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우리 역사에서 변절자로 낙인 찍혀 있다. 그러나 신숙주는 계유정난처럼 급변시대가 아니고 세종 때 같이 태평성대였다면 뛰어난 학자와 어진정치가로 황희정승 못지 않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신숙주는 계유정난이라는 희대의 쿠데타에서 수양 편에 섰다. 수양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할 때도 수양 편에 있었다. 수양이 세조가 되었을 때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신숙주와 동문수학을 한 성삼문, 박팽년등이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켰을 때도 신숙주는 세조 최고측근이었다.
이런 신숙주였으니 단종복위사건 실패로 세조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한 성삼문과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 하면 더 할수록 반대로 신숙주는 변절자로 명성이 높아졌다.
특히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선사대부들이 교조주의적 성리학에 빠져 명분, 의리, 절개를 추구 할수록 신숙주의 역사적변절자 불명예는 더 깊어졌다.
수양이 왕이 되고 난 뒤 신숙주는 항상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다른 벼슬아치와는 달리 탐욕을 보이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한 신숙주는 집안 종에게까지 잘 대해주었으며 부하직원들도 공평하게 썼다는 칭송을 들었다
신숙주에 대한 역사전문가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신숙주는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벼슬아치로서 결함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나약할지언정 포악하지 않았다. 현실적이었을망정 술수를 부리지는 않았다" 는 것이다.
신숙주의 역사적 치명적 결함은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수양 편에 섰다는 것이다.
명분과 의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신숙주결함은 확대재생산되어 수백년 동안 조선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면서 윤색 되어 갔다.
첫 번째가 사람들은 잘 쉬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다. 여기의 절묘하게 신숙주의 이름을 겹치게 하여 숙주나물의 숙주는 지금까지도 신숙주의 이름을 뜻하게 되어버렸다.
두 번째는 신숙주부인 자결이야기이다.
신숙주가 사육신 옥사가 있던 날 집으로 돌아 오자 신숙주부인이 신숙주에게 말했다.
"영감께서 성 학사와 형제같이 지냈는데 오늘 성 학사의 옥사가 있어서 영감께서도 그들과 함께 죽었을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 말에 신숙주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얼마 후 신숙주 부인이 자결했다.
이 이야기는 그의 변절을 미워했던 조선사대부 성리학자들이 날조한 것이다.
신숙주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있기 전 6개월 전에 이미 죽었다.
백성들은 그런 사회분위기에서 날조 된 이야기를 사실로 알고 신숙주를 수백년동안 씹어왔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까지 전해져 온다.
박종화 단편 소설 <목 메는 여인 > 에서 신숙주부인이 남편에게 침 뱉고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최근까지도 공공연하게 TV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대다수도 신숙주부인 자결에 대해서 진실로 믿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숙주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 놓는 일이 쉽지 않다.
잘못하면 신숙주에 대한 변명이 역사적으로 모든 변절자에 대한 변명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한말 나라 팔아 먹은 매국오적과 일제시대 친일파들에게 까지도 변명의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신숙주에 대한 변명이 더 어렵다.
그래도 수백년동안 대표적인 변절자 오명의 신숙주에 대해 정말 객관적으로 변명해 보고자 한다.
한 인간의 평가는 전체를 보아야한다. 어떤 한 국면만 보아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없다.
절의란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한 사회를 위한 것일 때 애국자도 되고 위인도 된다. 그러나 한 개인을 위한 것일 때는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도 있다.
장세동의 전두환에 대한 절의는 어떻게 봐야 할까?
신숙주가 살았던 시대는 왕조시대였다. 그 시대는 왕족혈통을 가진 자들끼리 왕위쟁탈전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시대라고 해도 단종과 많은 신하들을 죽인 세조가 잘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밑에서 신하 노릇을 했다는 것만으로 신숙주를 수백년동안 변절자 대명사로 만들어 놓은 것은 문제가 있다.
성삼문과 사육신이 의리와 절개를 위해 목숨을 바쳐 역사에 이름을 남긴만큼 신숙주는 목숨을 부지하여 편안하게 산 대신에 명예를 잃는다 해도 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수백년동안 숙주나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씹힐만 한 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최악의 쿠데타는 인조반정이다.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아무런 힘도 없고 대책도 없이 명에 대한 의리만 찾는 똥고집을 부리다가 조선백성 수 십만이 죽고 수십만이 청으로 인질로 끌려가게 했다. 또 수 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약탈 당한다. 게다가 왕이 청황제 앞에서 머리를 아홉번이나 얼음 땅에 박고 피를 흘리며 잘못을 빈다. 이처럼 그들은 조선자존심을 짓이겨 버린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대대참사를 일으켰다.
그런 그들이 인조는 국난을 극복했다고 '조'가 붙는 왕이 되어 있고 서인세력들은 자자손손 호위호식하면서 그들 지위를 유지했다.
인조와 서인들은 아무런 반성도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국난을 극복했다고 추앙을 받았지 그 어떤 비난도 받지 않았다.
세조와 신숙주는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국기를 흔들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수양과 신숙주는 수양이 왕이 되고나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쳤고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치적들을 남긴다.
윗 글을 보고 역사적으로 더 지탄을 받을 세력이 누구인 지 여러분 판단에 맡긴다.
신숙주는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평생동안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모두 6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수많은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신숙주가 변절자 소리를 듣을지언정 우리역사에 큰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신숙주는 비난받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신숙주가 수양 편에 선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 갔을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뛰어난 학자요, 세종 ·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기에 그 댓가도 아주 컸다.
만약 그가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쳐도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역사에 업적이나 남길 수 있었을까?
생육신 한 사람인 김시습은 요즘 말하면 저항시 비슷한 시로 농민의 고통을 담는 사회시를 썼다.
그러나 신숙주는 자기성품과 비슷한 순수시에 열중했다. 그는 남원 광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뜬 구름 같은 부귀 공명 따질 것이 못되니
임천(林泉)의 흥취 아직 버리지 못하겠노라
인생에 천명 있음 이제야 믿겠노니
공명은 물리치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워"
(이 시에 나오는 '임천의 흥취'는
이이의 고산구곡가에 나오는 말로
수풀속의 샘은 깊을수록 흥취가 있다는 말로
선비는 깊고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홀로 수양해야
더 흥취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숙주의 문사의 기질과 인생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역사적 인물평가에서 신숙주는 도통 사람을 죽이거나 권모술수를 부리는 인물이 못 되었다고 한다.
아마 그가 사육신에 끼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런 성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성찰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숙주 그런 모습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김시습은 그가 어릴 적부터 친분을 나눈 후배인데 김시습은 한양에 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한양에 와 머물자, 그 집 주인에게 “김시습에게 술을 많이 먹이라”고 당부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떨어지자 가마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시습이 술이 깨어 신숙주 집인 것을 알고 나가려 하자, 손을 잡고 “어째서 말 한마디 않는가?” 하고 안타까워했다. 김시습이 소매를 뿌리치고 말없이 가자, 그는 조용하게 김시습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신숙주는 말년에는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는 결백한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다.
그렇게 한가한 삶을 누리며 문학에 정진하겠다는 뜻을 자주 표방했다. 그래서 그의 아호를 보한재(保閑齋, 한가롭게 글 읽는 곳)라고 지었다.
신숙주와 같은 경우는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자주 보고 우리도 가끔 겪는다.
신숙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운 감자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462A3857B78D9A2C)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