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주석
〔28-29〕
이 가르침은 소년을 돕지 못한 제자들의 무능력 때문에 시작되었다. 예수의 대답에서 이 설화의 교훈은 제자들의 관점에서 총괄되는데 물론 마지막 대목의 이차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총괄된다.
여기에 놓여 있는 문제는 물론 마르쿄의 문제가 아니라 귀신축출 활동이 한계에 부딪쳐서 당황하게 된 한 교회 공동체의 문제이다. 마르코 이전의 설화에서는 귀신축출 활동의 비결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의 문제였으며 마르코에게는 신앙이 문제였다. 기도를 통해서만 축출될 수 있는 그런 귀신들이 있다는 가르침은 구체적인 조언으로 이해된다.
기도를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거나 마술적인 수단으로 평가한다면 이 가르침의 진지성은 상실될 것이다. 따라서 마르코에게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그의 신앙에 대한 관심과 결부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보다 원칙적이고 덜 직접적인 교회 공동체의 문제들을 취급하는 마르코는 다른 곳에서도 기도와 신앙을 결합시칸다(11, 23-25).
실제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Grundmann)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필사본들이 기도에 금식을 첨가한다. 그러나 금식을 첨가하는 것이 그것을 생략하는 것보다 그럴 듯해 보이기 때문에 간단한 본문 “기도하지 않고는”이 본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본문의) 확대는 널리 퍼져가는 금욕적 태도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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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는 제자들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회상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설화를 여러가지로 손질하였다. 이 설화가 잠시 예수가 자리에 없었음을 전제했다는 사실이 변모했던 산으로부터의 예수의 귀환 이후에 이 설화를 첨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의 소란스런 장면은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한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은 제자들의 태도를 중점적으로 문제 삼으려는 복음서 저자의 관심을 가리킨다. 제자들의 무능과 아버지의 태도를 대조시킴으로써 그의 관심이 충족된다. 예수와의 대화에서 신앙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제자들의 무능이 그들의 불신앙에서 바롯된 것임이 암시된다.
23-24절의 대화는 치명사건의 극적 성격 외에 이것을 능가하는 극적 성격, 즉 신앙을 위한 싸움의 극적인 성격을 마련한다. 기적은 신앙을 위한 싸움에 종속된다. 기적이 신앙의 싸움에 종속되는 일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에 의해 아버지가 아들의 관심사를 완전히 대변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신앙과 치유는 전능한 신앙을 지닌 예수와의 전폭적인 신뢰 관계 속에서만 얻을만한 능력있는 승리자로서 입증될 수 있다. 아버지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이 모범적이므로 제자들에 대한 비판은 약화되는 것 같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예수의 전능한 신앙 속에 받아들여지는 일은 추구해야 할 목표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19절의 탄식과 28-29절의 가르침은 새로운 빛 속에 놓인다. 요청되는 기도는 신앙의 순수한 표현으로 되는 반면 하나님 아들의 탄식은 예수의 신앙에서 구별된다.
마르코는 일찌기 인간의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 생기는 알력을 알고 있었다. 모든 신자는 어느 정도 불신자이며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는 불신앙 속에 신앙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치유의 모든 잘못된 자기 보장을 포기하고 무조건적으로 예수에게 결속됨으로써만 신앙은 주어질 수 있다
〔영향사〕
학자들은 자주 이 단화를 예수의 변모와 대립하는 설화로 보았다. 베다는 서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골랐다. 변모설화에서는 산의 정상에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데 여기서는 낮은 지대에서 불신앙에 빠진 인간들과 대결한다. 앞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하늘소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귀신들과의 투쟁이 있다. 그러나 산에 올랐던 예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예수의) 이런 취지는 이 문맥에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라파옐(Raffael)의 그림 “변모”{La Trasfigurazi。ne)의 의도에 부합하는데 이 그림은 (변모설화와의) 이런 대조가 잘 나타나 있다.
교부들은 이 단화에서 시작하여 자주 간질 현상을 다루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리게네스의 견해를 따랐는데 그는 이 질병의 의학적 해석에 대해 항의한다 “의사들은, 더러운 귀신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질병 현상이 있다고 봄으로 (질병을) 언제나 지연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들의 자연적인 설명에 따르면, 이 질병은 습기가 습한 성질(Natur)이 있는 달빛을 따라 사람의머리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병자의 질병이 더렵고 귀먹은 벙어리 귀신에 의해 생겼음을 복음서가 분명히 말해 준다고 믿는다.”
4세기에 의사 포세이도니오스(Poseidonio잉가 이 견해에 반대하였다, 여기서 논박하는 의학이 우리의 관점첨에서 보연 원시적인 것이겠지만 부차적이며 시대에 제약된 것안데 그는 이것을 신학적 논술의 중심에 놓고 분명히 신학적 권한을 넘어서서 논박함으로써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불행했던 관계를보여 준다. 이러한 입장이 신학적 권한을 넘어 선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신학자들이 아직도 많다. 이 단화의 중심에 신앙이 놓여 있다는 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서 알려져 있지만, 예수가 가능케 하는 신앙은 간질이 귀신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아니다. 후자의 신앙은 신앙이라 말할 가치가 없지만 이 단화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다는 신앙의 전농에 관한 진술(23절)을 이렇게 펑가한다 : “기만적이지 않은 신앙은 구원을 위해 구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 아버지의 반응은 신앙에 진전이 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완전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불신자이다.” 이 사려 깊은 가톨릭 조직 신학자는 24절을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귀절로 평가한다. 그는 펠라기안주의나 반(半)펠라기안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은총론에서 이런 명가를 내린다. 35)
하느님의 한없는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보았던 칼빈에게는 신앙의 심리학이 보다 중요했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주님의 풍부한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탓이 아니며 은혜가 감질나게 조금씩 흘러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협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중간하게 믿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에게서 배울 수 있다. 칼빈이 23절에 대하여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 그리스도는 온갖 축복이 아버지로부더 그에게 (그 신앙에로) 전해짐을 가르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는 칼반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직접 하느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전능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르트는 제자들의 불신앙을 예수에 의해 열린 신앙의 자유와 대조한다. 제자들은 전적으로 안에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밖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에 의지하려 할 때에 그들은 밖에 있는 것이며 그들이 은혜로 자신들을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안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의존하려는 의지의 극복, 인간의 행위, 즉 거짓 종교의 극복이 참 종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23-24절과 공관복음서 기적 보도들의 비슷한 귀절들에 대하여 “단독적으로 사용된 신앙개념이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구조적 특성을 설명해 준다”고 보는 에벨링 (G. Ebeling)은 보다 본문에 근접해 있다. 신앙개념의 구체적 내용은 그것이 관련된 구체척 상황, 즉 본문의 경우에 있어서는 질병의 상태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신앙의 전능에 대한 진술은 신앙하는 자가 하느님과 경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활동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자신의 것을 준다는 사실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신앙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고 절망할 이유가 있으나 믿을 이유가 있는 무력한 자라는 사실에 의해 강조된다. 따라서 단독적으로 신앙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신앙은 “구체척으로 만나게 되는 하느님과 구체적으로 관련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양식에 비추어 볼 때 예수 자신을 신앙으로부터 제외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일깨운 신앙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일깨우는 분은 자신의 신앙에 관해 말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다른 이들의 신앙을 일깨우는데) 투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