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초 이만응 선생
이만응(李晩應, 1857~1938)선생은 화서 - 유중교ㆍ이진응 문인으로 의병장이다.
자는 경덕(敬德), 호는 구초(九樵), 본관은 전주이다.
구초는 1875년 정사 9월 18일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서 부친 도빈(道彬 ; 1805~1886)과 모친 배천 조씨(1825~1897)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구초는 천성이 어질고 행실이 의연하며 기상과 위용이 특이한 데가 있었다.
일찍이 화서 이 선생의 고제인 성제 문하에서 백형 직헌공과 더불어 도학과 의리를 배우면서 특히 직헌공의 훈도를 받았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귀하게 여기고 이단을 천히 여기는 것과 존중화양이적은 인간의 주범(主範)라 했고 척사위정의 의리정신이 확고부동하였다.
조선 말기 왜노(倭奴)가 창궐하고 그 주구(走狗)들이 개혁이란 미명하에 갑신ㆍ갑오ㆍ을미년에 이적정변을 일으켜 국가 멸망과 식민통치를 자초하였다.
이 천인공노할 정변에 분노한 충의기절지인이 을미년 12월에 국권회복과 복수보형을 외치고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이때 공은 종조 이면수, 종형 이소응, 백형 이진응, 아우 이경응 등과 거의를 의논하였는데, 모친 조씨가 경계하기를
“효당갈력(孝當竭力)이요 충즉진명(忠則盡命)이니 무이노모려(無以老母慮)하고 위토적복수(爲討賊復讐)하라. 벌이보형(伐夷保形)하여 행물화어이적금수(幸勿化於夷狄禽獸)는 즉시소망언(則是所望焉)이라”
하였다.
이에 춘천부로 들어가 홍시승ㆍ유중악ㆍ유홍석 제공과 더불어 기의하였다.
공은 습재공을 대장, 이면수를 군사장, 이면응을 전군장, 이경응을 순무장으로 하는 등 의진을 편성하고, 그 아장(亞將)으로서 춘천 을미의병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수천여명의 의진은 대장 습재의 지휘하에 서울로 진격중 가평에서 새로 부임한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曹寅承)을 춘천으로 잡아들여 처단하였으나 보납산 싸움에서 경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구초는 춘천관찰사로 부임한 족질 이재곤에게
“조정에는 왜적과 그 주구들이 개화를 빌미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국권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그들에 의해 국모가 처참하게 시해되고, 그들에 의해 금상(今上)과 왕세자께서 머리를 늑삭당하고, 백성이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등 나라가 보존되지 못하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어 백성들이 의분이 터져 아우성인데, 하물며 나라의 녹(祿)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입은 선원(璿源)으로서 의병을 해산하라니, 도대체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누구의 후손인가. 나라를 사랑하고 인군에 충성하는 충정으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의병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
하고 꾸짖었다.
이에 재곤은 잘못을 사과하였다.
구초는 백형을 장수로 전열을 정비하여 춘천 약사원에서 관군과의 싸웠으나 장수 직헌이 순국하는 등 패퇴하여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의진을 수습하여 이경응에게 맡겼다.
공은 노모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춘천을 떠나 여주군 금사면 주녹리로 은거하여 곤궁한 생활을 하다 보통리로 이주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구초는 고종 1886년에 춘천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1906년에 주녹리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예로써 거상에 임하고 애통하였다.
구초는 철종 1857년 9월 17일 춘천에서 출생하여 임정 21년 1938년 7월 23일 몰하니 향년 82세이다.
배위 진천송씨는 재정(在定)의 딸로 부덕(婦德)과 용자(容姿)를 갖추었다.
묘소는 양평군 개군면 앙덕산 계좌에 합장하였다.
구초는 항상 순국한 백형(晉應)을 생각하고 아우를 사랑하면서 나라가 왜에 의해 강점당한 것을 절통하게 여겼다.
왜의 통치하에서도 지조를 지켜 선원의 체통과 민족 자존심을 유지하였다.
구초가 『가정훈행록(家庭訓行錄)』을 지어 자손에게 훈계하였는데, 특히 장질 이재구에게 처세에 대해 간곡하였다.
손자 윤용에겐 부지런히 글 읽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며 오륜을 행해서 효도에 힘쓰고 처세를 잘하고 유행을 경계하고 존양에 힘쓰라고 훈계하였다.
미루어 보면 여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구초의 묘는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에 있는데, 묘갈명(墓碣銘)은 장삼현이 짓고, 묘표(墓表)는 이구용이 지었다.
정부에서는 2002년 8월에 건국공로로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愛國志士全州李公諱晩應墓碣銘 幷序
公의 諱는 晩應, 字는 敬德, 號는 九樵, 姓은 李氏이니 本貫은 全州이다. 宣祖大王의 第九子 慶昌君 珘는 妣貞嬪 병환때에 沐浴齋戒하고 快差를 하늘에 빌고, 대변을 맛보아 吉凶을 豫見하는 등 매일같이 孝誠이 至極하였는데 諡號가 孝獻이니 이 분이 派祖가 된다. 八代祖 昌興君 諱 脩는 孝行으로 旌閭됐고, 六代祖 花平君 諱 橃은 五衛都摠府都摠官을 수차 역임했다. 高祖의 諱는 至, 曾祖의 諱는 惟英, 祖의 諱는 淵初이다. 考의 諱는 道彬이고 母親은 白川 趙衍五의 딸이다.
公은 天性이 어질고 行實이 毅然하며 氣像과 偉容이 特異한 데가 있었다. 일찍이 華西李先生의 高弟 省翁門下에서 伯兄 直軒公과 더불어 道學과 義理를 배우면서 특히 直軒公의 訓導를 받았다. 聖人의 道를 貴하게 여기고 異端을 賤히 여기는 것과 尊中華攘夷狄은 人間의 主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斥邪衛正의 義理精神이 確固不動하였다.
朝鮮末期 倭奴가 猖獗하고 그 走狗들이 개혁이란 美名하에 갑신, 갑오, 을미년에 利敵政變을 일으켜 國家滅亡과 植民統治를 自招하였다.
이 天人共怒할 政變에 분노한 忠義氣節之人이 乙未年 十二月에 國權回復과 復讐保形을 외치고 全國에서 봉기하였다. 이때 公은 從祖 勉洙, 從兄 昭應, 伯兄 眞應, 弟 景應 諸公과 擧義를 議論하였는데, 母親 趙氏가 警戒하기를 “孝當竭力이요 忠則盡命이니 無以老母慮하고 爲討賊復讐하라. 伐夷保形하여 幸勿化於夷狄禽獸는 則是所望焉이라” 하였다. 이에 春川府로 들어가 洪時承ㆍ柳重岳ㆍ柳弘錫 諸公과 더불어 起義하였다. 公은 習齋公을 大將, 勉洙公을 軍師將으로 하는 등 義陣을 편성하고 그 亞將으로서 춘천 을미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數千餘名의 義陣은 大將 習齋公의 지휘하에 서울로 진격중 加平에서 새로 부임한 관찰사 겸 宣諭使 曹寅承을 春川으로 잡아들여 처단하였으나 寶納山 싸움에서 京軍에게 敗하고 말았다.
公은 춘천관찰사로 부임한 族姪 李載坤에게 “朝廷에는 倭賊과 그 走狗들이 開化를 빌미로 權力을 마음대로 휘둘러 國權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그들에 의해 國母가 처참하게 弑害되고, 그들에 의해 今上과 王世子께서 머리를 勒削당하고, 百姓이 강제로 削髮을 당하는 등 나라가 보존되지 못하고 生死의 갈림길에 서있어 百姓들이 義憤이 터져 아우성인데, 하물며 나라의 祿을 먹고 나라의 恩惠를 입은 璿源으로서 의병을 해산하라니, 도대체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누구의 後孫인가. 나라를 사랑하고 人君에 忠誠하는 衷情으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義兵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하고 꾸짖었다. 이에 載坤은 잘못을 謝過하였다.
公은 直軒公을 將帥로 戰列을 정비하여 춘천 藥司院에서 官軍과의 싸웠으나 將帥 直軒公이 殉國하는 등 敗退하여 進退兩難의 岐路에서 義陣을 수습하여 景應公에게 맡기고, 公은 老母를 모시고 家族과 함께 춘천을 떠나 驪州郡 走鹿里로 隱居하여 곤궁한 生活을 하다 보통리로 이주하여 後學을 양성하였다.
公은 高宗 丙戌年에 춘천에서 父親喪을 당하고, 丙午年에 走鹿里에서 大夫人 喪을 당하였는데, 禮로써 居喪에 임하고 애통하였다.
公은 哲宗 丁巳 九月十七日 春川에서 출생하여 臨政二十年 戊寅 七月 二十三日 享年八十一歲로 서거했다. 配位 鎭川宋氏는 在定의 딸로 婦德과 容姿를 갖추었다. 哲宗 癸丑 六月 十九日 生하여 庚申 三月二十六日에 별세하였다. 양평군 개군면 仰德山 癸坐에 合葬하였다.
公은 載義, 載禮, 載信 三男을 두었다. 載義는 允鎔을, 載禮는 德鎔 善鎔 基鎔 仁鎔을 낳았고, 載信은 善鎔을 繼子로삼았다. 曾孫中 海鍾 海銓 海鏡 海銑은 允鎔의 子, 海鵬 海鳳 海䳟 海豸鳥은 德鎔의 子, 海仁은 基鎔의 子, 海薰 海錫은 仁鎔의 子, 海鳳은 善容의 子이다. 이하는 생략한다.
公은 항상 殉國한 伯兄을 생각하고 아우를 사랑하면서 나라가 倭에 强占당한 것을 切痛하게 여겼다. 倭治下에서도 志操를 지켜 璿源의 體統과 民族 자존심을 유지하였다.
公이 家庭訓行錄을 지어 子孫에게 訓戒하였는데, 특히 長姪 載九에게 處世에 대해 懇曲하였다. 손자 允鎔에겐 부지런히 글읽고 行實을 敦篤하게 하며 五倫을 행해서 孝道에 힘쓰고 處世를 잘하고 流行을 警戒하고 尊攘에 힘쓰라고 訓戒하였다. 미루어 보면 餘他를 짐작할 수 있겠다.
公의 曾孫 海鍾丈이 '乙華對策委'의 重責을 맡아 李鍾立會長과 더불어 東奔西走하던 중 不佞에게 碑文을 再請하기에 謹記하고 이어 銘한다.
璿源의 후예로서 孝友敦穆 실천하고
省翁을 師事하여 道學義理 배웠더니
尊攘斥衛 綱領으로 討倭誅斬 決行하매
凶惡한 賊徒앞에 生死禍福 따질소냐
千古의 恨을품고 走鹿에 隱居하니
困窮한 生活에서 孝誠이 지극했네
수차례 겪은 悲運 天命이 아닐런가
訓行錄 간절하니 자손들 昌盛하리
檀紀四千三百三十三年 庚辰 九月 日 경원대학 교수 結城 張三鉉 謹撰"
[출처]화서학파 인물열전 (39) 문화경제신문
이만응선생 영정사진.jpg![첨부이미지 미리보기](https://t1.daumcdn.net/cafe_image/cf_img2/bbs2/btn_imageview.gif)
첫댓글 좋은 자료네요! 첨부하신 자료는 증손자이셨던 이해종 옹의 구술에 따르면 1930년대 중반경 양평 마을에 왔던 사진사가 찍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어른의 매서운 눈초리에 우리의 근대사가 다 담겨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을미의병에 참가하셨고 나라가 망하는 지경을 다 겪으시며 말년을 맞으신 분이지만, 그래도 삶은 그런 게 아니라는 뭔가가 느껴지는 사진이라고 보였습니다.
혹시 번역된 '가정훈행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부자료에 선생이 약사원 전투에서 전사한것으로 기록되고있으니 이는 잘못이군요...저도 그리 알고있었는데 바로잡아야 겠습니다..직헌은 선생의 종제가 아니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