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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 아스피린을 50mm~100mm씩 매일 복용하면 혈전이나 뇌출혈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몇 차례 듣은적이 있었지요
가격이 만원이라고 적혀있는 아스피린 한 통을 건네받고 한달 보름째 복용하다가
2016년 6월 22일 오전 8시 30분경 코피가 흐르는데 그칠줄을 모르던군요
왈칵왈칵 쏟아지는 코피에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라 119구급차로 경찰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솜에 지혈제 액을 묻혀 코속 깊숙히
삽입하고선 응급실에서 안정을 되찾고 4~5시간 후에 또다시 코피가 나오면 큰병원을 찾으라는 당부를 듣고 퇴원을 하였습니다
낮 12시경 또다시 코피가 왈칵왈칵 쏟아저 또 119구급차로 건대병원 응급실로 갑니다
경찰병원에서처럼 솜에 지혈제를 묻혀 코속 깊숙히 삽입하고 퇴원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
5~6시간 후면 계속 반복적으로 코피가 쏟아저 구급차를 7번, 택시로 2번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경을 헤메게 되였습니다
6월 26일 AS병원에서 결국 4시간에 걸처 수술을 받고 입원한지 9일만에 퇴원을 하였습니다
2016년 8월 초에 딸과 덕혜옹주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덕혜옹주가 어떤 인물인지도 전혀 모른체
그냥 영화를 보고 난 뒤 <안내 포스터>를 보고 역사책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2016년 여름은 무던히도 더웠던것 같아요
6월 30일 퇴원을 하고 7 ~ 10월까지도 코피가 간간히 나왔으며 집에서 요양중에 1년 동안 무척 힘들었습니다
경춘선 금곡역에서 내려 덕혜옹주 무덤을 찾아가는 그날이
2016년 8월이였는데 그 해 여름은 푹푹찌는 폭염과 열대야 일수가 20일째 이어졌답니다
평지에서도 걷기가 힘들어 조금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이렇게 힘들게 무덤가에 도착하니 개방이 되지 않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을뿐이였지요.
덕혜옹주 묘에서 500m거리에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모신 왕릉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왕릉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로부터 조선왕릉 40기를 답사한다는 계획을 세웠지요
오늘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아 갑니다
매일 오후 2시면 <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 행사가 20분 정도 진행 됩니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은 조선시대 수문장청 소속 무관의 당직을 순번에 따라 교대하는걸 재현한 행사 입니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은 1996년 당시 서울시 문화과장이었던 이노근 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우리도 영국처럼 왕궁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덕수궁 수문장 교대의식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서울시 내부에서도 고증 부실에 따른 비판이 우려돼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쳤지만 소관 부서를 관광과로 넘겨
외국인 관광객용 이벤트로 시작을 할 수 있었다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노근 의원은 후에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지만, 세월이 흘러 고증자료가 하나 둘 쌓이면서 역사적 의미도 갖게 됐고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서울의 명물로 자리 잡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제정한 수문장 제도의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년)에 등장한다.
건국 이후 조선왕조 궁궐문의 방비는 궁궐을 수비하는 호군(護軍)이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지켰던 것이다.
실록 기록에 초창기 수문장은 국왕이 직접 낙점하였다. 예종실록의 기록과 <경국대전 병전 입직편>에 있는 기록을 함께 참고하면
이 당시의 수문장은 병조의 추천을 받은 무관 4품 이상의 고위 관원들 중 국왕의 신임도에 따라 매일 임명되는 방식이었다.
<날 마다> 낙점 했다는걸 보면 수문장은 국왕의 선택에 따라 자주 교체 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일종의 겸직이자 임시직 형태 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왜적의 수급을 베거나 공을 세운 이들에게 관직을 남발하였는데, 이때 수문장 직함도 남발되어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전국에서 수문장의 직함을 가진 이들이 43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수문장 제도는 크게 훼손되어 혼란을 겪었는데
이는 조선후기 영조대에 가서야 재정비 되어 안정된다.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수문장이 임시직이 아닌 별도의 정직(正職)으로 제정되었고,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는 업무 관청이
새로이 설치되어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늘어나 있던 수문장 정원을 대폭 줄여 종 6품직 5명, 종 9품직 18명 등
총원 23인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후 총원 29명까지 늘어났다.
이렇게 변천을 거듭한 수문장 제도는 고종 대에 이르러 군제개편에 따라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의식 절차는
1. 당직수문군이 광화문에 배치된 후 초엄이 울리면, 교대 수문군이 출발하여 광화문에 도착한다.
2. 이엄이 울리면 교대 수문장과 당직 수문장이 군례 및 신분 확인을 한다.
3. 교대 수문군이 수문장의 호령으로 광화문에 배치되고, 광화문 경계 상황과 수문군의 근태를 점고한다.
4. 당직 수문장과 수문군이 퇴장준비를 하고 삼엄이 울리면, 수문장의 지휘 하에 퇴장한다.
사진속에 인왕산이 보이지요, 풍수적으로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된답니다
개성 송악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풍수지리적으로
북악산이 주산이고, 좌청용은 낙산이 되지요. 남산은 안산이구요
역사 탐방을 하느라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을 4번을 가봤습니다
조선 제6대왕 단종이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아끼고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단종비 정순왕후가 궐 밖으로 쫓겨난곳이 정업원이였지요
낙산부터 ㅡ 자주골 ㅡ 청룡사 ㅡ 정업원 ㅡ 동망봉 ㅡ동묘 앞 여인시장터 ㅡ 영도다리까지
옛 유적지를 답사한다고 4번이나 찾을 정도였답니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는 1771년 이곳 청룡사를 찾아 정순왕후의 사연을 듣고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운 비각을 동망봉에서 촬영하였습니다
정업원구기(淨業院 舊基)란 뜻은
정업원이 있었던 옛터(舊=옛 구, 基=터 기)라는 것이지요
정업원 옛터에 세워진 비각의 현판 글씨는 영조임금의 친필이라 합니다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峰後巖 於千萬年) : 앞산 봉우리와 뒷산 바위 천만년은 가리다
경복궁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행사 관람을 마치고
광화문 광장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이동 합니다
광화문에서 세종대로 사거리까지 조선시대 땐 <육조대로>라 했답니다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형식상 문반·무반으로 양립되기는 했으나 문반 위주로 운영되었다. 즉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와 행정권을 가진
육조,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언론 기관인 삼사 등 중앙 정부의 중요기관은 거의 문반에 속해 있었다.
이에 비해 중추부와 오위도총부 등 일부만이 무반에 속하였다
사대부란 <독서인은 사(士)>요, 종정(從政)은 대부(大夫)라. 한 것처럼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 정치에 참여하던 계층이었다.
중인은 좁은 뜻으로는 서울의 기술관을 가리켰으나, 넓은 뜻으로는
서울과 지방의 경아전(京衙前), 아전, 군교(軍校) 및 서얼(庶孽)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시대 철학적 지도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16세기 이후 유교적인 교화 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이룬 학문으로서
우주의 근원, 사물의 법칙, 인간의 본질 및 윤리 문제 등을 체계화하여 크게 발달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절대왕권과 양반관료 사이의 권력 조화가 배려된 구조였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정립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의 80여 관아 중 대부분이 그 직능에 따라 육조에 소속된 속아문이었다. 그 밖의 관아로는 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를 비롯해 육조, 승정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 중추부, 오위도총부 등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기관으로 의금부, 한성부, 개성부, 겸사복(兼司僕), 내금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왕족, 왕의 외척과 공신에 대한 예우기관인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儀賓府), 돈녕부 등이 있었다.
의정부는 백관과 서정(庶政)을 총리(總理)하는 동반의 최고 관부로서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이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 좌참찬(左參贊)·우참찬(右參贊)이 보좌하며, 그들의 합의로 중요 국사를 의결하였다.
의정부 아래에 각 부의 행정을 관할하는 육조가 있었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호조는 호구와 조세
예조는 의식, 외교, 학교, 과거
병조는 국방 무관의 인사
형조는 법률 소송 및 노비 문제
공조는 토목, 영선(營繕), 공장(工匠) 등의 사무를 각각 분장하였다.
육조에는 각각 판서, 참판, 참의의 삼당상(三堂上)이 있고, 그 밑에 정랑(正郎), 좌랑(佐郎)의 두 낭관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이에 권한 변동이 생김에 따라 의정부 서사제 또는 육조직계제가 반복되었다.
사대부의 의견이 의정부의 의결권을 통해 반영되던 의정부서사제, 의정부를 소외시키고 육조가 모든 정무를 왕에게 직접 고하고 왕명을
직접 집행하던 육조직계제가 그것이다.
태조 때는 의정부서사제의 대표적 시기였고, 태종, 세조 때는 육조직계제의 대표적 시기였다.
세종은 전반기에는 육조직계제, 후기에는 의정부서사제를 택하였다.
세종 때 승정원에 6승지제도를 마련한 것은 의정부와 육조의 권력 균형을 위해 제도화된 것이다.
6승지제란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 6인의 승지를 두어 육조와 각각 연결시킨 것이었다. 즉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사무를 각각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정치는 국왕의 학문기관인 경연(經筵)에서 많이 논의되었다.
직제상 승지는 모두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했고, 이 밖에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였다.
또 도승지는 따로 예문관직제학과 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임하여 승지는 자연히 국정의 중요 사무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언론기관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있었다.
사헌부는 관료의 부정과 실정을 규찰하는 기관이고
사간원은 국왕에 대해 간쟁하고 논박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기관을 통칭해 대간(臺諫) 또는 양사(兩司)라 하였다. 대간은 따로 서경(署經)이라는 권한도 행사하였다. 이는 당하관 이하의 관리
임용에 있어서의 인준권, 입법에 있어서의 동의권을 말하는 것이다.
중대한 국사에 대해 왕의 뜻을 움직이려 할 때는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홍문관까지
합세시켜 삼사합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홍문관은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기관인데
이 삼사는 언론과 문필의 자유가 보장된 기관으로서 왕권의 전제와 관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있었다.
의금부는 국왕의 직속 사법기관으로 왕명에 따라 왕족의 범죄, 국사범이나 반란, 역모 등 중대 옥사,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강상(綱常)의 죄,
중외에서 장기간 처리하지 못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이 밖에 왕의 교서 등을 짓는 예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승문원
시정을 기록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경적(經籍)의 출판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 등의 4관(四館)이 있었다.
한편, 중추부와 오위도총부는 서반 최고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기관이었다.
이 중에서 중추부는 군사상의 기밀을 관장하는 최고 관부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다.
따라서 서반의 실질적인 최고 관부는 오위도총부였다. 그러나
그 장관인 도총관(都摠管)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무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 정치 권력은 국왕을 정점으로, 의정부와 육조와 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국왕은 전제적 왕권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 합의제에 의한 의결권이나 대간의 간쟁, 서경 등의 견제를 받았다. 반면
의정부는 의결권을 행사하면서도 왕권의 견제를 받았으며, 육조는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대간의 감찰권이 이를 견제하였다.
오늘은 조선시대 때 이조(吏曺)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대한민국억사박물관>으로 바뀌어 전시된 자료 몇 점을 올릴려고 합니다
이조란
의정부 자리엔 조선시대 때 건물인 정본당, 석화당, 협선당 건물은 사라지고
2020년 11월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던군요
역사박물관 홀에 입장을 하니 선생님 인솔하에 4~5명의 초등학생들이
교실에서 이론으로만 배웠던 학습을 전시물로서 체험하려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질문을 받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이나, 용산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몽촌토성 내에 있는 백제박물관 등등에서 수없이 봐왔지요
이러하니 도농간 학습 격차가 크지 않나 봅니다
옛말에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아무튼
한국의 태동기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변천된 과정의 전시된 자료들 일부를 옮겨 봅니다
나의 고향은 첩첩 두메산골이였습니다
1960년 1학년 때 보자기에 국어책과 양은 도시락에 꽁보리밥을 싸서 허리춤에 메달고 학교갔던 기억이 생각나는군요
60년이나 지난 지금 생각하니 1960년 초반 첩첩산중의 여름방학이 왜 그리워지는지~
형아들 따라 소몰고 꼴(
지게지고 땔감나무 해오다 나무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지펴 밀싸리 해 먹으며 꿂구린 배 채우던 옛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여기에 있는 6종류의 돈들이 지금 나한테 많이 있는데,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군요
이 화폐들은 1970년대까지 사용이 되였던가요
어허~ 이거 삼륜자동차 아니야
1971~1972년도에
내고향 두메산골 딱박골마을에서 이종사촌 형님과 면소재지 곳곳을 누비며 벼 수매한다고 타고 다녔던 화물차
지금 이 차는 중국 변방 지역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것 같아요
한국에선 앞쪽 바퀴가 하나뿐이라 사고 위성험성이 크다고 1970년 후반기에 생산 중단하였지요
역사박물관 5층에 대통령 집무실 모형을 만들어 두었답니다
대형 창 밖으로 경복궁과 청와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여 두었는데
옥상 휴게실에서도 조망을 즐길 수 있어요. 박근혜 정부땐 청와대쪽으로 앵글도 맞출 수가 없었는데~
잠실 석촌호수 서호
잠실롯데 신관 에비뉴엘(avenuel) 명품관
2020. 12. 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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