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출근 길에 지하철을 탔다가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듣고 반대 방향임을 알았다. 아차! 오랜 기간 다녔던 전 직장의 출근길이 몸에서 완전히 빠지지 않은 탓이다.
습관은 이렇게 무섭다. 다행히 다음 역 승강장이 양쪽으로 나뉘지 않고 가운데 있어서 바로 갈아 탈 수 있었다. 몇 분 사이 잠깐의 한숨과 잠시의 안도가 교차했다.
그래도 만원 출근길의 고단함보다 잠깐의 어긋남이 금방 수습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처럼 늘 삐걱대는 내 인생은 다음 역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늘 괜찮은 시집 하나 언급하련다. 박판식의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이다. 제목에 딱 꽂히기도 했지만 내용이 좋은 시로 가득하다.
온 세계가 그물망처럼 연결 된 인터넷 세상이라 조금만 검색하면 건강 정보든, 재테크 정보든 온갖 정보를 앉아서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진짠지 가짠지 여부는 소비하는 사람 몫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몰라서거나,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못 읽지 맘만 먹으면 시집 없이도 얼마든지 시를 읽을 수 있다. 인터넷에는 얼마나 많은 시가 떠돌고 있는가.
이 시는 인터넷에 없다. 왜? 내가 처음으로 한 자 한 자 타이핑해서 지금 올린 시니까. 시를 옮길 때는 참 조심스럽다. 행여 오타가 생길까 점 하나, 조사 하나라도 빠뜨린 게 없는지 신중하게 옮긴다.
이것이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시인은 창작의 고통을 안고 밤을 새며 시를 썼을 터,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은 그 시를 단물이 빠질 때까지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터넷에 돌아 다니는 시를 복사해서 갖다 붙이면 편하고 좋으련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하니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시는 시인이 썼지만 정작 임자는 시를 읽는 독자다. 나같은 활자 소비자가 많을 때 시인도 살고 문학도 산다. 이 시집에 실린 좋은 시 하나 올린다.
이 글을 쓰도록 유발한 시다. 당연 저작권은 시인에게 있지만 오늘 이 시는 내 것이다. 왜? 나는 당신의 시를 표절했지만 당신은 내 마음을 표절했으니까.
하늘의 마음 - 박판식
커피를 코트에 쏟아서 세탁비를 물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저녁이 와서, 원하는 것을 얻어오지 못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길가의 갈대를 꺾지 않아서, 부모를 내가 고르지 않아서
아들이 내 말을 안 들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시장 고무 대야의 자라를 사서 풀어주지 않아서
사격에 소질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금값이 비쌀 때 금니를 해 넣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벚꽃놀이를 못해서
죽을 만큼 아팠다가 나았다가 다시 아파서
직장을 잃어서, 신년운세를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또 용서받을 잘못이 있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2022
첫댓글 모두 다 다행이라시면서
또 무슨 시원한 구멍을 찾을까요.
제목을 정한 시인의 심오한 마음을 제가 어찌 알겠는지요.
저도 인생이 안 풀리고 답답할 때면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을 때가 있던데요?
그 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면 숨도 트이고, 술이 나오면 더 좋구요.^^
이글을 읽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ㅎ
저도 이 시집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답니다.^^
그렇구나 살아있는 동안이 모든게 다행이구나~ㅎ
그렇답니다.
일단 살아만 있기만 하면 다행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ㅎㅎ
잘 읽고 갑니다.
네, 저도 선배님 댓글에 댓글 붙이고 갑니다.^^
아 정말 좋은시군요.
카피 해야 겟네요.
저도 온라인 이지마는
시던 글이던 그대로
복사해서 올린건 건성으로
읽게 되더군요.
창작이던 표절이던
한땀 한땀 들인 정성만큼
팬들에게 어필되는거
같습니다.
차 잘못타는거 또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거 저도
정신 놓을때는 자주 실수를
하게 되더군요.
앗! 삶방의 글 친구 금박사님 오셨군요.
거기다 좋은 시를 보는 눈까지,,^^
저도 님의 글 읽을 때면 꾸밈 없는 표현과
혼신의 손가락 노동에 감탄한답니다.
님의 소박한 글 자주 읽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다행인게 너무 많지요.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데...
글 고마워요.
네, 동감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살아 있어서 다행,,
다양한 사람들 글을 읽을 수 있는 삶방에 와서 다행,,
님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 수 있어서 다행,,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다행,,^^
마음을 쥐었다 놓는 의미 심장한 시 입니다 구절구절 이 악물고 살아 내는 서민의 애환이 짙게
마음을 내려 놓게 합니다
본인 마음 달래고도 더 나아가
우리들까지.. 감사합니다.
네 읽을수록 좋은 시지요.
함께 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본인 마음 달래고도 우리들까지란 님의 댓글에서
시인의 마음을 제대로 간파했음을 알겠네요.
세상을 보는 눈은 님도 시인과 동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