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온(溫)이요 성(姓)은 조씨(趙氏)로 그 선계(先系)는 한양(漢陽) 사람이다.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낸 조휘(趙暉)가 그 고조(高祖)이고,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낸 조양기(趙良琪)가 그 증조(曾祖)이다. 삼중 대광(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이 그 조고(祖考)이고, 순성 익위 협찬 보리 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이 그 선고(先考)이다. 양렬공의 계실(繼室)은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딸이니, 양렬공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매서(妹壻, 매제(妹弟)를 말함)인데, 고려 말에 국사(國事)가 다른 성씨(姓氏, 조선 태조를 가리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곧 양양(襄陽)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마쳤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공은 양렬공의 맏아들인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기어 개국 공신(開國功臣)ㆍ정사 공신(定社功臣)ㆍ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세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양절공(良節公)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 때에 공의 유상(遺像)과 대대로 간직해온 문적(文籍)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에 공의 언행(言行)ㆍ사적(事蹟)과 관력(官歷)ㆍ생졸(生卒)을 모두 고찰할 수가 없다.
이에 보첩(譜牒)과 전기(傳記)에 뒤섞여 나오는 것을 살펴보면, 공의 증손자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가 쓴 족보(族譜)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양절공과 양경공(良敬公)은 효성스럽고 염결(廉潔)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함으로써 함께 훌륭한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특히 양절공은 협찬한 세 가지 큰 공훈에 있어 모두 의(義)로써 적절하게 처신하였으며, 공훈의 상사(賞賜)로 받은 것들을 살림이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서너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으므로 말[馬]조차 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또 밥상에는 별미의 음식이 없었고 좌석에는 두터운 요조차 없었으니, 연세가 여든이 되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변함없이 살았다.”고 하였다. 양경공은 곧 공의 아우인 우의정(右議政) 조연(趙涓)이다.
또 전하기를, “양절공이 별세한 뒤에 그 아들이 집을 새로 짓고서 양경공을 초청하여 낙성(落成)을 하였는데, 양경공이 그 집에 이르러 정제(庭除, 뜰의 층계)를 보더니 당(堂)에 앉지도 않고 나가버리며 말하기를, ‘백씨(伯氏)께서 살던 집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그랬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이 선인(先人)의 검소한 덕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돌로 계단을 만들었으니, 나는 너희 집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련다.’고 하니, 여러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공의 손자인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은 항상 여러 자제(子弟)들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석갈(釋褐, 과거에 급제함을 말함)한 날부터 선조(先祖, 조온을 말함)께서 행하신 바를 흠모하였으나 나는 선조처럼 해내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의 자제로서 만일 세상에 입신(立身)을 하고서도 혹시라도 양절공의 뜻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지은 문절공(文節公)의 비문(碑文)에도 그 세계(世系)를 서술하면서 또한 ‘공의 청덕(淸德)과 준절(峻節)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노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공의 평생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호귀(豪貴)하고 분화(芬華)한 생활은 여러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것이므로, 예로부터 훈귀(勳貴)의 가문(家門)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빈천하게 살아가기는 쉬워도 부귀하게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공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원훈(元勳)으로서 벼슬이 극품(極品)에 올라서 가문이 융성하고 총광(寵光)이 혁혁하였으되, 모든 것을 한결같이 청렴하고 검약함으로써 자신을 다스렸으며 마치 가난한 선비처럼 조촐하게 살았으니, 탁절(卓絶)한 조수(操守)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공의 선비(先妣)와 부인(夫人)은 모두 어떤 성씨(姓氏)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인은 모씨(某氏)라고 말하기도 한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부사(府使) 이중경(李仲慶)과 호군(護軍) 윤희전(尹希錢)과 직장(直長) 이소인(李紹仁)이 그 사위들이다.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대대로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높은 벼슬에 오른 자들이 끊이지 않으니, 덕을 두텁게 쌓으면 복록이 오래 이어진다는 옛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공의 장지(葬地)는 교하현(交河縣)의 모좌 모향(某坐某向) 언덕에 있는데, 옛날에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쓰러져 부서졌다. 이에 공의 8세손(世孫)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극선(趙克善)이 그 일을 슬프게 여기고서 여러 종인(宗人)들과 도모하여 재력(財力)을 모아 비석을 다듬고 장차 비문을 새기어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아들인 조창한(趙昌漢)이 뒤를 이어 성사시켰다. 장령(掌令, 조극선을 말함)은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나아가 장차 크게 쓰이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병이 들어 죽었으며, 조창한은 선친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양절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이 또한 비문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온 [趙溫]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