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저력은 거룩에서 나타납니다. 거룩은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거룩함으로 부르신 것을 지키는 것이 거룩입니다. 땅에서 난 것은 하나도 거룩한 게 없습니다. 저주 받은 땅의 소산을 드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는 걸 보세요. 예컨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보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별별 마귀의 꾐이 침투하여 그리로 기울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저건 죄야 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해 하면 아직 죄 가운데에 있는 겁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봤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안중에 없겠지요. 보이지 않습니다. 거룩도 마찬가집니다. 거룩하게 돼야지 하면 거룩을 모르는 겁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여기서 너희를 부르신이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신 거죠. 그리로 부르시기 위해 은이나 금이 아닌 흠 없고 점이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사용되었습니다(벧전1:18-19) 그 피 값이 아니면 우리를 거룩으로 부르셔도 우리는 감히 거기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음을 기억할 때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 은혜가 귀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핏 값을 안다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을 가지고 거룩하라고 하십니다(벧전1:17)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 성경의 모든 명령동사는 그렇게 되는 방법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앞뒤로 기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하라고 한다고 행위의 퍼포먼스를 보이면 안 됩니다.
주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므로 거룩하게 하신 그 사실을 진리로 깨닫고 그 자리로 좇아가는 겁니다. 아니 그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진리를 순종하면 영혼이 깨끗해지고 뜨겁게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벧전1:21-22) 거룩이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므로 성도의 저력은 거룩인 겁니다. 그로부터 풀과 같은 육체와 그 꽃과 같은 육체의 영광을 우습게보고 썩지 않을 씨이신 주의 말씀을 경외하며 존귀하게 여기게 됩니다(벧전1:24-25) 내가 가진 복음을 지극히 존귀하게 여길 때부터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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