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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계적 불평등
48. 인간 환경과 자연환경은 함께 악화됩니다. 우리가 인간과 사회의 훼손의 원인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환경 훼손은 특히 이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생활의 체험과 과학 연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6) 예를 들어, 물고기 개체 수의 감소는 다른 생계 수단이 마땅치 않은 영세 어민들에게 특히 어려움을 주게 됩니다. 수질 오염은 특히 생수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해수면 상승은 주로 해안 주변에 사는 달리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의 이러한 불균형의 영향은 많은 가난한 이들의 이른 사망, 자원의 결핍으로 일어나는 분쟁, 국제적 논의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많은 다른 문제들에서 나타납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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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볼리비아 주교회의, 볼리비아 환경과 인간 발전에 관한 사목 교서 '세상, 생명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ELuniverso, don de Dios para la vida),2012.3.23., 17항.
27)독일 주교회의 사회 문제 위원회, '기후 변화, 세계적, 세대 간, 생태적 정의의 핵심 문제'(Der Klim
andrl:Brennpunktglobaler,inyergenerationell
er und okogischerGerehtigkeit), 2006.9., 28-
30항 참조.
49. 특히 소외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은 수십 억 명에이르는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국제적 정치와 경제 토론에서 언급되고는 있지만, 그들의 문제는 거의 의무감에 못 이겨 또는 미미하게 다루는 부록으로 제시 되거나, 아니면 그저 부수적 피해로만 여겨질 수도 있다는 인상을 번번히 줍니다. 사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 보면 소외된 이들의 문제는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많은 전문가, 여론 선도자, 통신 매체, 권력의 핵심들이 부유한 도시지역에 위치하여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거의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틀은 높은 수준의 발전에 따른 편안한 위치에서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삶의 질을 누리며 생활하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만남의 결여는 종종 도시의 해체로 촉발되며 양심을 무디게 하고 현실에 있는 것을 무시하는 편향된 분석을 낳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환경을 옹호하면서도 이러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언제나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50.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생각하기보다 출생률 감소만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발 도상국들은 때때로 경제 지원을 특정한 '출산 보건' 정책에 연계시키라는 국제적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인구와 이용 가능한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가 개발과 환경의 지속 가능한 이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구 성장과 통합적이고 공평한 개발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28)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가 아니라 인구 증가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려는 술책일 뿐입니다. 이는 현재의 분배방식을 합법화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현재의 분배 방식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편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소비할 권리가 자신에게만 있다고 믿습니다. 지구가 그러한 소비로 발생하는 쓰레기조차 감당할 수 없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산된 식량 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버릴 때마다. 그 음식은 마치 가난한 식탁에서 훔쳐 온 것과 같습니다."29) 국가와 세계 차원에서 인구 밀도의 불균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소비 증가는 환경 오염과 교통, 쓰레기 처리, 자원 손실,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들이 서로 얽힌 결과로 복잡한 지역 사정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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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 교리]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2004.4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 2014 (제2판 6쇄),483항3
29. 프란치스코, [교리 교육], 2013.6.5..[프란치스코의 가르침](Insegnamentide Francsco),1/1 1(2013),280.
51. 불평등은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은 우리가 국제 관계의 윤리도 생각해보게 합니다. 현실적인 '생태적 빚'은 특히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상업적 불균형, 그리고 특정국가들이 장기간에 걸쳐 천연자원을 지나치게 이용한 사실과 관런됩니다.산업화된 북반구의 시장을 충족시키려고 천연자원을 수출한 결과로 금광 지역의 수은 오염과 동광 지역의 아황산 오염과 같이 지역적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배츨된 가스들을 처리하려고 전 세계의 환경 공간을 이용하는 것에 대하여 예측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200년 동안 쌓여 온 가스 분진을 처리하려고 전 세계의 자연 공간의 사용을 계산해야 하는 긴급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이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일부 부유한 국가들의 엄청난 소비로 야기된 온난화는 세계의 가장 가난한 지역, 특히 아프리카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기온 상승이 가뭄과 맞물려 농업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고체와 액체 상태의 독성 물질을 개발 도상국에 수출하고, 자본을 대는 나라에서는 결코 할수 없는방식으로 저개발국에서 기업을 운영한 데 따른 오염으로 발생되는 피해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기업들이 흔히 다국적이라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선진국, 이른바 '제일 세계'라고 불리는 국가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이곳에서 저지릅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기업 활동을 중단하고 철수하고 나면 실업, 활기 없는 마을 , 천연자원의 고갈, 삼림 파괴, 지역 농업과 축산업의 몰락, 노천광의 웅덩이, 훼손된 언덕, 오염된 강, 유지가 불가능한 사회 시설과 같은 인간과 환경에부담이 되는 짐만 남게 됩니다."30)
52.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는 통재 수단이 되어 버렀지만, 생태적 빚은 경우가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생물권 보존 지역이 있는 개발 도상국들은 자기의 현재와 미래를 희생해 가면서 부유한 국가들의 발전에 계속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의 토지는 기름지며 대부분 오염되어 있지 않지만, 구조적으로 사악한 상업 관계와 소유권의 체계 때문에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위한 재화와 자원에 대한 소유권의 체계 때문에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위한 재화와 자원에 대한 소유권이 차단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의 소비를 크게 줄이고 가난한 나라들의 지속 가능한 발전 정책과 계획을 지원하여 이러한 부채를 갚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지역과 나라들은 환경 영향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에 필요한 과정을 개발하고 그 비용을 충당할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관하여 차등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미국의 주교들은 "힘 있는 이익 집단이 주도하는 토론에서 가난한 이들과 무력한 이들과 취약한 이들의 요구"31)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인류 가족이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국경도 장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무관심의 세계화를 위한 공간은 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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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코마우에 주교단, 성탄 담화.2009. 12., 2항
31) 미국 주교회의,성명 '세계 기후 변화: 대화와 분별과 공동선의 요청'(Global Climante Change: A Plea For Dialogue, Prudence and the Commo
m Good),2001. 6. 15.
6. 미약한 반응
53. 이러한 상황은 누이인 지구가 세상의 모든 버려진 이들과 더불어 부르짖으며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볼 것을 호소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의 집을 아프게 하고 잘못 다룬
것처럼 그렇게 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바라신 그대로 존재하고 평화와 아름다움과 충만함을 위한 당신의 계획에 맞갖은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위기에 맞서는 문화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후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모든 이를 고려하여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법적 틀을 반드시 수립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술-경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힘의 구조가 우리의 정치는 물론 자유와 정의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54. 국제 정치의 반응이 얼마나 미약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환경에 관한 세계 정상 회담의 실패는 우리의 정치가 기술과 금융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너무나 많은 특정 이익 단체들이 있고, 경제적 이익 단체들은 손쉽게 공동선을 장악하고 그들의 계획에 영향이 없도록 정보를 조작하기에 이릅니다. [아파레시다 문헌]은 "생명의 원천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경제 집단들의 이익이 천연자원을 다루는 일에서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32)고 말합니다. 경제와 기술의 동맹은 그 즉각적 이익과 무관한 모든 것을 결국 배제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껏해야 피상적인 말, 어쩌다 하는 자선 행위, 마지못하 보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사회 안에 있는 단체들이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기울이는 참다운 노력은 낭만적인 환상에 근거한 골칫거리나 회피해야 할 걸림돌로 여겨집니다.
55. 일부 국가들은 점진적으로 중요한 진전을 이루고 더욱 효과적인 규제를 개발하며 부패와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태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는 있지만 나쁜 소비 습관은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습관은 사라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냉방기 사용의 증가와 그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판매를 통하여 즉각적 이익을 얻는 시장은 더 많은 수요를 자극합니다. 지구 밖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때로는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행동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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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파레시다 문헌]. 471항
56. 그러는 사이에 경제 세력들을 투기와 경제적 수익 추구를 앞세우는 현재의 세계 체제를 계속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재는 인간 존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환경 파괴와 인간적 윤리적 타락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방해
공작으로 세계가 실제로 얼마나 유한하고 덧없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절대 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33)
57. 어떤 자원이 고갈된다면, 고귀한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결국 새로운 전쟁의 상항이 조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쟁은 언제나 환경과 풍부한 민족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며, 누군가 핵무기와 생물학적 무기 사용을 고려한다면 그 위험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화학전, 세균전, 생물전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에도 자연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공격 무기의 개발을 위한 실험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34) 정치는 새로운 갈등을 예견하고 그러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강력한 경제 세력들은 이러한 노력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고, 정치적인 계획에는 넓은 시각이 부족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급하고 반드시 실행할 필요가 있는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 한 정치인으로 기억될 뿐일 터인데 그 누가 권력을 잡으러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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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5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2014(제2판 12쇄),AAS 105(2013).1043
34. 요한 바오로 2세,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989.12.8., 12항, [회보] 제56호(199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AAS 82(1990), 154면.
58. 일부 국가들에서는 환경 개선에 긍정적 모범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오염되었던 강을 정화하고 원시림을 복구하였습니다. 환경개선 계획으로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졌습니다.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우고 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 생산과 대중교통 개선에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조치들로 세계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가 여전히 긍정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어, 우리의 한계에도 관대함과 연대와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 샘솟을 수밖에 없습니다.
59. 또한 자기만족과 경박한 무책임을 부추기는 거짓되거나 피상적인 생태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담대한 결단이 요구되는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종종 그러하듯이, 우리늘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혹에 빠집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염과 훼손에 관한 몇 가지 피상적 표징을 제외하고는 상황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고 지구도 한동안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회피적 태도는 우리가 현재의 생활 양식과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이는 악행들을 알아채고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중요한 결정을 뒤로 미루고, 아무일도 벌이지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악행들을 조장하는 길입니다.
7. 다양한 의견
60.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과 가능한 해결책과 관련하여 다양한 시각과 사조가 전개되었음을 인정합니다.한 극단에서는 발전이라는 신화를 맹목적으로 믿으며, 생태 문제는 윤리적 성찰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도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적용으로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극단에서는 인간과 그 개입이 위협이 될 뿐이라서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위협하므로 지구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줄이고 모든 개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현실성 있는 미래 계획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에서 중용을 취한 것이어야 합니다. 해결 방법이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모두 포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여러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61. 많은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교회가 단정적인 견해를 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이견들을 존중하면서 솔직한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의 집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언제나 헤쳐 나길 길이 있고, 길을 바꿀 수 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급속한 변화와 훼손으로 상황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은 대규모의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 심지어 경제 위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계의 문제는 개별적으로 분석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위험에 놓인 지역이 있으며, 종말론적 예언은 차지하고라도 현재 세계 체재는 여러 관점에서 봤을 때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인간 활동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지구의 여러 지역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바로 인류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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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요한 바오로 2세,[교리 교육], 3항.[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24/1(2001). 178.
제2장
창조의 복음
62.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 문헌에 신앙의 확신에 관한 장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와 철학 분야에서, 창조주의 개념은 단호히 부인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어 종교가 통합 생태론과 온전한 인류 발전을 위하여 커다란 이바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종교를 그저 관용되어야 하는 하위 문화쯤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종교는 각자의 고유한 현실 접근 방식으로, 서로에게 생산적인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1. 신앙이 주는 빛
63. 생태위기가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여러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 곧 그들의 예술과 시, 그들의 내적 삶과 영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괴된 모든 것을 바로잡게 하는 생태론을 발전 시키고자 한다면 어떠한 학문 분야나 지혜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와 그 고유 언어도 포함됩니다. 카톨릭 교회는 철학적 사상과 나누는 대화가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신앙과 이성의 다양한 종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의 발전은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한 종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 교리는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풍요로원질 필요가 있습니다.
64. 더 나아가 이 회칙이 해방의 길을 함께 찾고자 모든 이와 나누는 대화에 열려 있지만, 저는 먼저 그리스도인과 일부 다른 신자들에게, 신앙적 확신이 자연 보호와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의 보호를 위한 강력한 동기를 어떻게 부여하는지 보여 주고자 합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돌보도록 촉구한다고 볼 때,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피조물 안에서의 자기의 책임은 물론 자연과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가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36)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우리의 확신에서 나오는 생태론적 의무를 더 잘 깨닫는 것은 인류와 세상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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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5항
2. 성경 이야기의 지혜
65. 창조 신학 전체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창세기에 나오는 첫 창조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의 계획에는 인간의 창조도 포함됩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다음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모든 것이 참 좋았습니다".(창세 1,31).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창세 1.26 참조). 이는 모든 인간이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
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37)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한 사랑은 "인간에게 한없는 존엄을 부여"38)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존엄 수호를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은 이러한 노력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그리스도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순전한 우연이나 무한한 순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희망 없는 혼돈 속에 떠다니지 않고 있다는 확신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창조주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예레 1,5).우리는 하느님 마음에서 생겨났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유의 산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존재입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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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 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2014(제2판 12쇄), 357항.
38. 요한 바오로 2세,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장애인들과 바친 삼종 기도, 1980.11.16,[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3/2(1980),1232.
39.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 미사 강론,2005.4.
24.,[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34호(2005), 한국천주교중앙협의, 31면, AAS 97(2005), 711면.
66. 창세기에 나오는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고유한 언어로 표현된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과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 창조주와 인류와 모든 피조물의 조화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고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 깨어졌습니다. 결국 이는 이 땅을 "지배"(창세 1,28
)하는 우리의 임무, 곧 "그곳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2.15) 임무를 왜곡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과 자연과 자연이 맺은 본디의 조화로운 관계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창세 3.17-19 참조). 아시시의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체험한 그 조화가 이러한 불화의 치유로 여겨진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맺은 보편적 화해를 통하여 어느 모로 본디의 순수 상태로 돌아가려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40) 이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재 상황에서 죄는 전쟁,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과 학대, 가장 취약한 이들의 유기, 자연에 대한 공격에서 모든 파괴적인 힘으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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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보나벤투라, ' 프란치스코 성인의 주요 전설 ',
8. 1. FF 1134 참조.
67.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지구는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였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 그리스도교의 사상에 대한 비난에 응답하도록 해 줍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땅을 "지배"(창세 1.28)하게 했다는 말이 창세기에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을 본성적으로 지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묘사하면서 유다-그리스도교 사상이 무분별한 자연 착취를 조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교회가 이해한 바른 성경을 부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에게 이 땅에 .대한 지배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강력하게 부인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은 우리가 세상이라는 정원을 '일구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창세 2.15 참조). '일구다'
라는 말은 밭을 경작하고 갈거나 밭일을 한다는 뜻이고, '돌보다'라는 말은 보살피고 보호하며, 감독하고 보존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풍요로운 땅에서 얻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땅을 보호하고 후손들을 위하여 이 땅이 계속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땅은 주님의 것입니다'(시편 24[23], 1참조). 그래서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신명 10,14)은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절대적 소유에 대한 모든 주장을 물리치십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68. 하느님께 속한 땅에 대한 책임은, 지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법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저들이 창조되었고 그분께서 저들을 세세에 영원히 세워 놓으시고 법칙을 주시니 아무도 벗어나지 않았기"
(시편 145.5-6) 때문입니다. 성경의 율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위한 다양한 규범을 인간에게 차근차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동족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것들을 모르는 체하지 말고 반드시 너희 동족을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 너희가 길을 가다가 나무에서건 땅에서건 어린 새나 알이있는 둥지를 보았을 때, 어미 새가 어린 새나 알을 품고 있거든, 새끼들과 함께 어미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신명 22,4.6). 이와 같은 이유로
, 이렛날에 쉰다는 것은 인간이 쉰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와 나귀도 쉰다."(탈출 23.12 참조)는
것도 의미합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다른 피조물을 고려하지 않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69. 우리는 이 땅의 재화를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하고, 또한 다른 생명체들도 하느님 보시기에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을 것을 요청받습니다. "동물은 단순히 생존함으로써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41) 주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04[103],
31 참조). 인간은 고유한 존엄과 지성을 지녔기에 피조물과 그것의 고유 법칙을 존중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기"(잠언 3.19 참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마치 다른 피조물들이 그 고유한 가치가 없고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나 한 듯이 인간의 이익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독일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에 관하여 "유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42) [가톨릭 교회 교리서 ]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를 매우 분명하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 다양한 피조물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합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각 피조물의 고유한 선을 존중하여 ------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 합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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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가톨릭 교회 교리서 ], 2416항.
42. 독일 주교회의, '피조물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 환경과 에너지 대책에 관한 독일 주교회의 성명'(Z
Ukunft der Schopfung-Zukunft der Menschhe
It. Einklarung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
nz zu Fragen der Umwelt und der Energiever
Sorgung), 1980,11, 2.
43. [가톨릭 교회 교리서 ], 339항.
70.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시기심에
불탄 카인이 어떻게 자기 아우를 상대로 극단적인
불의를 저지르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불의는 결국 카인과 하느님의 관계, 그리고 카인과 그가 쫓겨난 땅의 관계를 망쳐 버립니다. 이는 하느님과 카인의 극단적인 대화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창세 4,9-11). 내
가 책임지고 돌보고 보호해야 할 내 이웃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면, 나 자신, 다른 이, 하느님, 지구와 각각 맺은 관계를 망쳐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소홀히하면
, 정의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삶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는 정의와 평화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인류를 하느님께서 쓸어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시는 노아의 이야기에 나타납니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찼다"(창세 6,13), 상징으로 기득 찬 이러한 오래된 이야기들은 이미 오늘날 우리가 공유하는 확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
맺은 관계를 올바로 돌보는 것은 형제애, 정의,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71.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자"(창세 6, 5) 하느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
(창세 6.6)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흠 없는
노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희망을 되찾는 데에는 의로운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성경 전통
은 이러한 회복에 하느님께서 직접 자연에 새겨 놓으신 순환의 재발견과 존중이 동반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이는 안식일을 율법에도 나타납니다. 이렛날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렛날마다 쉬도록, 곧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창니ㅣ 2.2-3: 탈출 16,23; 20.10 참조)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은 일곱째 해는 땅을 위한 안식의 해로 지내게 하셨습니다(레위 25,1-4 참조). 이때에는 씨를 뿌려서는 안 되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레위 25,4-6 참조). 끝으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면, 곧 마흔아홉 해가 지나면, 모든 것에 대한 용서와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레위25.10)을 선포하는 희년을 거행하도록 하셨습니다.이러한 율법의 전개는 인간이 다른 이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과 맺은 관계에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땅의 결실을 포함하여 땅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이들은 그 결실을 특히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과 공유해야 하였습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게 두어야 한다"(레위 19.9-10).
72.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창조하라고 자주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물 위에 펼쳐 놓으신 분"으로 "주님의 자애는 영원"(시편 136[135],6) 합니다. 또한 시편은 우리와 함께 찬미하도록 다른 피조물들을 초대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반짝이는
모든 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의 하늘아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저들이 창조되었다"(시편 14
8,3-5). 우리는 하느니의 권능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주하며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73. 예언자들의 글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관상함으로써, 시련의 때에 다시 힘을
얻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이 우리를 하느님 부성의 온유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권능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건전한 영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무한한 권능에 대한 신뢰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두 활동 방식은 긴밀하고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 주 하느님, 당신께는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 당신께서는 표징과 기적들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예레 32.17. 21).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이사 40.28-29).
74. 바빌론 유배의 경험은 영적 위기를 가져왔으나,
이 위기가 하느님에 대한 더욱 깊은 믿음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경험은 하느님의 창조적 전능을 드러내어 불행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되찾으라고
사람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다음, 로마 제국이 절대 지배를 행사하려는 가운데 찾아온 또 다른 시련과 박해의 시기에, 믿는 이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굳세게 하여 위로와 희망을 찾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
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묵시 15.3).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관여하시고 온갖 악을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무적은 아닌 것입니다.
75.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힘 있는 것을 숭배하거나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그분의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며 짓밟아 버리는 제한 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절대적 지배에 대한 인간의 주장을 멈추고 인간이 제자리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언제나 자기만의 법과 관심을 강요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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