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소 강과 캔자스 중앙으로 쭉 뻗은 땅에 살던 샤이엔족에게 백인들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초였음.
1858년 인근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금을 캐려는 백인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음.
샤이엔족을 비롯한 지역 원주민들은 이런 변화에 처음에는 환영을 내비췄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지역이 원주민들의 소유지라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너무 오래 머물지 말라는 걱정을 보이기도 했음.
그러나 원주민들 땅 뺏는게 당시 백인들의 특기였으므로 점점 언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음.
당시 인디언 보호관은 이런 기억을 남김.
"백인 집단을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고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다. 인디언들은 수가 우세하고 호전적이지만 이들이 사는 영역은 아주 좁은 원으로 압축되었다. 식량도 없는 와중에 몰려드는 이민자 행렬 때문에 그 좁은 영토마저 양분되었다. 굶주림과 절망이 가득하다.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전쟁이 터질 분위기이다."
결국 연방 정부는 원주민 대표들을 모아 협의 끝에 언주민들이 사냥터 대부분을 양도하는 대가로 매년 만 오천달러의 돈과 1인당 40에에커씩의 농지를 준다고 합의를 보았음.
이렇게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갈등이 진정되나 싶었지만 미국 정부가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다시 문제가 ㅂㄹ거지기 시작함.
그리고 이 무렵에 중요한 인물이 이 지역의 지역군 대령으로 발령이 나서 오게 되는데 이 사람이 존 치빙턴. 남북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었음.
이 사람의 이력은 매우 독특한데 이 사람은 직업이 일단 목사였음.
미주리에서 목사 생활을 할 때 성질 사나운 신도들을 잠재우기 위해 설교단 위에 성경과 6연발 리볼버를 두 자루 놓고 설교하는 것으로 유우명했음.
알 카포네가 이런 말을 했다면 치빙턴은 이런 말을 함.
이렇게 얻은 별명이 전투목사였음.
존나 찰떡같네.
하여튼 덴버에서 목회를 하던 도중 군대 측에서 군목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치빙턴은 이 제의를 거절한 뒤 '전투' 장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음.
하여튼 그가 이 지역에 부임했을때 원주민과 백인의 갈등은 심해지는 중이었음.
굶던 원주민들은 백인의 가축을 습격하여 잡아먹고는 했음.
그러던 1863년, 샤이엔족 수천명이 백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는 소문이 돌았음.
이 일은 사실이 아니었음.
![](https://t1.daumcdn.net/cfile/cafe/265D5F4B58F251CA26)
꼴값 오졌다 진짜.
결국 치빙턴의 군대와 원주민 사이에 소규모 접전이 몇 번 발생했음.
치빙턴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음.
"인디언은 무엇에도 복종하지 못하고 어떤 조약도 이해 못하는 빡머가리임. 우리가 편하게 살려면 인디언들을 다 죽여버려야 함."
결국 샤이엔족은 외딴 곳에 사는 백인들에게 공격을 가해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고
백인 측도 원주민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아묻따 죽여버리곤 했음.
결국 1864년 9월 원주민 추장들이 평화 협정을 요구하고 나섰음.
자신들은 싸움에 지쳤으니 다른 백인들의 공격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군대가 도와줬으면 한다는 입장이었음.
군 측에서는 동계 야영지로 돌아가면 필요할 때 보호를 주겠다고 답을 했음.
그렇게 양측은 평화롭게 협정을 마치고 서로 갈 길을 갔음.
하지만 치빙턴은 이후로도 원주민을 공격할 구실만 찾아댔는데
그는 원주민의 전쟁 원칙을 알고 있었는데 여름에는 전쟁, 겨울에는 휴전이 그 원칙이었음.
봄에 원주민들이 통수를 칠 것이라고 굳게 믿은 그는 연방 정부에게 다기 복무 연대를 조직할 수 있는 허가와 자금을 얻어냈음.
이 연대의 이름은 제 3연대. 유지기간이 100일에 불과한 덴버 지역의 유명한 게으름뱅이들과 떨거지가 모인 군대였음.
그러나 어차피 치빙턴에게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음.
1864년 11월, 치빙턴과 제 3연대는 원정을 떠남.
행군 중 야영지에서 치빙턴이 한 말이 매우 끔찍한데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군인들이 인디언 머리 가죽을 얼마나 벗길 것인가에 대해 떠들어대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짐.
"음. 나는 피로 질퍽한 땅을 헤치며 걷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5984B58F255D223)
목사출신 맞음????
당연하게도 모든 군인이 치빙턴의 미친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음.
몇몇 장교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공격은 9월에 체결된 협약을 깨는 것이고 결국은 살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항의하자 치빙턴은 제목과 같이 말했음.
어그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나도...ㅎ
11월 28일 저녁 8시경. 그디어 치빙턴과 제 3연대는 샤이엔족 야영지와 가까운 곳에 도착함.
그들은 새벽이 올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고
원주민들은 협정을 믿고 보초도 서지 않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음.
새벽이 되자 치빙턴은 샤이엔족의 말 떼를 풀어버리라고 지시했음.
말을 잘 다루는 원주민 기병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음.
말떼를 모두 쫓아낸 그들은 총을 발포하면서 원주민의 거주지로 향했음.
치빙턴은 "살해당한 백인 여성과 아이들을 기억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뒤늦게 뛰쳐나온 원주민들이 전선을 형성했지만 역부족이었음.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사냥철이라 거주지에 남은 것은 대부분 비전투원인 여성과 아이들이었음.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AB34C58F257DD2F)
샤이엔족 추장인 화이트 엔델롭은 자신들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장 한복판에 걸어들어가 맨몸으로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음.
그러나 적들은 그를 쏘았고, 그의 시체를 잘라 훼손하기까지 함.
원주민들은 항복의 의미인 백기를 천막 위에 걸었지만 치빙턴측이 읽씹하고 발포를 멈추지 않았음.
결국 원주민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도망갈 길이 아무데도 없었음.
군인들은 후에 이렇게 사건을 기억했음.
"인디언들이 몰살할 때까지 총을 쏘았다. 내 눈 앞에 70구 정도의 시체가 쌓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구덩이 속에 인디언 여자들 30~40명이 숨어 있었다. 여성들은 그 중 여섯살 쯤 된 어린 아이의 손에 백기를 들려 내보냈지만 꼬마는 얼마 못 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 구덩이에 있던 인디언들은 모두 죽었다.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약탈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짓이 행해졌다. 머리 가죽을 벗기고 어린 아이들을 총으로 때려 죽였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모래위를 걷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75야드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아이를 발견하고 총을 빼들었다. 그는 총을 쏘았지만 불발이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내가 저 개자식을 죽여볼게. 맞출 수 있어.' 그러나 총알은 빗나갔다. 그러자 세 번째 병사가 나타나 비슷한 말을 내뱉으며 총을 쏘았다. 아이는 쓰러졌다."
살육은 그날 내내 이어졌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끄탄지 않았음.
치빙턴은 상관에게 자신이 인디언 전사 1000여명이 머물고 있는 마을을 공격해 인디언 500명을 사살했다고 구라를 깠음.
물론 실제 수치는 500은 커녕 150여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음.
치빙턴은 지역 언론사에 자신의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며 '가장 잔혹한 인디언들과의 전투였으며 지금껏 이만한 전투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전투를 벌인 대상은 여자와 아이들이었음.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E845058F25BF22B)
이렇게 덴버로 돌아간 치빙턴은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행진했지만 곧 샌드크리크, 그러니까 원주민 거주지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음.
전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부하 장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음.
결국 치빙턴은 군에서 쫓겨났지만 이미 갈라진 원주민과의 사이는 메울 수 없었음.
1865년 1월 겨울.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시작했음.
그리고 백인들과 원주민의 평화적 공존은 완전히 물 건너가 버림.
첫댓글 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신의 이름으로 지옥 제일 깊은 곳에서 타고있겠지
와 개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