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학총서2]견본(작고 인물)
안재극(安在極. 1879~1940) 애국지사. 성리학자. 문인
□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字)는 기오(箕五), 호는 사암(思菴)이다. 1879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장평에서 태어났다. 6세에 『白首文』을 배우고, 11세에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일찍 문리를 깨쳤다. 16세 되던 1894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운강(雲岡) 이강년(1858~1908)을 찾아가 항일 의병활동에 가담했으며, 24세에 의당(毅堂) 박세화(1834~1910)의 문인이 되어 평생 성리학을 연구했다.
□ 연보
16세(1894) 운강 이강년의 좌운(坐運. 문서담당 참모)이 되었고, ‘토동격문(討東檄文)’을 지어 전국 각 읍에 배포하였다.
17세(1895)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운강 선생을 다시 찾아가 ‘의병소집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1896년 정세가 날로 흉흉해짐에 따라 민심 안정과 의분을 단결시키기 위해 효유문(曉諭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24세(1902) 제천 덕산면 억수리 용하구곡 내 불억산에서 강학하는 박세화 선생을 찾아가 문하가 되었다.
25세(1903) 박세화의 명을 받아 춘천 가정자(柯亭子)에서 의암(毅菴) 유인석(1842~1915)이 개최한 향음주례에 참석하였다.
26세(1904) 9월 박세화가 화양동에 강회를 열 때 사례(司禮)로서 『孟子』 ‘거천하광거장(居天下廣居章)’을 강의하였다. 겨울에는 <서전(書傳)>의 ‘기월300장(朞月三百章)’을 저해(著解)하였다.
27세(1905) 을사조약 체결로 박세화가 문경 관산에 진을 칠 때 동문인 채형주와 함께 진역에 가담했으나 박세화의 병으로 거사하지 못했다. 뒤에 박세화는 피체되어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29세(1907) 1907년 군대해산 후 이강년과 재기를 약속하고, 각 읍에 통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그 해 3월 단양에서 이강년을 주축으로 재기할 때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와 함께 종사관이 되어 작전을 보좌하였다. 각지에서 토적하던 윤기영, 김상태, 하한서 부대 등이 모여들었고, 이강년을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추대하고, 삼도 14읍을 전전하며 수천의 왜적을 토벌하였다.
1908년 전국 의병이 13도창의군을 결성해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강년 부대는 강원도 인제, 간성, 양양, 횡성 등지를 누비며 적참과 수비대를 소탕하고 서벽에서 적 수 백을 도륙하고, 말 200필을 노획하였고, 봉화와 재산에서도 적 수 백을 섬멸하였다. 그 해 6월 청풍의 금수산을 넘던 중 기습을 받아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이강년은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되어 그 해 8월 순국하였다.
1915년 5월 이강년의 장남 창주(蒼洲) 이승재가 내방 인근 동지들과 다시 의거할 것을 다짐하고 인재 선발과 재원 확보 등을 준비키로 하고, 모든 보고는 선생이 정하였다. 이승재와 함께 중장군인 윤희선과 교련관인 안춘흥과 전 동지 유시연, 노병대, 주시혁, 서상업, 이응수, 정희섭, 허달 등을 찾아다니며 기의(起義)할 것을 약속하고, 소집 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1916년(38세) 2월 단양에서 의기를 높이 드니, 의병의 수는 7,300여 명이었다. 각 참모장들이 50명씩 병력을 거느리고 유격전을 펴는데, 선생은 제천, 이천, 장호원, 진천 등지에서 적 14연대 보병 2개 중대를 상대로 접전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1917년(39세) 진천에서 제천으로 행군하던 중 이승재가 적정(賊偵)인 일진회원 박준호에 의해 음독되어 죽사 이지선, 석초 한양이와 함께 대전 유성 참봉 박용규의 집에 당도하였으나 이승재는 절명하였다. 선생이 국내에 순국 통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1918년(40세)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의병 행적은 눈치 채지 못했고, 1912년 흑복(黑服)과 단발에 복종하지 말 것을 신당 채형주 등과 서신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아 사문하였으나 수일 만에 풀려났다.
1919년 「운강대장(雲岡大將 李公傳)」을 저술하여 배포하였다.
1923년(45세) 박세화가 항거할 때 남긴 ‘예의조선(禮義朝鮮)’ 네 글자와 시 2수를 판각 탁본하여 각 지에 몰래 배포하고 우국지사를 양성하는 한편 조국광복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교 경로를 통하여 민족의 한을 풀어보고 학문을 강론코자 중국의 석학 영봉 하진무와 서신 왕래를 하였다.
1932년(54세) 일제는 선생이 제자를 양성하고 중국과 교류함을 알고 삭발과 창씨로 박해를 가하자 견딜 수 없어 가산(嘉山 산북 가재목)으로 들어가 화를 피했다.
1934년(56세) 삭발강요가 더욱 심해져 손영조 집에서 화를 피하니 양홍대, 안승락, 종질 진악, 가손 영구 등이 따라가 글을 읽었고, 지방 유생들이 운집하였다.
1936년(58세) 1936년 오성유상(五聖遺像)의 소지(小識)를 짓고, <경제잠(敬薺箴)>과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발문을 썼다.
1937년(59세) <예재문집(藝齋文集)>의 발문을 지었다.
1940년(62세) 3월 제자들의 주선으로 초상을 모사하였다. 선생의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그해 6월 19일 별세하셨다. 향년 62세였다.
1947년 『사암문집(思菴文集)』 6권 4책이 제자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995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음.
2011년 4월 17일 제천 유림들의 합의로 병산영당(屛山影堂)에 추봉되었다.
□ 문집
『사암문집』(『思菴文集』)은 1947년 사암의 손자 안영구(安泳龜. 1915 ~1973)가 간행했다. 국학연구회에서 2012년 『문경의 고서와 도서해제-문경문원1』에 문집을 해제해 실었다. 아울러 이회문(李會文)이 사암집 서문을 번역하여 실었다. 이어 안재극의 증손 안중식(1942~ )이 『思菴集』 번역 출간 준비를 하여 2020년 3월 30일 『思菴安在極先生文集』(752쪽)을 간행하였다.
□ 사상과 시가(詩歌)
안재극은 존사(尊師) 존화양이(尊華攘夷) 의식을 일생의 신조로 삼고 이를 시가(詩歌)로 표출했다. 시대정신은 국권수호와 국권회복으로, 경술국치 전후 현실 대응양상의 전형은 항일투쟁이며 시문학도 그런 정신을 담았다. 안재극은 사상과 척왜정신을 시가로 표출하여 현실성, 진실성, 계도성을 담아냈다. 표현기법은 비유를 잘 활용하여 문예미도 양호하다. 안재극의 시가는 내용과 표현미가 우수하여 항일문학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안재극은 특히 스승의 사상을 높이 받드는 존사의식이 남달랐다. 「思菴銘 幷序」에서 보이듯 스승 박세화의 사상을 계승, 항일투쟁으로 실천하여 가르침에 보답했다.
‘중국문물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화양이 의식도 강했다. 「答林子儀[郭]」에서 자신의 스승 의당 박세화가 존화양이를 엄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答南致道 亨元」에서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구차하게 사는 것은 존양(尊攘)하는 춘추의 대의가 아니라고 일갈했다. 「與蔡文翼[東鎮]」에서도 채동진의 존화의식을 예찬하고 있다. 「答蔡通汝」에서는 단군 기자로 이어지는 예의조선의 기개를 계승하여 오랑캐가 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의식은 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의 시는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적 비유 표현으로 시격을 높이고 있다.
「주흘산(主屹山)」에서 안재극은 자신의 평소 날카로운 척왜 의지를 주흘산의 우뚝하고 날카로움에 비유하였는데, 시적 기교가 매우 뛰어나다. 「은폭동 재속리산(隱瀑洞 在俗離山)」에서는 자신의 척왜항일 의지를 거센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과 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특히 「화산자취가(華山自炊歌)」를 지어 화산에 오기까지 과정을 읊고 있다. 화산에서 은거하며 스승에게 배운 학문을 노래하고 존화양의의식 등 시국 정세에 대해 토로했다. 서양열강들이 침입해 와도 눈보라에도 굳건한 소나무 잣나무와 같이 저항하겠다는 투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華山自炊歌」는 안재극 인생 좌우명이자 불변의 항일투쟁 결의가(決意歌)라 할 수 있다.
「華山自炊歌」 (화산에서 자취하며 부른 노래)
元會天將半, 元會 하늘이 장차 반절인데,
姤豕方躅躑. 姤卦의 어린 돼지 바야흐로 뛰고뛰네.
氣機滾倒處, 기운의 기틀이 거꾸로 흐르는 곳에,
三才失衡尺. 三才가 저울과 잣대를 잃어버렸네.
天發淫殺氣, 하늘이 음살기를 발하니,
彗孛屢見厄. 혜패의 妖星이 자주 재액을 보이네.
地發淫殺氣, 땅이 음살기를 발하니,
蛇龍入處宅. 뱀과 용이 집에 들어와 사네.
人發淫殺氣, 사람이 음살기를 발하니,
腥血九野赤. 비린내 나는 피가 아홉들에 뻘거네.
汩蕩爲洪[水降]. 홍수와 강수가 어지러히 질펀한데,
劓劉森戈戟. 창과 칼이 삼엄하게 코를 베고 죽이는구나.
詭秘爲鬼𧌒, 비밀히 속임수는 귀신과 물여우가 되었고,
噬嚙吹虺蜴. 씹고 물어뜯은 도마뱀이 독을 부는 구나.
鳳圖無消息, 봉황과 河圖는 소식이 없는데,
蚓書幻骨骼. 지렁이 글씨가 골격조차 변하는구나.
舞新夸毗者, 신식에 춤추며 자랑하는 사람들은,
目古反隱僻. 옛것을 보고서 도리어 숨기고 편벽하게하는구나.
抑此幾皇甫, 문득 이곳에 몇몇 선비들이,
洸潰怒轉益. 광궤하여 화냄만 점점 더하네.
舟人職熊구, 배 젓는 사람들은 곰털 가죽옷에 직위를 갖고,
狡童主關石. 교활한 아이들이 關石을 주관하네.
草芟縫章類, 풀을 베듯이 선비들을 막아 버렸으며,
仇視孔朱籍. 공자와 주자의 책을 원수처럼 보는구나.
心隨形俱倒, 마음은 얼굴따라 함께 거꾸러져,
大綱一朝革. 큰 기강 하루아침 변혁되는구나.
蠢爾云云士, 어리석은 너희들은 말끝마다 선비라 하면서
嫣然視秦瘠. 웃음 짓으며 남의 환란을 바라보네.
世乏拳踢力, 세상에 拳踢하는 힘이 결핍하였으니
灰死疇距闢. 재 같은 죽음을 누가 막고 물리치리,
熇熇崑炎棘, 이글이글 산불이 가시나무에 타오르니
玉石不可擇. 구슬과 돌을 가히 가릴 수가 없네.
鎖舌徒囁嚅, 혀를 봉해서 다만 말하려다가 그치고,
累足頻跼蹐. 발을 동여 매어서 자주 절룩이누나
硜硜朝陽子, 도를 행하려는 외골수 朝陽子가,
抱經靡所適. 경전을 안고서 갈 곳이 없구나.
往年在嘉山, 지난 해 가산에 있을 적에,
飽喫風雪劇. 눈보라의 혹독함을 실컷 맛보았네.
歸來鐵綱裏, 돌아오니 철망속이며,
羅織去益窄. 벌리고 짜여서 갈길 더욱 막히었네.
擡頭三蹙額, 머리를 들어 세 번을 이맛살 찌푸리고,
拊心長寤擗, 가슴이 길게 뛰는 것을 실감한다.
何處是梁碭, 어느 곳이 피난 할 梁碭인고,
華山萬仞碧. 꽃재산이 萬 길이 푸르구나.
畫鹿遊町畽, 낮에 사슴은 밭고랑에 노는데,
巖雲巡簷隙. 바위 구름은 처마 틈에서 맴도는구나.
里俗太淳厖, 마을 풍속은 너무도 순후한데,
借我東箱席. 나에게 동쪽 책방 자리를 빌려주었네.
擔鼎暨糇奨, 솥과 양식과 간장을 짊어지니,
筮衾件簡册. 이불 상자에 책고리도 짝을 지었다.
五生從而後, 五名의 生徒가 뒤를 따르니,
饔飧供朝夕. 솥에 밥을 지어 아침저녁 공양하네.
乘暄獵薪返, 햇볕나면 땔나무 꺾어 날랐으니,
松葉棲兩腋. 솔잎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오네.
輪回爨又爨, 돌아가며 불을 때고 또 밥 지으니,
群粒鼎中[口畫부르짖은 획].모든 쌀이 솥가운데 오글오글 소리나네.
列坐讀書熟, 나열해 앉아 글을 익숙하게 낭독하니,
楚聲增氣魄. 초나라 소리가 기백을 돋구는 구나.
一人大雅讀, 한 사람이 『詩傳』 「대아」편을 읽으니,
詠嘆西雍澤. 서옹의 혜택을 길이 감탄했네.
一人二典讀, 한 사람은 『書傳』의「요전」「순전」 二典을 읽으니,
神化上下格. 신통한 조화가 위와 아래로 이르네.
一人讀魯語, 한 사람은 『논어』를 읽는데,
仲尼渾無跡. 孔子님 도가 세상이 혼탁하여 자취 없도다.
一人讀思傳, 한 사람은 思傳을 읽으니
明誠揭日白. 밝은 정성이 밝은 해에 걸렸도다.
一角學小學, 한 총각은 소학을 배우니,
昭示明命赫. 명명의 혁혁함이 밝게 보이네.
嘐嘐狂且簡,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 열광하고 또한 간략하며,
言必稱古昔. 말끝마다 반드시 옛날을 칭찬하네.
佩服忠敬訓, 충성하고 공경하는 가르침을 차고 다니어,
行可孚蠻貊. 오랑캐 나라에 가더라도 믿음을 주네.
甚人能會此, 무슨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는고?
萬鍾不能易. 萬鍾의 祿을 주더라도 바꾸지 아니하네.
天乎來復否, 하늘이여 復卦가 회복이 회복 될까말까.
不須問龜策. 모름지기 거북점을 쳐서 물어 보지 않네.
况乎五洋風, 하물며 五大洋의 바람과,
雪噴薄中莫. 희박하나 막막하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如小華山上, 작은 화산 산마루에,
獨秀干雪栢. 눈보라 속에서도 잣나무가 홀로 빼어난 것 같네.
忍痛含寃此一翁 애통을 참고 원통을 머금은 이 한 늙은이
遼天萬里雪堆中 요동의 하늘 만 리 눈 쌓인 속에 있네.
四千餘載中華脉 사천여 년 중화의 정맥
五百來年列聖功 오백년 이래 여러 임금의 공적이라.
歲莫能寒松栢勁 날씨는 송백의 꿋꿋함에 춥게 하지 못하고
春無不到海山瀜 봄은 산해에 포근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라.
屈伸有感看於易 굽혔다가 폄에 느낀 것이 있어 주역을 보는데
耿耿燈光徹夜紅 깜빡이는 등잔 빛이 밤새도록 붉구나.
*글쓴이: 권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