받았다. 학교에서 가장 크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장학금이었다. 어느 성공한 대 선배가 입학 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일이가 사실은 차석이었고 수석 합격 생이 안 와서 대신 수석이 된 것이다. 그 후 어느 누구에게도 수석 합격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엄연히 차석이고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것이다. 모교인 중학교에서는 당시 교문에 "축, 서울 S공고 수석 합격 ㅇㅇㅇ"라고 프랭카드도 붙였다 한다. 졸업식도 끝나고 진학도 결정되어 그 후에 학교를 가보지 못 했다. 사람의 운명은 순간의 선택으로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 작성자 23.05.25 14:19

    5.서울 S공고를 들어간 상일이는 3년 간 엄청난 시련과 좌절 속에 보냈다. 학교 수업은 80%가 실업계 과목과 실습이었다. 영수 과목이 인문계는 1주일에 8~10시간인데 S공고는 2시간이었다. 진학에 필요한 인문계 필수 과목은 뒷전이었고 수박 겉 활기 식의 수업이었다. 다른 실업계 학교에서는 2학년 2학기부터 진학 반을 개설해 별도 과외 수업을 시켰는데 S공고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 당시도 일류고 기준이 SKY대 진학율이었다. 이제 예비 고사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일류 대학 기준과 전통은 변함이 없다. 지금도 일류 대학 진학을 위한 강남 학군 선호와 학원 가의 과열 과외는 그대로다. 공교육이 거의 무너진지 오래고, 길 잃은 교육 정책은 이념과 진영 논리에 흔들린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요 우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다. 그런데 급격히 인구가 줄어 전 세계서 최저 저 출산율은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고 풀어야 할 과제다. 서울에도 폐교 하는 초등학교가 등장했다. 계속 늘기만 하던 서울 인구도 줄기 시작했다. 저출산이 사회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구 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라는 데 좌고우면 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 23.05.25 23:07

    행복한 밤 보내세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 23.05.26 13:12

    조용한 금요일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복 된
    나날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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