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계율은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명령보다는 권고 성격이다. 즉 Commandments 아니라 Precepts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요구가 아니라 수행자의 수칙이다. 그것은 부처님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를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학교의 학칙과도 같고 국가의 법령과도 같다. 그러므로 이 계율은 절대적이지 않다. 언제든 수행자의 조건과 환경에 따라 바뀌어질 수가 있기에 그렇다.
어떤 약이든지 약은 병을 고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약을 남용하거나 그 약에 중독되면 그 약의 본래 효능은 없어진다. 또한 약은 계속해서 신약이 나온다. 그러면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신약을 복용해야지 과거부터 있어온 약이라고 해서 그것만을 고수해 복용할 수는 없다.
불교의 계율이 그렇다. 계율은 환자에게 약과도 같아서 수행자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계율을 무조건 신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의 계율이 완전 목적인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를 소나 말처럼 계율의 말뚝에 꽁꽁 묶어 꼼짝 못하도록 하려 한다.
부처님은 2천 5백년 전에 이미 불교의 주체를 부처가 아닌 수행자로 두셨다. 그만큼 신권이 아닌 인권에 혁신적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도 계율 자체를 부처의 명령이나 요구로 생각한다.
세월은 자동차를 우선시하던 시대로부터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시대로 바뀌어 육교 대신 횡단보도를 설치하였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하던 자전거 노래도 자전거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시대를 맞아 사라졌다.
그런데 불교의 계율은 아직까지 그때의 신설목적과 사용목적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그 계율이 도리어 수행자를 옥죄는 시빗거리가 되어 버렸다.
부처님 당시 때의 계목으로 된 수계를 받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데 공연히 지키지도 못할 그때의 계율을 받아서 거기에 깊이 갇혀진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첫댓글석가모니부처님을 죽이려한 제바달다가 제창한 계율은 놀랍습니다. 1. 죽을 때까지 떨어진 옷만 입는다. 2. 죽을 때까지 걸식만 한다. 3. 죽을 때까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4. 죽을 때까지 길바닥에서만 산다. 5. 죽을 때까지 육식을 하지 않는다. 중도를 지향하는 수행자와 금욕주의자, 고행주의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첫댓글 석가모니부처님을 죽이려한 제바달다가 제창한 계율은 놀랍습니다.
1. 죽을 때까지 떨어진 옷만 입는다.
2. 죽을 때까지 걸식만 한다.
3. 죽을 때까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4. 죽을 때까지 길바닥에서만 산다.
5. 죽을 때까지 육식을 하지 않는다.
중도를 지향하는 수행자와 금욕주의자, 고행주의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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