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굴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 이사야 6 장 8 절 |
시대적 상황
기원전 8 세기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남부 유다 왕국을 도덕적으로 재무장 시키고자 일생을 헌신한 예언자이다. 기원전 8 세기부터 우시아 왕, 요담 왕, 아하즈 왕그리고 히즈키아 왕 때 활동을 하였다. |
구성
이사야서는 총 66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이사야: 1-39장 아하즈와 히즈키야의 통치시절, 기원전 735-687년 : 심판,이사야 제 2 이사야: 40-55 장: 다윗 왕조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가져온 바빌론 침공과 유배시절 : 586-539 년 제 3 이사야: 유배 이후 이스라엘의 재건 시절(539-500 년)을 다룬다. 회복 |
내용상 구분
제 1 이사야: 아시리아인들의 억압과 침략에 앞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집중한다.
제 2 이사야: 다윗 왕조에 대한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고, 예루살렘은 중요한 실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적인 상징으로 제시되며 성전에 관해서는 단 한 번 언급한다. 44 장 28 절
제 3 이사야: 다윗 왕조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메시아 시대에 예루살렘이 가지게 될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선포. 제 1 이사야 39장까지는 기원전 8 세기에 살았던 이사야의 기록으로 주로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다루고 40 장 이후는 유대 역사에서 훨씬 뒤인 바빌론 포로기를 다루고 있다. |
겸양
이사야는 위험한 국제 정세 속에서 유다 왕국의 생존을 지켜 내리라 믿었던 우시아 왕이 죽자 실의에 빠진다. 우시아 왕은 유다 왕국에서 가장 성공한 왕 중에 한 명이었다. 52 년간 통치하면서 유다 왕국을 외세로부터 굳건히 지켰고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다. 다른 왕들은 예루살렘 성안에 안치된 반면 그는 성 밖 들판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 ‘그는 나병 환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의하면 우찌야는 마음이 교만해져 자신이 사제 역할을 하며 제단에 스스로 분향을 하려 했다고 ‘역대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제 80 명이 우찌야 왕의 진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려했다.
우찌야에게는 왕이라는 역할이 있고, 제사장에게는 다른 역할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의 노력을 할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
우찌야는 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성경은 우찌야가 권력자에게 요구되는 ‘겸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자 신의 저주의 상징인 나병에 걸렸다고 기록한다.
‘겸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일에 매진하는 헌신이다. 우찌야는 제사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다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나병을 앓았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별궁에서 홀로 살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때 국제 정세에서 아시리아 제국이 새로운 근동 지역의 강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장소
이사야는 궁중 최고 고문으로서 유다의 태평성대가 사라지자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묵상한다. 그리고 신을 만나기 위해서 지성소로 들어가기로 마음먹는다. 지성소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위치한 특별한 장소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보관했다는 궤가 위치한 장소이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종교 축제일인 대 속죄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이다. 대제사장은 1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들어가 가운데 있는 분향단에 희생의 피와 향을 피운다.
지성소는 예루살렘 성전 왼쪽 끝에 위치한 가로, 세로 4.5 미터의 정사각형 공간으로 빛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지성소의 원래 명칭은 ‘코데쉬 핫-코다쉼’ 으로 ‘가장 거룩한 장소’ 라는 의미이다. 이 공간은 신이 인간 가운데 존재한다는 특별한 표식이다.
이사야는 신과 인간이 만나 하나가 되는 장소 ‘신적인 합일’이 가능한 지성소에 들어간다. 지성소에 들어가자마자 신이 높게 들린 어좌에 앉아 있고 그 신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찬 것을 본다. 이사야는 천상의 의자에 앉아 우주를 주관하는 하느님을 본 것이다.
우찌야 왕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자 통치자라고 생각했던 이사야는 지상의 통치자는 잠시 왕으로 위임받은 것일 뿐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사야는 조그만 씨앗을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는 생명의 약동과 암수 동물의 씨로 모든 생명을 잉태시키는 생명의 신비를 조절하는 주인을 본 것이다.
이 주인은 지상의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하늘 높이 천상에 거주하는 존재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그것을 착복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왕은 그가 착용하는 왕관과 왕복으로 자신을 표시한다. 신의 표식인 그의 옷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 차 있고 어좌 위에는 여섯 개의 날개가 달린 ‘스랍seraphim’ 이라는 존재가 있다.
이들은 두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려 신을 직접 볼 수 없게 하고,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발, 몸을 가려 신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며, 나머지 두 날개는 자유롭게 두어 신의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한다.
이 스랍이 후에 천사로 발전하는 천상 존재가 된다. 이 스랍은 영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사람들의 진입을 막기도 하고, 신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 거룩한 공간과 일상 공간의 중간에서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신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부른다.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표시하는 것으로 신은 ‘가장 거룩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
거룩하다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코데쉬’는 본래 의미는 일상으로부터 ‘구분된’, ‘분리된’, ‘다른’, 이라는 뜻이다.
독일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거룩’의 개념을 ‘비이성적이며 비감각적인 경험이나 자신을 넘어선 중요하면서도 갑작스러운 대상에 대한 감정’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절대 타자라고 했다. 절대 타자 는 내게 익숙한 ‘에고’에서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무아 상태로 진입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다름’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체험한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체험할 수 없으며 우리가 부수적인 것들을 버리고 나 자신에서 벗어났을 때 만나게 되는 분이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다.
이사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전까지의 세계관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무너지고 하느님의 세상을 체험하고 ‘오, 나는 망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 이사야가 느낀 것이 ‘거룩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발견과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회개’라 한다. |
회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단순히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외로 가득한 신비한 세계를 경험 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완전히 부순 뒤 미지의 세계로 설레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회개를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그 의미 또한 ‘오래된 자아를 새로운 자아로, 나를 넘어서는 자아로 대치하는 행위’이다. 히브리어로는 ‘슈브’라고 하며 예수님이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는 ‘타브’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신이 인간에게 심어 놓은 신의 형상, 신의 DNA 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신을 대신해 (pro)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 (phet) 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을 담을 수 없는 ‘입술’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전까지 하느님을 빙자해 자신이 전한 것들이 부질없는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실하게 회개한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눈으로 하느님을 보니 자신은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이렇게 거룩함을 경험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의례가 바로 ‘정화’이다. 이사야가 이것을 느꼈을 때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숯을 가지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에 갖다 댄다.
‘활활 타고 있는 숯’을 입에 댓다면 입술이 다 타버렸을 것이다. ‘숯’은 모든 것을 정화한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입술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입술이 정화되면 마음도 정화된다.
스랍은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라고 한다. |
거룩함이라는 것
신의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 이사야는 천상회의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회의에서 신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사야가 이러한 천상회의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대답한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주십시오.’ 이제 이사야는 이 세상에 태어나 그럭저럭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소명을 받고 그 일을 자신의 삶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변화된다.
이사야의 말을 들은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 한다.’하고 일러라. ” 하느님이 이사야에게 하신 이 말의 의미를 당시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외국어를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그 언어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온 세상에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뜻을 알려주고 들려주어도 우리는 신의 언어를 판독할 수 있는 문법을 모르기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도 우리에게 우이독경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주의 신비를 마주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신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 이 사람들은 내 말을 듣기는 참 잘 듣는 것 같으나,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이 보기는 참 잘 보나, 알지 못한다. ’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누이 경고한 문구이기도 하다. |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하느님은 성읍이 황폐해 주민이 없어지는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즉 유대 민족이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 절실하게 깨달을 때까지 방치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 사라진 것과 같은 그 상황에서 그런 유대 민족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에 비유해 다 잘리더라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어 그곳에서 다시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고 풍성하게 잎을 낼 것이라고 말한다.
신의 ‘거룩한 씨’가 바로 그루터기라고 선포한다. 거룩함이라는 씨앗의 히브리어는 ‘쩌라 코데쉬 serah qodesh’이다. ‘쩌라’는 동식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 즉 ‘정자, 난자, 씨앗’을 의미한다.
‘쩌라’는 자체만 보아서는 생명의 신비를 가늠할 수 없지만 이 씨앗을 통해 모든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하느님은 우주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을 바로 ‘거룩함’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곧 다가올 유대 민족의 멸망을 준비하고 과거의 안이한 삶의 모습들, 특히 자신들만이 신을 섬기고 구원받았다는 자만심과 우둔함을 일깨워 줄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숨어 있는 거룩한 씨앗을 찾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거룩한 씨앗은 나 자신을 넘어 위대함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