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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한참 준비하느라 정신없지. 사내에서도 죽상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나 봐."
"그렇겠지."
KM에서 준비하는 런웨이는 이제 한창 중반에 접해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BH에서 선물한 웨딩드레스가 크게 떠오르면서 화제의 주목이 되었고 그 일로 인해 많은 곳들에서 협찬 요청이 끊이지 않아 일이 2배로 늘어났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강산.
동시에 슬슬 KM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기로 했던 색다른 웨딩드레스. KM과 BH가 처음으로 같이 선보이는 합작.
틀을 잡는데 오래걸리나 싶었던 웨딩드레스는 점차 틀을 갖추고 하나 둘 씩 맞춰가더니 결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색다른 드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걸 본 순간 지혁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웨딩드레스가, BH를 변화시켜준 드레스가 될 거라고. 정확히는 웨딩드레스로 인해 얻은 많은 것들이겠지만.
웨딩 드레스에 놓여져 있는 수와 그 외의 자잘자잘한 레이스들을 마무리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마 느려도 2주일 내로는 완성이 돼 KM으로 보낼 수 있겠지.
"스카웃 제의는 언제쯤 할 생각이야?"
"글쎄. 우선 KM에 런웨이를 위해서 웨딩드레스를 보내면 담당은 다해씨로 해달라고 할 거야."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해 함께 만들어간만큼 다해는 웨딩드레스를 무척이나 소중히 대했다.
만든 과정부터 완성되어지는 순간까지 함께하게 된 그녀가, KM에서 맡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디자인 팀의 팀원들도 똑같았다.
자신들이 며칠 밤을 세워 만든 웨딩드레스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 관리되어져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함께 만들어간 다해에게 믿고 맡기는 게 더 좋다는 걸 아는 것이다.
"런웨이가 끝나면 웨딩드레스를 돌려받을거고, 그때 제안할까 해. 시기상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조금 늦는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런웨이 도중에 데려올 순 없으니."
"그럼 그런걸로 하고, 런웨이는 얼마나 진행 되지?"
"KM은 1년으로 보고 있어."
"1년이라…."
길긴 했다. 다해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기 위해 1년을 기다리기에는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데려올 수는 없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강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1년이란 시간동안 큰 프로젝트 하나를 끝마치고 나면 다해를 스카웃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지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고, 그 뒤에 있는 옷걸이에서 외투를 챙겨입었다.
"뭐야, 어디 가?"
"집."
"벌써?"
아직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퇴근하겠다는 지혁을 어이없게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에 출근한 너도 대단하다. 나는 안 나올 줄 알았어 네가."
"누리가 억지로 내보내더라고."
"역시, 앞으로는 사모님한테 잘 보여야겠다."
"나 간다."
"좋은 시간 보내라."
강산은 히죽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속에 담긴 엉큼한 뜻을 눈치챈 지혁은 그를 째려보다 쿨하게 사장실을 나섰다.
여느때와 같이, 누리에게 전화를 걸며 차를 타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하는데….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듣고싶은 누리의 목소리는 커녕 웬 듣도보도 못한 여자의 목소리에 미간을 확 찌푸린 지혁은 빠르게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출근 전에 5시까지 집에 온다고 했다. 그 얘기에 누리는 시간에 맞춰 준비해놓는다고 답했고.
무엇보다 퇴근하면서 꼭 자신에게 전화해달라는 그녀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그녀가 전화를 안 받을 이유가 뭐가 있지?
머리로는 생각을 굴리며 손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누리에게로 몇 번이나 전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운전까지 해내는 지혁이 어찌보면 위험하게, 또 어떻게 보면 대단하게 보였다.
졸이는 마음으로 겨우겨우 집에 도착한 지혁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누리의 이름을 불렀다.
"누리야."
거실에 불이 커져있으니 집에 있는 것 같긴 한데, 지혁은 집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누리를 찾았지만 누리는 어느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안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제자리에서 멈춰섰다.
침대도 아닌 바닥에서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누리가 눈에 가득 담겼다.
이성이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냉큼 그녀에게 다가가 누리의 상태를 살핀 그는 그녀가 잠이 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진 줄 알고 식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면서도 괘씸해서 놀려주고 싶다는 심술이 고개를 내밀었다.
"으음…."
지혁이 그녀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다리에 놓아 무릎베개를 해주자 움찔거리며 잠꼬대를 하던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잠기운이 가득 묻어있었다.
몇 번을 깜빡이던 눈이 곧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놀랐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 어? 지혁 씨? 왜 여기…, 그보다 지금 몇 시예요?"
"5시 조금 넘었어."
"…미안해요. 언제왔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은 지혁은 일부로 표정을 굳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바닥에서 이러고 있어."
"…어, 그게…."
머리를 긁적이던 누리는 결국 헤헤, 웃으며 말했다.
"침대에서 잠깐 낮잠을 자려고 했는데 너무 덥길래…. 바닥이 너무 시원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잠깐만 있는 다는게 그냥 잠들었나봐요."
"집 들어와서 너 쓰러진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웃던 표정이 단번에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미안하다는 듯 그의 팔을 쓸어내렸다.
"전화도 안 받아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전화 했었어요?"
"응. 엄청 많이."
"진동이라 못 들었나봐요, 어떡해. 미안해요."
토끼였다면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며 뱅글뱅글 돌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혁은 그녀를 더 놀려줄 수가 없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으니까.
"지혁 씨?"
"장난이야."
"…! 아, 정말. 못됐어."
"그래도 걱정한 건 진짜고."
누리는 그의 나직한 말에 베시시 웃으며 지혁의 품에 안겨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그는 얼떨떨하게 있으면서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얼른 준비할게요. 옷이랑 머리만 하면 다 끝나."
미리 메이크업을 하고 잠들었던 누리.
지혁이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말을 건넬 새도 없이 옷장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꺼내더니 방에 달린 쪽방으로 냅다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품이 비어버린 지혁은, 그 시간이 꽤나 허전하게 느껴져서 서늘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리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나오는 순간, 그 모든 시간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병아리인 것 마냥 키도 작은 사람이 노란색 옷을 입으니 귀여워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 마디로, 지혁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신나하는 모습으로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며 고데기를 예열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 그는 경악했다.
뒷목선이 가느다랗게 보이는 것도 모자라 날개뼈가 흘깃 보일듯 말듯하는 곳까지 파여있었다.
누군가가 잡아당기면 큰일이라도 날 듯한 원피스였다.
"안 돼."
"응?"
"갈아입어 그거."
"왜요? 이상해요?"
"… …."
지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긴 커녕 너무 잘 어울려서 이성의 끈을 놓을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분명 예쁘게 보일리는 없다는 걸 지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리가 저 옷을 입고 나가는 건 결사반대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러면?"
"그 옷 입고 거울 봤어?"
"그럼요. 안에서 확인하고 나왔는데."
"아무것도 안 느껴져? 뭐, 깨달은 거나 느낀 거 없나?"
"…그런 게 있어야 해요?"
고개를 갸웃하던 누리는 오늘따라 이상한 말을 하는 지혁을 쳐다보며 다 예열이 된 듯한 고데기 손잡이를 쥐었다.
"너, 그 옷, 위험해."
"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이제는 지혁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머리를 고데기로 베베 꼬는 누리에게 다가선 지혁은 훤히 드러난 그녀의 뒷 목과 날개뼈 근처까지 입을 촉, 맞췄다.
"으…!"
맨살에 갑작스럽게 닿아오는 감촉에 놀라 고데기를 놓칠 뻔 하였으나, 언제부터였는지 지혁의 손은 누리의 손 위로 고데기를 쥐고 있었다.
덕분에 화상 걱정 없이 맨살에 닿는 그의 입술의 감촉만 잔뜩 느껴야만 했다.
"지혁 씨…!"
"내가 위험하다고 했지."
어깨 선에서 입술을 뭉개고 말하는 탓에 발음이 조금 망가졌지만 누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건 그냥, 읏. 지혁 씨가…!"
"내 눈에만 네가 예쁜 줄 알아? 누구 환장하게 만들려고 이런 옷을 입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지혁 씨한테만 예쁘지 그럼 또 누구한테 예뻐?"
어이가 없다는 듯 터져나오는 항변에 지혁은 그녀를 의자 위에서 돌려 앉혔다.
눈을 맞추자 잔잔하던 그의 눈빛은 커녕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을 들게하는 눈동자가 누리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너는 나한테만 예뻐야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 한테까지 예쁘게 보이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는 지혁에게 허허, 웃으며 누리는 다시금 돌아앉아 고데기를 시작했다.
기어코, 누리는 모든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돌돌 말고 나서야 만족했다는 듯이 고데기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혁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어디 한 번 그 옷 입고 나가봐, 라는 눈빛으로 무시무시하게 누리를 쳐다보았다.
그 뜨거운 눈빛을 일부로 무시하며 베시시 웃은 누리는 냉큼 챙겨놓았던 작은 크로스백을 챙겨들고 지혁의 팔을 톡톡 쳤다.
"가요."
"정말 그 옷 입고 나갈거야?"
지혁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누리에게 그 모습의 보이지 않을리 없었지만 누리는 모른 척 하며 백치미 넘치게 웃었다.
빨리 가자고 보채는 아이처럼 그의 팔짱을 기어코 풀게 만들어 팔을 잡고 낑낑 거리며 그의 발을 움직이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혁은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서 누리를 쳐다보았다.
기어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가야겠다는 그녀의 의지에 한숨을 쉰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옷장으로 다가갔다.
"지혁 씨?"
"그 상태로는 불안하니까."
그는 옷장을 몇 번 뒤적거리더니 옷걸이에 걸려있는 얇은 코트를 꺼냈다.
어떻게 해서든 옷을 가리려고 애를 쓰는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남들이 보면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웃음이었으나 누리는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사랑스러웠다.
아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코트를 들고 그녀가 팔을 끼워넣기를 기다리던 지혁은, 대뜸 자신의 팔을 잡고 까치발을 들어 키스해오는 기습에 놀라 코트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아 깊게, 누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키스를 했다.
그 키스에서 묻어나오는 지혁의 욕심, 그리고 열기가 느껴져 누리는 더더욱 그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밀착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더 붙어있고 싶고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행동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에 불이 붙은 지혁은 결국 누리를 번쩍 안아들었다.
바닥에 버려진 코트를 밟고 침대로 직행한 그는 어느덧 누리의 위를 점령해 뜨겁게 타오르는 눈길로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러번 그와 잠자리를 가졌지만 오늘만큼 그의 감정이 드러나는 날은 없었다.
눈에서부터 꿀이 흘러나오다 못해 하트가 넘쳐나오는 것만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그의 눈빛은 농밀하면서도 뜨거웠고, 또 따뜻하면서도 애정이 섞여있었다.
"나가지 말자."
"… …."
"적어도 난 지금 못 나가. 해결하기 전까지."
"뭐, 뭘 해결해요?"
"네가 불 붙여 놓은 거."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달아올랐기 때문인지, 연약한 살 속으로 맞닿은 그의 온기가 누리의 마음을 더 애타게 만들었다.
사랑해, 사랑해.
닿고 싶고 닿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이 마음. 당신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좋아서 정말 미쳐버릴 거 같은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전할 방법이 없어서, 누리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손등 키스였으나 그 짧고도 담백한 키스에서 누리의 진심을 느낀 지혁은 숨을 들이켰다.
진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애정이 마음속으로 치고 들어와 그를 뜨겁게 만들었다. 온몸이 불탈 것 같은 감정에 휩쓸렸다.
좋아서 미칠 거 같아. 사랑스러워서, 네가 너무 귀여워서 어떻게 되어버릴 거 같아.
지혁은 손등 키스에 대한 답변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부디,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
*
"불러낸 이유가 뭐에요?"
"누리 씨. 제가 이혼하라고 했던 제의에 정말 깜찍한 방법으로 대응했던데."
하나를 만나 카페에 앉아있던 누리는 피식 웃었다. 깜찍한 방법은 곧 가짜 이혼 행세를 한 것을 얘기하는 걸테지.
이 사람을 질투했었던 지난 시간들이 아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하나가 무섭지도 그렇다고 질투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 지혁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될 수 없는사람.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될 지도.
"그렇게 됐네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요."
"그 사람, 그 사람 하나 포기하는 게 어려워요?"
"제가 물을게요. 하나 씨, 그 사람 포기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제가 먼저 물었어요!"
"그럼 감히 대답하건데 네. 죽을 지언정 그 사람 손 놓을 생각 없습니다."
"하."
하나는 기가막히다는 듯 웃었다. 입술 끝에 나쁜 말들이 맺혀져 나오려 했지만 애써 이성을 잡은 하나는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누리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BH가 어떻게 되어도 좋나보죠?"
"저번부터 자꾸 BH에게 협박하는 것 같은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셨나봐요."
"아버지께 못 들으셨어요? 이미 KM과 BH는 계약 마쳤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역시 진행되어진지 오래고요."
뒷북을 왜 치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누리에게 하나는 냅다 손을 내뻗었다.
짜악-
거세게 울리는 소리에, 그리고 뺨이 화끈 거리는 감각에 놀란 누리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때리기까지 할까 싶었다만 정말 때리기까지 하는 하나를 보며 기가찼다.
자기가 지혁씨의 뭐였다고 눈물까지 흘리고 나를 이렇게 만들지? 하는 생각이 솟구쳤다.
대학생 때 사귀던 사이도, 그렇다고 교류가 오가던 사이도 아니었다고 들었다. 썸은 커녕 연락처도 모르고 얼굴과 이름만 간신히 아는 사이라고.
그랬으면서 왜 갑자기 지혁 씨한테 집착하고 뭐가 있는 것처럼 굴지?
결국 참아왔던 분노와 억울함, 그 외의 감정들이 폭발하면서 누리는 테이블 위에 있던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그녀에게 뿌렸다.
"꺄악!"
"흰 옷에 참 죄송하네요. 손이 미끄러져서."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손바닥.
짜악.
"이건 날 때린 것에 대한 보답."
하나는 황당하고도 허탈한 얼굴로 누리를 노려보았다.
지혁과 누리가 다시 한 집에 살며 이혼은 세간에 떠돌던 찌라시라는 기사를 본지 오래되었다.
그랬음에도 이렇게 늦게 그들을 찾아온 것은, 갈라놓을 수 없었기에 포기하려고 했었다.
한 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게 만든 사람을, 대학 시절을 다 바쳐 한 사람만 봤던 그 사람을, 그 사람에게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사소한 말들이 전부 의미있는 말이 되어 깊숙이 박히게 만들었던 사람을.
나는 어떻게 잊지?
그래서 충동적으로 누리를 불러내어 만났다. 오로지 감정에만 충실한 만남이었고, 그 만남 속에서 남은 건 결국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만해요 이제. 이럴 수록 힘든 건 당신이니까."
"지혁 오빠를…."
"그 오빠 호칭도 매우 불쾌하니까 관둬줬으면 좋겠고요.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 하면, 지혁 씨의 와이프 된 사람으로서 가만 지켜볼 수가 없네요 이제."
"… …."
하나는 비참함에 고개를 떨궜다.
가질 수 없었던 그 사람. 나에게는 너무나도 멀고, 멀었던 그 사람. 결국 지금까지도, 여전히 멀어서 이제는 돌이킬 수조차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그 관계를 만들어버린 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기에 하나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한 번 만 더, 우리 앞에 나타나면 그땐 이걸로 안 끝나요."
"… …."
"기억해요. 우린, 받은 만큼 돌려줍니다."
누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페를 나왔다. 하나에게 맞은 볼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의 화끈거림이었다.
이 상태로 집에 들어가면 혼나겠지.
모처럼의 휴일, 지혁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 사이에 몰래 빠져나온 누리. 물론 탁자 위에 외출한다는 메모지를 붙여놓고 나오긴 했지만….
그의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울리는 전화.
"여보세요?"
-…어디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이제 막 일어난 건지 여전히 비몽사몽한 정신인 게 느껴졌다.
그런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감출 수가 없었다.
"일어났어요?"
-…응…아직.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금 당장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선 부은 볼부터 어떻게든 가라앉힌 뒤에 가는게….
"조금 더 자요."
-너는?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요. 잠깐 엄마 좀 뵙고."
-장모님 뵈는 거면 나도 같이 가지….
이미 그럴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오로지 잠기운만이 가득한 상태에서 얘기를 하니 설득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누리는 차마 깔깔 웃지는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 귀여워. 귀여워. 어떡해!
혼자서만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통화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새침하기만 했다.
"뭐, 시간 보고 빨리 들어갈게요."
-빨리 와…. 추워.
"이불 잘 덮고, 보일러 더 빵빵하게 틀고 자요."
-그거 말고. 너만 있으면 되는데.
웅얼거리며 다시 잠에 빠져드는 목소리에 누리는 한참동안 대답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고르게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에 실실 웃으며 조용히 잘자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끊었다.
귀여워서라도 빨리 그를 보러 가야겠다.
한없이 길을 거닐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본가였다. 우선 집에서 볼 좀 식힌 뒤에 지혁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누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 얼굴보다 지혁이 더 보고싶다 하면 너무 불효녀일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
*
"자네도 몰랐던 겐가?"
"…지금 알았습니다."
본가로 들어온 누리는, 갑작스러운 방문에 부모님을 놀라게 하고 빵빵하게 부은 볼을 보임으로서 두 번 심장을 쥐락펴락했다.
덕분에 지혁과 싸운 줄 알았던 희선은 누리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지혁에게 전화했고, 결국 그녀의 상태를 알게 된 지혁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본가로 넘어왔다.
삼자 대면을 하듯이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앉은 가족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뭘 이런거까지 말하고 그래요…."
자신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는 걸 알기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누리는 푹, 바닥만 쳐다보았다.
무슨 별일이라고….
"고개 들어봐."
"…안 아파요."
"그건 안 물어봤어."
오늘따라 유독 날이 서있는 듯한 반응에 누리는 순순히 고개를 들어 하나에게 맞은 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다행히 그가 오는 동안 붓기를 가라앉혀 많이 좋아진 상태였지만 맞으면서 하나의 손톱에 긁혔는지 아주 작은 생채기가 나있었다.
그걸 본 지혁이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미세하게 난 상처이기에 전혀 아프지 않았던 누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안 아파요, 정말로."
"…왜 아까 얘기 안 했어?"
"음, 너무 단잠을 자고 있길래."
"언제 얘기하려고 했는데?"
"… …."
사실 말할 생각이 없었던 누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이제는 버릇이 된 웃음. 자신이 불리할 때 더 활짝 웃는 누리를 알게 된 지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니, 대체 그 집 딸내미는 왜 남의 귀한 집 딸 볼을 이렇게 만들어?!"
그녀의 볼을 보며 흥분한 아버지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진정하지 못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내가 더 심하게 때렸다니까요. 아메리카노도 들이붓고 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리가 못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는 한없이 자식의 편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들에게는 누리의 대응이 너무나도 미미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키워온 딸인데, 어떻게 행복하게 된 딸인데, 어떻게 얻게 된 귀한 아내인데.
누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윤수와 희선, 지혁은 그 뒤로 주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만남의 주 목적은 KM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을까 하는 사업적인 이야기였지만 실상은 하나를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논의였다.
그리고 그 끝에 나온 결과는 결국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누리에게 들켜 혼쭐을 나야만 했다.
첫댓글 지혁과 누리의 지독하도록 껌딱지같은 사랑이 너무도 절절넘쳐나네요 그사랑 오래오래 아무시련없이 지속되었으면 좋겟어요^^~
잘보고가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