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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관우는 봉투에 넣은 편지를 혜림에게 전달했다. 이미 관우가 해놓은 말이 있으니 편지의 내용은 알만 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 했다.
-4학년 때부터 너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이사 가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이야기는 하고 떠나고 싶어서 이렇게 썼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러니까 20살에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나는 너를 잊지 않고 간직 할 것이다. 약속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친구를 심하게 두들겨 팬 죄로 관우 역시 그날 담임 선생님한테 얻어 맞고 그 벌로 혼자서 청소까지 해야 했다. 그렇게 혼자 청소를 하고 있을 때 혜림이 관우에게 와서 말했다.
“힘들지? 같이 할까?”
“됐어. 너는 그냥 집에나 가. 누가 볼라.”
“아무도 없는데 뭐.”
“그래도 가라. 늦을 거 아냐.”
그러나 혜림은 그날 관우와 청소를 다했고 학교 문을 나서면서 관우에게 역시 쪽지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는 말했다.
“고마워. 잘 가.”
혜림은 그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사라졌고 관우는 혜림이 남긴 그 쪽지를 폈다.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실은 나도 너 좋았어. 그리고 너무 고맙다. 나도 이제 헤어진다니 아깝네. 잘 지내. 20 되면 만나자. 내 출석부 사진도 줄게.
이후로 관우는 이 쪽지와 혜림의 사진을 고이 간직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처럼 자신도 끝까지 신의와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1995년의 일이었으니 연락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사 간 후 중학교에 올라서 만난 오혜림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지만 신의와 약속을 위해서 관우는 끝까지 참았다. 늘 아직 학생이니 공부나 하자는 핑계를 대며 오혜림을 밀쳐낼 때마다 관우도 미안했지만 신의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무시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꾼 꿈을 믿었다. 그 꿈대로 아마 평생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도 해봤다. 사실 권혜림과 오혜림은 용모가 비슷하기는 했다. 차이가 있다면 오혜림 쪽이 더 갸름하고 마른 이미지 였고, 눈이 더 컸고 눈썹이 가늘었다. 오직 공부만 열심히 해서 대한민국 3대 명문대만 들어간 모습만 보여주면 권혜림은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공부만 했다. 지칠 때마다 관우는 권혜림의 사진을 꺼내보며 자신을 독려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2001년 고3 수능이 끝나고 관우는 권혜림을 찾아갔다. 동창 찾기 사이트에서 권혜림의 이메일을 알아내서 만나게 되었다. 때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 날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기대는 빗나갔다. 어떻게 만난 권혜림은 관우에게 말했다.
“너가 아직도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의 일 아니니? 우리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어. 어렸을 때 그런 약속 같은 거 잊어버려. 잊어버리고 대학교 가서 예쁜 여자 만나. 나보다 수능도 잘 봤네.”
이렇게 만난 권혜림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껴져 있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했다. 저녁은 그 남자와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 때 관우는 어느 수필가의 수필을 떠올렸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만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관우는 생각했다.
‘나는 오직 신의를 지킬 생각으로 버텼는데 너라는 녀석은...’
관우의 애정은 곧 분노와 경멸로 바뀌었고 건성건성 인사하고 사라졌다. 오랜 세월의 혼자 쌓아온 정은 한순간에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 날 관우는 몰래 산 소주를 마시고는 비틀대며 집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오혜림이 보았다. 혜림은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관우의 기색이 이상해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몰래 따라갔다.
‘술에 취했네. 모범생인 저 오빠가 웬 일이지? 무슨 일 있나?’
그렇게 따라갔다. 관우는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폐휴지 수거함에 넣었다. 수첩 같은 것으로 보였다.
관우가 사라지고 혜림이 관우가 버린 수첩 보았다. 맨 앞에는 스카치 테이프로 권혜림이 썼던 메모가 붙어 있었고 관우가 하나하나 기록한 글들을 볼 수 있었다. 내용은 대충 힘들지만 권혜림을 만날 것을 늘 결의하며 견디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였어? 결국 이거였던 거야?’
혜림은 관우의 메모를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이 그렇게 은근히 관우 곁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밀쳐내고 핑계대고 멀리하고 냉정하게 대했던 것이 결국 그 권혜림이라는 존재 대문이었다니 혼자서 그렇게 고지식하게 자신 만의 연정을 구축했던 관우에게 혜림은 화가 났다. 실은 수능이 끝나고 혜림은 관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지만 관우는 혜림이 수능을 봐야하는 처지임을 들어서 거절했다.
“너 수능 끝나고 대학가고 생각해 보자.”
이런 식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되고 혜림은 망연자실했다.
‘이거 미친놈 아냐. 이 미친놈. 바보. 멍청이...’
왜 관우에 술을 마셨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럼 그 여자가 기다려 줄줄 알았니. 이 바보 멍청아...그게 언제적 일이라고...미련한 새끼...’
혜림은 그 자리에서 입을 막고 울었다. 관우에게 화가 나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고 혜림은 돌아가서 울적한 마음으로 라디오를 켰다. 그 때 마침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저는 혼자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는 이제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여자도 물리칠 생각입니다. 다시는 배신감에 상처 받지 않을 것입니다. 신청곡은 인형의 꿈입니다.”
혜림은 이 사연이 관우가 보낸 것임을 직감했다. 노래가 나왔다.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이 노래를 들으면서 혜림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야 이 바보야. 너는 한 걸음 뒤에서 기다린 게 아니고 안 보는 데서 기다린 거 아냐...안 보이는 데서 있는데 알 사람이 어디 있냐고... 정작 자기 뒤에 있는 사람은 전혀 못 봤지? 이기적인 새끼...”
1년 후 혜림은 다시 관우와 만났다. 죽어라 공부해서 관우가 들어간 바로 그 학교에 들어갔다. 학과가 다르긴 했지만 결국 같은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혜림이 관우를 붙들고 말했다.
“오빠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 오빠 바보야? 아니 싸이코 집착남이야? 한참 어렸을 때 일에 왜 그렇게 집착을 해?”
“집착하는 거 없어. 이제는 여자 따위에 관심 가질 일 없을 거다. 군대가야하는 데 여자는 무슨 여자.”
하고 일축하고는 돌아섰다. 그러나 혜림은 안다. 관우는 우연히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다시 그 권혜림을 만났고 자신의 맹세와는 달리 그 권혜림에 대한 마음을 거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관우가 권혜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던 것도 아니었다. 아예 모른 척 사무적으로만 대했다. 남자가 있던 권혜림 입장에서도 오히려 그게 낫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서운해 했지만 곧 적응했다. 이 꼴을 본 오혜림이 폭발해서 관우에게 따졌다.
“누구 바보로 알아? 그 여자 남자 있다는데 왜 그렇게 집착해?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해도 관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러는 너는 내가 뭐라고 이렇게 쫓아다니냐.”
“한심해서 그렇지 새끼야!”
그 다음 날 관우는 군대에 갔다. 의경을 지원했던 관우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치정사건을 보고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여자 친구 때문에 너무도 실의에 빠져 살던 후임을 보면서 저런 사건 겪으면서 사느니 차라리 여자는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버린 것이었다. 여자에게 다시는 정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관우가 입대하고 지쳐버린 혜림도 다른 남자를 만났다. 관우가 제대를 하고 남자와 함께 있는 오혜림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관우는 무표정했다.
졸업 이후 관우는 대학원을 거쳐서 중국으로, 독일로 유학을 갔고 그 후로 관우는 권혜림도, 오혜림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관우는 웬일인지 여전히 그 권혜림의 어렸을 때 사진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권혜림의 사진을 보면서 관우는 생각했다.
“꿈대로 되나. 결국 내 기억 속에서 함께 하는 군.”
하면서 한번 씩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오혜림과 같이 찍은 사진이 눈에 보이면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너무 차갑게 대하긴 했지. 좀 더 친절히 잘 대해 줄 것을 그랬던가. 그 때 내가 너한테 솔직하지 못했다.”
그 후 2019년 여름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30대 후반에 접어든 관우와 혜림은 밤바다를 걸으면서 관우가 스마트폰을 열었다. 관우의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본 혜림이 말했다.
“어. 이 사진 중학교 때 사진 아냐?”
“어. 나 중3때 너 중2 때 여기로 수학여행 왔던 거. 그때 너하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관우와 혜림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아마도 친구였던 현철과 현미가 찍어줬을 것이다.
“그거 폴라로이드 사진 아니었어?”
“스캔 했지.”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그렇게 되었다.”
“하여튼 변한 게 없어. 옛날 일은 절대로 안 잊지. 이 미련한 인간아.”
“살면서 잊거나 버려서는 안 될 것도 있는 법이지.”
자신이 실은 잊거나 버려서는 안 될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한 혜림은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혜림이 말했다.
“그러게 일찍 좀 솔직해지지 그랬어. 너무 오래 돌아서 왔다는 생각은 안 해?”
“다 인연의 때가 있었던 것 아닐까.”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소리를 해 무슨 옛날 도인같이.”
“아니었으면 내가 하필 너하고 여기 있겠냐?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거지.”
“그런가?”
둘은 한 방향으로 저 바다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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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전편인 추억 다시 대면 하다의 후속편으로 써봤습니다. 후속편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써보게 되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그동안 조금 썼던 거 올려 봅니다.
첫댓글 결국에는 혜림과 맺어지긴햇는데 초딩때 권혜림이 아니고 오혜림이였던가보네욤^^~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