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코너.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 출생여운형 선생은 1886년 양평군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치마 폭으로 태양을 안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합니다.
- 신학문 습득과 기독교 활동여운형 선생은 배재학당 교사로 재직 중이던 친척 여병현(呂炳鉉)의 영향으로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흥화학교와 우무학당 등으로 옮겨 신학문을 익혔습니다. 한편 기독교에 입교하여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의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알렌 목사 아래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으며, 1911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 애국계몽운동국권이 기울어 가던 1907년경 여운형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아 고향집에 기독광동학교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강릉의 강릉 초당의숙 교사로 부임하여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양평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제2코너. 독립운동(1914~1945) >
- 3.1운동 발단의 중심 여운형 선생은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했습니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본,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하고,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했습니다.
- 민족의 웅변가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 핵심인물인 여운형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도쿄로 초청합니다. 일본을 방문한 선생은 일본의 고관대작들을 만나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여 오히려 그들을 주눅 들게 했습니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몽양 선생은 도쿄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연설을 했습니다.
- 옥중 생활여운형 선생은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0년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32년까지 서대문 형무소 외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제3코너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년 8월 15일 여운형 선생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보름이 채 안된 시점에 전국에 145개의 지방위원회들을 조직할 정도로 전국의 치안과 행정을 장악함으로써 과도기의 혼란을 방지했습니다. 이는 일제 말의 사전 준비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여운형에 대한 민중의 신뢰와 지지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좌우합작위원회와 통일정부수립운동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이 전해지자 정치세력들은 이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 때 여운형 선생은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 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민족적 단결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좌우 합작과 남북 연합을 통해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 통일임시정부가 미·소·영·중 4개국의 지원과 협력 하에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것입니다.
< 제4코너. 서거(1947. 7.19) >
- 서거 좌·우와 친미·친소로 나눠진 극단적 대결 정국 하에서 여운형 선생은 해방 후 2년 간 12차례의 테러에 시달렸습니다.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테러 조직원인 19세의 한지근이 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 장례식1947년 8월 3일 근로인민당사 앞에서 진행된 장례식은 60만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제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 몽양 좌상 >
전시실 중앙에 동으로 제작된 몽양 선생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선생의 옆에 앉아서 함께 책 읽는 모습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 정관재(正觀齋) >
여운형 선생의 사진, 친필과 함께 선생에 관한 도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생의 친필 중 대표적인 것은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인 1936년 정월에 쓴 ‘正觀邁進’(바로 보고 힘써 나아가자), 1941년 일본 사이타마에 있는 고려신사에 들렀다가 남긴 ‘血濃於水’(피는 물보다 진하다), 1944년 신년에 김문갑에게 써준 ‘分則倒合必立’(나뉘면 쓰러지고 합치면 반드시 일어선다) 등이 있습니다.
< 몽양 선생과 사진찍기 >
크로마키 시스템을 이용하여 선생의 모습이 담긴 18매의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촬영하면 마치 여운형 선생과 함께 찍은 것 같은 사진을 1매씩 출력해주고 있어 관람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