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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트비아 공화국(Republic of Latvia) 역사]
문화: 독일(옛 리보니아) 면적: 6만4천㎢(전남), 인구: 230만, 민족: 라트비아 58%, 러시아 30%, 벨로루스 4%,
우크라이나 3%, 폴란드 3%, 공용어: 라트비아어, 다민족에 따라 다언어 사용, 화폐: 유로(€)
BC 2000년경부터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201년 이들에 의하여 리가 시가 건설되었다.
1558년 러시아 이반 4세가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 지역을 지배하던 튜턴기사단은 라트비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하였고, 1561년 기사단이 자진 해체하면서 2나라 공국이 탄생했다.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란드 공국과 쿠를란트 공국이었는데 1600~1629년 이 지역을 둘러싸고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으며, 이하는 리가 역사와 같다.
행정구역은 26개 주와 7개 자치시이며, 종교는 스웨덴과 독일 북부의 영향으로 개신교 20%,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정교 15%, 폴란드의 영향으로 소수의 가톨릭교도 믿고 있다.
국민 소득 48.6% 서비스업, 23.9% 제조업, 22.8% 농업이 차지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2천 달러이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여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고, 아름다운 항구가 많은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이 311m로 약 40%인 산림지대이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의 합병되었던 역사적인 이유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이를 경계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우리나라는 1991년 10월 22일 수교하였으며, 2003년 비자면제 협정을 체결하였다.
※무국적자(無國籍者): 난민도 포함하는 ‘국적이 없는 사람’을 뜻하며,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1940년
이전에 온 러시아 사람과 그 직계자손에게는 라트비아국적과 여권을 가지도록 허용되었다.
1940년 이후 이민 온 사람에게는 수여되지 않아 약 45〜50만 명의 귀화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태어난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국적을 갖지 못해서 러시아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금이나 병역의 의무도 없지만 대신 참정권과 시민권행사를 할 수 없기에 유럽에서 여러 번 개선을
재촉했지만 이들이 사회로 귀화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라트비아 당국은 해결책을 보이지 않고 있다.
1997년 라트비아 정부가 발급한 Alien Passport(무국적 여권)를 의무적으로 갖게 되었고,
이를 무국적자라고 한다.
<여행 지도>
[3일] 18년 10월 19일 금요일 ●일정: 시굴다 관광[1 구타마니스 동굴 2 투라이다 성]→ 리가 관광[1 리가 성
2 스웨덴 문 3 성 베드로 교회 4. 성 야곱 성당 5 피터 폴 교회 6 자유의 동상 7 화약탑→ ISLANDE
[시굴다(Sigulda) 약력]
리가에서 48km 떨어진 시굴다는 라트비아에서 가장 긴 길이가 452km인 가우야 강을 끼고 있으며, ‘라트비아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는 발트 3국은 산이 없어서 협곡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솟은 협곡이 아니라 평지에서 푹 꺼진 협곡이 있어 ‘스위스’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인구 1만6천
명의 작은 도시로 아름다운 풍광과 건축물들을 볼 수 있고, 시의 상징이 지팡이라 ‘지팡이 공원’도 있다.
시굴다는 리가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시내는 시청사와 1207년 검은 기사단이 세운 중세 성이
있고, 북쪽으로 있는 가우야 국립공원에는 구트마니스 동굴을 지나 투라이다 성이 있다.
[새벽 산책]
오늘도 나와 TC 그리고 아줌씨 2분과 함께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이 발 닺는 데로 걸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온통 흰색이어서 모두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으나 알 수가 없었지만 야백수(夜白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야백수는 ‘밤에 흰 것은 물이더라’라는 말로 아마도 호수이거니 했지만 걸어가는 주위가 전부 흰색이어서 그러면
우리가 물 가운데 있는 것이니 야백수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데 3명이 앞서 가고 나는 뒤처지면서 알게 됐다.
그들이 멀어지면서 다리는 보이지 않고, 상체만 하얀 속에 어렴풋이 보여 그것이 안개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에게 안개라는 것을 알려 주었더니 평생 처음으로 안개 속을 걸었다며 좋아했다.
오늘 새벽은 오직 안개 속만 걷다가 호텔로 돌아왔지만 현미의 밤안개, 배호의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이나 밤안개
속의 데이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을 만큼 멋진 안개였다.
[구트마니스(구타마니스) 동굴(Gutamanis cave) 관광]
9시에 호텔을 떠나며 어제 호텔에서 본 트레이닝복을 입은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썰매나 루지를
하는 선수들로 유럽 여려 나라에서 훈련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하여 어제 멀리서 본 봅슬레이 경기장이 생각났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봅슬레이 경기장이 자리 잡고 있어 이 나라 선수들도 봅슬레이를 잘하며, 아이스 학키도 좋아
하는데 이들의 우상이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스켈레톤 부분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나라 윤성빈 선수라고 한다.
시굴다는 작은 시골 같았고, 리가까지 가는 국내 기차역도 보였는데 도시를 벗어나자 나무들이 아름답게
단풍졌고, 10분 후 가우야 국립공원에 도착하면 먼저 구트마니스 동굴을 볼 것이라고 한다.
구트마니스 동굴은 너무 커서 다 보는데도 1분도 안 걸린다고 했으며, 주차장에서 내리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시굴다의 상징이라는 지팡이인데 이번여행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동굴로 가는 우측 비탈에는 붉은 돔 지붕의 건물은 ‘사랑의 맹세’라는 작은 매점이었으나 지금은 물품을 팔지
않는다고 하며, 그 앞 정자에는 이곳 특산물인 ‘오스몬 쿠키’라는 집에서 만든 과자를 판다.
가이드는 ‘오스몬 쿠키’를 귀리를 가공한 오트밀 건포도라고 했으며, 여기서는 과일이 없어 비타민을
베리베리에서 섭취한다고 해서 우리도 2가지를 사서 맛보았는데 별 맛은 없고 단지 너무 달고 시었다.
이 쿠키 때문에 웃을 일도 아닌데 여자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기에 아마도 이래서 오래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평지에서 푹 꺼진 협곡이라 산도 있고, 발트 3국의 최대 동굴도 있는데 이 동굴 높이는 10m, 폭 12m,
길이 18.8m로 이 동굴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있어 한국에서는 ‘사랑의 동굴’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에서는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점령하고 투라이다 성을 건축했으나 1601년 5월 스웨덴이 침범했을 때
스웨덴 병사 그레이프는 투라이다 성 사망자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아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레이프는 아기 이름을 5월의 의미로 ‘마이야(Maija)'라고 불렸고, 그녀는 빼어난 미모덕분에 ’투라이다
장미‘라고 불렀으며, 빅토르 헤일이라는 독일 총각은 정원사로 마이야와 결혼을 약속했다.
둘이는 매일 저녁 동굴에서 만났는데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폴란드 탈영병 야쿠봅스키는 빅토르의 이름을 빌려
마이야를 동굴로 나오기를 유혹했고, 도착했을 때 속았음을 알았으며, 몸이 더럽혀질 바에 죽기로 결심했다.
빅토르가 선물로 준 붉은 스카프를 목에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스카프를 펼치면서 ‘이 스카프는 어떤 검으로
찔러도 막아 내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하며, 한번 시험해 볼 것을 유도했다.
당시는 마법의 힘을 믿던 시절이라 탈영병은 힘을 다해 목을 찔렸고, 마이야는 바로 숨을 거두었으며, 그때 그녀
나이는 20살이었고, 놀란 야쿠봅스키도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투라이다 성 안에 있는 성당 옆에 있으며, 이런 연유로 2개의 동굴 벽에는 사랑의 낙서가 많다고
하면서 가이드는 마이야를 발견한 시기가 인터넷과 좀 달랐는데 지금부터는 가이드의 이야기이다.
성을 점령한 스웨덴 군인들은 축제를 벌이면서 독일인에게 자유를 주었고, 이때 아들을 잃은 한 학자는 자기처럼
슬퍼하는 사람을 찾다가 아기울음 소리를 듣고 찾아 간 곳에는 잘 생긴 군인이 죽었고, 그 옆에는 예쁜 여인이
한 팔에 아기를 안고 죽은 여인을 있었다고 하며, 이 학자는 아기를 키우기로 했으나 이름이 없기에 5월 붉은
피로 물든 전쟁 중에 얻은 아이라고 ‘마이야 로즈(Maija Rose)'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야가 죽은 날이 결혼하기로 한 날이라고 하며, 폴란드 청년은 군중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오히려 빅토르가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받을 뻔 했다고 한다.
다행이도 누명을 벋은 후 마이야 무덤에 흙 한줌을 얻어주고 이곳을 떠났다고 며, 시굴다 주민뿐 아니라 1시간
거리에 있는 리가 시민들도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맹세하려고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마이야와 빅토르가 연애의 장소였던 동굴은 투라이다 성과 무척 가까운 거리라고 하여 지도로 거리를 측정해본
결과 직선거리로 800m가 조금 더 되었고, 동굴 벽에 있는 글들은 일종의 ‘동굴 방명록’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이때 대기하고 있던 조각가에게 부탁하여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며,
동굴은 빙하가 녹으면서 가우야 강이 범람할 때 어름조각과 물이 부딪치면서 생긴 굴이라고 했다.
[투라이다 돌 성(Turaida Stone Castle) 관광] 입장료 5~10월 5 유로, 11~4월 3유로
4분 정도 달리면 투라이다 성 주차장으로 먼저 찾은 곳은 가이드와 친한 린넨(아마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옷
가게이었으며, 우리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단체 관광객이 이었는데 무척 귀여운 아이들이다.
이들은 동전으로 입장표를 구매해서 많은 시간이 걸렸고, 입장 후에는 투다이다 성에 다시 만났으며, 우리가 처음
찾아 간 곳은 마이야 무덤이었고, 비석엔 ‘Turaida Rose, ▷1601, ▷1620’라고만 적혀있다.
‘투라이다 장미, 1601 태어난 해, 1620 죽은 해’이며, 비석 앞에는 결혼하고 찾은 이들이 놓고 간 화분과 꽃이
있고, 뒤에 버섯 같이 생긴 것은 당시 살았을 것 같은 나무 밑둥치인데 썩지 말라고 지붕을 씌운 것이다.
성으로 이동 중에 붉은 교회도 있었고, 교회 뒤편, 지도에 사과와 곡류로 표시된 지역에 잇는 나무들의 단풍이
몹시 고왔으나 사진에는 그 풍경을 살릴 수가 없었는데 가이드는 지도에 있는 ‘민요 공원’의 이야기를 했다.
가이드는 이곳을 ‘노래 언덕’이라했는데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위해 198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 조약 50주년
기념 날에 탈린에서 시작하여 리가를 지나 빌뉴스(빌니우스)까지 600㎞ 거리를 200만 명이 손을 잡고 평화와
독립을 라디오에 맞추어 다 같이 노래를 불러 세계에 알렸던 이 길을 ‘발트의 길’이라고 한다.
이 ‘노래혁명’을 통해 1991년 완전하고 평화로운 독립을 얻었고, 나라마다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하며, 돌아올 때는 ‘조각 공원’을 들렸다가 오라고 하였고, 성으로 들어가기 전 작은 바위 표지석 앞에 섰다.
가이드는 이를 ‘돌 간판’이라고 하면서 이곳에 사는 30%의 러시아 사람들을 위해 키릴 문자로 적은 것인데
Turaidasky의 sky는 ~의 의미이어서 ‘18세기 투라이다의 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탈린에 사는 처남이 라트비아 역사에 기록한 무적국자라고 하며,
여권에는 국가의 기록이 없지만 러시아도 가고, 유럽도 갈 수 있지만 이제는 무적국자를 안 만든다고 한다.
성 입구에서 처음 이곳에 이주해서 살았던 독일계 사람들을 ‘리보니아’이라고 불렀는데 리브인의 복장을 한
여인이 표를 받았는데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지금 와서 후회되었으나 버스는 이미 떠났다.
이제는 3층으로 된 박물관을 가이드와 함께 보고 나면 자유 시간을 줄 것이라며, 먼저 주 탑(메인 타워)를
올라가 가우야 국립공원의 단풍을 구경하고, 여유가 있으면 문이 열린 곳도 박물관이니 구경하라고 했다.
다음은 조각공원에 가서 할아버지 옆과 뒷모습도 구경한 후 출구에서 만나자고 하며, 이제는 메인 박물관으로
들어가 가이드는 먼저 지도 앞에 섰으나 유리와 등빛으로 반사되어 사진이 나오지를 않았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역사는 리가에서 시작한 것은 주교 알베르토가 독일 브레멘에서 제일 먼저 리가에
도착하여 1201년 리가에 대성당을 세우고, 투라이다에 성을 건축하여 원주민을 몰아내고 점차 세력을
늘려갔다고 한다.
2층으로 이동하면서 올라갈수록 시대에 역행한다고 하며, 그림을 위주로 튜턴기사들과 주교들의 그림이 많고,
그림 앞의 진열장에는 생활 소도구가 있으며, 루터 초상화를 본 후 마지막 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여인들이 사용하는 단추, 골무, 바늘 등이 있으며, 4층은 좁은 공간이라 올라 갈 수는 없지만 밑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미니어처로 만든 빅토르 헤일 총각과 같이 있는 마이야가 있다.
우측에는 폴란드 탈영병 야쿠봅스키가 붉은 옷을 입고 외로이 떨어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빅토르와 마이야가
주고받을 것 같은 편지와 그림도 있고, 구트마니스 동굴에 글을 새기는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다.
이제는 11시35까지 35분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고, 먼저 메인 타위로 올라갔고, 인터넷에서는 30m 높이이라고
했으나 가이드는 건물 5층 높이라고 했는데 가이드 말처럼 한 15m 높이가 될 것 같았다.
예전에는 중간에 나무로 만든 출입문을 사다리를 이용해서 올라 다니다가 전쟁 때는 사다리를 치워 적들의
침입을 막았으나 지금은 1층에 문을 만들어 관광객이 탑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간에는 창이 없어 꼭대기 전망대까지 올라가면 가우야 강과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단풍이보였으나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고, 이제는 감옥으로 쓰인 지하에서 죄수와 병사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것을 구경했다.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다 들어가 보았으며, 아마도 양의 머리뼈 같은 것을 본 후 건물 뒤로 돌아가
단풍든 벽 담장이를 보고, 돌아서서 조각공원으로 가 할아버지 뒷면의 모습을 본 후 출구로 향했다.
지도에 ‘새 거주지’라고 적힌 곳에도 몇 개의 조각이 있었고, 투라이다 장미 아래 있는 돌에는 많은 글씨가
쓰여 있었으나 내용을 알 수 없었으며, 이제는 가이드를 만나 48km 떨어진 리가로 향했다.
※투이다 성: 시굴다는 최고의 관광지로 처음엔 목조로 만들었으나 1214년 비솝 알버트((Bishop Albert)의
요청으로 돌로 다시 만들었으며, 1215~1556년 사이 300년 동안 남쪽과 북쪽 성을 건축했다.
1776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20세기 중반에 다시 복원했으며, 민요정원, 투라이다 성, 교회와 언덕, 농장
등으로 구분되며, 19세기 이 지역을 관리하던 하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과 곡물창고가 지금도 있다.
이곳이 현재의 매표소이며, 리브인어로 ‘신들이 사는 정원’의 뜻을 가진 ‘투라이다’는 라트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고, 건조실(drying kiln), 투라이다 장미묘소, 현재도 예배를 드리는 붉은
벽의 투라이다 교회, 민속역사박물관, 투라이다 성, 26개 조각품 야외 전시장 순서로 보고
건조실(매표소)로 다시 돌아온다.
1. 민속역사박물관: 연두색건물에는 리브 족의 문화와 역사자료, 암각화가 있는 각석, 중세 화폐가
전시되어 있다.
2. 투라이다 성: 반 쯤 부서진 북쪽의 성문 타워를 지나 성 위로 올라가면 붉은 3층 건물이 있고,
지하~3층까지는 박물관 전시실로 라트비아의 역사, 문화,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는 감옥으로 무기와 고문기구들이 전시 되어 있으며, 1층은 부엌과 난방기구가 있고, 2층은 교회와
대주교 집무실이 있다.
3. 조각 작품 야외전시장: 민요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인둘리스 란카가 조각한 26개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4. 민요공원(Folk Song Park & Folk Song Hill): 1985년 라트비아의 민요 아버지로 불리는
크리스야니스 바론스(1835-1923)의 탄생 150번째 기념으로 조성했으며, 민요축제가 열린다.
[리가(Riga) 역사] 다우가바 강 연안, 인구 약 70만, 발트 3국 중 가장 큰 도시.
‘발트 해의 파리’라는 리가는 리가 만에서 15㎞ 떨어져 있고, 고대 리브인들이 살았으며, 1199년 독일 브레멘
사람인 리보니아의 주교 알베르토 1세가 23척의 십자군선박을 이끌고 서쪽 드비나 강 어귀에 상륙했다.
그 후 1201년 도시를 건설하여 주교관구를 세웠으며, 1201년 '검의 제기사단'을 창설하였고, 1237년
튜턴기사단 소속의 지부가 되었으며, 1253년 대주교관구로 승격했고, 1282년 한자동맹에 가입하였다.
리가는 발트 해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가 되었고, 주교관구라는 특권으로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561년 기사단 해체로 쿠를란드만 독립하고, 주변지역은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1581년 리가도 폴란드로 넘어갔다.
1621년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점령하여 폴란드 같이 행정자치권을 허용했고, 1709~10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점령하여 1721년 스웨덴은 니스타드 조약으로 러시아에게 이양된 후 무역이 매우 발달하였다.
1914년경 러시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고, 1918년 라트비아독립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940년 소련침공으로 합병되었고, 다른 지역과 같이 1940~41년 소련정부는 수많은 라트비아시민을
국외로 추방하거나 처형하였다.
독일의 폭격으로 중세의 상트 표트르 교회와 14세기에 세워진 검의 형제기사단 본부가 파괴되었으며,
1941~44년 독일이 점령하였고, 독일과의 전쟁 이후 1948~49년 국외추방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강제추방과 낮은 출생률로 생긴 공백을 러시아 이주민들로 채워 1959년 리가 인구 45%만 라트비아인이었고,
1991년 완전 독립하였다.
1215년경에 세운 도마대성당, 중세 상인 가옥들과 상점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았으며, 중세의 해자는 구시가지에
운하처럼 남았고, 리가는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이지만 항구는 12~4월에 만이 얼어 기능을 하지 못한다.
1997년 구시가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동록 되었고, 이곳에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건축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60% 정도로 많으며, 인구 분포는 주민인 라트비아인(45%)이다.
그리고 러시아인(40%), 4%가 벨라루스인, 3%가 우크라이나인, 2%가 폴란드인, 1%가 리투아니아인 이며,
대부분 개신교를 믿지만 일부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
※백만 송이장미: 시그나기 출신 조지아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백만 송이장미 사건이 러시아 대표시인
안드레이 보즈넨센스키의 시로 태어났고, 리가출신 레이몬츠 파올스 작곡하여 러시아여가수
알라 뿌가쵸바가 노래 불렀다.
[시청사 광장(Riga City Hall Square) 관광] 시청에서 자유기념비까지 700m
가이드가 놀랄만한 일은 리가는 80만 명에 가까운 도시인데 이 도시에 사는 러시아인이 60%가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어 70만 명 정도이고 러시아인도 40%라고 하며, 12시 30분에 리가에 도착했다.
주차장 앞에는 ‘성 구세주 성공회(St. Saviour's Anglican Church)’이고, 리가 성 앞 아름다운 건물은 ‘슬픔의
성모 교회(Our Lady of Sorrows Church’인데 중앙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리가 성(Riga Castle): 성은 ‘물 많다’ 뜻을 가진 다우가바 강의 반수(Vansu) 다리 동쪽 끝에 있고, 1330년
성곽 요새로 건축되었으며, 현재 대통령궁과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원형 탑 위에는 국기와 시 기가 있다.
점심을 먹은 후 시청 광장으로 향했고,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인터넷에서 본 ‘소총수 기념탑’과 검은 상자
같이 보이는 건물인 ’라트비아 점령박물관’이었으나 이곳은 설명도 없이 통과했다.
※소총수 기념탑: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라트비아 붉은 소총수’라고 불렀던 탑은 2차 대전 나치와 전쟁 때
공을 세워 스탈린의 호위병이 된 3명의 ‘소총수 기념탑’이다.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소총수 기념탑이 있는 검은 건물이며, 레닌 탄생 100주년을 맞아 라트비아 소총대대
박물관으로 시작되었으며, 1940~1991년 독립까지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자료를 전시한 입장은 무료이다.
건물 옆에는 1510년 길드회원들이 트리를 세계 처음 세웠다는 곳에 모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데 1605년
처음 독일에서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 것보다 95년이나 빠르다.
이젠 시청 광장장 안에 들어오니 박물관 바로 옆의 아름다운 건물은 ‘검은 머리전당‘이었고, 그 뒤로 ‘성 베드로
교회’가 있으며, 광장 중앙에 ‘롤랜드 석상’이 보이고, 좌측 끝에 시청사가 있다.
1. 검은 머리 전당
(House of Blackheads): 1334년 건축했으며, 이름유래는 건물을 사용했던 중세 무역인 모임의 하나인
‘검은머리형제들’에서 왔고, 이 조직의 수호성인이 모리셔스 출신 혹인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프리카나 남미를 다니며 무역한 미혼상인들로 구성된 무역조합이며, 이 건물은 2차 대전 때 독일의
폭격으로 무너진 것을 리가 800주년 맞이하여 2011년 새로 건축했고, 르네상스 건축물의 진수라고 한다.
전당 건물에 국기게양대가 많은 것은 대통령 궁으로 사용하던 리가 성이 화재로 수리할 때에 1년 정도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그때 많은 기를 걸기 위에 만든 것이 지금 맘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길드회의를 하거나 독신자 숙소로 쓰였지만 현재는 관광안내소와 길드박물관이다.
※검은머리전당: ‘검은머리길드’라고 부르며, 리가의 것이 본점이고, 탈린 것은 분점으로 이집트출신으로
수호성인 모리셔스가 흑인이어서 검은머리로 부쳐진 이름으로 그는 80~300년 사이 스위스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졌다.
2. 롤랜드 석상: 광장엔 1897년 제작된 무역상의 수호신 ‘롤랜드(로란드, 로렌트) 석상’이 있으며, 석상이 들고
있는 방패에 리가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가 들고 있는 ‘듀랜달’ 검의 칼끝이 라트비아의 ‘0 km’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다.
※롤랜드(Rolland): 1402년 독일의 브레멘을 왕과 종교에서 자유로 도시로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평화와
독립의 상징인 중세기의 유명한 기사이지만 한자동맹의 무역 도시는 정의와 자유의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브레멘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하지만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데 아마도 롤랜드의 후손이 성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으며, 로란드 또는 프랑스어로 룰랑이며, 이태리어로 오를란도이다.
오페라 ‘룰랑의 노래’의 주인공으로 프랑코왕국의 샤를마뉴대제의 사위인데 그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장수로
대제가 이슬람세력이 지배하던 스페인의 사라고사를 정복하러 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778년 대제는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후퇴했으며, 롤랜드는 따로 뒤따라오다가 스페인의 바스크 족과 싸운
론세바예스 전투(778년)에서 죽었고,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칼이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가 사용하던 전설의 검
‘듀랜달’인데 대제가 하사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검은머리 전당’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시청사’는 756년 건축되었으며, 리가 시가지는 2차 대전
당시 피해가 컸지만 리가 탄생 800주년 되던 2001년에 잘 복원했다고 한다.
2시 정각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가 울러 퍼졌는데 이것은 시청에서 컴퓨터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시청 입구 위에 있는 3개의 깃발 중에 좌측에 있는 라트비아 국기는 위아래는 빨강색이고, 중앙은 흰색으로
이런 깃발은 유럽의 오스트리아 국기와 같으나 오스트리아는 빨강과 흰색의 폭이 똑 같다고 했다.
라트비아 국기는 흰색이 빨간 색의 1/2로 좁은데 국기색의 의미는 독일, 스웨덴, 러시아와 수많은 전쟁에서
졌지만 어쩌다 이겼을 때 흔들던 옷에 묻었던 피의 색깔로 아픈 역사를 말하고, 흰색은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고 한다.
중앙 깃발은 유럽연합 국기이고, 맨 우측은 위는 초록 아래는 흰색은 리가의 시기라고 하며, 참고로 세계
국가마다 코드가 있는데 에스토니아는 EE, 라트비아는 LV, 리투아니아는 LT, 한국은 KR이라고 한다.
라트비아는 돌이 많아서 건물들을 돌로 했으나 리투아니아부터는 돌이 부족해서 붉은 벽돌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 관광]
시청광장 동쪽에는 1209년 리가 상인들의 기부금으로 리가에서 2번째로 세워진 가톨릭 성당으로 재건축 되면서
고딕, 바로크,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었고, 스테인 글라스는 서유럽처럼 화려한 성화가 없다.
17세기 성당은 독일의 루터교회를 받아드린 스웨덴이 지배하면서 개신교회가 되었고, 소련이 지배하면서
콘서트 홀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신자가 없어 박물관과 전망대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곳 원주민들은 자연신을 믿었으며, 이들을 포교하기 위해 첨탑 꼭대기에 ‘수탉’을 올려놓았는데 그 이유는
이곳 날씨가 좋지 않아 300일 정도는 우중충하였으며, 60일 정도만 맑았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맑은 날을 열어달라고 수탉을 신성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리가의 성당은 모두가 수탉이 올라가
있기에 리가 시의 별명은 ‘수탉의 도시’ 또는 발트에서 제일 큰 도시이어서 ‘발트의 파리’라고 했다고 한다.
베드로와 수탉의 인연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예언한대로 베드로가 3번 부인한 시간을 알린 것이
‘수탉’이어서 예루살렘의 ‘베드로 통곡 교회’의 풍향계도 ‘수탉’이다
이 ‘금 수탉’의 풍향계는 리가의 상징이지만 범선을 타고 리가를 드나들던 선원과 어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바람의 방향을 보고 배가 많이 들어오면 그때에 맞추어 시장을 개방했다고 한다.
건축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았던 123m의 첨탑전망대는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내부는 1941년 2차 대전 때
독일 폭격으로 파손된 잔해들이 전시되고 있었지만 양은 많지 않았다.
예전에는 첨탑 끝에서 두 번째 전망대였지만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3번째로 내려왔으나 전망에는 아무 지장 없고,
공간이 넓어져서 오히려 좋아졌다고 하며, 러시아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곳을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트비아의 독립으로 정작 혜택은 누리지 못했다고 하며, 지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옛 소련시절에
누구나 집과 의료혜택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다만 자유만 없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더니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좀
덜거덩 거리였고, 밖을 나오니 탄성이 절로 나왔는데 가이드는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우가바 강의 남쪽에서 시작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강의 북쪽까지 펼쳐진 구시가지 전부를 대충 설명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지도를 보고 찾았는데 제일 먼저 다우가바 강 건너 높은 송신탑이 눈에 띈다.
다우가바 강다리(Bridge over Daugava river) 뒤로 있는 이 탑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송신탑(Radio & TV Tower)
이며, 다리 앞의 건물은 텔레비전 방송국인데 모두 작은 섬 안에 있다.
그리고 리가 시내로 들어올 때 비행기 격납고 같이 생겼다고 말한 중앙시장은 농산물 직판장이며, 그 좌측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건물은 리가 국제 교회(Communitas International Church)이다.
모스크바 대학처럼 케이크 같이 생긴 이 건물을 보고 러시아 스타일의 건물이라고 하며, 옛 소련의 KGB가
있었던 건물이고, 지금은 학교와 사무실로 쓰인다고 하여 설명과 지도의 표기가 달라 KGB를 찾아보았다.
KGB가 있었던 건물은 ‘The Corner House’로 지도엔 가르친 방향도 맞지 않으며, 래디슨 블루 호텔과 같은
방향에 있고, 호텔과는 직선으로 600m 정도 떨어져 있어 이곳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파란 지붕의 첨탑만 보이는 곳은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 이며, 성 베드로 교회 바로 뒤에 있다.
좌측에 보이는 파란 돔 지붕은 정교회이며, 또 좌측으로 보이는 검은 양파의 지붕을 가진 건물은 성 요한 교회
(러시아 동방 정교회)이고, 그 앞 좌측에 보이는 2개의 첨탑은 천주교 성당(성 프란체스카)이다.
성당 앞에는 국내만 다니는 중앙 기차역이며, 그 앞에는 스토크만(stockmann) 백화점이 있다.
또 멀리 빛나는 황금 돔의 건물은 러시아 동방 정교회인 그리스도 탄생 성당(Nativity of Christ Cathedral)이며,
그 뒤에는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묵었던 래디슨 블루 호텔과 같은 계열로 같은 이름을 쓰는 호텔이다.
전 세계에 체인점을 가진 이 호텔은 모양이 비슷한 청 유리에 직사각형 건물인데 이름처럼 청(블루) 유리로 건물
전체를 장식했으며, 이곳은 래디슨 블루에 라트비아 컨퍼런스 & 스파 호텔이라는 이름이 더 붙어 있다.
호텔 좌측에 파란 원뿔형의 건물이 화약 탑으로 있다가 들린다고 하며, 그 앞 검은 지붕 좌측에 원뿔형 첨탑에
검은 고양이가 올려 진 곳이 ‘고양이 집’ 이며, 그 좌측 푸른 지붕의 첨탑이 ‘성 야곱(St. Jacob) 가톨릭
성당’이다.
이 성당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은 농림부(Ministry of Agriculture) 이며, 성 야곱성당 좌측에는 주차장에서 본
‘슬픔의 성모님 교회’는 천주교 성당이고, 그 좌측에 유명한 ‘돔 성당(리가 대성당) 있다.
그 좌측에 작은 첨탑이 주차장에서 본 ‘성공회 성당’이고 그리고 현수교인 ‘반수교(Vansu Bridge)’가 있으며,
다리 끝에는 길쭉한 섬이 있고, 다리와 연결된 도로 바로 위에는 우리가 묵을 아이랜드(Islande) 호텔이 있다.
'돌다리(Stone Bridge)’ 건너에 ‘라트비아 국립도서관’도 보였으며. 이로서 구시가지 전체를 보았고, 이제는
내려와 2차 대전 때 파괴된 유물로 인해 이름만 박물관이 되었는데 그나마 롤랜드 진품을 본 것이 다행일까?
브레멘 악단, 대 길드, 소 길드, 자유기념비, 스웨덴 문, 삼형제 집 등은 보이지는 않았다.
[브레멘 악단(The Musicians of Bremen) 동상]
이제는 성 베드로 성당 북쪽을 돌아 뒤로 가면 성당 바로 뒤 작은 공간에 ‘브레멘 악단’의 동상에서 멈추었고,
가이드의 설명은 리가에 처음 상륙한 주교 알베르토 1세가 독일 브레멘 사람이라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인해 브레멘과 리가는 자매결연 맺었고, 1990년 브레멘에서 기증했으며, 아래로부터 당나귀, 개,
고양이, 닭인데 이 동물들의 코 등을 잡고 속으로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어 코등이 반질반질하다.
어떤 사람은 가장 높이 있는 닭 코등을 만져야 효험이 있다고 해서 높은 곳에 있어도 반들거리는 것을 보고
대단한 열성에 경이롭게 느껴졌으며, 이것을 보고 생각난 사람들이 있는데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이다.
그들 모녀가 개 15마리, 고양이 5마리에 말까지 데리고 다녀 독일 사람들이 ‘브레멘의 악단’을 패러디하여
‘브레멘 악당‘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비리혐의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악단을 악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화 내용은 주인을 위해 평생 노동을 해온 동물들이 늙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주인의 학대를
해서 견디다 못한 동물들은 브레멘에 가서 악사나 되어보자며 길을 떠났다.
우연히 도둑이 든 집에서 도둑을 쫓아내고 그 집을 차지해 먹고 놀며, 그들이 원하던 악단이 되어 여생을
즐긴다는 이야기로 서로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고,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동화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는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대주교 거주지’로 향했고, 예전에 이곳은 성안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2개의
벽면이 남아있으며, 일부는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1분 쯤 더 걸어가면 성벽통로 위에
리가 시의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사자 2마리가 리가 성을 잡고 있는 모습인데 이 2곳은 지도에서 찾을 수가 없었으나 성 요한
교회와 갤러리아 쇼핑몰 사이에 있다는 것만 알았으며, 이 성벽 통로를 지나서 리브 광장으로 향했다.
[리브 광장(Live Square) 관광]
리브 광장은 리브인들에게서 이름이 왔다고 하며, 북쪽엔 건물지붕 끝에 ‘고양이 집(Cat House)’이 있는데
가이드는 이 집주인은 대 길드에 지원을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했으나 인터넷에서는 제명되자 보복으로
고양이 엉덩이가 대 길드 쪽으로 향하게 하여 길드 장 사무실에서 보이므로 기분이 좋지 않아 소송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는 대 길드에 합류하면서 현재의 방향으로 놓았다고 하며. 이집 서쪽 길 건너 남쪽에는 1330년 독일
세력의 절정기 지어진 대 길드(Great Guild)가 있고, 고딕 양식의 건물로 현재는 교향악단이 사용하는
콘서트홀이다.
길 건너 좌측(남쪽)엔 ‘소 길드(Small Guild)'는 대 길드와 나란히 붙어있는데 길드를 쉽게 애기하면
쟁이(기술자)의 단합이고, 한자는 업자들의 단합이라고 보면 되며, 이제는 동북쪽에 있는
라이마 광장으로 향했다.
[라이마 광장(Laima Square) 관광]
신화에 나오는 라이마는 발트 해를 주위의 여러 국가에서 믿고 있는 운명의 여신으로 출산, 결혼, 죽음도
주관하는 신의 이름으로 광장에는 많은 라트비아 국기가 있으며, 동판으로 만든 ‘두 발바닥’이 있는 곳에
멈추었다.
가이드는 2018년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1918년 소련에서 잠시 독립국한 100주년 되는 해이어서
뜻 깊은 해이라고하며, 두 발바닥’의 동판은 ‘발트의 길 25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내년이면 ‘발트의 길’을 노래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로 독소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진 50주년 되는 날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 전 세계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기 위해 발트 3국의 국민 200만 명이 모였다.
그들은 620km 길 위에 서로 손 잡고 한 줄로 늘어섰으며, 라디오에 맞추어 다 같이 15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외쳤는데 탈린은 에스토니아 역사가 시작한 톰페아 성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리가는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므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라이마 광장에서 빌니우스는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시작된 게디미나스 성까지라고 하며, 이 염원은 1991년 8월 20일 이루어졌다.
높이 42m의 ‘자유 여신상’은 신화의 밀다 여신이며, 라트비아의 첫 독립을 상징하고, 이 여신은 별 3개를 들고
있어 우리나라의 삼성이 생각나게 했는데 실제로 리가에 있는 삼성 판매 법인은 발트 3국을 총괄한다고 한다.
인터넷은 이별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쿠르제메, 비제메, 라트갈레를 의미한다고 했으나 가이드는 이 나라가 처음
독립했을 때 행정구역이 3개인 것을 상징하며, 16세기에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리보니아가 있다고 한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리보니아는 스웨덴 통치시절 3분할되면서 라트비아 동남쪽은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차지하고, 서남쪽에는 1562년 새로운 나라인 쿠를란드 공국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공국은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조공을 바치고 독립을 유지했으며, 내일 볼 룬달레 궁전이 공국이 가장 전성기
때 건축된 것이라고 했고, 이젠 자유 여신상을 가까이 보기 위해 광장을 떠났다.
중세 때 성의 ‘해자’였던 ‘리제타스 도시운하’의 다리를 건너면 1935년 시민의 기부금으로 세워졌으며,’ 여신상
밑의 조각상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용사와 민족의 대 서사시 ‘라츠플레시스’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이곳 근위병 2명은 1시간마다 교체되며, 이젠 화약 탑으로 이동했는데 참고로 여신상 북동쪽엔 인터넷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인 ‘알렉산더 넵스키 성당’이라고 했으나 지도엔 ‘그리스도 탄생 성당’으로 되어 있다.
[라트비아 전쟁박물관(Latvijas War Museum)과 스웨덴 문(The Swedish Gate) 관광]
1330년 건축된 구시가지 성곽요새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둥근 원형 탑’은 모래 탑으로 불렀으나 1650년
전쟁에 대비하여 화약을 보관하면서 ‘화약 탑’이 되었으며, 1919년 ‘전쟁박물관(War Museum)’으로
변경됐다.
1937~39년 지금 모습으로 재건축했고, 높이 25.6m. 지름은 14.3m 이며, 뚫어진 구멍은 대포를 설치했던
곳으로 소련시절에는 방치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학생들이 1달에 1루블을 주고 빌렸다고 한다.
학생들은 탑 안에 있는 비둘기 똥을 비료로 팔아 300루블을 벌었다고 하며, 1970년 화약 탑에서 스웨덴 문까지
성벽을 복원했는데 화약 탑 옆 길게 늘어선 노란색 건물이 스웨덴 군인들이 사용하던 병사용 막사라고 한다.
이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건물이 부서져서 성 밖 바로 옆에 새로 건축한 것으로 막사 벽에는 라트비아
모든 도시의 문장이 있으며, 지금은 주거, 사무실, 상가, 식당, 카페 등으로 용도에 맞게 사용된다고 한다.
저녁 예약 시간이 남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전쟁 박물관을 들렸으며, 15분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는데
입구에는 어뢰정 같은 무기와 나폴레옹 시대에나 사용했을 것은 같은 대포도 보였다.
통로 벽에는 한자도시 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벽에 있는 루터 그림과 그 앞에 있는 화약 탑의 조형물은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구식 권총과 재래식 무기 창과 칼, 대포 등과 군대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군인들의 개인휴대 용품인, 총, 철모, 수통 등이 그림과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현대식 무기와 모형을 만들어 놓은
진열장도 있고, 군복,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곳에도 ‘싱거 미싱(SINGER MACHINE) 재봉틀'이 있다.
이 재봉틀은 너무 잘 만들어 팔리지 안 해 망한 회사인데 너무 잘 만들어도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상품이다.
이제는 박물관을 나와 1970년에 복원된 200m 성벽을 따라가다가 경이로운 것을 보았는데 자기들이 필요하지
과일을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길 위 적당한 곳에 놓아 둔 것이다.
좀 의심하던 우리 일행도 사과를 가져다가 먹어 보았고, 가이드는 발트 3국의 문화라고 하며, 크림반도의
얄타에서는 음식점에서 남은 것을 가게 앞에 내 놓았는데 보기는 드물지만 개인뿐 아니라 영업하는 사람도
동참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배려도 좋지만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먹는 다는 믿음이 더 부럽다.
성벽동쪽 끝에는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작은 ‘스웨덴 문’은 1628년 스웨덴은 이곳을 지배하던 폴란드와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웠지만 병사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던 문이라고 했다.
문 상단에는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자머리가 있고, 그 머리 좌우에는 이곳의 지배를 시작한 1628년도가 적혔는데
좌측에는 16 우측엔 28로 나뉘어 있고, 문 양쪽엔 ‘이젠 전쟁은 없다.’라는 뜻으로 대포를 거꾸로 박아 놓았다.
그러나 그 염원은 1709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점령으로 깨졌다고 하며, 문의 뒤편도 앞과 비슷하지만 1628
숫자는 없었고, 서쪽으로 있는 작은 골목은 사람들이 많이 붐벼 ‘소음의 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국회의사당(Latvijas Republikas Saeima)과 성 야고보 성당(St. Jacob Catholic Cathedral) 관광]
이제는 19세기에 지어진 가장 젊은 국회의사당(Latvijas Republikas Saeima) 귀퉁이에서 발을 멈추고 설명을
들었으며, 에스토니아는 국민 134만 명에 국회의원이 101명이라고 한다.
라트비아는 국민 198만 명에 국회의원은 100명으로 2나라 다 인구에 비해 의원이 너무 많다고 했다.
국회의사당과 남쪽으로 나란히 있는 건물이 1225년 건축된 ‘성 야고보 성당’이며, 1523년 이곳에서 최초로
라트비아어로 미사가 열린 가톨릭 상당으로 복원사업을 현재도 진행 중이라 푸른 안전망도 보인다.
이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실제로 주교 신부가 있는 천주교 성당인데 창유리가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가 아닌
것은 전쟁이 많았던 이곳의 큰 건물은 전쟁용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며, 이곳도 첨탑 꼭대기엔 수탉이 있다.
모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이콘이나 성화가 없이 깨끗한 이유는 이곳을 지배했던 사람들에 의해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종교가 없었던 공산당은 다른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래시 없이 사진촬영은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찍을 것이 없었는데 옆 기도실 정면에는 마리아 성화가
있었고, 1993년 교황 성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했을 때 찍은 것 같은 사진도 보였으며, 3형제 건물로 향했다.
[3형제 건물(Three Brother Building) 관광]
야고보 성당 동남쪽으로 탈린의 ‘3자매 건물’ 같이 이곳에는 ‘3형제 건물’이 있는데 작아도 건축학적으로는
중요한 가치를 가졌으며, 17번지 건물이 가장 큰 형님으로 15세기에 건축 된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로마네스크 형식과 고딕식이 합쳐진 것이라고 이라고 하며, 중앙 19번지 노란색 건물은 1646년
건축된 년도가 3층 창 사이에 적혀 있는데 이 건물은 현재 건축박물관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21번지 건물은 18세기에 건축되었고, 1746년에 만든 석조현관 문 위에 ‘하나님께 영광을’이란 글귀가 있다고
했으나 보지 못했으며, 이 3형제 건물은 중세로부터 바로크 양식까지의 건축역사를 보여준다고 한다.
[돔 대성당(Riga Dome Cathedral) 관광]
‘돔 광장( Doms Square)’ 동남쪽으로 1201년 알베르트 대주교가 세웠다는 ‘리가 대성당(Rīgas Doms)’
또는 ‘돔 대성당’이 있으며, 성당에는 당시 대주교 관저가 있었고, 현재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수백 년 동안 증축되면서 고딕, 바로크, 바실리카 양식이 섞여 있으며, 이 성당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해서
발트3국 중에 제일 크고, 1883년에 완성된 6,768개의 파이프 오르간도 있다고 했다.
유럽 최대로 파이프 길이는 13mm~10m이며, 19세기 독일인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도 있다고 했으나 입장하지
않아 보지는 못했고, 대성당은 1776년에 개축된 돔과 91m의 첨탑이 있다.
첨탑 꼭대기엔 리가를 상징하는 ‘수탉’의 풍향계가 있으며, 리가 중심에 가장 큰 돔 광장은 구시가지 모든 길과
통하고, 광장 바닥에는 원형으로 된 유네스코 인정 마크가 있고, 주위엔 카페가 많으며, 각종행사가 열린다.
돔 광장에 있는 벽 건물에는 착시현상을 일으켜 튀어나오게 보이는 그림이 있으며, 가이드는 라트비아에서 찍은
한국영화가 2편이 있는데 하나는 강제국 감독에 장동건 주연인 ‘마이 웨이(May Way)'라고 한다.
이 영화는 좀 엉뚱한 것이 2차 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게 된 동양인의 이야기로 어릴 적 라이벌로
자란 조선인 준식(장동건)과 일본인 타츠오 사이에 벌어지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실패작이라고 한다.
두 번째 영화는 ‘베를린(The Berlin File)'인데 감독은 류승환이고, 출연 배우는 하정우, 한석규, 전지현이며,
소재는 남북한 이야기로 국제적 음모에 휘말리는 숨 막히는 추격전인 영화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베를린보다 리가에서 촬영한 것이 더 많았다고 하지만 2편 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화이며, 우리가
저녁 먹으로 가는 한국식당의 골목도 나온다고 하고, 이제는 리가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반수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하면 다우가바 강가에 길쭉한 작은 섬에 있어 ‘아일랜드(Islande) 호텔’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 같은 호텔 입구엔 호텔 등급을 별이 4개 반이어서 재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호텔 복도에서 주위의 사진을 찍었는데 다리 건너 구시가지와 다우가바 강에 떠있는 크루즈선도 보이고,
강 반대편에는 러시아 동방 정교회인 ‘성 삼위일체 교회(Holy Trinity Church)’도 보였다.
교회 우측에는 ‘치사 오토독스 컬러라타(Chiesa Ortodox Colorata’라는 곳은 러시아어로 하는 기독교회라고
하며, 한식인 저녁을 빨리 먹고, 혼자 돔 광장과 시청광장은 다녀왔으나 리가 성을 못간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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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18년 10월 20일 토요일 ●일정: 리가→ 룬달레 궁전→ (3) 리투아니아 시아우리아이(십자가 언덕)→
카우나스 관광[1 바타우타스 성당 2 페르쿠나스 집 3 시청사 4 성 베드로와 바울 성 5 카우나스 성]→
EUROPA ROYALE KAUNAS 호텔
[쿠를란드 공국(Courland Principality)과 룬달레 여름 궁전(Rundale Palace)의 역사]
독일어 ‘평화의 계곡’이라는 룬달레에 있는 궁전은 1562~1795년까지 234년 동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연합국에
조공을 바치며, 독립을 유지했던 제후국 쿠를란드 공국의 바른 대공의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궁전이다.
쿠를란드 공국은 1561년 리보니아 독일 기사단이 자진 해체하면서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고타르트 케틀러와
그 후예들이 건설한 공작령은 공작 야코프(1649~82 재위)가 통치하던 때에 번영했다.
그는 강력한 해군, 대규모 상선, 해외무역의 조선업과 각종 산업의 발달을 장려하여 1651년 서아프리카의
잠비아와 1652년 서인도제도의 토바고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1658년 스웨덴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 뒤부터
쇠퇴했다.
그의 후손들은 공국의 영화를 유지하려고 유럽의 왕실들과 유대를 계속했고, 1710년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표트르 대제의 조카인 안나 이바노브나(1693~1740)와 결혼하고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그녀는 공작대신 1730년까지 쿠를란드 공국을 다스렸으며, 1727년 에른스트 요한 본 비른 공작(Ernst Johann
von Biron, 1690~1772)은 안나 이바노브나의 애인이었으나 그는 하층 귀족출신이었다.
1730년 안나는 러시아의 여황제가 되었고, 비른 공작은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1736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오스트리아의 쉔부른 궁전을 모델로 하여 룬달레 궁전 건축을 시작했다.
이태리 건축가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에게 건축을 맡겼고, 그는 1754년 에르미타주 박물관도 건축했다.
1737년 케틀러 가문의 마지막 공작이 죽자 러시아의 여황제가 된 안나 이바노브나는 비른 공작을 제7대 군주로
임명했으며, 1740년 궁전의 외부 공사를 마쳤던 같은 해에 안나의 병세가 심해졌다.
안나는 언니의 아들인 생후 2개월인 조카 이반 6세에게 황제를 물려주었고, 비른에게 섭정을 맡긴 후 22일 만에
죽었으며, 이반 6세 어머니는 3주(22일) 만에 비른을 시베리아로 축출시키고 섭정했고, 궁전 공사는 중단되었다.
1762년 러시아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는 1764년 추방된 바른 공작을 다시 쿠를란드 11대 대공으로 임명하여
궁전 공사는 다시 시작하였으나 바로크 양식은 이미 유행이 지나가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바꾸어
아담하고 우아하다.
1768년 궁전은 완공되었고, 1769년 비론은 아들 페터(Peter) 폰 비른1724~1800)에게 양위했으며,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편입되어 쿠를란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유가 됐다.
궁전은 그녀의 애인인 발레리안 주보프(1772~1804) 백작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그가 일찍 죽자 마지막
애인이자 그의 형인 플라톤 주보프(1767~1822)에게 주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궁전에서 살았다.
1822년 그가 죽은 후 플라톤의 미망인 러시아 왕가의 슈발로프 백작과 재혼하면서 궁전은 슈발로프 가문의
소유가 되어 1차 대전 전까지 소유했으며, 1812년 나폴레옹 군대의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19세기 말 대대적인 재건축을 하였으나 1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병원이 되었으며, 1919년 독립전쟁의
승리로 다시 라트비아에 속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궁전은 많이 손상됐다.
이때 수도를 룬달레 궁전에서 북서부 40km 지점에 있는 옐가바로 이전하면서 방치되다시피 했으며,
1920년 일부는 학교로 이용되기도 하고, 공작식당은 학교체육관으로 사용했으며,
1933년 국립역사박물관이 인수하였다.
2차 세계대전 때 곡물창고로 쓰였다가 1972년 가치가 인정되어 박물관으로 복원을 시작했고, 1981년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으며, 2014년 복원 공사를 끝냈기 때문에 새 것처럼 보인다.
궁전외부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이라 안전감을 주기 위에 모두가 대칭이고,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했으며,
총 138개의 방 중에 40개만 개방했고, 정문은 비론 공작의 상징인 2마리 사자가 양쪽 기둥에 있다.
지하에는 화장실과 유물전시실 등이 있고, 1층은 레스토랑과 안내소가 있으며, 2층은 초록색 방, 황금 방,
화이트 홀, 침실, 블루 홀, 주보프 방, 슈발로프 가문 방이 있고, 청색과 회색 도자기로 장식된 벽난로만
80개 정도가 있다.
※안나 이바노브나(1730-1740): 이바노브나는 이반(5세, 1682-96 재위)의 딸이라는 뜻으로 표트르 대제의
조카인 안나는 1710년 라트비아 서쪽에 있던 쿠를단드 공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다.
결혼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편은 죽었으며, 그녀는 1730년 어린 나이의 표트로 2세가 죽을 때까지 쿠를란드
공국을 지배하면서 1727년부터 독일의 하층 귀족출신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과 부절한 관계를 가졌다.
1730년 실질적인 통치권을 가진 추밀원이 그녀에게 실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여제에
오르고 그녀는 애인인 비론에게 쿠를란드 통치자로 임명했고, 그녀는 근위병들이 추밀원계약에 반감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근위병을 믿고 추밀원의 포기계약서를 찢은 후에 추밀원을 해체한 후 전제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안나의 총신이자 애인이었던 요한 비론 공작과 발트 해의 소수 독일 고문관에 정치를 맡겼다.
상트페테르를 지키기 위하여 투르크와 전쟁(1736-39)을 하여 그로 인해 막대한 인명과 자금의 손실을
보았으며, 죽기 전 언니의 아들인 이반 6세를 지명하고, 섭정자로 애인 요한 비론을 임명하였다.
1740년 이반 6세의 어머니는 섭정자 요한 비른을 3주만(22일)에 유배시키고, 섭정은 어머니가 대신하였으며,
이반도 1741년 키예프의 마린스키 왕궁을 지은 옐리자베타 파블로브나에게 황제자리를 찬탈 당했다.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독일인 소피아는 16세 때 표트르 대제의 손자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온전하지 못하며 고집이세고 반항적인 것들이 그녀를 여제로 만들었는데 그녀는 미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상당한 매력과 비범한 예지와 활력을 가지고 궁중에서 품위 있는 독일 여성으로 러시아를 사랑한 그녀는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변경의 북쪽 나라인 러시아에 서구문화를 접목하려는 강한 의지를 품고 있었다.
에르미타쥐의 미술품 수집도 여기서 비롯되었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최소한 3명의 정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녀는 모두가 정부의 자식이었는데 그녀는 90명 정도의 정부와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업무를 엄격히 분리하여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였는데 예외로 투르크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크림반도와
흑해로 진출하게 한 '포툠킨'이었는데 그는 하급귀족 출신으로 그녀와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2년간의 정부생활을 끝낸 뒤에도 계속유지 하였으며, 포툠킨은 야심과 뛰어난 예지와 유능함을 겸비하였기에
그의 덕택으로 흑해에서 크림반도를 횡단하는 항해를 하여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스러운
행사를 했다.
성직자들이 소유한 토지와 봉토가 1/3나 되는 것을 전부 정부재산으로 이관하여 재정을 채우고, 성직자들은
국록을 받는 공직 집단으로 격하하였고, 1764년 폴란드를 1차 분할하여 애인 '포니아 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으로 앉혔다.
그녀의 통치기간에는 유럽과 전쟁을 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처리하여 폴란드 분할을 3번이나 하였고, 1792년
그녀는 독일인의 조상답게 유대인에게 거주, 재산, 직업을 제한하여 유대인들은 가난과 질병으로 죽게 하였다.
대제의 칭호를 받은 그녀의 걱정은 프랑스의 대혁명이 러시아에도 파급되는 일과, 후계자가 마땅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아들 파벨은 무능하며 침착하지 못하고 손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예카테리나 1세나 2세의 공통점은 둘 다 러시아 사람이 아니고, 둘 다 심하게 남자를 밝혔으며, 황제가 될 정도의
가문은 아니어서 왕위를 찬탈 점령했다는 점이다.
※로코코(Rococo) 양식: 프랑스 루이와 마담 퐁파두르가 막대한 비용으로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건축물에
장식한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며, 루이와 퐁파두르는 건축가, 조각가, 장식예술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다.
이 양식은 두 사람 덕분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745년 24살 나이로 지성과 미모를 갖춘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이 ‘로코코의 여왕’으로 예술계에 깊은 관심을 가져 아티스트들의 스폰서로서
잘 알려져 있다.
‘퐁파두르 풍’이라고 불렸던 많은 패션, 헤어스타일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앞서가는 미적 센스를 지니고
있어 당시 궁정 여성들의 패션을 선도했는데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향기로 체질 개선을
시도한 것이다.
음식에 향료를 넣고 음료에도 넣고 마셔 루이 15세의 관심을 받았으나 43세로 일생을 마친 그녀는 죽기
직전에도 자신의 얼굴에 연지를 칠해 달라고 했다고 하니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퐁파두르는 국왕과 정치, 예술, 양면에서 공동으로 협력했으며, 파리의 에콜 미리테르와 루이 15세 궁전(
지금의 콩코르 궁전), 베르사유의 콤피앙 궁전과 페티트 트리아농 궁전 등을 설계·건축했다.
유명한 도자기 공장을 세브레에 건축하기도 했고, 퐁파두르의 20년 전성기는 프랑스 양식의 최고 정점을
이루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가 전해준 비너스 병(성병)으로 냉이 심해 뒷물용 대야에 청결 소독제와 향수를
넣어서 사용한 것이 점차 발전하여 오늘 날의 비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룬달레 궁전(Rundale Palace) 관광]
리가에서 9시에 출발하면서 멀리서만 보았던 ‘라트비아 국립도서관’은 돌다리(Stone Bridge) 끝에 있으며,
이제는 리가를 벗어나 룬달레로 향했는데 룬달레는 리가에서 남쪽으로 가면 바우스카(Bauska) 시가 나온다.
바우스카에서 서쪽 약 18km 거리에 궁전만 있는 것은 휴식을 위해 여름 별궁으로 지었기에 계곡 속에 아담하게
궁전만 있고, 시와 시청은 궁전에서 서북쪽 1.5km 지점에 있으며, 리가에서 궁전까지 50km 정도 거리이다.
소요 시간은 1시간 정도인데 차는 식당에 두고 궁전까지 걸었고, 북서쪽으로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ㄷ’ 형의 왼쪽 아래로 들어가 한 바퀴 돌고, 위로 올라가 위쪽 우측으로 진행하면서 볼 것이라고 했다.
궁전에서 사진을 찍을 때 5유로이고, 삼각대를 사용하면 50유료였지만 올해부터 입장료를 인상하면서 무료인데
다만 플래시만 끄고 마음대로 찍어도 된다고 해서 요금에 대한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었다.
(초록색 방)
2층 대기실과 접견실로 쓰였던 ‘초록색 방’에 들어가 설명을 들었으며, 룬달레 궁전에 있는 모든 것은 본래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이와 똑 같은 건물은 세계 10대 흉가인 자메이카 몬티고베에 있는 로즈 홀이다.
그 이유는 궁전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행이도 이곳 진열품은 그 연대에 맞는 가구를 유럽 등에서 수집한
것이어서 가치가 높아 18세기 유럽 가구 전시관처럼 보면 된다고 했다.
그림도 복원 할 때 러시아 등지에서 데려온 뛰어나 화가를 초청해서 18세기 풍으로 그렸기에 이 또한 18세기
유럽 미술전시관처럼 보아도 되며, 푸른 자기로 만든 럭셔리(luxury, 호화 사치스러운)한 벽난로가 있었다.
벽난로는 다리가 있어 열기로 인한 바닥손실을 막아 주고 있는데 이 때 ‘불은 어디로 때냐?’는 질문이 나왔는데
화부들이 뒤편으로 들어가도록 문이 있었고, 이문은 벽과 똑 같이 해 놓아 잘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문틈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며, 화부는 좁고 어두운 곳에서 불을 땠고, 연기는 지붕 위에 있는
굴뚝을 통해 나갔고, 굴뚝 수만큼 난로도 있으나 요즘은 공동 굴뚝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굴뚝은 전문가가 1년에 꼭 한번은 청소를 해야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직업이어서 비수기 때는 정부가 보조해 주기 때문에 수입이 좋은 직업이라고 한다.
청소부는 모자도 옷도 신발도 모두 검지만 단추만은 금색인데 이 단추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이 궁전은 여름 궁전인데 난로가 있는 것은 7~8월에도 평균 온도가 20도 정도이기 때문이며, 벽지의 초록색은
실크이고, 누런색은 린넨(아마)라고 한다.
(황금의 방)
이 방은 1769년 12대 대공 페터 폰 바비른이 즉위식을 했던 곳이며, 작은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대공보다 직위가
높은 유럽의 왕실들과 유대를 계속하기 위해 초청했던 손님들의 환영식도 거행했던 장소라고 한다.
진열된 도자기는 무역을 했던 나라이기에 중국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작은 초록색 방)
이제는 환영식을 받았으니 파티를 하려 복도를 따라 화이트 홀로 이동 했는데 도중에 있는 작은 초록색 방은
대기실로 계단이 있다고 하며, 초상화와 난로 하나가 있었다.
(화이트홀)
이 홀은 원래는 예배실로 지어졌으나 20년 후 다시 개조하여 무도회장으로 바뀌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병원으로 사용했으며, 춤추는 여인들의 흰 옷과 잘 어울리도록 벽, 천장, 창문, 상들리에까지 하얀색이다.
화이트홀’에 달린 촛불 상들리에가 밝기에는 한계가 있어 창을 많이 낼 수 있는 3면에 방이 있는 ㄷ자 아래 끝에
있으며, 창문 위에서 천정까지 스투코 방식인 회반죽으로 만든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조각장식 중에 많은 아기들을 통해 당시의 생활풍습을 더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고 하고, 천장 중앙에는 어린
새끼와 함께 있는 황새가 있으며, 이 새는 여기서 길조로 여기는 것은 이 새를 보면 아기가 생긴다고 믿었다.
아이들이 ‘아기가 어떻게 생기나?’라고 물으면 ‘황새가 물어준다.’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발트 3국에서 가장 길조인 이 새는 리투아니아의 국조이며, 자기 마당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둥지를 만들어
주기까지 하는데 반대편 건물 지붕 굴뚝 위에 있는 황새 집도 크기가 대단해서 황새 궁전이라고 했다.
지금도 리가에서 1시간 거리이어서 국빈이 오면 연회 장소로 사용된다고 하며, 얼마 전에는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영화를 2주간 촬영했다고 하고, 그 이유는 그녀가 애인인 ‘주보프 백작’에게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방은 대공의 비밀 계단으로 만들었으나 일꾼들이 사용했으며, 지금은 스투코 장식대를 설치하여 일본과
중국에서 가져온 도자기를 진열했는데 도자기 진열대 앞에 평소에 없는 2개의 꽃이 장식되어 있다.
이 꽃은 오후 3시에 있을 결혼식 장식이라고 하며, 이 방은 일반인들에게도 빌려주며 결혼식이 있으면 우리는
밖에서 구경만 할 수 있고, 입장은 할 수 없는데 결혼식 전이라 다행이라고 했다.
※스투코(stucco): 이탈리아어로 골재나 분말, 물 등을 섞어 벽돌, 콘크리트, 어도비나 목조 건축물 벽에 바르는
회반죽인 미장재료이며, 굳으면 딱딱해져 건물의 방화성과 내구성을 높이고 아름답게 만든다.
4~5 세기경 조각에 적합한 석재를 구하기 힘들었던 탁실라에서는, 석회에 모래 등을 개어서 굳힌 스투코를 써서
간다라 고대 사원의 불상조각을 자유로운 소조기법으로 만들었고, 요즈음은 시멘트 모르타르(몰탈)로 만든다.
(이름 없는 방)
이제는 다시 돌아 황금의 방을 지나 중앙에 건물에 들어갔는데 주보프 방을 들리기 전에 이곳도 초록색 방이어서
접견실이거나 대기실 같은 곳으로 사용했을 것 같은 방을 지나갔으나 설명은 없었다.
(주보프 방)
중앙 건물은 국왕, 대통령, 공주 등이 사는 호화로운 방 즉 아파트먼트에 해당하는 곳으로 방이 2줄로 나열되어
있다고 했으나 복도 쪽만 보았기에 2줄로 나열 된 것을 느끼지 못했다.
바깥쪽 방은 침실 등 생활공간이고, 안쪽은 욕조, 변소 등 지극히 개인적인 방이라 했는데 첫 번째 방은 이런 것과
상관없이 러시아 가구로 장식한 ‘주보프 방’으로 그림 중앙에 큰 그림이 예카테리나 2세라고 한다.
‘주보프 방’엔 예카테리나의 사랑을 받았던 주보프(1767~1822) 형제의 초상화가 양옆에 있고, 여제는 형제를
위해 친히 궁전을 개조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지고 온 네오클래식 가구로 꾸몄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의 좌측은 군인출신이며 그녀의 애인 ‘주보프 백작’인데 그가 죽자 그의 형까지 애인으로 했으며,
우측이 형이라고 했으나 가이드는 설명하지 않았고, 공작이 사용했던 독서실에는 책장과 책상이 있다.
(장미 방)
장미 방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초록색 방은 손님 접견실이라고 하며, 별 설명 없이 지나갔고, ‘장미 방’엔 분홍색
벽지에 스투코로 만든 장미꽃이 줄기가 아래로 처졌고, 바닥도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나무 무늬를 짜 맞추어 결합(join)하는 방식으로 만든 것이며, 이 방은 천정에 있는 꽃의 연신 ‘플로라’에게
바쳤진 것이라고 한다.
(화장실)
화장실 앞에 있는 방의 설 합장 위에 울려진 도자기 2개는 변소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방향제를 넣어 둔다고
하며, 이곳 벽에는 풍경화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변소 입구 반대쪽 문 양쪽에는 궁전의 본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는데 옆의 문도 당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페인트를 칠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전은 주인이 바뀔 때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본래 것 위에 덧칠을 하고 또 그 위에 덧칠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하며, 복원 작업을 할 때 본래 것으로 하기 위해 덧칠을 베껴낸 장면이라고 한다.
좌측 벽에 있는 것은 세면대와 물통, 그 앞에 있는 것은 욕조로 좀 게 보이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체구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옆의 놋쇠 주전자 같이 생긴 것은 난로이라고 하는데 방 크기에 비해 작아 보인다.
아마도 작은 것은 여름 궁전이어서 크게 춥지 않은 것과 난로를 통째로 달군 뒤에 불을 담아 식는 것을
지연시킨 것으로 생각을 했으며, 자기로가 막혀 있는 의자는 비데(bidet)이고, 큰 나무의자는 변기라고 했다.
나무의자의 통속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대변 통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초상화 방)
다음은 ‘초상화 방’으로 벽마다 다른 초상화가 있었는데 우측 벽에 중앙에 있는 사람이 요한 비른이고, 우측
상단의 여인이 부인 베니냐(Benigna)라고 하며, 그 아래는 그녀가 낳은 어린 피터 비론의 모습이라고 한다.
좌측 벽 상단 왼쪽에 있는 사람이 피터 비른이고, 그 우측 여인이 3번째 부인 도로시아(Dorothea)이며, 아래
중앙에 있는 여아는 그녀가 낳은 딸인데 2명의 딸이 더 있다고 하며, 공국의 상속은 아들에게만 가능했다.
피터 비른은 아들도 없지만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협정으로 러시아에 편입되어 물려줄 공국도 없었다.
남자 4명이 있는 그림 중에 가장 크고 맨 위의 사람은 당시 쿠를란드가 조공을 바치던 가장 중요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연합국의 왕이라고 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지만 야기에오(요가일라)의 그림은 찾지 못했다.
그림으로 봐서는 요한 비론의 아들 피터 폰 비론 같았고, 그 아래는 제7대와 11대를 겸한 에른스트 요한 본 비른
공작으로 그는 키도 작고 인물도 없고 공부도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사교력이 뛰어난데 그 중 밤일도 잘해서 안나 이바노브나를 잡았고, 그녀가 황제가 되자 그 권력을 이용해서
막대한 부를 쌓아 궁전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일행이 비론이 연하인가? 라고 물었으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비론이 안나보다 3살 많았으며, 좌측은 프로이센 왕이라고만 해서 인터넷에서 가장 비슷한 사람을 찾은 것이
프리드리히 2세(대제, 1740-86) 이며, 우측은 우리도 알 수 있는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이다.
(침실)
이제는 벽난로에 불을 때는 화덕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을 보았고, 가이드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꼭
오른쪽만 보고 있으라고 당부해서 일행들은 순종을 했으며, 침실에 있는 초록색의 침대는 좀 작아 보였다.
가이드는 왕(킹)의 침대이기에 킹사이즈(크다)이나 방이 커서 적게 보이고, 당시는 체구가 작기 때문이고
했으며, 침대 위에 있는 글은 에른스트(Ernst)의 ‘E’자와 요한(Johann)의 ‘J’자가 합쳐진 것이라고 한다.
좌측 벽에 있는 그림은 비른 공작의 젊을 때이고 우측은 그 부인이며, 우측 벽의 그림은 피터와 그 부인이고,
바닥은 장미 방의 바닥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 후 이제는 모두 뒤를 돌아보라고 했다.
(정원)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아름다운 정원은 바로크 양식이라 이 침실을 기준으로 해서 좌우대칭으로 만들었고,
그 중앙에 원형의 연못과 분수가 있었는데 정원에는 입장하지 않으며, 이 분수대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여자 한분이 셀프촬영을 위해 뒤 걸음 치다가 이 연못에 빠졌는데 창피하고 스마트폰 못 쓰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여권 손상으로 출국을 할 수 있을 런지는 출국장에 가봐야 알지만 여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은 가방 안쪽에 있어 많이 젖지를 않아 잘 말려 출국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방)
이제는 핑크색 벽지로 장식된 리셉션 홀로 사용하던 이탈리아 방에 도착했는데 전에는 바티칸과 이탈리아 그림을
스케치로 남겨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바뀌었고, 중앙 제일 큰 그림은 피터 공작이라고 한다.
그는 이탈리아를 좋아해서 여행도 했는데 당시는 카메라가 없었기에 스케치한 그림(5458)을 걸어 놓고 보았다고
하는 곳은 초록색 방(블루 홀)으로 ‘이탈리안 살롱’이라고도 한다.
(식당)
우아한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식당은 공작가족이 식사를 하던 식탁에는 6명이 앉을 수 있도록 리셋(reset) 되어
있었는데 여기 사용된 자기 그릇은 독일 황제들이 사용하던 것과 똑 같은 것이라고 했다.
(게임 방)
이제는 당구대 하나가 있는 ‘게임 방’으로 이동했는데 게임기보다 벽에 있는 그림들이 더 볼만 했는데 가장 큰
그림은 피터 공작이고, 여아 2명과 같이 있는 여성이 3번째 부인 데리고 도르시아(도로테아)리라고 한다.
쿠클란드 공국은 남자만 대공으로 즉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페터 폰 비른은 아이를 못 낳은 2명의 부인을
버리고 3번째 결혼했으나 그녀도 4명의 딸만 낳았으나 대공은 물려줄 공국도 없었으니 오히려 다행?
(슈발로프 가문의 방)
마지막 방은 1795년 애인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선물로 받은 ‘주보프’가 일찍 죽어 그의 부인 ‘올가(Olga)’가
궁전의 마지막 주인이 되었고, 그녀는 러시아왕가 슈발로프와 재혼하여 남편 소유로 바뀌었다고 한다.
올가 그림 왼쪽 아래가 ‘주보프 백작’이고, 우측이 슈발로프 이며, 올가는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 모든 가구를
러시아로 반출하여 남은 것이 없었는데 이 여인 때문에 본래 것이 하나도 없게 된 이유라고 한다.
지하에서 조각을 보면서 다시 바깥으로 나왔으며, 우리는 이것으로 딱 1시간 궁전의 관광을 마치고, 차가 주자된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라트비아를 떠나 리투아니아의 샤울레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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