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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02: 김동연(金東連, 男, 1921年 10月19日生.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 | ||
*최초증언일: 1995. 10. 8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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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탄을 터트리려고 전기선을 밑으로 내려놨다. 최소한 4∼5천명 죽었잖느냐! 미군이 던진 기뢰에 맞아 터졌다는 식으로 이유를 대려고 마이즈루만까지 들어간 거여. |
나는 1938년 도쿄로 가 공부할 생각으로 고향인 여수에서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아 자신의 의사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도쿄에도 공습空襲이 심하여 홋카이도에 있는 외숙부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 뒤에도 도쿄를 한번 왕래往來했다. 홋카이도에 있을 때는 홋카이도 업체에서 노무자 관리업무에 종사從事했다. 이 무렵에 나는 외삼촌이 경영하는 토목공사업체에서 노무자를 관리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홋카이도에도 공습이 심하였는데 탄광이나 공사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 때 나는 탄광에서 탈출한 조선인 50명 정도를 이끌고 1944년 5월 오미나토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3개월 앞서 도착하여 자리 잡은 외숙부인 장종식씨와 만나 다시 홋카이도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장종식씨는 스가와라조한테서 토목공사를 하청 받아 일했는데, 나는 장종식씨가 운영하는 업체에서 일하던 70여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의 관리업무를 맡았었다. 관리업무란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배당하고 그 날 그 날 명단을 확인하고 임금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스가와라조에는 조선인 자유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우키시마호에 승선하기 직전에 5백16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내가 오미나토해군경비부에 직접 전달했다. 스가와라조에는 약 5백여 명의 조선인이 고용되어 있었다.
「김동연씨가 관리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주로 산중턱에서 굴을 파기도 했고 비행기격납고를 만들었지요. 또 건축공사장 부지정리 작업도 했는데 내가 해군 4부대와 7부대를 출입하며 부대의 요구대로 일했으니까 해군부대와 관련된 일을 한 것이지요.」
「노무자 명단을 작성하셨는데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모두 배로 간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군부에서 승선자 명단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는데......., 5백16명 명단을 내가 작성해 줬는데, 우리 주위에 있는 인부들과 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지요. 조선사람들이었는데도 조선이름은 없고 창씨개명된 이름이었죠. 그 때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개명된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걸 창씨라 하는데 성을 만든다는 거요. 개명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지만 창씨는 성이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을 모두 씨를 바꾼다는 것이니까 개명改名보다도 창씨創氏가 더 나쁜 것이지.」
「우키시마호에 승선이 시작되기 직전의 오미나토와 기구치잔교 주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8월17일 아니면 18일이었을 겁니다. 해군 전투기가 공중을 날며 삐라(전단)를 뿌렸는데 “육군은 항복해도 우리 해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상륙하면 결전을 해야 한다. 민간인들은 전부 소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동연씨는 오미나토에 있는 군부대가 해군시설부 본부였기 때문에 해군들의 이 같은 행동이 가능했다고 판단함) 그러나 민심이 소란해서 우리 조선사람들 뿐 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피난을 가야겠다. 말아야겠다.” 그랬지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 사람은 모두 배를 태워 보낸다. 오미나토에서 희망하는 사람은 모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우키시마호를 타려고 기구치잔교 근처에서 기다릴 때는 조선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었지요. 한국인들이야 모두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승선에 임박해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졌는데 그것은 우키시마호 함장이 승선을 강행하면서 조선인을 하루속히 배에 태우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함장이 왜 승선을 강행했을까요?」
「승선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장종식씨한테서 들었습니다. 그 때 당시 미나미라는 조선인 헌병이 있었는데 재간이 뛰어났고 외모도 일본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었지요. 이 미나미 헌병에게 우키시마호 함장이 “우키시마호는 오미나토를 출발하여 부산에 가지 않고......,”라고 말한 거에요. 하여튼 미나미가 그 말을 직접 들은 거죠.」
「미나미 헌병과 승선강행과는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까?」
「오미나토에 조선인 헌병 파견대장이 있었는데 계급은 중위였고 이름은 남(南, 미나미)이었습니다. 긴 칼을 차고 다녔는데, 계엄령, 정치......., 전시였기 때문에 경찰서장도 헌병대장한테는 꼼짝 못했습니다. 그 미나미 헌병은 영도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지요.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전해들은 얘기인데.......,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옆에 있는 김동천씨와 이재석씨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 잇는다) ‘조선 사람은 모두 배를 타고 간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배를 타기 전 날 부둣가에서 하룻밤을 잤다고......., 모두들 잤을 거예요. 그랬던 바로 뒷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나미가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소속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헌병 파견대장 이름이 ‘미나미’ 이니까 꼭 일본이름 같거든. 그러니까 일본 사람인 줄 알고......., 그 때 참모장 이름이 시미즈, 청수淸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미나미 헌병에게 ‘이 배에 내일 모두 승선시키는데 배가 가다가 도중에 어느 곳인가 귀항하면 즉 들어가면 거기서 어떤 모종의 사건이 있을 것이다.’고 귀뜀하였는데 그 사실을 미나미 헌병이 장영도 아버지한테 말한 거여. 미나미 헌병도 조선 사람이니까 배를 같이 타고 나오려고 나중에는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 입었어. 그 다음에 미나미 헌병이 일본 사람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시미즈 참모장이 ‘아! 내가 잘못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그 때에 시미즈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긴 칼을 뽑아들고 ‘누구든지 내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칼로 벤다. 절대로 명령에 복종하여 배를 타야 한다.’고 하여 그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한거여.」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이유가 있었을까요?」
「우키시마호 함장이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말한 것은 그 많은 조선 사람들과 해군 병사들을 배에 태우려는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폭동을 일으킬 우려는 없었습니다.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도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참모가 미나미 헌병에게 말을 발설한 다음에 자신의 실수임을 알고 퍼트린 것이지 귀국의 기쁨에 넘쳐있는 조선인들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인산인해를 이뤘던 조선인들이 우키시마호에는 어떻게 올랐습니까?」
「처음에는 명단대로 순서대로 태우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소용없었어요.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그 작은 배에다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마구 실었다고요. 먼저 탄 사람은 선실이나 기관실 옆에 자리를 잡았고, 나중에 탄 사람은 맨 위층 앞쪽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나무로 만들어 놨고요. 내가 인솔한 사람들이 맨 나중에 탔습니다. 나도 우키시마호를 타고 출항하기 전 날 하룻밤을 배 위에서 지냈는데 아마22일이 확실한 것 같아요. 그 날 밤늦게 출항했습니다.」
「낮에도 출항이 가능했을 텐데 왜 하필 밤에 출항했을까요?」
「그렇잖아도 제가 미나미 헌병한테 ‘왜 출항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많이 타서 저쪽에 임시변소를 만들려고 출항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보니까 뒤쪽에 나무로 칸막이를 만들어 놨습디다.」
「우키시마호가 항해할 때 무슨 수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를 떠나 항해할 때 해군들이 자신들의 옷과 소지품을 모두 바다에 버리는 것을 보고 내가 ‘왜 물건을 바다에 버리느냐?’고 물으니까-(이 때 김동천씨와 이재석씨에게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라고 물음) 옆에 앉아있던 이재석씨가 ‘나도 봤어요. 바다에 모두 팽개쳐 버리더라구.’라고 말하고, 김동천씨도 ‘나도 봤어요.’라고 말함. -해군이 대답하기를 ‘당신들은 좋겠다. 돌아가면 광복될 것이고, 우리는 부산에 가면 포로가 되어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게 필요 있겠느냐?’ 하면서......., 시계만 받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옷이나 구두가 필요하다면 바꾸기도 했는데 다른 것은 안 받고 시계만 갖더라고요. 그 어떤 놈은 뭐라 했는지 알아요. '이 배는 부산에 안 갈 것이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뭐!」
*김동천: 그 한국인 헌병이라는 사람이 그것까지 알았었다고요.
(김동연씨가 ‘들어보세요.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하며 김동천씨의 말을 막았다)
「미나미 헌병이 한국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하니까 영도 아버지한테 찾아 왔어요. 그 때 막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육지가 보인다.’고 함성을 질렀잖아요. 그러니까 미나미 헌병 이 사람은 벌써 그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다급하니까 영도 아버지한테 ‘지금 틀림없이 어디로 들어가는데’라고 이야기를 한 게야. 해군들이 미나미를 감금하려고 뒤를 쫓았어요. 배 안에서도 미나미는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며 해군들의 눈을 피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 하는 말이 배안에 폭탄이 있다는 거여.」
김동천씨가 얘기를 거들었다.
「폭탄이 있었다구. 폭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러니까 해군들이 처음에 오미나토에서 삐라를 뿌린 것과 딱 맞아 떨어지는 거 아니요? 삐라에는 ‘해군은 일전을 한다. 민간인은 소개하라.’며 이틀 동안 두 번이나 뿌렸잖아요. 보세요. 해군이지요. 군함이지요. 배 안에는 반드시 폭탄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폭탄 없이 어떻게 싸웠겠어요. 분명히 폭탄이 있었어요. 미나미 헌병의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아마 영도 아버지가 나한테 한 얘기일 건데요. ‘폭탄을 터트리려고 전기선을 밑으로 내려놨다. 나 하나 희생으로 사람을 다 살려야겠다.’며 심정을 말하더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끊으려고 했지만 기구가 없어 끊지 못했답니다. 그 뿐 만 아니라 ‘해군은 전쟁에 항복하지 않았다.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워야 한다. 적을 만날 수 있으므로 그 때는 싸워야 한다. 뒤에 폭탄도 많이 실었다’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더라고요. 이 같은 일이 있고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우키시마호는 마이즈루만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으로 보아 틀림없이 우키시마호를 폭파할 계획을 세운 것이고 해군 사병들의 일부도 이 폭파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8월24일 정오가 되면 배가 연합국의 소유가 되니까 일장기와 연합국 기를 나란히 게양했지요.」
「배가 폭파될 때는 어떠했습니까?」
「나는 반바지에 메리야스만 입고 지금처럼 꼭 이렇게 맨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에 쾅!〜 하고 소리가 났는데 (방에 앉아서 장롱에 비겨 튀어 오른 높이를 가늠해 보이며) 아마 내가 이 만큼은 튀어 올랐을거요.」
「이재석: 선실에 앉아 있는디 팍 튀잖아!」
「김동천: 뭐! 공이 벌떡 튀듯이 튀었지. 그런 지경이니까 사람이 죽는다구. 아우성였어! 배가 터졌다구. 뭐 난리통이지! 내가 있던 곳에도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었어요. 하나는 원래 만들어진 것이고 나무사다리는 임시로 만든 것이었지요. 그 위에 사람들이 붙어 빠져 나가려고......., 내가 위로 올라와 양쪽을 보니까 한 쪽은 육지가 가까운데 한쪽은 꽤 멀더라고요. 나도 헤엄쳐서 나올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이재석: 멀기는 했지! 헌디 나도 헤엄쳐 나오려면 나오겠더라구.」
「김동천: 그 전에 우리들 보고 회의를 해야 하니 밑으로 내려가라는 거요. 그래서 자리를 비워줬지. 그놈들이 잠간 동안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위스키를 한 병씩 나눠주니까 그 걸 병 채로 마시더라고요.」
「배는 완전히 멈춘 상태였지요. 몇 몇 해군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폭발소리가 두 번 들렸고 배는 가운데부터 꺾이면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배 위에서는 남 헌병이 일본 해군의 추격을 받았는데 물속으로 뛰어든 남이 헤엄을 잘하여 쫓아가질 못했습니다. 잔잔한 바다였지요.」
「구조된 것입니까? 아니면 헤엄쳐 나왔습니까?」
「내 헤엄치는 실력으로 살겠더라고요. 해군들이 우리보다 경험이 많으니까 해군이 뛰어 내리면 나도 따라 뛰어 내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해군이 선장실 위로 올라가더니 구조신호를 보내데요. 이 때 쯤에서 민간인 배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김동천: 나팔도 불었어요. 사람들이 옷을 벗고 뛰어내리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뛰어 내렸지요. 먼저 뛰어 내린 사람은 거의 다 죽었어요.」
「이재석: 다 죽었지. 뭐!」
「나는 한참을 헤엄치다가 뒤를 돌아보니까 배가 그 때까지 다 가라앉지 않기에 다시 배 위로 올라가 있다가 어민들이 몰고 온 쬐그만 배를 타고 나왔습니다.」
「물기둥에 대한 존재 여부에 논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갑판위에서 있었는데 물기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 분명한 사실은 물기둥이 공중으로 높이 솟았다면 그 물이 어디로 떨어지겠습니까? 당연히 갑판위로 떨어지면서 사람들이 모두 바닷물에 젖는 것이 상식인데 갑판 위나 사람들은 바닷물에 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기둥은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지낸 상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해군시설에 수용되었지요. 옷이 없으니까 해군 작업복을 입기도 했고 담요를 둘러쓰기도 했지요. 모자하고 지까다비를 주더라고요. 사실은 일할 때는 지까다비가 아니고 마까다비라고 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한국 사람이 만든 말인데 3일 밖에 못 신는다 해서 마까다비라고 부른 거예요. 해군시설에 수용되어 내가 명단을 작성하여 데리고 온 사람을 확인해 보니까 18명이 없더라고요. 배 위쪽에 있었기 때문에 많이들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9명 가족 가운데 한명만 살아난 가족이 있고, 한 가족이 다 죽은 경우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다음 날 나는 외숙부인 장종식씨가 두 딸과 아내를 잃었으므로 같이 바닷가에 나가 시신을 찾아보려고 수용소를 빠져 나왔어요. 그 날이 8월25일이었는데 인근 주민들은 바닷가에 밀려든 보따리를 모두 뒤지면서 다녔고 물속에 있는 보따리를 갈퀴로 끌어내 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따리 속에서 돈을 빼내가려는 것이었지요. 해안가에 밀려든 시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 날 장종식씨는 두 딸과 아내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해안에 널려있는 시체들의 얼굴을 모두 살폈으나 결국 가족을 찾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기름으로 덮여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 선실에 갇혀 나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김동연씨 댁을 방문한 김동천씨와 이재석씨의 대화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김동연: 그 당시 우키시마호에 몇 명이 탔느냐? 몇 명이냐? 내가 생각하기로는 6∼7천명은 탔다고 봐요.」
「김동천: 1만2천명이 탔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7천5백명이라는 것을 확인했어.」
「김동연: 정확히 안다는 것은 그건 거짓말이요.」
일제 대본영의 “조선인 긴급소개 조치(=군사적조치)”로 멀리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에 타려고 오미나토항 기구치잔교와 그 주변에서 거룻배를 타고 본선으로 이동하는 모습. (일본 현지인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라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제작함) 조선인들이 마지막 발자취를 남긴 이곳에서 해군의 통제 아래 거룻배가 오가며 태우는데 3일이 걸렸다. 당년 8월19일부터 승선을 시작하여 21일 오후 늦게 끝났으나 당일 출항하지 아니하고 하룻밤 하루 낮을 이유 없이 해상에서 정박하였다가 22일 밤 10시에 출항했다.
「김동천: 아! 그것은요. 우리 영동사람이 일본말도 잘하고 아주 똑똑했어요. 그 사람이 군인은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소대장 노릇을 하면서 일했는데 그 사람 얘기가 7천5백명 탔다고 말한 거요.」
「김동연: 그 당시 죽은 사람이 3천5백명이라고 했거든. 그러면 산 사람이 3천여 명이라는 건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렇게 많이 살아나지 못했어요. 최소한 4∼5천명 죽었잖느냐!」
「이재석: 실제로는 만 명 이상 죽었어. 실제로 무한정 실었거든. 내가 1만3천5백명 탔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 때 놈들이 말하지 말라잖아.」
「김동천: 똑똑한 계산이 어디 나오기나 했나.」
「이재석: 또 뭐가 있냐면 저쪽에서 돈이 나왔어요. 돈 나온 것 알아요. 죽은 사람 한 사람당 2천원씩 받아왔는데 누군가가 다 닦아 썼어요.」
「김동천: 누가 닦아 썼어요.」
「이재석: 군부에서 닦아 썼겠지.」
「김동천: 우리는 돈 나온 걸 몰라.」
「이재석: 그러니! 그걸 모르면 세밀하게 모르는 거야. 나는 돈 나온 걸 안단 말야.」
「김동연: 동마이즈루와 서마이즈루가 있었는데 우리는 처음에 동마이즈루에서 일주일 있다가 서마이즈루로 옮겼어요.」
「이재석: 그래. 일주일 있다가 밤에 옮겼지요.」
「김동천: 태풍을 만났던가요?」
「김동연: 나는 그 뒤로 중간에 세 명이 빠져 나왔어요. 뭐냐면 “한국에서는 일본 놈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으니 우리를 언제 몰아놓고 죽일지 모른다. 언제 보복 당할지 모른다.” 는 소문이 있어서 세 명이서 수용소를 빠져 나와 버렸지요. 일본 해군이 우리를 죽이려면 오다가 바다 한복판에서 죽이지 왜 마이즈루까지 들어와서 죽이려고 했느냐면 나중에 변명의 여지라도 남겨 놓으려고 그랬을 거여. 전쟁 때 적군(미군)이 던진 기뢰에 맞아 터졌다는 식으로 이유를 대려고 마이즈루만까지 들어간 거여. 바다 한가운데라면 미군이 기뢰를 던지지 않았을테니까......., 사건이 국제사회에서 여론화되면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거지 뭐! 안 그래요.」
「김동천: 그건 사실이오. 그 놈들이 그려. 그런 이유일거여.」
「이재석: (김동천씨를 가리키며) 이 양반들은 기차로 나왔거든.」
「김동연: 어디서 기차로요.」
「김동천: 해군수용소에 있다가요. 수용소에서 군복을 입고 있다가 기차를 탔어요.」
「김동연: 그건 군속이었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군속은 기차로.......,」
「김동천: 기차로 보낸다 해서 타려는데 사람이 많아 한 2∼3백명씩 세 차례 나눠 탔어요. 그래서 기찻길이 뚫리게 된거지요.」
「김동연: 그 때 영도하고 영도 아버지는 곧장 부산으로 왔어요. 영도아버지가 여기저기 기관에 다니면서 호소하게 된 것이지요.」 (장영도씨의 부친 장종식씨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부산일보에 맨 먼저 알린 분임) 신동아 기자가 장종식씨를 얼마나 찾았는데요. 해방 직후에 한국이 무슨 힘이 있었나요. 당시에는 미군정시대지요. 광복이 되었으나 채 정리도 못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지요. 그 뒤에 전후 수습하느라고 그랬지. 이박사는 일본이라면 이를 갈았기 때문에 수교도 안 되었지. 이런 상태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배상 얘기할 시간도 없었고......, 실수는 우리야! 우리들이 우선 잘못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이 단합해서 지금처럼 만나기라도 했으면 달라졌을텐데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김동연씨는 계속해서 군속이 먼저 기차를 탄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셋이서 (서마이즈루에 수용되었을 때 먼저 빠져 나온 일행)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을 때 시모노세키 역 안에는 2만5천명이 있다고 했어요. 비가 철석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시모노세키에서 센자키까지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기차표를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도저히 표가 나오질 않는 거였어요. 시모노세키에서는 기뢰 때문에 배를 탈 수 없다고들 했어요. 그래서 부산으로 가려면 시모노세키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시 기차로 센자키까지 가서 배를 타야 했습니다. 며칠을 기다리다 기차표를 받기는 받았는데 그 때 증명이 없으면 기차표를 받을 수 없었어요. 일정량의 표가 있으면 맨 먼저 군인이 받고 그 다음으로 군속, 징용자 그리고 일반인이 맨 꼬랭이였어요. 예를 들어 정원이 5백명이라면 군부에서 ‘3백명의 군인이 가야한다.’고 연락을 취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징용자들이나 일반인들은 2백 명 밖에 못가는 겁니다. 군인, 군속, 징용자 또는 증명이 있는 사람이 먼저 타고 일반인 중에서도 헌병대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먼저 타고 그 다음이 일반인이었으니까 일반인 표는 몇 장 안되는 것이지. 아이구! 역 안에 있으려니 냄새는 나지,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나중에는 일반인들만 남았으니까 돼지우리나 한가지였어.」
「김동천: 말도 못했지. 사람한테 치어 며칠씩 기다려도 기차를 못 탔어요.」
「이재석: 나는 후쿠이에서 병원선을 타고 나왔는데 거기서는 군인과 똑같이 취급해 주더라구. 열십자가 그려진 병원선이었다니까요.」◼
[이상은 1995년 10월8일 김동연씨 자택에서 김동천씨 이재석씨 세 분의 대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