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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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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미국에 가서도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는데 시댁은 상당히 수준높고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미국인들은 자식
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풍습이 없어 두사람은 처음에 상당히 고생을 하였다. 남편은 군대에서 좀 모아둔 것을
언니 데려오는 자금으로 비행기삯으로 거의 다 소비해버려 당장 집을 얻을 여유도 없어 셋집을 얻었는데 미국엔
전세라는 제도는 없고 처음에 보증금 약간을 내고 매달 상당한 금액을 내는 식이라 그 월세내기도 빠듯하였다.
언니는 미국서 어디 영어를 가르칠 수도 없고 미국서는 그 중 하위직업이라할 은행에 창구텔러로 들어가고 남편
도 무슨 회사에 취직을 한다.
미국에 주판이란 없고 컴퓨터계산기도 없을 때라 매사 일일이 암산 계산을 하는데 뛰어난 머리의 언니는 당연
발군으로 다른 텔러들을 누르고 뒷자리로 윗층으로 계장 과장 등으로 쾌속 진급을 하여 얼마안가 그 은행의 최
윗층 지점장으로 등극하고 산하 지점장 중에서도 대출을 가장 많이 내어주어 은행수입을 최고로 올리고 있었다.
은행 본사에서는 언니를 주목하여 하루 온종일 일처리하고 손님상대 등의 장면을 본보기로 촬영해 카셑 태잎을
만들어 20여개의 지점들에게 교육용으로 배분하고 있었다. 급기야 본사은행의 부사장으로까지 승진하여 다음
단계는 본사 은행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미국에서 은행장이 유대인아닌 특히 이중 단점
(double minority) 즉 여자+동양인으로서 그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 한참 후 우리나라에선 어느
은행 지점장에 사상 최초로 여성이 임명되었다고 대서특필 떠든 적이 있는데 그래도 역시 그 후 은행장에 여성이 임명되었다는 말은 못들었다. 유리천장이 아니라 강철천장일까.
그 바쁜 생활 중에서도 가슴깊이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은 한시도 잊을 수 없었으니 교도소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나에 대한 걱정으로 한시도 편할 순간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나를 초청하였으니 아버지도 출옥하시고 나도 더이상 언니청을 거절할 수만은 없어 조카애가 세살되던 해 나는 미국을 방문한다.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 언니는 너무도 크게 감격을 하여 그 때까지의 그 가슴앓이의 반은 해소돼 버린듯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언니는 나를 놓치기 싫었고 자기옆에 두고 싶어 나를 잡아 둘 방법으로 그곳에서 결혼해 살기를 바랬으니.. 미국남자들 중엔 얼마나 미남이고 신사고 집안 좋고 지성적이고..등등.. 그런 사람이 많은 줄 아느냐,
내가 최고의 남자를 골라줄 테니 여기서 결혼해 내옆에 살아라..
나는 가슴이 탁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는 그렇게 아버지를, 나를 이해못하는가.. 미국에 미남들이 많다는 건
사실이다. 길을 걷다보면 영화배우같은 미남들이 채이고 그들은 또 여자들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친절하여 넘어가기 쉽상이다. '군자는 위험을 멀리하느니라 하면서 나는 그들을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고 언니에게 절대 절대 미국남자를 내게 소개할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아버지를 두번이나 죽일 셈이냐 하며 펄쩍 뛰었으나 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나를 평생 곁에 잡아두는 것이었으니. 나는 곧 그녀의 조국이자 가족이었으므로 나만 곁에 있으면 언니의 많은 고뇌와 고통도 한도 사라질 것이었다. 언니는 자주 '나는 너만 있으면 되'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솔직히 끔찍하였다. 그녀는 확실히 남편보다 아니 딸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였다 할 수 있으니 그건 차라리 내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나는 바로 한국에 돌아와 학창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자들 중 대충 한사람을 골라 결혼하였는데 아버지 눈
에는 별로 차지 않았겠으나 아버지는 그동안 딸을 또 잃는 건가 내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시던 차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게다가 한국인과 결혼한다는데 대해 대단히 흡족해 하셨다.
나는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보다는 그가 그동안 내가 상처받은 영혼을 잘 보듬고 돌보아주어 내가 정신적으로 편히 쉴 수 있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그는 나를 따라다닌 경력이 있고
정치과 출신이라 물론 나와 아버지의 사상을 잘 이해할 것으로 믿었는데 결혼하고보니 그는 의외로 아버지 사상을 반대하였고 그런 아버지를 감정적으로도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그점 나 또한 결혼으로 아버지께 큰 불효를 한 셈이었다.
그런 점들이 결혼생활 내내 충돌의 요건이 되었으니.. 예로 그의 동창들중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한 분이 신문기자생활 중 언론자유를 외치다 구속되어 여러번 감옥을 드나들었는데 다시 잡혀 구치소에 들어갔다는 신문 말단기사를 시골서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 그에게 짧은 위문편지를 한장 보냈는데 나중에 그 일 때문에 부부싸움이 났었다.결혼 전에 몇번 보아 친분도 있고 아주 타인도 아닌데 남편은 그런 정부를 대항해 싸우는 인간들을 친구던 장인이던 아주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유명인이 자신의 친구라며 주위사람들에게 자랑은 많이 하였다.
또한 당시 신문일면을 크게 채우던 전국의 대학생들 데모를 보면서도 그는 학생들에게 크게 분노하여 그런 점들도 나와 매번 충돌하였다.
그 집안 모두 남존여비사상이 깊숙히 베여있어 내가 딸만 낳았다고 섣달 추운 날 찬 방에 미역국은 커녕 두 모자
모두 내게 물한모금도 안주던 기억은 평생 상처로 잊혀지지 않는다.(이얘긴 내가 여러번 했었다) 게다가 그 후 평생 나는 집안의 생활비를 벌어야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댁 부모 형제들 집안 모두를 부양하면서 과수원의 고된 노동에 몸에 과부하가 걸렸던지 몸도 마음도 점점 쇄약해지고 있었다.
내가 정말 불행하게 느꼈던 것은 그 모든 고생속에서도 남편이 '고생많지, 미안해'하는 위로의 한마디만 있었다면 모두 해소되어 힘이 날 것 같았는데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불평하면 '집안을 위한 것인데 당연한 일을 어째서 불평하는가'라며 자존심 상한다는 듯 매우 불쾌해 했다. 나는 속으로 아아 마누라란 이집에선 하녀와 같은 위치로 보는구나 싶어 슬펐다. 하인이 주인에게 일이 고되다고 불평하면 주제넘다 하듯이. 다른 동서들도 같은 얘기를 하던 것 보면 그것은 이 집안의 물레인 것 같았다.
결혼 전 내가 도미하기 직전 언니는 세살된 딸아이를 데리고 아버지를 뵈러 한국에 나왔었다. 우리집 입구에 언니 모녀를 세워두고 나는 아버지가 충격받으실가봐 먼저 들어가 언니가 아버지를 뵈오려 멀리서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툇마루에 앉아계시던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우리 과수원으로 올라가는 산길로 재빨리 도망가시는 것
아닌가.. 할 수 없이 내가 언니를 불러들이자 언니는 그 툇마루에 와 앉아 대성통곡을 하였고 나는 멍하니 그 옆에 앉아 하늘만 쳐다보며 속으로 피울음만 울었다..
그후 내내 언니는 그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매번 '나의 딸이 설사 아프리카의 어느나라 남자와 결혼해 아이
를 낳아왔다해도 내가 그 사위를 안받아 들이겠는가..'라며 울었다. 나는 '차라리 아프리카인 사위라면 백번천번
낳았겠지만 이 지구상 하필 가장 나쁜 미국인이라서 그렇지..' 라 속으로 외쳤지만 그말은 언니에게 절대 통할 말이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악연을 모르는 언니는 천재가 아니라 바보천치였으니까.
나는 한번 제자분들 중 한분에게 '아버지가 참 너무하셨다 언니에게 그리 잔인하실 수가..'라 하소연했는데 그는
'아버지로선 당연히 그러실 수 있음을 왜 이해못하는가'라고 오히려 나를 질책하였고 실상 나는 그말도 저말도 다 이해하고 있었으니 그 이해심이 바로 나의 비극이었다.
몇년 후 한창 월남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말하셨다. '만일 네언니 남편이 미국서 월남전을 반대하여 감옥에 들어간다면 내가 사위로 받아들여주겠다 말해라'고. 나는 참 기가 막혀 두 고래사이에 등이 아니라 가슴만 터지는 순간을 평생 수없이 당해왔지만 이번엔 더욱 기가 막혔다. 두 사람 모두 어찌 그리 서로를 모른단 말인가.
내평생에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천재들은 두사람이었는데 또한 가장 고집불통이고 바보천치도 그 두분이었다.
한사람도 벅차거늘 두사람이나.. 그것도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처지를 몰라주고 자신들만 생각하는 그 바보스러움도 둘다 똑같았다. 부전여전으로.
그래도 어쨋든 아버지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므로 그 말을 전했더니 예상대로 언니는 길길이 뛰며 그걸 말이라고
하셨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는 그동안 속으로 언니를 너무도 그리워해 오셔서 어찌하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편을 홀로 고민해 오셨던 것인데.. 얼마나 숱한 밤을 언니를 그리워하며 지새우셨으면 그런 아이디어를 짜 내셨을까 나는 아버지의 그 심정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언니는 그냥 단순 바보였으니까. 그런 아이디어가 언니에게 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신 아버지도 물론 바보이셨고.
이제 두분 모두 저세상으로 가셔서 서로 만나셨을 텐데 약간이라도 화해가 있었을까. 언젠가 나도 그곳으로 간다면 나는 또 그 두분 사이에서 등이 터질까.. 안된다 그건 또 새로운 지옥이 시작될 것이니 하느님 제발 나혼자 있게 해주옵소서하며 빌고싶다.
그런데 요즘들어 내 인생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한줄기 깨달음 같은 것이 오기
시작한다. 거기엔 무엇이 있다.. 하느님이 나를 단련시키기위해 그 훈련을 시키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일까..하느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무슨 일을 맡기시려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그렇게 호되게 훈련시키신 것일까.
작은애가 늘 나의 당뇨식을 간섭하고 자주 무슨 침을 들고와서 내 손끝에 피를 내서 검사를 하는데 내가 요즘 그
수치가 거의 정상인으로 돌아왔다고 좋아한다. 그렇다면 남은 건 치매인데 그건 자신이 없다. 어제 그제일도 기억을 못하지 않는가 그러나 요즘같이 미세먼지 전자파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 정도도 아닌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한가지 지난일들은 그 세세한 일들까지 정상인들보다 더 생생하게 그 느낌까지 기억하는 것 보면 내가 보기엔 그런걸 기억 못하는 그들이 나보다 더 치매같다. 치매가 얼마나 좋아졌나 검사하기 위해선 대형병원에 가서 그 놈의 MRA 기계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살아있는 나의 세포들을 완벽하게 죽이는 그 엄청난 전자파를 피하기위해 그 검사는 피하고 있다. 인간의 그 섬세한 봉한관들을 일시에 죽이는 그 살인기계. 인간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가 아니다. 처음에 진단 검사를 위해 그 MRA속에 들어갈 때는 오냐 그래봤자 몇년 죽음을 당기는 것 뿐이니 큰 손해볼 건 없겠다 싶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즉 하느님은 나를 무엇엔가 쓰시기 위해 내 몸도 회복시키고 계신 것 아닌가하는 의심과 기대로.
첫댓글 비극적인 민족사 한 조각 같군요........잘 보고 가네요.....
그 당시에 투철한 애국 애족 애민의 의식을
지니셨던 분들은 아버님처럼 행하셨지요
일제침략자들에 몸바쳐 투쟁하신 애국자들이신데
당연한거죠
미제침략자도 마찬가지지요
더욱더 증오하였겠지요
그러나
미제나 일제를 증오하고 반대배격하고 싸워야할
상대는 미국을 지배하는 미제국의 억만장자들과 반동지배층들이지 결코
절대다수의 근로인민대중이 아니지요
사위,형부는 도시소시민 계층으로 보이는데
근로하는 로동자, 농민, 소시민,지식인들은
우리의 투쟁대상도 아니고 타도대상은 더구나 아니고
협력하고 단결해야할 사회의 구성성분의 절대다수를 차지합니다
근로하는 로농, 소시민,사무원, 병사중하층장교들까지는
그들이 미국이나 영국이나 아세아나
아프리카에 살던 삶의 처지의 공통성이나 이해관계의 공통성이나 서로연대하고 연합하고 공동투쟁도 할수 있고
개인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가정도 이룰수 있다고 봅니다
가열처절했던 장구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김일성장군이 이끈 항일혁명대오에서도
부자와 빈자들의 사랑과 결혼이 있었고
부유한 가정을 탈출하여 손에 총을들고 목숨바쳐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항일투사들도 있었지요
그때에 창조된 그러한 인간관계의 전통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어져야할 귀중한 유산이되죠
글을 올려놓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사건들에 물을 타지않고
곧이 곧대로 쓰면 읽는 이들이 부담스러울 텐데..
글을 차라리 취소해 내려버릴까 아니면 군데군데 부분적으로
삭제해 버릴까하고.
분칠을 하지않고 사실대로만 쓰면 내얼굴도 깎이고 다 믿기지도
않을 것인데.. 쓰다보니 우리 가정은 너무도 비정상적이고 지독
하였다는 걸 더욱 실감합니다. 그걸 나는 사이사이에서 스폰지
처럼 흡수만 하고 살았으니
더 부끄러운 건 시댁 남편 얘기인데 내 친구들 중 내가 최악이라
체면이 말이 아니었는데 그걸 여기서 다 까발렸습니다
글을 삭제할까 하고 망설였는데 봉수님 글을 보고 그냥 두고
나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6.02 00:1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6.02 00:56
TS님 아쉬타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지만
아뭏든 올해 갑진년 안으로 지구의 대변혁이
시작된다는 건 믿고있지
환태평양 중심으로 그 중에 일본에 모범으로
하느님은 그동안 그 변혁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계신데 끝까지 일본 미국은 천손의 나라 조선에
대한 죄악을 참회하지 않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가차없는 벌을 내리실 것도 믿고있고..
보호구역안에서지만 한 인디언 추장에 한국인이
추대되었다는 게 예사로 보이지가 않는군
감격 감격이야...
너무 진솔하고
한편의 드라마를 압축한 이야기
아버님과 그리고 미국인과 결혼한 언니,
그를 둘러싼 아버님과 언니의 갈등,
그 차가운 강태풍속에, 그속에 끼인 어린 양
미국을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로 여겨오신 아버님,
그러한 미국인과 결혼한, 애지중지 길러온 내딸,
그리도 사랑했건만 용서못할 미국인과의 결혼을
용납할수 없었던 아버님,
찾아온 딸을 피해 과수원으로 뛰여간 아버님,
대성통곡하는 딸, 그 가슴아픈 드라마같은 장면을 지켜봐야만 하는 어린 양,
그 무엇으로도 치유도, 봉합도 되지 않는 분단의
아픔, 분단민족에게만 있을 이 가슴아픈 사연,
서로가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었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두분ㅡ
그걸 곁에서 지켜보고 가슴앓이만 한 어린 양,
얼마나 가슴 아프고 비극적인 사연입니까
그 사연을
실화 수기나
소설을 써도 훌륭한 명작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사연글
잘 보았습니다
건강에 우념하시면서 글쓰기를 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