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안의 경영인’ 고 최종현 회장 생애 (전편 )
1929년, 아버지 최학배와 어머니 이동대 사이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수원농림중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대학교로 편입해 1956년 졸업하였다. 3년 후인 1959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하였다. 유학시절 자유주의 시장경제 수업을 들었으며, 그 영향으로 국내기업인 중 자유시장경제이론에 가장 밝았고, 가장 잘 실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형 최종건이 1973년 폐암으로 별세하자 선경그룹을 지휘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선경그룹은 잠재력은 있어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기업이었지만, 최종현의 리더십 아래 한국 재계 5위 이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최종건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지만 최종현이 창업주가 아님에도 창업주와 같은 대접을 받고 SK 그룹을 최종현의 아들인 최태원이 물려 받은 것은 이러한 경영능력 때문이다.
기업관·국가관[편집]
최종현 회장의 기업관∙국가관은 사업보국(事業報國), 기술보국(技術報國), 자원부국(資源富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 회장은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잘 살게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제시해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시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제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입니다. 섬유공업에서 석유정제사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성취해 나가는 데에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제적 기업으로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선경그룹 신년사에서
특히 최 회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사업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먹고 살 산업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열정을 보였다. 최 회장이 1973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주변에서는 허황된 꿈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 회장은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한 뒤 일본 이토추상사와 함께 정유공장을 설립키로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공급을 약속받는 등 차근차근 사업을 준비했다. 이 같은 계획은 1차 석유파동으로 무산됐고 관련 글로벌 합작사업들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최 회장은 장기적 안목으로 중동지역 왕실 등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다.
선경직물에서 생산하는 합성섬유들의 주 원료인 석유를 수입하면서 중동거래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이 석유 위기에 직면했을 때 최종현 회장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정에 따라 한국이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돼 원유공급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최종현 회장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급파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이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받을 정도로 사우디 왕실 측근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급파된 최 회장은 사우디 왕실과 접촉하면서 야마니 석유장관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고, 우리나라는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후 대한석유공사(유공) 합작사인 걸프의 철수를 사전에 예상한 최 회장은 걸프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직접 TF를 이끌었고, 1980년 지분 인수에 성공하며 유공의 1대 주주가 됐다.[3] 원유 확보와 중동 오일머니 유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이후 유공은 세계 최대의 정유공장이자 복합 석유화학 단지를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최종현 회장은 국가 전체가 흔들렸던 석유파동을 교훈 삼아 해외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섰다. 진정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석유개발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 최종현 회장은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경험하면서 자원이 곧 무기이고 국력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유전개발은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최 회장이 추진했던 석유개발은 반대가 많았다. 실제 거액이 들어갔지만 실패가 계속됐고, 헬기로만 접근할 수 있는 미얀마 밀림에서 5,600만 달러를 투자해 석유탐사를 나섰다가 빈손으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연이은 실패를 딛고 결국 SK는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 평균 55,000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궈내며 최 회장이 품었던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냈다.
에너지∙화학 사업 진출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한 최 회장은 1980년에 이미 정보통신 중심의 시대가 올 것임을 강조하는 혜안도 보였다. 유공 인수 후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조만간 무선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테니 여러분도 거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 한다.
선진 산업동향을 분석하기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설립한 최 회장은 정보통신 분야가 핵심성장 동력이 될 것임을 파악하고, 1985년 미주경영실 산하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 현지 이동통신사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이통사에 직원을 파견, 실제 근무를 하는 방식으로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통신 경영 노하우를 축적했다. 1990년에는 미국 IT업체와 합작, 선경텔레콤을 설립하면서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위한 준비를 갖췄다.
이후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수 있는 민간사업자(제2이동통신 사업권) 선정"을 발표하자 그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입찰해 압도적인 점수 차로 1위에 선정됐고,[4] 1992년에 주력계열사 유공을 중심으로 미국 GTE와 영국 보다폰 등 국내외 주주들을 총망라해 '대한텔레콤'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이었기 때문에[5] 특혜 의혹이 생겼다.
14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 노태우와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당 대표로 있던 김영삼이 자신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해 최종현 회장도 정부가 먼저 사업권을 취소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지만 김영삼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기자들에게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언해 1992년 8월 27일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고 공식적으로 노태우 정권에서는 통신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선경에 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 선정을 최종현이 회장을 겸직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맡긴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바꾸고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에서 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선경그룹에서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포기[6]하는 대신 제1이동통신을 서비스하고 있던 공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 인수 후 CDMA 상용화에 힘써 1995년 12월 31일 최종 테스트에 성공해 1996년 1월 3일부터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최종현 회장은 폐암 투병 중에도 그룹 업무보다 나라경제 걱정을 많이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 회장은 일찍이 1970년대부터 ‘21세기 일등국가론’을 제시하며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SK는 세계 100대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병상에서 그는 여러차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에 몰두하고 싶다.”(최종현 지음,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
실제로 그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 그룹일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면서도 학자들과의 토론만은 거르지 않았다. 미국 뉴욕의 슬론 케터링병원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코네티컷의 한적한 곳에 집 한채를 빌려 요양중이던 1997년 8월에는 송병락 서울대 교수,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학자들을 일부러 미국으로 초청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건강이나 챙기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나면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게 주변 사람들의 회상이다.
최 회장은 이 시절, 학자들과의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해 나갔다. 이같은 원고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이라는 책을 보면, 최 회장의 당시 관심사는 대부분 국가경제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인재양성, 글로벌라이제이션, 국가경제의 선진화 등은 지금 곱씹어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내용들이다.
최 회장은 21세기 일등국가가 되기 위한 구체적 방향으로 글로벌리제이션과 시장경제 활성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제시했다. 최종현 회장은 1980년대 세계변화의 흐름이 민족주의(Nationalism)에서 지역주의(Regionalism)의 시대를 거쳐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최종현 회장은 세계화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시장의 힘이 한 국가의 경제를 넘어 주변 지역과 세계를 통합시킬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 진출과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최 회장은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하며 경제5단체 공동으로 국가경쟁력 민간위원회를 발족해 ‘Mr.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실물경제 이론에 해박했던 최 회장은 학자, 관료들과 열띤 토론을 하며 시장경제 시스템과 질서를 강조했다. 최 회장은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인하, 규제철폐, 쌀 시장 개방 같은 민감한 문제에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1년 전부터 아시아 경제위기를 경고하고 폐암 투병 중이던 1997년 10월에는 산소마스크를 달고 휠체어를 탄 채 청와대에 찾아가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외환과 환율, 은행이자율에 관해 직언을 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난다'는 호소도 했지만 돌아온 김영삼 대통령의 반응은 '알아보겠다'가 끝이었다고 하며, 이에 자택으로 귀가한 최 회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지자 한국은 결국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인재 양성[편집]
최종현 회장은 인재를 가장 중시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사람이 제일 큰 자원이고, 기업 경쟁력 역시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게 최 회장의 평소 지론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느 기업가와 달리, 최종현 회장은 기업을 뛰어넘어 사회 전체를 이끌 인재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1979년 SK그룹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Sunkyoung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국내 기업 중에 가장 체계적인 경영이념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에는 이들을 더욱 발전시킨 SUPEX(수펙스) 경영기법을 정립했다. 이는 Super Excellent라는 최상의 목표를 세운 뒤 목표 달성을 위해 직원들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 최상의 성과를 내고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법이다. 인간의 성장을 신뢰하는 최종현 회장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SKMS와 SUPEX에 관해 강연 하는 최종현 회장의 동영상을 아트센터나비[7]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교육이나 연수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75년 3월 최 회장이 워커힐 호텔 부지 내에 300평 규모로 국내 기업 최초의 연수시설인 선경연수원(현 SK아카데미)을 설립한 것만 봐도 얼마나 사람과 인재를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최 회장은 인재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보고 1974년 세계적 학자 양성이라는 목표 하에 사재를 출연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일등 국가, 일류 국민 도약과 고도의 지식산업사회 건설’이라는 100년의 목표로 출발한 세계적 석학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까지 800여 명의 해외 명문대 박사를 비롯해 3,700 여명의 인재들을 키워냈다.
재단 설립 당시만 해도 SK는 국내 50대 기업에 겨우 포함될 정도의 중견기업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장학재단 설립을 두고 회사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재를 출연하며 경영진의 불만을 잠재우고 재단 설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최종현 회장은 서울 퇴계로 요지에 위치한 5층 빌딩 한 채를 출연금으로 내놓았으며,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재단명에도 회사 이름을 반영하지 않았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