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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제1장
기찻길에 갇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는 교리 하나에 조심스럽게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 교리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대한 놀랍고 자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그들이 선택할 모든 결정을 포함하는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완벽한 계획은 마치 기찻길과 같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놓친다면, 당신은 필경 잘못된 종착지에 도착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당신이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경을 읽거나, 내적 감동을 따르거나(보통 “점검 사항”이나 “조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외적인 표지를 해석하는 것이 있다.
나는 몇 가지 점에서 이 생각에 도전을 하겠다.
그 교리는 성경적이 아니다
우선, 이 교리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당신은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개개인의 신자에게 고유하고 세부적이며 미리 정해진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생각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절은 성경 전체를 볼 때 네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이 책 뒷부분의 후기에 있는 성경구절을 참조하라):
1. 하나님의 영원한 뜻.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이 되고 모든 것을 아우르며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계획을 말한다. 그것은 주님의 중심 목표와 궁극적인 의도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영원한 계획(엡 3:11)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시는 동력이 되는 한 가지의 뜻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창조와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것은 우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한 가지 뜻이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에베소서 3:1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전 세대에는 숨기셨다. 그것을 신비로 가리시고 자기 아들 안에 숨기셨다. 전능하신 분은 그것을 어떤 피조물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결정하셨고, 심지어 천사들에게도 알게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주님은 그의 자비하심 가운데서 기다리셨다.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리셨다. 주님은 무엇을 기다리셨는가? 주님의 마음에 있는 감추어진 비밀을 알게 하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특권을 받을 특별한 그릇이 태어나기까지 기다리셨다. 그 그릇은 교회였으며, 그 안에는 당신과 내가 포함되어 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3:9~10
오랜 세대 동안 감추어진 신비… 하나님의 영원한 뜻… 주님의 궁극적인 계획…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다소의 바울에게 이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권과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창조의 신비와 그 모든 것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영원한 계획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나의 책, 영원에서 지상으로(From Eternity to here)를 참조하시라).
2.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뜻”이라고도 부른다. 이 뜻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이 하시거나 허락하시는 뜻은 무엇이나 주님의 주권적인 뜻이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시며, 그 의미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전지(全知)하시다. 즉,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주님은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과 과정과 결과를 아신다.
그러면 영원 전으로 한번 가 보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미래를 아신다. 모든 사건이 주님의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주님은 개개의 인간이 범하게 될 모든 행동도 보신다. 주님은 또한 전지(全知)하셔서 주님이 보시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꾸실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셔츠의 단추를 내일 잃는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것을 보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힘도 가지고 계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그것이 미래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다면(주님이 보신 것을 바꾸실 수 있다), 내 단추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함께 가는데, 그것은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주님의 주권이나 “허락하시는 뜻”이다.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그것을 당신에게 계시하실 때에만 당신은 그 일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책을 읽어 보시라. 만약 역사책이 정확하다면, 당신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인데, 그 이유는 주님은 그것을 아셨고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우리에게 숨겨졌지만, 주님의 도덕적인 뜻은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것을 바라시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도덕적인 뜻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예를 들면,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 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완전한 뜻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주권적이거나 허락하시는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거절할 수 있게 허락한다.
4. 주님의 교회에서 은사와 소명을 나눠주시는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몸의 지체들이 자리를 잡을 곳을 정하실 뜻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몸의 지체들에게 은사(恩賜, 선물)와 소명(召命, 부르심)을 나누어주신다. 신자들은 주님의 몸에서 각각 다른 지체이기에(어떤 이는 손, 어떤 이는 발 등-고린도전서 12장 참조), 은사와 부르심에 대한 주님의 뜻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은사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은사와 부르심을 받는다. 나아가, 주님은 종종 자신의 일과 관련하여 자신의 종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이런 식이었다.
이런 네 가지의 용법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난다. 후기(後記)에 기록된 성경구절들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각각의 구절을 그 문맥에서 읽어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 결코 그리스도인마다 다른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계획을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것을 달리 말하자면, 당신이 내려야 하는 모든 결정을 포함하여 당신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 교리는 믿을만하지 않다.
이 교리는 또한 믿을만하지 않다.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가르침을 따라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오늘 아침에 당신의 삶에 일어난 일을 말해보겠다.
일어나자마자, 당신은 침대에서 일어날지 아니면 좀 더 잘지를 결정했다. 당신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할지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의 침대의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할지를 결정했다.
그 후에 당신은 즉시 침대에서 나갈지를 결정했다. 즉시 욕실로 가서 이를 닦기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하기로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방을 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로 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떤 결정을 했다. 만약 당신이 샤워를 한다면, 당신은 샴푸를 머리에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면도를 할 지 말 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당신의 몸의 어느 쪽을 먼저 씻을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당신은 언제 옷을 입을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당신은 무슨 옷을 입을 지를 정했다. 만약에 양말을 신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 양말을 먼저 신을지도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구두를 신을지 결정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어느 쪽 신발을 먼저 신을지 결정했다.
당신은 이제 아침식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했다.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면, 어디서 먹을 지, 무엇을 먹을 지, 그 음식을 어떻게 준비할 지를 결정할 것이다.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면, 어디로 가야 할 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주문할지를 정해야 했다. 당신은 웨이터에게 어느 정도의 팁을 줄 지를 또한 결정했다.
요점: 오늘 아침에 당신은 수없이 많은 결정을 했다.
이제, 방금 언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에 대해서도 주님께 주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말하기를, “프랭크 형제여, 당신이 방금 말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인도를 해 주셨소… 나는 이런 모든 결정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그 뜻을 묻고 있소. 그리고 성령께서는 나를 인도하여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알려주신다오.”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하나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두뇌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당신은 즉시 외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추가로, 당신은 진실을 말하는데 문제가 있다. 내 말의 요점은 이 교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교리는 미성숙을 부추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대부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기찻길의 관점을 가지고 살도록 성장해왔다. 내가 관찰해 본 바로는 그것이 전체적으로 미성숙(未成熟)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 교리를 따르는 많은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이 가장 어리석은 결정과 이상한 결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프랭크 형제, 나는 해가 내리쬐는 밖에 앉아 하나님 앞에서 결정을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되죠.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나에게 신호를 보내신다는 것을 알아요.”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은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드온처럼 양털을 밖에 두게 한다. 나는 과거에 이런 문제로 정죄의식에 빠졌다. 내가 곧 알게 된 것은, 이것은 새 언약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한번 있었다. 그 조건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양털을 사용하는 방식과 너무나 다르다. (만약 당신이 “양털을 밖에 두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사사기 6장을 읽어보라.)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사사기 6:36~3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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