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끼 낀 돌담에 긴 세월 간직한 ‘내륙의 제주도’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마을이라. 상상이 되려나.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왕건이 살던 고려시대(918~1392)다. 서기 950년경 강천 서씨가 첫 살림집을 내고, 고려 중엽 재상을 지낸 홍란이 남양 지방에서 이주해 오면서 부림 홍씨 집성촌이 형성된 땅. 지금의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일대다.
그로부터 1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2003년. 지금도 이곳에는 부림홍씨의 후손들이 남아 문중을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마을의 역사가 500년을 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장구한 역사만큼이나 경이로운 점은 좀처럼 전통성을 잃지 않은 마을의 모습이다.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2.jpg) |
▲ 70년대에 넓혀진 돌담길 위로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길은 넓어졌지만 돌담의 모습은 그대로다. 마을 사람들은 좁은 길만 넓히고 돌담은 원형대로 다시 쌓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1000년 전에도 사람이 살았다는데
대율리는 한밤마을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가졌다. 혹자는 ‘대’는 우리 말로 치자면 ‘크다’ ‘많다’ ‘하나다’라는 뜻이 담긴 ‘한’이라는 글자와 거기서 거기고, ‘율’도 우리 말 소리는 ‘밤’ 이니 그게 그거라고 얘기한다.
이름처럼 한밤마을은 큰 마을이다. 250호가 넘는 대군락이다. 주민 다수가 과수와 밭, 논농사로 생계를 꾸린다.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에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팔공산과 한티재, 시루봉, 파계재 등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좀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인 탓이다. 대구에서 팔공산 한티재를 넘는 팔공산순환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순환도로를 빠져나와 제2의 석굴암이라 불리는 삼존석굴을 지나 1km 남짓 달리자 마을이 펼쳐진다. 아뿔사. 2차선 도로에 늘어선 여관과 식당들이 갈 길을 잃게 한다. 이곳이 옛 정취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한밤마을이 맞나.
서둘러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주머니의 안내멘트가 기다리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가 보이소.”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3.jpg) |
▲ 마을 입구 솔숲에 서 있는 오리 솟대. 요즘도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 ‘대청’이라는 팻말을 따라 들어가는 골목은 차 한 대 지나감직한 넓이였다. 콘크리트 건물을 한 두동 지나자 이내 펼쳐지는 돌담의 행렬. ‘여기가 맞구나’ 안도의 한숨이 이어진다. 돌담장을 점령한 검푸른 이끼들이 먼길 온 손님에게 마을이 품은 기나긴 세월을 단숨에 말해 줘버린다.
돌 틈 사이로 씨앗을 내려 싹을 틔운 이름모를 야생초들. 그렇게 피고 지기를 몇백년이었을까.
마을이 품은 기나긴 세월을 돌담이 말해주다
구불구불 좁게 난 돌담길을 빠져 나오자 시야가 트인다. 대청(도유형문화재 262호)이다. 마을의 중심에 다다른 것이다. 맞배지붕을 쓴 늠름한 대청을 빙 둘러 집과 골목, 돌담이 호위하듯 펼쳐진다.
넓직한 터와 키 낮은 전통가옥들 덕에 대청에서 바라본 하늘은 넓고, 크고, 하나다. 한밤마을의 뜻처럼 말이다.
먼 산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부랴 부랴 부림 홍씨 종가집을 찾아 나섰다. 마을길은 고즈넉했다. 도통 인기척이라고는 없었고 돌담 위에 드리워진 넝쿨들만 바람에 쓸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1년 중 가장바쁜 농번기를 맞은 탓이다.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4.jpg) |
▲ 부림 홍씨 종가집 안채 모습. 차남 홍갑근씨와 그의 아내 김영애씨 내외가 종가집을 지키고 문중일과 마을일을 보고 있다. |
종가집을 지키고 있는 둘째며느리 김영애(58)씨가 이끄는 대로 큼직한 사랑채 옆으로 난 문을 지나 대청마루에 올랐다. 집의 풍채를 칭찬하자, 이 집 나이가 400년이라며 미소를 머금는다.
“처음 시집에 오는데 여기가 제주도인가 했어요. 돌담길이 즐비한거라. 그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돌부리에 걸리고, 다시 걷다 보면돌담에 치이고. 또 밭에 나가니 빙 둘러 온통 돌이예요. 하천이고 논이고 땅만 파면 돌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뒤이어 안채에 들어선 남편 홍갑근(58·대율1리 이장·종가집 차남)씨가 돌담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돌담의 역사라. 오래 된 것은 수백년도 더 됐지. 이 마을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 한창일 때도 돌담만큼은 지켰으니까. 좁은 길만 넓히고 돌담은 원형 그대로 다시 쌓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았어요. 돌담을 내다 팔고 시멘트 담장을 쌓는 인근 마을하고는 달랐죠.”
물론 고치고 싶어하는 주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홍씨는 “문중에서는 다른 마을들이 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보다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것을 보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전한다.
홍갑근씨는 대구에 나가 있는 장손 대신 종가를 지키며 마을일과 문중일을 겸하고 있다. 그에겐 마을이나 문중이나 다르지 않은 하나같은 존재인 듯 싶었다. 10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늙으신 부모를 보필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궂은 일부터 시작한 이장생활이 올해로 18년째다.
그가 자라면서 보고 들어온 것이 ‘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가르침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긴 이야기를 뒤로한 채 다음날을 기약하고 종가를 나섰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골목길로 털틸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60~80대 노인들이지만, 모두들 해뜨기 무섭게 일터로 나가고 어둑해져야 마을로 들어선다. 해가 긴 여름철이면 15시간이 넘는 고단한 노동이다. 돌아오는 그들에게 차마 이런저런 긴 말을 건네기가 안쓰러운 시간이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5.jpg) |
▲ 마을길에서 만난 농가주택. 지난해 오래된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한밤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건물과 마당, 텃밭을 돌담 안에 모두 갖추고 있다. | “처음 시집오는데, 여기가 제주도인가 했지”
다음날 아침. 마을은 어제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김영애씨와 종가를 나서 그물망처럼 짜여진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슬레이트 지붕과 현대적인 농가주택들이 돌담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이곳도 현대화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일까.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목재, 돌, 흙 등 자연에서 가져온 전통재료는 설 곳이 없는 시절이다. 그래도 드문드문 보이는 한옥 지붕이 돌담과 어우러져 운치를 풍긴다. 이 한옥들은 대부분 문중소유의 사당과 정자, 재실, 종가 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었다.
대부분 집은 건물과 마당, 텃밭으로 이뤄져 규모가 있어 보였다. 텃밭에는 콩이며 배추, 오이, 상추, 깨 같은 작물들이 촘촘히 심겨 있다. 지금은 비록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지만,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이 너른 마당에서 가족들의 각종 행사와 놀이, 작업들이 한창이었으리라.
골목 모퉁이나 담장에는 감나무와 산수유, 호두나무들이 왕성한가지를 늘어뜨리고 서서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이따금 기와지붕에 얹힌 호박과 수세미 넝쿨이 눈길을 끈다. 어스름한 저녁이면 기와지붕 위로, 담장 너머로 모락모락 피어올랐을 연기가 새삼 그리워지는 골목길이다.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8.jpg) |
▲ 집에도 수도가 있지만 일부러 빨래터에 나왔다는 박부조(70) 할머니. 할머니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구던 옛 기억이 더 좋다. | 굽이굽이 골목이 끝날 즈음 재미있는 광경을 만났다. 빨래터다. 박분조(70)할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손주의 실내화며 옷가지를 빨고 있다.
“안동 영양에 살다가 여기 이사온 지 20년 넘어 아휴 살기 좋아요. 인심 좋지 경치 좋지, 동네 너르고 농사도 잘 되고. 옛날엔 공동우물이 있어서 같이 모여 빨래하고 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지하수퍼 올려 써. 응? 자녀들은 도시로 나갔어. 그런데 여기 늙은 사람들다 죽고 나면 빈 마을 될 꺼 아니야? 예삿일이 아니야.”
마을 외곽에 난 신작로를 따라 마을 입구 쪽으로 향했다. 신라시대 석불입상(보물 제988호)을 모시고 있는 대율사를 지나자 2차선도로가 나타났다. 도로를 중심으로 우람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서 있다. 성안솔숲이다.
오래된 마을의 나이는 나무가 말해준다고 했던가. 직경이 40cm나 되는 굵은 소나무들이 150여 그루는 됨직하다. 팔공산순환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마을 입구였다.
솔숲 끝즈음에서 돌로 만든 오리솟대(진동단)와 당목나무를 만났다. 70여년 전 대홍수로 마을 사람 68명이 목숨을 잃자 재앙을 막기위해 세운 솟대다. 물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오리의 형상을 바위끝에 조각해 배의 균형의 잡으라는 의미라고.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가 되면 이곳에 모여 동제를 지닌다.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전통공간이 아닐 수 없다.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6.jpg) |
▲ 마을 옆 하천에 자연학습 나온 대율초등학교 6학견 아이들과 선생님. 얼마전 까지만 해도 가재가 살던 청정한 물이었는데, 관광객이 드나들면서 많이 오염됐다. | 돌담 너머로 피어오르던 저녁연기가 그리운 마을
천년 역사에 각종 문화유산이 남아있고 전통가옥과 돌담 등에 옛정취가 그대로 스며있는, 이만한 마을이 또 있을까. 이를 알리듯, 성안 숲 입구에는 전통문화마을이라고 쓰인 돌이 버젓이 서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에 돌아와 확인한 사실은 그것과 달랐다. 그동안 수차례의 공청회를 통해 군청과 일부 주민들에 의해 전통마을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무산된 것이다. 전통마을로 지정된 후 주민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상 없는 행정규제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밤마을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온 계명대학교 낙동강 환경원 연구원 심근정 박사는 “다른 전통마을과는 달리 살아있는 공간이며 마을 전체가 역사 공간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를 들며 한밤마을의 보전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7.jpg) |
▲ 한밤마을에서는 밭이나 논두렁에 쌓인 돌을 쉽게 볼 수 있다. | 민속마을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이나 낙안 읍성마을 등이 박물관식 전시공간이라면, 한밤마을은 아직도 주민들이 지켜야 할 전통문화는 지키면서 현대생활을 하고 있는 살아있는 전통마을이라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마을의 ‘돌담’이 네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자발적 헌금과 기부로 가치있는 자연 및 문화유산을 사들여 영구관리하는 시민운동) 후보지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답사길에 마을을 만나게된 한 대학생이 개발 압력에 밀려 파괴 위험에 처한 이곳을 널리 알리고 지켜내고자 한국네셔널트러스트에 보전을 요청한 것이다.
살아있는 역사공간 많은 한밤마을 보전가치 높아
한 세기 역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옛 정취가 잘 남아있다 해서 들뜬 마음으로 찾아든 마을이다. 굽이굽이 돌담장을 끼고 돌며 담장너머 기와선이 아름다워 몇 번이고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 대학생이 느꼈을 희열이 이심전심 전해져오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을의 경관은 전설같은 옛말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티재를 넘어 연결되는 2차선 도로옆으로 여관과 식당, 상점이 제법 늘어서 마을 경관을 흐린다. 수많은 관광객들은 성안숲 잔디 위에 발자욱을 새기고 간다.
마을주민들이 휴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삶터가 그만큼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밤 주민들에게 마을은 보전의 공간이기 전에 삶터였다. 아무 대책없이 보전만을 내세우는 우리의 문화정책은 속수무책이 아니고 무엇이랴. 10년 뒤, 100년 뒤에도 오늘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속시키는 것이 비단 한밤마을 사람들만의 몫일까.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jutech.co.kr%2FJournals%2FJImage6%2F04042719.jpg) |
▲ 마을 입구 성안 솔숲에 자연학습을 나온 대율초등학교 학생들. 이곳은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이자 의병대장 홍천뢰와 효자 홍영섭을 기리는 비각이 서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또 마을 사람 누구나 와서 휴식하고 담소를 즐길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