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번째 시집 **
** 최정아의 『혼잣말 씨』. 흔적’을 통해 ‘있었음’의 과거에 도달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최정아의 이번 시집은 ‘흔적의 박물학’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흔적의 모티프들로 채워져 있다. 이 ‘있었음’에 대한 추구가 ‘그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최정아의 시에서 ‘흔적’에 대한 관심은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가 화자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화자의 내면이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대화’로서 드러나는 이 ‘그리움의 세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건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최정아 시의 발성은 우리가 오랫동안 ‘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왔던 언어이자 세계의 본래면목이다.
기억과 그리운 흔적의 박물학 《문학의전당 시인선》 201.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정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최정아의 시세계는 상처의 시간과의 재회라는 실존적 고투에서 점차 가족적 기억의 세계 바깥으로 확장되고, 시적 관심의 층위에서 그것은 ‘가족’이 중심에 위치한 기억의 문제에서 한 존재자의 부재를 확인하며 시간의 갈피를 더듬어 나가는 ‘흔적’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전자에서는 ‘기억’이 중요한 문제였다면, 후자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부재를 통해 존재했음을 증언하는 ‘흔적’이 시인의 주된 관심이다. ‘흔적’이란 부재를 거슬러 올라가 존재에 도달하려는 의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흔적’을 통해 ‘있었음’의 과거에 도달하견지하는최정아의 이번 시집은 ‘흔적의 박물학’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흔적의 모티프들로 채워져 있다. 이 ‘있었음’에 대한 추구가 ‘그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최정아의 시에서 ‘흔적’에 대한 관심은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가 화자에게 건네는 말인 동시에 화자의 내면이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대화’로서 드러나는 이 ‘그리움의 세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건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최정아 시의 발성은 우리가 오랫동안 ‘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왔던 언어이자 세계의 본래면목이다.
<< 출판사 서평>>
**식지 않는 기억**
주관적 감정 위에 건설되는 시적 세계에서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되불러오는 지성적 작업이 아니라 특정 경험을 실존적 맥락에서 ‘사건화’하는 감성적?감정적 작업에 속한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 ‘기억’에는 일정한 왜곡?망각?과장 등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시적 세계에서 ‘기억’은 한 인간 존재의 내면을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실존적인 가치를 지닌 일종의 부분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볼록거울’처럼 대상을 왜곡한다. “기억이란 오목하고/가끔은 찌그러진 곳이 티눈처럼 박혀 있어도 좋다”(「볼록거울」). 우리가 한 시인의 시세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그 ‘블록거울’에 반복적으로 비치는 풍경일 수밖에 없다. 기억의 실존적 가치는 그것이 좀처럼 억압 또는 망각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인은 이 기억의 불멸성을 “기억은 식지 않는”(「지난 슬픔」)다고 표현하는데, 최정아의 시에서 잊히지 않는 이 기억의 원초적 장면들 대부분은 ‘가족’에 할애되고 있다. 가령 그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더운 눈물”(「지난 슬픔」)이 난다고 고백하다가도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오지 않는 엄마”(「빈자리 가족」)를 원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또한 “엄마를 배워야 할 시간에 할머니를 배우는 아이”(「빈자리 가족」)와 “보호자도 없이 혼자 걷는 아이”(「아홉수와 놀았다」), “문밖의 아이”(「업둥이」)를 등장시켜 불행했던 유년을 회고하기도 하고, “나는 엄마의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열로/모욕도 참아내고 슬픈 일도 견뎌내는 것이다”(「태열」)처럼 ‘엄마’와의 유대, 즉 “더웠던 기억”에 의지하여 고난의 현실을 이겨내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기억’은 양면적인 가치를 함축한 시간으로 경험되고 있다. 그리하여 시집 전체에 흩어져 있는 ‘기억’에 관한 진술들 역시 기쁨과 슬픔이라는 상반된 감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양면적 가치가 양적인 평형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 듯한데, 그것은 “기억은 머릿속에 등불 하나 다는 것이라 해서/그 환하지 않은 가물거리는/불빛 하나 들고 참 멀리도 걸어 도착한 문간”(「앵무새」)처럼 기억이 주는 상처보다는, 기억 이전의 기억, 즉 ‘엄마’와 연결된 원초적 기억이 시세계 전체를 이끌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이 힘겹게 도착한 문간이 “경로에는 최초의 기억만 남아 있다./알에서 깨어난 곳으로 회유.”(「닭들의 이동경로」)처럼 모성과의 상상적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은 “아버지의 얼굴 반쪽이 생각나지 않는” 세계, ‘아버지’라는 이름의 “낯선 야수와 함께 사는 가족”(「마스크」) 세계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세계이다.
이름은 외고집으로 하나만 허락했다 나는 발칙한 양딸이어서 내 이름 부르면 날카롭게 두 번 대답하고 새 옷을 사주면 진흙에서 뒹굴었다//(…중략…)//기차 소리 나는 방향에 가출을 두고 보살폈다 엄마는 팔이 네 개였고 기차 소리가 레일을 벗어나 기울어진 바람으로 흔들렸다 비스듬한 고대를 삐딱한 고개라고 양엄마는 흉을 봤다//두 번의 초경을 겪었고 여러 개의 사춘기가 찾아왔으나 두 개만 허락했다//(…중략…)//몸에서 물의 통로가 하나씩 사라질 무렵 친엄마가 불쑥 찾아왔다 팔월의 매미였다 누가 진짜 엄마일까 어린 날은 그치지도 않고 훌쩍거려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양딸」 부분
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원초적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이 물음에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출생을 “나는 새벽의 얼굴을 하고 있고 첫 발견자를 엄마로 정한다. 언제 울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울었고 젖이 안 나오는 엄마를 한동안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되돌아갈 수 없는 사실이 가족이 되었다.”(「업둥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존재에게는 생의 첫 순간부터가 문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업둥이의 삶을 “본성(本姓)이 먼 곳에서 소문으로 살고 있었지만/얼굴을 알 수 없어 본래의 타성(他姓)으로 살았다.”(「업둥이」)라고 쓰고 있다. ‘본성’과 ‘타성’, 즉 두 개의 성(姓)의 문제는 “두 개의 화장대”, “두 명의 엄마”와 맞닥뜨리는 분열적 경험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린 화자가 이런 분열적 경험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이름 부르면 날카롭게 두 번 대답하고 새 옷을 사주면 진흙에서 뒹”구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기차 소리 나는 방향에 가출을 두고 보살폈다”라는 진술처럼 현재의 가족을 벗어나는 꿈을 꾸며 성장했을 것이다. 이런 방황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사춘기를 지나던 어느 날, “친엄마가 불쑥 찾아왔”으나 소녀는 끝내 “누가 진짜 엄마일까”라고 묻지 못했다. 이처럼 최정아의 시에서 ‘가족’은 늘 결핍된 대상으로 존재한다.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가족들이 모여 앉으면 거기엔 발화의 근거지가 된다.”(「발화점」)라는 진술처럼 ‘분란’의 불씨를 일으키는 가족은 현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빈자리들만으로 한 가족을 만들 순 없을까”(「빈자리 가족」)라고 자문하는 까닭은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가족이 이미-항상 결핍된 상태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스프링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사는/스프링벅은 위험하다./펼쳤다 접히는 갈피마다 스프링이 튕겨 오른다./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어떤 형태로 묘사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달을 놓친 날/무릎들로만 걸어가는 가족을 본다./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말없는 무릎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질주의 좌석에 앉아 있다./엎질러진 기억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고 불러보려다/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벅을 생각한다./스프링 노트를 찢다보면/바위산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도는/뿔만 남은 산양들이 있다. ―「스프링벅」 전문
이 시가 ‘스프링벅’과 ‘스프링 노트’ 간의 유사성, 더 직접적으로는 ‘스프링’이라는 소리와 ‘탄성’이라는 성질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쓰였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유사성의 관계로 인해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 “스프링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 같은 문장들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사성의 발견이 가져다주는 유쾌함이나 신선함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화자가 스프링 노트를 펼치자 ‘스프링벅’의 점프처럼 순식간에 지금-이곳으로 튕겨 오른 것, 즉 화자가 “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이라고 표현한 것의 실체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노트를 펼치는 행위를 과거의 시간을 회상 또는 기억하는 행위라고 말한다면, 화자의 기억의 밑바닥에는 지금도 “엎질러진 기억을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 불러보려다”처럼 ‘아버지’라는 가족적 존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벅을 생각한다.”라는 진술은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족’을 잊으려는 의지에 관한 것이다. 화자는 과연 가족적 존재들이 불시에 튀어나오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노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화자의 이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귀결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스프링 노트를 찢”음으로써 오래된 시간과의 결별을 다짐하지만 “가장 화려하게 핀 꽃나무”(「발화점」)에서조차 ‘슬픔’을 발견하는 화자가 그 결별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그리움에도 불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우리의 발화의 불길은 어디에서 오는지/어떤 소리 눈물로도 진화가 안 된다.”(「발화점」)라는 고백적 진술이 설명하듯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것이 화자의 바깥 세계가 아닌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안다. 이 세상의 모든 상처는 근본적으로는 내상(內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작 「혼잣말 氏」에서 화자가 설명하고 있는 말, 즉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말”, “다른 사람과 섞을 수 없는 말”, “괄호도 없는 혼잣말”이 무엇이고, 또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세계가 화자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실상은 화자의 내면이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대화이고, 따라서 “질문과 대답의 자웅동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독백-대화이다. 이처럼 최정아의 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건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을 통해 한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우리가 오랫동안 ‘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왔던 언어이자 세계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