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인시
박 꽃
홍 건 표*
토담 밀친 사립문 달그림자
잠재운 삼복 지열에
죽마 타던 소년도 잠들고.
함초롬이 이슬 먹고
하이얀 웃음으로 피어나는
초가지붕 박꽃은
소복단장 올곧은 누이의 자태이다
먹밤 지새며
봉숭아 물든 고운 손 모아
모듬발로 무지개 꿈 간절한
한 꿈의 기도이다
아기별도 졸리운 한 여름 밤
초록 실바람이 누이의 얼굴을 스치며
이 밤을 환하게
귓속말로 다가오고 있다.
가을 이야기
마른바람 한 점 없는 솔뫼 고개
무덤은 숨죽인 체 엎드려있고
햇살은 무리 지여 내려오는데
가을 이야기 찾아 조급한 마음
길 떠나네.
백만 마디 진한 사연 가슴에 묻은
코스모스 살래 살래 말 아끼고
순정의 백도라지 요요히 구름 따라 날면
야심한 삼경 오만 가지 챙기던 귀뚜라미마저
뚝, 입 다물고.
북평 땅 휘영청 달빛 깔고 누워 있는
흐드러진 메밀꽃 이랑이나
더 늦기 전 신성리 갈대밭
물옷 적시며 손짓하는 사연 찾아
어서 속히 떠나라 하네,
* 충남 서천 출생. 시인, 2003년 ≪해동문학≫으로 등단, kunpye@hanmail.net
상처가 흐르는 것은
최 광 임*
수심 깊은 강은 그저 물이 모여서만 된 것은 아니에요.
속으로 속으로 견뎌 근심이 되고,
위장병이 된 지병 같은 여자의 굵은 주름이에요.
하여 시간이 흐르는 것은 체념 하나씩 풀어 띄우는 것.
사랑에 생을 걸고 사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어요.
별을 떨구고 먹먹한 가슴팍에서 시작한 강,
이제 미혹의 퇴행성관절염 꾹꾹 눌러가며
아득히 거슬러 오르는 강줄기,
꿈 속 그곳엔 아직도 풋풋한 물풀들 이슬을 터네요.
굵어진 주름으로 흐르는 강 같은 여자,
어머니가 젖고 있네요.
강물이 깊어진 것은 단단한 바위를 사랑하였거나
어린 소나무를 사랑하였거나,
오래도록 함께 흐르지 못한 독한 상처 탓일 텐데요.
부질없음도 세월이라 여적지 흐르고
다시 화암사
화암사 길 오른다
철재난간 사이 내려다보이는 아득한 벼랑
흔들리던 하늘이 와르르 안겨온다
다시 찾은 가파른 길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삶의 울음 떨어져 내렸는지 우화루 지나
접근금지 푯말 속으로 들어갔을 때에야 보았다
몇 백 년 묵어 썩은 기둥과 서까래 받쳐 든
쇠파이프 사이사이 세월의 곰팡이 냄새 진동 한다
세인의 등에 얹혀 가파른 길 올랐을 인간사
듣던 적묵당의 부처님 자리
시꺼멓게 썩어 들어간 보수중인 기둥에서
묵묵히 받아낸 기복의 세상사 읽는다
바위 위를 유유히 기어오르던 뱀과
가지 사이 높이높이 올라앉는 새들과
어쩌지 못하는 내 등짐 부려놓으려 오른
불명산 꼭대기에, 오르기 좋아하는 산 것들의
적묵당 밖 바위계곡으로
부처의 눈물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