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서기 1010년. 물론, 거란의 최종 목적은 고려 정벌이 아니다. 거란은 중국 본토의 송(宋)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후방을 안정시키고 송과 고려의 연합을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고려를 치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고려는 강조가 나서 흥화진에서 잘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 후 개경이 함락되자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1009∼1031)은 어쩔 수 없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고, 몽진 도중 공주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현종은 고달프고 힘든 피난(避難)의 노정(路程)에서 당시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였던 김은부(金殷傅)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김은부(金殷傅). 전란의 와중에 국운과 가문의 이 놀랍고도 극적인 반전을 일구어낸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초기 1530년에 발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산군조에 보면 안산을 본군(本郡)으로 삼는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안산 김씨가 바로 김은부의 집안이다. 김긍필이 1024년(현종 15년)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그의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世居)하면서 안산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이다. 안산 김씨가 고려 초기 문벌의 반열에 오른 것은 김긍필의 아들, 바로 김은부(金殷傅) 때이다. 나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바로 이 김은부가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큰 딸에게 어의(御衣)까지 지어 바치게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그 딸이 왕비(王妃)가 되니, 그녀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그녀는 훗날 덕종(제9대)과 정종(제10대)을 낳게 된다. 또한 그의 두 딸들 역시 현종의 비(妃가) 되어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된다. 그리고 원혜왕후는 문종(제11대)을 낳게 된다.
뿐만아니라 그의 큰 아들인 김충찬(金忠贊) 역시 현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 어사대의 정6품 벼슬)가 되고, 덕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중추원의 종2품 벼슬), 정종 1년(1035년)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오늘날의 국방부장관)를 지내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김난원(金欄圓)은 출가(出家)하여 문종 때 개경의 영통사에 있었으며 화엄종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훗날 문종은 왕명으로 넷째 왕자 후(煦, 대각국사 의천)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는데, 김난원이 바로 그 왕자의 스승이 되어 화엄교관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후에 김난원은 ‘경덕국사(景德國師)’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김은부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고 외손자들이 왕이 되니 가히 당대 최고의 집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안산 김씨는 고려 현종에서 문종대에 이르는 장장 4대 50여 년의 세월을 권력의 중심부에 있게 된다. ![]() 신대광 (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최종편집 : 2008-01-25 11: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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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