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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梧桐)1里 연화마을
조선(朝鮮) 선조(宣祖) 1526년경에 현풍(玄豊) 곽씨(郭氏) 할머니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며, 마을이 커지면서 집터가 모자라 섬 중앙으로 다른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최초의 마을이면서 마을이 크기 때문에 큰마을이라 불리워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줄여서 큰멀이라 부르고 있다.
▶오동(梧桐)1里 신오(新梧)마을
1923년 간척후(干拓後) 농사짓기 위해 진주강씨(晋州姜氏) 동수(東秀)가 상오에서 들어와 기타 성씨와 함께 성촌하였다. 성촌 전에는 가마동이라 불렀으나 제방축조로 농사를 짓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신설된 마을이며 오동리(梧桐里) 중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오(新梧)이라 하였다.
▶오동(梧桐)1里 복용(伏龍)마을
1337년에 인동장씨시조 장금용(張金龍)의 25대손 장기준(張基準)이 성촌에서 도를 닦기 위해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다. 고려말
당시 선비였던 사람이 도를 닦기 위해 월암산(月岩山)에 살던 중
용(龍)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 되어서 복용(伏龍)이라 칭하게 되었다.
면적은 115.4ha, 현재는 한세대도 거주하지 않고 있다.
▶오동(梧桐)1里 상오(上梧)마을
1587년 밀양박씨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57대손 박맹인(朴盟仁)이 장성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다. 고려말 부락이 위치한 곳이 숲으로 가득찬 산밑에 위치하여 먹골이라 칭하였으나 왜정때
길촌(吉村)이 설도(雪島) 제방(堤防)축조로 간천이 되어 농사를
짓기 위해 주민이 모여들어 오동리란 법정리가 형성되어 2개 부락으로 나누면서 아랫마을을 신오(新梧), 웃마을 상오(上梧)라고 이름하였다. 이 마을이 형성될 당시 3그루를 식재하여 가꿔오다 1그루는 고사하고 현재 2그루가 있다. (수령 400여년)또한 심산유곡으로 수원이 풍성하여 염산면민의 상수도가 1990년 시설되어 있다.
▶두우(斗牛)2里 창우(昌牛)마을
지금부터 40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 뒷산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닮았고 흰바위가 소의 꼬리 부분으로 백수(白岫)쪽에 소의 굴레가 있어 소가 푸른강을 건너 백수쪽으로 간다하여 창수(昌洙)라고 불렀으나 해방후 창우(昌牛)라고
하였다.
▶두우(斗牛)2里 상정(上亭)마을
지금부터 400년전 백씨(白氏)가 들어와 살면서 터를 잡았으나 지금은 선산만 있으며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다. 마을
뒷산이 닭형으로 되어 닭머리라 부르다가 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이 되자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분할되면서 마을이 급경사이고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정(亭)자와 같다고 해서 상정(上亭)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두우(斗牛)1里 당두(堂頭)마을
1507년 밀양박씨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제54대손 박수공(朴守恭)이 장성에서 들어와 성촌하였고 마을 뒷산이 닭형으로 되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닭머리라고 불러 오다가 해방이후에 한자 표기로 당두(堂頭)라고 불려지고 있다.
▶야월(野月)4里 월평(月坪)마을
1650년 진주강씨시조(晉州姜氏始祖) 강이식(姜以式)의 第20대손(代孫) 명환(命煥)이 신안(新安)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가음도의 한마을로서 마을 형세가 운중만월(雲中滿越)이라 하였으며 그후 달이 수평선 넘어 평평한 곳에 진다하여 월평(月評)이라
칭하였다.
▶야월(野月)3里 운곡(雲谷)마을
1700년 김해김씨(金海金氏) 시조 김수로왕 제65대손 실이 전북(全北) 고창(高敞)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구름속의 반달과 같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운곡(雲谷)이라 칭하였다.
▶야월(野月)2里 야장(野庄)마을
탐진최씨(耽津崔氏) 기중최석언(氣中崔錫彦)의 10대조가 나주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천하였고 1587년부터 불러오는 촌명으로 음양수(陰陽水)가 합류하는 때에 가음도란 섬안 들판에 마을을 형성했다고 해서 야장(野庄)이라 불려지고 있다.
▶야월(野月)1里 이리(裡里)마을
1627년 김수로왕(金首露王) 제 62대손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1587년 야장(野庄)을 들마을이라 하고 속리를 안마을이라
해서 이리(裡里)라고 부르고 있었다
▶송암(松岩)2里 입동(入冬)마을
이조중엽에 김수로왕의 46대손 김계립(金繼立)이 임란을 피하기
위해 전북(全北) 고창(高敞)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김해준(金海俊) 인계립(人繼立)의 이름 입(立)자와 마을동(洞)자인 동(洞)자를 합하여 입동(立洞)이라 부르다가 왜정때 편의상 입동(入冬)이라 불러오게 되었다.
▶송암(松岩)1里 신대(新大)마을
1750년 광산탁씨(光山卓氏) 시조(始祖) 지엽(之葉)의 第27대손(代孫) 진택(振澤)이 전북(全北) 부안(扶安)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 뒤에 큰바위가 서있다고 해서 선바우라고 해칭하다가 그 후 마을이 커지면서 대화(大花)재의 大자를 따고 새로운 마을이라고 해서 신대(新大)라 불러오고 있다.
▶신성(新星)2里 노현(蘆峴)마을
평산갑씨노(平山甲氏蘆)의 후손이 노현(蘆峴)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 뒷산 봉덕산(鳳德山) 날개 봉밑의 지형이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노현(蘆峴)이라 칭하였다.
▶신성(新星)2里 신정(新井)마을
1750년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나주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단한가구가 산속의 높은곳에 거주하여 불갑사(佛岬寺)암자에 비유하여 해불암(海佛岩)이라 불렀는데 왜정때 신정(新亭)으로 부른것이 근래에 와서 신정(新井)으로 변해 불려지고 있다.
▶신성(新星)1里 성상(星上)마을
1750년 밀양박씨가 전북에서 들어와 성촌하였고 거주 당시 신벌리에서 밤에 봉덕산(鳳德山)을 바라보니 2가구의 불빛이 별처럼 보여서 성상(星上)이라 불렀다.
▶신성(新星)1里 도사(都仕)마을
1630년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창녕조씨(昌寧曺氏)가 들어와 살면서부터 성촌하였고 1630년 신벌리라 통칭하다가 그
후 이곳에 살던 분이 시랑(侍郞)벼슬을 받은 마을이라 해서 조시랑(曺侍郞)이라 했다가 왜정때 도사(都仕)라 불렀다.
▶봉남(奉南)5里 봉전(奉田)마을
왜정때 제방을 축조한 후 간척지(干拓地)에 농사를 짓기위해 경주이씨(慶州李氏) 백현(栢鉉)이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1923년 봉덕산(鳳德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본 마을을 봉전(鳳田)이라고 불렀다.
▶봉남(奉南)5里 한시(韓侍)마을
김해김씨(金海金氏) 학봉(學奉)은 군서(郡西) 매산(梅山)에서, 광산김씨(光山金氏) 영선(永先)은 영암(靈岩)에서 함께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1600년경 벼슬을 가진 사람이 본 마을로 귀양와서
부락주민들이 한시랑(韓侍郞) 또는 한시(韓侍)레이로 불러오던 줄
한씨(韓氏)와 시랑(侍郞)의 머리 첫 글자를 따서 한시(韓侍)라 불러지게 되었다.
▶봉남(奉南)4里 설도(雪島)마을
1927년 전주최씨(全州崔氏) 규봉(圭奉)이 무안임자(務安荏子)에서
간척지(干拓地)를 찾아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눈섬으로 짧게
발음하여 불러오다가 "와도(臥島)" 를 "설도(雪島)"로 잘못표기하여 설도(雪島)로 불러오고 있으며 마을앞 배수갑문에도 와도(臥島)란 글씨가 적혀있다.
▶봉남(奉南)3里 합산(蛤山)마을
1927년 간척답을 농사짓기 위해 탐진최씨(耽津崔氏) 최봉한(崔鳳漢)이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왜정때 일본인이 간척사업으로
농토를 형성되었으며 당시 마을 뒷산이 조개모양을 닮아 합산(蛤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남(奉南)2里 내남(內南)마을
1592년 김해김씨시조 김수로왕의 16대손이 전북 남원군중 이순중장군(李舜中將軍)의 下에서 이곳에 낙남하여 내남(內南)에서 주둔(駐屯)하여 살면서 성촌하였고 1592년 마을 뒷산 이름이 남악(南岳)이란 높은 산이 있으며 마을 이름을 안나메기라고 불러오다가
남악(南岳)의 남(南)을 따고 내(內)를 따서 내남(內南)이라고 부르고 있다.
▶봉남(奉南)2里 양일(陽日)마을
일본인 진촌(津村)이 간척사업차(干拓事業次)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왜정때 한인강길용(韓人康吉龍)이 볕날이라 하는 산능선이름을 따서 양일(陽日)이라고 불러졌다.
▶봉남(奉南)1里 봉양(奉良)마을
1623년 김수로왕 63대손 몽서(夢瑞)가 나주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 뒷산에 봉덕산(奉德山)이라는 높은 산이 있으며 이
마을이 봉덕산(奉德山)밑의 양지바른 마을이라 하여 봉양(奉陽)이라 하다가 구전하는 과정에서 봉양(奉良)이라 불러지고 있다.
▶봉남(奉南)4里 동촌(東村)마을
왜정초 간척지(干拓地)가 개답(開沓)되면서 농사(農事)짓기 위해 정태수(丁泰秀), 전창규(全昌奎), 박대철(朴大喆), 박화실(朴化實), 유희욱(柳熙旭), 이문옥(李文玉) 등이 여러곳에서 제방을 축조하면서 솔번 등에서 흙을 파서 사용했다고 해서 토일판이라 칭하다가 왜정말 본 마을이 면소재지가 되고 면민의 생활 중심지가 되면서부터 본면의 중심지 산인 봉덕산(鳳德山)의 동편에 있다하여 동촌(東村)이라 불러지게 되었다
▶상계(上溪)3里 평촌(平村)마을
1837년 홍천용씨태고(洪川龍氏太高)가 강원도(江原道)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1837년 옹기그릇을 만드는 마을로서 평촌(平村)마을을 점등이라고 불러 왔으며 1900년 설매산(雪梅山)밑의 평지(平地)마을이라 하며 평촌(平村)이라 불러졌다
▶상계(上溪)3里 신창(新昌)마을
방조제(防潮堤)제방 축조후 해주오씨(海州吳氏) 남수(南洙)가 본
마을에 나주에서 이민(移民)와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고 처음에는 염창(鹽昌)이라고 불러오다가 새로운 마을이라하여 신창(新昌)이라고 불렀다.
▶상계(上溪)4里 남계(南溪)마을
마을전답(田沓)에 옛 기와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흔적을 알 수 있으며 1587년 진주강씨시조(晉州姜氏始祖) 강이식(姜以式)의 제20대손 진환(眞煥)이 불갑(佛岬)에 들어와 성촌하였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으며 마을 지형이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모양으로 중국에 가면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 중국사기에 어옹수조남계피(魚翁垂釣南溪彼)라는 낚시터가 있어 이곳을 이름을 따서 남계(南溪)라고 불렀다
▶상계(上溪)2里 하논(下論)마을
김해김씨시조 김수로왕의 제65대孫 영택(永澤)이 영암(靈岩)에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간척지의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배가
닿는 어촌으로 당시는 아랫논금포(論芩浦)라고 불리우다가 설도(雪島)제방 축조후 포구가 폐쇄된 후 하논(下論)이라 불려졌다.
▶상계(上溪)2里 상논(上論)마을
1627년 광주이씨(廣州李氏)시조 이대촌(李隊村)의 제8대손 왕수(王壽)께서 군남 동간(東澗)에 들어와 살 무렵 나주송씨 시조 비의 제23대손 태하(泰夏)가 함평(咸平)에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1734년 논금포(論芩浦)라고 불렀는데 제방축조후 포구가 폐쇄되어 윗 논금포(論芩浦)눈 상논(上論), 아랫 하논(下論)이라고 부른다.
▶상계(上溪)1里 봉서(鳳棲)마을
1537년 경주최씨시조 최치원(崔致遠)의 제17대손 춘영(春榮)이 나주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산좋고 물맑아 봉황새가 머물러
쉬어 가는 곳이라 봉서(鳳棲)라 불러졌다.
▶축동(丑東)4里 동산(東山)마을
1607년 한양조씨(漢陽趙氏)가 상오(上梧)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을 동산(東山)이라 칭하였다.
▶축동(丑東)4里 신동(新洞)마을
1920년경 농사를 짓기 위해 박이찬(朴二讚)이 동산에서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농사를 짓기 위해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에 의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동(新洞)이라 불러졌다.
▶축동(丑東)3里 오교(烏橋)마을
1920년경 김수로왕 71대손 김국칠이 전북에서 농사를 짓기위해 들어와 살면서 성촌하였고 마을 지형이 까마귀를 닮았으며 왜정때
간척 이전은 마을앞 가막포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마을내 조그마한 나무다리가 있어 "까막다리"로 칭하다가 왜정때 오교(烏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축동(丑東)2里 염신(鹽新)마을
1920년 전북 고창(高敞)에서 거주하던 박필수가(朴弼秀家) 정부의
권장으로 옥토가 많은 이곳으로 이거해와 성촌하였고 1955년경 박준태(朴俊太)가 들어와 들 가운데서 농사를 지으면서 신선동(新仙洞)이라는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다. 1920년경 일본인이 불갑천(佛甲川)을 막아 간척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하천을 경계로 북쪽은 백갑읍(白岬邑), 남쪽은 염산면(鹽山面)인데 염산(鹽山)쪽 염(鹽)자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염신(鹽新)이라 부르고 있다.
▶축동(丑東)1里 축장(丑壯)마을
1450년 창영성씨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제 14대손이 화순옥동(和順玉東)에서 들어와 성촌하였고 마을 뒷산의 형태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기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축장(丑壯)이라 불러지고
있다.
▶축동(丑東)1里 장동(壯洞)마을
1637년 김수로왕의 68대손 김성주(金性周)가 육창(六昌)에서 들어와 성촌하였고 마을이 새로 형성되어 부흥되자 장한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하던것이 오늘에 이르러 장동(壯東)이라 불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