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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성곽순례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정조(正祖)가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의 복원에 이 기록이 이용되었음은 더말할 나위도 없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화성은 1997년 12월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조선 태종때 도호부로 승격된 수원은 한성 4진의 하나였다.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인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보위케 한것이다. 그 수원땅을 지키고 있는
화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상설 공연을 진행하고, 매년 가을이면 수원화성문화제를 개최하여 수원 화성을 알리고 있다.
팔달산(143m)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사적 제3호)은 총길이가 5,700m에 달하고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건축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21일 사도세자
(장조:고종때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9월까지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화성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화성의 건축과 관련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당시 30세였던 다산은
왕실서고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서적들을 섭렵하고 중국에서 들여온『고금도서 집성』5,000권을
참조해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을 비롯해 팔달산을 둘러싼 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서장대, 화포를 감춰두고
적군에게 총을 쏘도록 축조된 남포루,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방화수류정 등
200년전 건물엔 조선의 문화 향기가 가득하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정조대왕 동상
수원 화성, 정조가 사비 털어 세운 이유
서민을 위하는 통치자의 자격조건
평생 왕궁에서만 살았는데도, 서민을 배려한 '정조'
조선 제22대 주상인 정조(재위 1776~1800년)가 서민을 위한 개혁군주였다는 점을 문헌기록을 통해
서가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원 화성이 바로 그곳이다.
한국에서 옛날 궁궐이나 성벽이 가장 잘 보관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수원 화성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축조 당시의 건축물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수원 화성은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건설한 화성을 감상하다 보면, 이곳이 상당히 잘 짜인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시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궁궐 한 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궁궐·성벽·사대문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새로 건설하는
수준이었으니 그 공사에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되었을 것인지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정조는 화성 지을 때 어떻게 공사비용을 조달했나
화성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건축을 계획하는 통치자라면, 당연히 국민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방안을 고민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적 저항을 받지 않고 세금을 더 거둘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세금 거둘 생각부터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업으로 인해 서민들이 겪게 될 부담을 먼저 걱정했다. 단 한 번도 서민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는데도 그는 사업구상 단계에서부터 서민들의 가계를 염려했다.
정조의 그런 마음씨는 정조 20년 10월 22일 자(1796.11.21) <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비변사) 고위 관계자인 이시수에 대한 업무지시에서
그는 "재물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이라면서 "세금이 적어야만 민생이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물은 국가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소중한 것이므로 세금을 함부로 거두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백성의 재산을 '돌'처럼 생각하지 말고 '금'처럼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정조는 말만 그렇게 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화성 건설과정에서
자신이 그런 군주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위의 <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화성 공사를 3년 만에 종결지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고 국고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신속히 완성하고자 하는 통치자들은 아무래도 서민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조는 3년 만에 화성을 건설하면서도 서민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다.
서민들의 세금으로 공사비용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고를 건드린 것도 아니었다.
정조가 공사비용을 조달한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공사계획을 발표하기 오래 전부터 왕궁 금고(내탕고)에 차근차근 자금을 축적했다.
요즘 말로 하면, 봉급과 판공비를 아껴서 화성 건설비용의 상당부분을 준비했던 것이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대신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맨 것이다. 국고와 달리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내탕고의 자금을 동원해 화성을 건설했으니, '사비'를 털어서 화성을 세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둘째, 그는 자신의 경호부대(금위군)를 축소시켰다. 공사 개시 10년 전부터 금위군을 축소 운영하고
거기서 생기는 여윳돈을 착실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금위군을 축소할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정조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서민들의 돈'을 거두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거두어서 화성 건설비용을 조달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민들의 세금 부담만 덜어준 게 아니었다.
그는 화성 건설과정에서 기존의 요역제도를 대폭 수정했다. 종래의 요역은 서민들의 노동력을
대가 없이 동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성 건설에 동원된 서민들에게 일당을 지급했다.
'백성의 노동력은 공짜'라는 인식이 지배했던 당시로써는 꽤 파격적인 조치였다.
정조가 화성 건설현장에 거중기 같은 첨단 장비를 도입한 데는 비용문제에 대한 고려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세금을 거두지 않는데다가 임금까지 지급했으니,
첨단 장비라도 동원해서 인건비를 줄이고 공사기간을 단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개혁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서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화성 건설 10여 년 전부터 차근차근 '적금'을 붓고
서민들의 노동에 대해 임금까지 지급한 정조의 마음씨. 그런 그를 보면서 우리는 그가 서민 지향적인
개혁군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그가 시도한 정치개혁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런 마음씨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생 왕궁에서만 생활한 사람이 이 정도로 서민을 위할 수 있다면, 서민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해본 사람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서민을 위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앞서 언급했듯이
'서민생활을 경험했느냐' 못지않게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냐'도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고통치자가 될 사람의 겉모습이나 말솜씨보다는 그 내면의 본성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
그런 지혜를 갖춘 국민만이 훌륭한 통치자를 맞이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왕 초상
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착공하여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증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언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수원화성의 방어시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merlon)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복원된 것을 포함해 41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1. 4대 성문: 4개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1-1. 장안문(북문)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그러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1-2. 팔달문(남문)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3. 창룡문(동문)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1-4. 화서문(서문)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2. 수문: 2개
2-1. 북수문(화홍문)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2-2. 남수문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舖)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돌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새로 복원된 남수문
3. 장대(將臺): 2개 & 노대(弩臺): 2개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3-1.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서장대(화성장대)
서노대
3-2. 동장대(연무대) 와 동북노대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서장대가 성의 안과 밖을 조망하면서 적과 아군을 감시하고 지휘하는 지휘소라고 한다면,
동장대는 군사들을 모아놓고 훈련을 하고 집회를 하던 곳이다. 실제로 정조대왕시절 많은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으면 군사들을 조련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연무대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동장대(연무대)
동북노대
4. 공심돈(空心墩): 3개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서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4-1.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
(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공심돈 & 화서문
4-2.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3층구조로 지어진 동북공심돈
원형으로 돌아가면서 위로 올라가게 설계되어 있다.
4-3. 남공심돈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 (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5. 암문(暗門): 5개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5-1. 동암문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 (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5-2. 북암문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 (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5-3. 서암문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암문의 안팎에다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하였다
서암문 입구
서암문 출구 : 서암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옆이 서장대다
5-4. 남암문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현재는 미복원 상태로 있다
5-5. 서남암문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舖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서남암문에는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가 지어져 있다.
바깥쪽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려 놓았다
6. 각루(角樓): 4개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6-1.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 (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
방화수류정(동북각루)과 화홍문(북수문)은 서로 이웃해 있다
6-2. 서북각루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6-3. 동남각루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6-4. 서남각루 (화양루)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 (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7. 봉돈(烽墩): 1개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8. 포루(砲樓): 5개, 대포포루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 5개의 포루가 있다
'화성성역의궤 포루(砲樓)'편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대체로 5좌가 있는데 그 구조는 모두 똑같다.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게 하였다. 지대 위에다 벽돌을 쌓고 집을 지었는데...
높이는 들보와 이어져 있고... 바깥 쪽 지대 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대포 혈석 2개를 놓았다.
좌우 면에도 사이에 3개의 혈석을 놓았다. 벽돌로 쌓은 공간 안에는 평지에서 위로 5척 되는 곳에다
벽에 의지해서 3면에 포판을 두르고 총혈 15개를 내었다. 또 포판을 두른 곳에서 10척쯤 위에는
3간 누판을 깔고 누의 위 3면에는 총안 15개를 뚫어 놓았다. 외면의 총안 위에는 또 전안 넷을
뚫었다. 좌우 면에는 위쪽 가까이 벽돌을 뚫고 판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밖에는 짐승 얼굴을 그리고, 각각 전안을 뚫었다. 문 사이 벽면에도 쌍으로 전안을 뚫어 놓았다."
8-1. 남포루
남포루(南砲樓)는 팔달산 중턱 서남암문 근처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준공되었다.
구조는 동북포루와 거의 동일하다. 여장에는 타구와 전안을 뚫었고, 타구의 안에는 전판문을 달았다.
마루, 지붕 등의 구조는 서포루와 비슷하다. 남포루에는 대포와 혈포가 각 2대, 총안 19개가 설치되어 있다.
8-2. 동포루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垛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8-3. 북동포루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과 북수문 사이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중층이며, 도리는 납도리이고 홑처마의 5량 구조이다.
포루 밖으로는 우진각지붕을 안으로는 박공지붕으로 하였다.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계단을 설치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도로 했다. 그 외는 북서포루와 비슷하다.
8-4. 북서포루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8-5. 서포루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9. 포루(舖樓): 5개... 망포루
포루(舖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목조 건물로 누각을 세운 것이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북포루(北舖樓),
서포루(西舖樓)등이있다.
9-1. 동북포루
동북포루(東北舖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9-2. 동일포루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9-3. 동이포루
동이포루(東二舖樓)는 봉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누각 밑에는 총안을 뚫어 놓았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3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납도리를 썼으며, 지붕틀은 5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하층의 총안 등은 동북포루와 동일하다.
9-4. 북포루
북포루(北舖樓)는 서북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5년 (정조 19년) 2월 20일에
준공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중층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처마는 홑처마에 민오리집이며, 상층에는 주위에 전판문을 달았다.
9-5. 서포루
서포루(西舖樓)는 서장대 남쪽 서암문과 서삼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18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내면은 나무사다리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10. 치(稚): 9개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남치(南稚), 북동치, 용도이치 등 9개의 치가 있다.
10-1. 동일치(東一稚)
10-2. 동이치(東二稚)
10-3. 동삼치(東三稚)
10-4. 서일치(西一稚)
10-5. 서이치(西二稚)
10-6. 서삼치(西三稚)
10-7. 남치(南稚)
10-8. 북동치
10-9. 용도이치
11. 적대(敵臺): 4개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와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적대 위의 홍이포
11-1.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北西敵臺)는 장안문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11-2.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는 현안과 총안을 두어 성문과 옹성을 방어하던 곳이다.
11-3. 남서적대(南西敵臺)
남서적대(南西敵臺)는 팔달문 옆 팔달산쪽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11-4. 남동적대(南東敵臺)
남동적대(南東敵臺)는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12. 기타 시설
12-1. 여민각
여민각(與民閣)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정조의 정치철학을 상징하는 여민각
12-2. 성신사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12-3.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첫댓글 자주 가 보는 곳이지만
사진으로 보니 더욱 튼실 하게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두고 두고 잘 익히겠습니다
자주 가시는군요
저는 가본지가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