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호수 아래서 3000년前 고대 요새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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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려 하는 속성이 있다. 성경이 역사적 진실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그 성경을 믿지 않는 데 대한 도덕적 책임이 훨씬 커진다는 의미이므로 그 양심의 부담으로 인해 사람들은 진실이 보여도 보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다.
이 고대 성벽이 발견된 반 호수는 노아의 방주가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저 유명한 아라라트 산의 남쪽에 위치한 호수로서 아르메니아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한 동안 아라라트 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는데 그들은 산 위에 머물렀던 고명하고 위대한 인물인 셈의 영적 지도력과 영향 하에 있었다.
또 그가 말하기를 “셈의 주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카나안은 그의 종이 되리라(창 9:26).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셈은 특별히 아버지의 "영적인 지분"을 집중적으로 물려받은 제사장 신분이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더 비옥한 농지를 찾아서 하산하는 와중에도 아라라트 산에 머물면서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치고 지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관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알렉산더 히슬롭의 "두 개의 바빌론"이라는 책에 잘 나온다.
이 기사에서 보면 성이 축조된 연대가 기원전 9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반 호수의 생성 연대가 60만년 전이라는 허황된 진화론적 추측만큼이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본다. 어쨌건 그 성의 길이가 1km가까이 되고 성벽의 높이가 3-4m라는 것은 이 성을 쌓은 주체가 완전한 문명인이었고 결코 신석기 시대 야만인들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그들이 거기 성을 쌓았다는 것은 상당히 발달된 문명을 이룰만큼 충분한 인구가 있었다는 증거이며 진화론 역사학자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인류 문명이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상상의 허구와는 전혀 다른 진실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문명이 남에서 북으로 전파되었다면, 즉 아프리카 - 이집트 - 바빌론 등지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라면 아라라트 산과 아르메니아 촌동네인 그곳에 거대한 성이라던지 발달된 도시의 흔적 등이 발견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곳은 문명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중에서도 상당한 변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의 조상인 셈의 자손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극동까지 이동하면서 정착하여 고조선을 만들었는데 그 고조선의 어떤 흔적이 지금 남아 있는가? 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이 실제 남아 있어서 "이것이 고조선의 왕검성 성터입니다"라는 추정이 되느냐는 얘기다.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아무리 철저히 파괴되었다 치더라도 너무 없으니 이상할 정도이다. 다시 말해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인구가 적었던 것이고 큰 성을 쌓을 만큼 인구 밀집 지역이 없는 유목 사회였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인류 최초의 발상지는 에덴 동산, 곧 유프라테스 강의 어느 지역일 것이며 노아의 홍수 이후 최초 문명 발상지는 아라라트 산과 그 어귀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주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21:33).
아브라함은 에셀을 심고 거기서 주께 경배했는데 에셀은 나무를 말한다. 이방 종교들이나 무속에서는 "신목"이라고 하는 신령한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왜곡되어 전파된 개념이다. 원래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인 셈은 아라라트 산속의 수림 속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경배드렸기에 그 풍습을 본받아 그 시대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단 옆에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천주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응용하고 개신교에서조차 아세라의 풍습대로 설교단 옆에 꽃장식이나 나무 장식을 한다. 또 크리스마스 때는 자작나무에 장식을 하는데 결국 이것은 좋은 데서 나온 악습인 것이다. 셈과 아브라함 당시의 에셀은 좋은 풍습이었지만 그 후에 이방 우상을 섬기는 악한 아세라 조성하기로 바뀐 것이다.
우리가 기사의 사진을 보면 성벽이 잘 맞춰진 깎은 돌로 쌓여진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돌로 축조된 성벽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고대의 석조 문명의 형태를 보여준다. 초기 문명은 진흙이 아닌 돌을 사용해서 건물과 집을 지었었고 물론 지역마다 특성상 석조가 우선시되는 곳도 있다. 이스라엘은 돌이 많아서 돌로 건물을 짓고 그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돌을 깎아서 성벽을 쌓는 형태는 인력이 많이 들어가기에 중앙집권 체제가 잘 정비된 왕국이나 제국이라야 추진할 수 있다. 소왕국이나 지방 정권은 좀체 할 수가 없는 일이고 그래서 중국의 만리장성도 시황제 때 이르러서 대대적인 축조 사업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라랏 문명이 "돌 문명"이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실 왕국이 "돌 왕국"이라는 사실과 잘 맞아들어간다.
왕께서 보셨는데,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이 철과 진흙으로 된 그 형상의 발을 쳐서 산산이 부수니,(단 2:34).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돌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경배드렸는데 노아는 자기 영적 후계자인 셈에게 그것을 교육시켰다.
셈, 함, 야펫 족속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메소포타미아 한 곳에 이르러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을 때 그 탑의 주 재료는 돌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가서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 하고 그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회반죽을 대신하였으며,(창 11:3).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인데 그들이 성읍 축조의 방식을 완전히 신개념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자면 그들이 성읍을 세운 그 지역에서 많은 돌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신앙 형태를 돌 문명에서 진흙 문명으로 바꿔 버렸다는 얘기도 된다. 벽돌을 단단하게 구워도 돌의 강도에 미칠 수는 없기에 이 탑은 다분히 "보여주기용"의 전시효과가 강한 것이다.
사람들이 높은 탑을 쌓는 이유는 그런 "과시용"의 의미가 매우 크고 그 지속성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물론 돌을 깎아서 쌓아 만들었긴 하지만 그것은 바벨탑을 영구히 기린다는 의미에서 보존성을 부각시킨 것이지 원래 바벨탑은 흙덩어리의 진흙 탑이었다.
철과 진흙은 조화될 수 없는 두 요소인데 인류 문명은 돌 문명에서 시작해서 진흙과 철로 이행했다. 철은 철기, 곧 필리스티아인들의 주업인 철기 문화에 관련된 것인데 아다시피 필리스티아에서 거인 문화가 전승되었다. 사람들은 이스터 섬의 거상들, 영국의 스톤 헨지 같은 것을 두고 거인 이야기를 할 경우가 있고 마귀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대체로 보면 한국의 고인돌도 그렇고 거석들은 아주 과거에 세워진 것일 수록 순수한 신앙의 흔적인 경우가 많다. 사탄은 역청(콘크리트)과 진흙(벽돌)으로 된 도시 속에 겨우 숨쉬듯이 조그만치 돌 문명의 흔적들을 허용해 놓았다. 그나마 그 돌은 오벨리스크 형태를 취한 뾰족탑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께서 오실 때 즉 기자의 대피라미드 꼭대기의 머릿돌이 내려오듯이 그 분은 올리브산에 착지하실 것이다.
이 단순한 발굴 기사로부터 너무 멀리 나가지 않았나 싶기는 하지만 충분히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이러한 영적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소망을 더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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