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이단이라 공격하는 이에게 두 번째 변증.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의 전승과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신학사상을 정리하여 체계화시킨 탁월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또한 그의 신학은 청교도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변증으로서 그의 설교 및 주석에, 특별히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청교도 준비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을 시작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전개한다. 즉, 첫째는, 창조주의 주권적 선하심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Inst, 1,2,1). 믿음은 “머리(brain)보다는 마음(heart)이고, 이해(understanding)보다는 성향(disposition)인데,” 그 이유는 “믿음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만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Inst, 3,2,8). 따라서 구원 얻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지성(mind)의 설득뿐 아니라 마음(heart)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또한 포함한다. 그는 믿음은 교인들을 “전적인 무지”로 남겨두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 굴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음을 논하는데 있어 지식을 강조했다(Inst, 3,2,2). 하지만 지식에 대한 칼빈의 개념은 머리로 깨닫는 지식뿐 아니라 마음(heart)으로 깨닫는 지식까지 포함했다.
이와 같이 구원 얻는 믿음은 머리와 마음 둘 다 사로잡는 지식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춰진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스럽고 겸비한 인식을 포함한다. 칼빈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스스로를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심사숙고함으로써 낮아지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결코 얻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의롭고 올바르며 지혜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Inst, 1,2,1)라고 말한다. 또한 “스스로를 정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됨이 없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저주에 대한 두려움과 극심한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회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칼빈은 율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성시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라고 말했다. 칼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는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그는 또한 신자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하는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그는 디모데전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한 사람도 예외자 없이 하나님 앞에 모든 이를 부른다. 율법은 아담의 모든 자손을 정죄하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내쳐져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과 지옥 불에 삼켜지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어떤 다른 소망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가 된다. 이제 하나님께서 천둥이 몰아치듯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지는 자비를 향하여 반드시 달려가야 한다...우리 안에는 단지 영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 겸비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구해야 한다.
기독교 강요 제 2권 7장 11항(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는 굴레가 된다)에서 바울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기능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즉,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종류는 자신들이 덕이 있고 의롭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들을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들을 꺾어 겸비케 하여 전에는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었다고 깨닫지도 못하던 것들을 추구하도록 그들을 준비하도록 해준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재갈이 필요하다. 즉, 그들이 의에 대한 모든 추구를 포기하게 할 정도로 날뛰는 육신의 정욕을 재갈로 억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때때로 정욕이 맹렬히 불타올라 육욕으로 향하는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망각과 멸시로 빠져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이 구조책을 강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왕국의 기업을 상속시키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즉시 중생시키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공포 아래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신다(벧전 2:12). 이 공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정결하고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들에게 참 경건을 가르치기에 유익한 공포심을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아주 많은 증거가 있으므로 예를 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기간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냈던 자들은 모두 다음 사실들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율법의 굴레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어떤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도록 얽매어 있다가, 마침내 성령에 의해 중생되어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3권 2장 23항 (두려움과 떨림)에서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가르칠 때, 사도는 우리가 주의 권능을 높이며 자기를 대단히 낮추는 것이 습관화 되도록 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마음에 확신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을 믿지 말 것과 자신의 파멸 상태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경배하리이다”(시 5:7).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올바로 결합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 앞에 나아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며, 그 위엄 있는 광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며 항상 두려워하는 사람은 복되다고 한 솔로몬의 말(잠 28:14)도 참되다. 그는 우리를 괴롭히며 넘어지게 만드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조심성 있게 만드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 본래 혼미한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며, 낙심했던 마음이 그의 안에서 소생되며, 절망에 빠졌던 마음이 그를 의지함으로써 새롭게 회복된다.
그러므로 신자가 무서워하는 동시에 확신에 찬 위안(慰安)을 얻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신자는 눈을 자신의 허무에 돌렸다가 하나님이 참되심을 상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속에 공존(共存)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실로 그것은 대조적이지만 나태함과 염려가 공존하는 것과 같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하나님조차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추궁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백성이 겸손케 되도록 훈련시키시며, 그들이 역전 분투하는 동안에 자제를 통해 능히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게 하신다. 문맥상으로 보아, 사도가 말한 의도는 분명히 이것이었다. 즉, 그는 두려움과 떨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올바른 의욕과 과감한 실천력을 주신다고 한다(빌 2:12-13).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경외(敬畏)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라고 한 선지자의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낳을 뿐만 아니라, 낙심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의 감미로움과 즐거움은 그 사람의 마음을 경외심과 동시에 찬송으로 가득하게 채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권능에 겸손히 복종하게 한다.
기독교 강요 3권 2장 22항 (올바른 두려움)에서 “두렵고 떨림”(빌 2:12)은 믿음의 확신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굳세게 만든다. 불경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 예를 보고, 그것을 자기들에게 주는 경고로 생각하여 같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때에, 신자들은 이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진다. 또한 자신의 가련한 상태를 반성하여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주를 떠난 자신들은 바람같이 불안정하며 덧없는 존재인 것을 깨달을 때, 신자들은 두렵고 떨리는 경험을 한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벌을 일일이 묘사하는 이유는 고린도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같은 악행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려는 때문이다(고전 10:11). 사도는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나태함을 흔들어 깨울 뿐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직접 인간을 준비시키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고 말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나님께서 죄인을 준비시키시는 한 예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간절함(눅 19:1-10)을 들었는데 주석에서 “여기서 아직 삭개오가 믿음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간절함은 믿음을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보기를 아주 진지하게 갈망했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화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종종 인간들에게 은밀한 갈망을 부여하시는데 이러한 갈망은 그들을 그분께로 인도한다.”고 기록했다.
기독교 강요 3권 3장 3항 (죽임과 살림)에서 회개는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죽임이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영혼의 슬픔과 두려움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죄를 진정으로 알게 된 때에는 죄를 참으로 미워하고 혐오하기 시작하며, 다음에 진심으로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자신이 비참하고 잃어버린 자인 것을 인정하며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더 나아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큰 충격과 타격을 받게 된다. 교만이 꺾이며, 낙담하여 떨며,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회개의 첫번째 단계이며, 보통 "통회"(contrition)라고 불리운다(회개가 일어나기 전에- 성령께서 준비시켜 주심을 말함). 또한 그들은 "살림"을 믿음에서 생기는 위안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살림"이란, 죄 의식으로 절망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즉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깨닫고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며 용기를 회복하고, 말하자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바르게 이해된다면, 회개의 의미가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림"을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받는 행복감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림"이란 거룩하고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소원, 곧 중생에서 생기는 소원을 의미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 위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죽는다고 하는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