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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 of the Bebop Minton's Playhouse Portrait of Thelonious Monk, Howard McGhee, Roy Eldridge, and Teddy Hill, Minton's Playhouse, New York, N.Y., ca. Sept. 1947
Minton's Playhouse는 1940년에 문을 열었던 뉴욕 할렘에 위치한 재즈 클럽이자 모던 재즈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Minton's Playhouse를 개업했던 장본인은 크라리넷 연주가인 Henry Minton으로 할렘에 자리잡은 Cecil Hotel의 Dining area(손님들에게 식사와 음식을 접대하는 곳)을 개조해서 재즈 카페를 만들었답니다.
Minton은 Teddy Hill이라는 악단연주자를 고용해서 그곳을 경영하게 했는데, 그는 여러 음악가들에게 이미 많은 명성과 존경을 받고 있었던 음악가였지요. Minton's이 유명한 이유는 세가지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첫번째 이유가 Nick Fenton (bass), Kenny Clarke (drums), Joe Guy (trumpet), 그리고 Thelonious Monk (piano)같은 명연주자들로 이뤄진 이클럽의 고정밴드 때문이었지요.
두번째 이유는 이클럽은 정기적으로 한달에 한번은 손님들과 음악가들에게 무료음식 서비스와 아울러 정기 재즈 공연을 갖었는데 그모든 비용은 이클럽에서 부담했었답니다. 정기 재즈 공연은 많은 재능있는 재즈 연주자들의 관심을 끌었을 뿐더러 당시 유명했던 Lester Young(tenor sax), Coleman Hawkins (tenor sax), Ben Webster(tenor sax), Roy Eldridge (trumpet) 등과 같은 쟁쟁한 연주가들까지도 이곳에서 연주를 갖었던, 젊은 재즈연주가들의 실험적 음악과 기성음악가들의 멜로디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던 곳이 아니었나 싶군요.
Minton's playhouse가 무엇보다 가장 의미가 있는 곳은 바로 이곳에서 Charlie Parker(alto sax)와 Dizzy Gillispie(trumpet)가 기존의 어떤 재즈 음악가들이 시도해보려고 하지도 엄두도 내지 않았던 상업적인 재즈 리듬과 멜로디에 반감하여 빠른 리듬과 박자, 급격한 엇박자의 강조, 복잡한 멜로디와 화음을 기조로한 연주가를 위한 새로운 재즈 장르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Be-bop혹은 Bop이라고 일컫는 재즈장르랍니다.
Be-bop
Bebop혹은 Bop 재즈라 함은 Charlie Parker (Alto Sax), Dizzy Gillispie (Trumpet), Thelonious Monk (Piano) 의 세사람으로 대변되는 Modern Jazz의 초기 형태를 말합니다. 스윙재즈는 극히 들어보셔서 잘 아실겁니다. 위의 세사람들 모두 이전 빅밴드나 스윙을 연주하던 연주가들이었지요.
하지만 기존 스윙재즈는 너무 상업주의에 물들어져 있고 새로운 음악세계를 갈망하는 음악가들에게는 너무나 단조롭고 따분한 음악이라서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비록 기존 스윙음악을 연주하고 있지만 보다 진보된 형태의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있었습니다. Count Basie (Piano), Lester Young (Tenor sax), Art Tatum (piano), Nat Cole (Piano), Coleman Hawkins (tenor sax) 등이 바로 그들이지요. 이들은 이미 재즈계에서는 내놓라하는 대스타들이자 중견 연주가들이였는데, 이들을 나중에 따로 재즈 평론가들은 Mainstream이라고 부르곤 한답니다.
그러던 가운데 뉴욕 할렘에 자리잡고 있던 한재즈바(Minton's Playhouse)에선 새로운 음악을 갈망하는 재즈연주가들을 위해 매주, 매달마다 재즈 정기 공연을 갖게 되지요. 기존의 열대명이상의 연주가들이 모여서 이루는 커다란 빅밴드가 아닌 서너명의 연주가들이 소규모의 공연을 그곳에서 갖게 되는데요, 거기엔 기성 중견 연주가들도 있었지만 새롭게 재즈연주를 시작하는 젊고 유능한 연주가들도 함께 공연을 갖었지요.
찰리 파커와 디지 글리스피, 바로 이 두청년이 그중에 있었는데, 어느날 찰리 파커는 자신의 동료이자 절실한 친구인 디지를 설득시켜서 그전에 어떤 음악가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빠르고 복잡한 리듬과 멜로디에 화음변조가 심한, 음악가들을 위한 음악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비밥의 시작입니다.
비밥은 스윙과는 달리 복잡한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기존의 스윙을 연주하던 백인들은 거의 따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연주가의 상당한 연주실력을 요하는 음악이기에 스윙과는 달리 그것을 듣고 따라서 춤을 출 수가 없지요. 거기다 스윙처럼 예측가능한 멜로디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 연주자들의 연주테크닉에 의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격렬하고 빠른 것이 특징이랍니다. 비밥은 기존 듣고 따라서 춤을 추는 재즈(Premodern Jazz)를 듣고 감상하는 음악으로 반전시킨 재즈이지요. 실제로 비밥의 태동지였던 Minton's 나 비밥을 다루던 재즈클럽에선 관객들이 춤을 추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으니까요.
비밥은 비평가들 뿐만아니라 기존의 재즈 연주가들에게도 상당한 비판과 비난을 많이 받았던 재즈였답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경우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비밥을 증오하고 싫어해서 비밥을 만든 디지 글리스피를 비아냥한 재즈곡을 만들기까지 했으니까요. 더구나 스윙시대에 재즈음악과 더불어 춤을 즐겨추던 춤꾼들이 비밥을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따라서 비밥은 대중적인 인기를 그리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재즈사를 바꾸고 재즈를 발전시키는데 거의 혁명과도 같은 음악이어서 재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길줄 아는 분들은 비밥을 많이 선호한답니다. 영화배우이자 감독, 제작자인 클린턴 이스트우드는 비밥의 가장 신봉자이지요. 그는 찰리 파커의 생애를 다루 영화 "The Bird(찰리 파커의 닉네임)"를 직접 제작 감독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Acid Jazz
Acid Jazz는 Jazz-Rock Fusion의 하층계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엔 Smooth Jazz도 들어가 있지요. 이용어는 1987년 주말의 어느 음악파티에서 영국의 디스크 자키인 Gilles Peterson과 Chris Bangs에 의해서 만들어졌지요.
그파티에선 Detroit와 Chicago의 음악을 "House music"이라고 불렀는데요, 그파티에 있었던 몇몇사람들은 요새 어느 여자 연애인이 복용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마약 "Ecstasy"와 속칭 "Acid"라 불리는 LSD를 복용할때 느낌을 빌어 "Acid House Music"이라고 불렀는데요, Peterson은 파티도중 "자! 여러분들께서 "Acid House"의 열기로 가득차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께 "Acid Jazz"를 들려 드리지요." 라고 장난삼아 말한 것이 이후 당시 유행했던 Pop tune(or sound)과 Old Jazz앨범을 섞어 만드는 곡의 대명사로 낙인 되버렸지요.
Peterson과 더불어 당시 디스크 자키들은 1960년대 Blue Note(재즈바 이름이면서 레코드 회사임)와 Prestige가 발매한 Funky 풍의 hard bop을 상당히 좋아했는데요, 나중이 이들이 만든 음반회사 역시 Acid Jazz라고 불렸고 그것이 마치 1930-40년대 유행했던 Swing의 멜로디처럼 하나의 댄스뮤직 장르로 굳혀지지 되었답니다.
보통 Sampler와 synthesizer등과 같은 전자 음향기기를 많이 이용하고 재즈의 리듬위에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랩(raps)을 실어서 만든 음악인데, 이미 재즈의 특징을 잃어버린 음악이라고 해야 하지요. 사실, 정통 재즈음악가나 비평가들은 Jazz-Rock Fusion 장르에 속하는 모든 음악을 재즈로 취급하고 있지 않답니다. 재즈가 갖고 있는 엇박이라든지 즉흥 리듬이나 멜로디 그리고 잔잔한 스윙감 뭐 이런 것 따위가 아주 허물어져 버린 음악장르이니까요.
Acid Jazz는 젊은이들에게 폭팔적인 대중적 인기는 끌지는 몰라도 재즈라는 음악을 세속화시켜서 그등급을 낮췄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재즈 연주자들을 타락으로 몰락시켰던 마약의 이름을 빌어 재즈라 칭한 것에 대해 많은 정통 재즈 연주자들과 비평가들이 Acid Jazz라는 음악뿐만아니라 그명칭 자체를 마음에 들어할리는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미국의 음악사에 있어선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재즈를 제대로 아시려고 한다면 퓨젼쪽보단 밥이나 하드밥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밥이나 하드밥을 이해하시려면 초창기 재즈부터 이해하셔야 함은 당연한 얘기지요. 기본적으로 재즈는 락보단 클래식쪽에 더 가깝습니다. 락을 좋아는 젊은 분들은 자칫 퓨젼재즈를 재즈의 전부인양 오해하거나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글쎄요? 뭐 좋아하기 나름이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퓨젼이나 Smooth Jazz(흔히 라디오나 광고들에서 많이 사용되는 듣기 편한 음악)는 재즈라기 보단 락계열로 따로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되군요.
어떻게 얘기한다면 재즈 퓨젼 락은 재즈의 가장 진보된 형태라서 이해하기가 가장 난이한 음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데요. 음악적인 선율과 리듬보다는 그음악과 음악가주변을 맴도는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 의식과 기존 권력에 대한 반항이 담긴 사상적 음악도구로 사용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장 사회학적인 음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재즈 락 퓨젼에 대해선 본인도 아직까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한지라서 이야기하고 논의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무드는 글쎄요? 그냥 듣기 좋은 음악이지만 오래 기억이 날만한 재즈로서나 음악적 가치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스무드가 상업주의와 언제나 항상 나란히 걸어가고 있기때문에 대중에 입맛에만 맞춘 자극적인 음악이라서가 아닌가 싶군요. 하지만 미국에선 스무드라는 장르를 더고급화하고 진보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볼 수 있지요. 물론 스무드라고 전부 가치없고 재즈로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무드 재즈 연주가들 중에서도 뛰어난 연주가들이 있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보통 대중에게 인기있는 연주가들은 화려한 상업주의에 포장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적 가치와 연주를 쉽게 구분할 수가 없지요. 재미있는 것은 1930-40년대 스윙이 미국에서 한참 인기있었을때도 이와 비슷한 비난을 받았지요. 스윙은 대중을 혼란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라고요.
Post Bop, Mainstream, 3rd Stream, Funky Jazz
재즈 장르에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각 재즈곡을 접하시게 될 때, 곡소개 내용에 적혀있는 다양한 재즈 장르의 용어로 혼동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wing에서 부터 Bebop, Cool, Hard Bop, Post Bop 등등 별별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곤 하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혼동되는 몇가지가 있다면 바로 Post Bop, Mainstream, Third Stream, Funky Jazz, Soul Jazz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 사항이 있다면 Modal Jazz가 있지요.
사실 위에 용어는 일부 재즈 평론가들이 Hard Bop 그러니까 1950년 후반부터 등장한 일부 재즈 음악가들의 특징을 따로 분류해 놓은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 같은 장르라는 얘기이지요. 보통 일반적으로 쉽게 Hard Bop이 가장 커다란 분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Post Bop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Post(이후), Bop이후에 나타난 Bop이라는 것이니까 Hard Bop 밖에는 없겠지요. 거기에 더 확고히 용어를 다지기 위해 Hard라는 말까지 붙였지만 사실 밥을 계승한다는 것 이외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드밥은 사실 Cool Jazz의 하나인 백인 연주가들에 의해 연주된 West Coast Jazz를 견제하기 위해 흑인 연주가들이 붙여논 용어랍니다.
Mainstream 역시 기존 Bop의 스타일과 리듬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Lester Young, Coleman Hawkin, Count Basie 등의 주류 음악을 일컫는 말입니다. Bebop은 사실 Charlie Parker나 Dizzy Giliespie등에 의해 만들어 졌긴 했지만 이들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음악가들은 Lester Young, Art Tatum, Count Basie, Coleman Hawkins 등의 연주가들이었지요.
Funky Jazz는 조금 이해가 필요합니다. 물론 Hard Bop이지만 Hard Bop의 Subcategory(하층범위)로서 Horace Silver, Julian "Cannonball Adderley등과 같은 음악가들이 사용한 약간의 브루스의 음조를 띄면서 교회음악의 하모니를 빌려서 만든 재즈를 말하지요. 하지만 특별히 따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
Third Stream은 Bop, Cool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밴드리더인 John Lewis(M.J.Q: Modern Jazz Quartet의 리더)가 시도한 클래식 음과 재즈의 스윙감을 살려 만들어낸 재즈를 말하는데 역시 이것도 특별한 장르로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Soul Jazz는 Georgia On My Mind를 부른 장님가수있지요? 지금은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 Ray Charlies가 1950년대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교회음악을 섞어 거기에 Pop Tune을 집어 넣어서 만들어낸 빠른 박자와 리듬형태의 재즈 음악을 말합니다. 사실 Soul과 Funky는 일종의 같은 장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 레이 찰스가 음반을 발표했을때, 평론가들은 재즈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그의 음악을 비난했지만 그 음악은 젊은 층들에게 의외의 반응을 보였지요. 레이 찰스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Soul"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R&B라는 것이지요.
레이 찰스의 영향을 받아 한 백인 젊은이가 기타를 들고 나와 다시 그의 노래를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적절한 리듬과 박자를 살려 불렀는데 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이고 그의 음악을 Rock'n Roll이라 불렀지요. 락 큰롤은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백인들에 의해 불려지고 연주되는 Soul을 그들이 흑인과 따로 구분 짓기 위해 만든 용어이지요. 따라서 미국의 모든 음악의 뿌리는 재즈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Modal Jazz는 역시 Hard Bop의 하층구조 장르로서 멜로디와 하모니를 Mode(음계) 배열에 입각해서 만든 재즈로 기존의 변조 (Chord Progression)에 입각한 음계가 아닌 하나 혹은 둘의 음조(Chord)를 지속적으로 번갈아 반복해서 만든 재즈를 말합니다. Miles Davis와 John Coltrane의 곡들 중 일부가 바로 이 모달 재즈이지요.
SWING
SWING은 1030년대 초 빅밴드가 강조된 시기에 나타났다. 스윙은 1940년대 말 속으로 퍼졌고 레코딩,영화, 텔레비젼 음악에서의 기억을 떠올릴수 있다.
대부분의 스윙 스타일 그룹들은 적어도 10명의 멤버로 구성되었으며 적어도 3, 4개의 색소폰, 2, 3개의 트럼펫, 2, 3개의 트럼본,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구성되었다. 뮤지션들은 그들의 악기로 좀더 양질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즉흥연주자들은 사람을 리드믹하게 이끄는 강한 필링과 열정, 서정만큼 연주에서 복잡함을 찾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1930년대와 40년대의 기간을 '스윙시대(swing era)', 빅밴드시대(big band era)'라고 불려졌다.
1930,40년대의 빅밴드에 의해 연주된 모든 댄스음악이 재즈는 아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연주되며 싱커페이티드된 파퓰러한 음악을 재즈라고 여겼다. 저널리스트들과 재즈팬들은 격렬한 리듬과 광범위한 솔로 임프로바이제이션을 추구하는 밴드들과 스윙감, 즉흥감이 덜한 밴드들을 구별지었는데 전자를 '스윙밴드'혹은 '핫 밴드(hot band)' (예를 들어, Count Basie's, Jimmie Lunceford's, Andy Kirk's, DukeEllington's) 라 불렀고 후자는 '스위트 밴드(sweet band)' (예를 들어, Glenn Miller 's, Wayne King's, Freddy Martin's, Guy Lombardo's)라고 불렀다.
그러나, 많은 청자들은 그런 구별을 짖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든 댄스밴드들을 스윙밴드로 간주하였다. 모든밴드들은 적잖게 재즈를 연주했기 때문에 놀랄일은 아니다. 그리고 듀크엘링톤 밴드같은 최고의 스윙밴드도 스윗넘버를 연주하곤 했다. 역으로 글렌밀러 밴드 같은 최고의 스윗밴드도 아주 댄서블한 스윙과 간단한 즉흥연주도 하였다. 1940년대의 매우 유명한 토미 도시(Tommy Dorsey)의 밴드가 이러한 혼란에 중요한 예가 된다. 밴드는 재즈초기에 바탕을 둔 반주자들과 스윙으로 어레인지된 곡들, 최고의 즉흥연주자들이 있었다. 아직 그들의 레퍼토리중 많은 부분이 발라드와 보컬곡이라는게 놀랍다. 그 결과 재즈역사가들은 Dorsey밴드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지만 재즈 뮤지션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높은 존경을 보낸다.
비록 스윙시대 전에 많은 댄스밴드들이 있었지만 음악팬을 위한 '빅밴드 음악'라는 컨셉이 이 시대를 더욱 확고히 발전시켰으며 그후로도 몇십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은 스윙시대 부터 사용된 유사한 악기편성의 새로운 앙상블들에 의해 많은 다른 하모니와 리듬의 접근들에도 불구하고 호칭에 있어 애매함의 원인이 됐다. 규모가 큰 앙상블들은 거의 모든 종류의 재즈를 연주했다
: swing, bebop, cool, hard bop, free jazz, jazz-rock, fusion. 모든 빅밴드들이 스윙밴드는 아니다. 그리고 빅밴드스타일은 모든 앙상블들의 재즈를 가리키는데 최선이라는 관례적인 표현도 아니다. 많은 이들은 '빅밴드'를 단지 악기편성이 아닌 하나의 음악적인 특색으로 간주한다. 또한 빅밴드의 배경속에서 명성을 얻지 못한 아트 테이텀(Art Tatum)과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같은 뮤지션은 스윙시대에서는 중요한 즉흥연주자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빅밴드의 솔리스트로 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레스터 영(Lester Young), 찰리 크리스천(Charlie Christian),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같은 뮤지션도 여기에 포함 되는데 그들은 종종 작은밴드를 통해 그들의 베스트 레코딩을 만들었다.
Big Band
BIG BAND는 열명 혹은 그 이상의 뮤지션으로 구성된 재즈그룹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3개의 트럼펫, 2개 이상의 트럼본, 4개 이상의 색소폰과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의 조화로운 연주가 리듬섹션을 담당하는 것으로 특징을 잡는다. 재즈팬을 위한 '빅밴드 뮤직'의 컨셉은 스윙시대와 동일시 된다. 비록 1930, 40년대의 스윙시대 후의 거대한 재즈 콘서트 밴드들과 스윙시대 전의 댄스밴드들이 있지만 말이다.
많은 이들은 빅밴드를 단지 악기편성이 아닌 하나의 음악적 특색으로 간주한다.
BOSSA NOVA
보사노바의 정의는 꽤 어렵다. 보사노바는 브라질 음악가들이 미국의 거대한 시장을 목적으로 삼바를 미국인도 쉽게 알 수 있 도록 단순하게 한 것이라느니, 반대로 미국인이 자기들에게 맞도록 삼바를 마치 인스턴트 식품처럼 맥이 빠진 것으로 만든 것이 라고 한다. 따라서 '보사노바란 브라질에는 없는 미국의 음악, 즉 미국의 브라질풍 음악이다'라고 하는 극단적인 설도 있다. 그런 보사노바 음악이 탄생한 것은 1960년으로 금년 2004년은 보사노바 탄생 44주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브라질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지나친 표현으로 보사노바는 삼바를 간소화한 것, 특히 도회의 뮤지션에 의해서 도회화, 도시화된 것이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연주되는 보사노바는 가끔 삼바가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다. 재즈 잡지 다운비트(Downbeat)의 편집인이기도 했던 진 리즈는, 그의 저서 [Singers & The Songs]에서, 보사노바에 대해서 흥미깊은 의견을 적고 있다. 그는 "보사노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브라질 음악이며, 결국 브라질인에게 새로운 울림, 신선한 을림으로 들렸던 것이다"라고 적는다. 또한 좀 더 보충해서 설명을 한다면,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앞서서, 대중 음악이 레코드나 방송 등의 음 악 산업을 이용하여 거대해지고, 현대적인 것으로 변화, 변질했으나, 브라질에서는 좀 늦게 1950년대 후반 가까이부터 시골 음 악이었던 삼바가 "도회화", "도시화"하여 보사노바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처음에 적은 것처럼 보사노바를 만든 장본인이 미국인이었는지 브라질인이었는지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으며, 미국에 있었던 브라질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어떻든 "미국으로부터 역수입되어 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새로운 음악"에 브라질의 대중도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이, 이 보사노바라는 음악의 재미있는 점일 것이다. 이 브라질 음악의 근대화는, 결국 완전히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재즈나 샹송의 움직임에 불이 붙어, 그 강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던 것이다.
카를로스 조빔을 태두로 브라질에서 싹트기 시작한 재즈스타일 보사노바를 알아보도록 하자.
리듬감이 강한 브라질의 Samba에 차분한 Cool Jazz 감각이 가미되어 발달한 음악인보사노바 (Bossa nova)란 포르투갈어로 '(New Wave: 새로운 경향, 혹은 새로운 감각'이라는 의미. 가사와 곡조가 모두 지적이며 차분한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52년경부터 브라질에서 싹트기 시작했지만 조니 알프가 스타일을 만들고, 1955년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빌리브랑코와 공동으로 내놓은 최초의 보사노바 《태양의 찬가》가 발표됨으로써 보사노바의 열기는 시작되었다.
조빔은 다시 가수 주앙 질베르토 등과 함께 보사노바를 보급시켜 1958년경에는 브라질의 포퓰러음악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재즈계 역시 이브라질에서 만들어진 라틴 풍의 리듬과 재즈의 즉흥연주가 가미되어 나온 새로운 경향(Bossa Nova: New Wave)의 음악에 젖어들게 된다. 그음악은 브라질 음악가가 아닌 Cool Jazz Tenor Sax 연주가인 Stan Getz와 Guitarist인 Charlie Byrd 에 의해 소개되고 이후 미국 뿐만아니라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게 되게 된다.
보사노바의 주요 리듬은 Samba와 Baiao라는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브라질 북동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리듬인데 1950년경 이리듬은 브라질의 수도인 Rio de Janeiro에 급격하게 확산된다. 사실 스탄 겟츠와 찰리 보이드이전에도 몇몇 미국 재즈 연주가들에 의해 이 리듬(Baiao)를 이용한 음악이 시도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커다란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보사노바가 탄생하도록하는 중요한 촉매제 구실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보사노바 연주자들은 보사노바의 주요 기타리스트였던 Bola Sete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백인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West Coast Jazz가 백인들에 의해 연주된 것처럼 말이다.
<Hard Bop/Funky Jazz>
일반적으로 재즈는 흑인의 음악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유럽의 클래식 음악과 미국의 백인문화와의 혼합과 창조로 발전되어 왔다. 이처럼 발전해 온 재즈가 50년대 후반이 되자 지금까지의 그 어느때 보다도 진한 흑인 고유의 문화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인의 대부분은 백인이었기 때문에 흑인문화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인 큰 호응을 얻기 보다는 소중(小衆)의 문화에 그쳤었다. 하드 밥의 시작은 '54년,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과 드럼의 맥스 로치가 5중주단(Quintet)을 이끌면서부터 였다. 그들의 첫번째 레코딩은 L.A.에서, 두번째는 뉴욕에서 행해졌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부 해안에서의 활동이 동부로 옮겨왔다. 스튜디오 뮤지션에 의한 단편적이고 한쪽에 치우친 음악이었던 웨스트 코스트 재즈는 점차 팬을 확보하기 보다는 팬을 잃어갔다. 이러한 시기에 흑인 음악인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하드 밥과 펑키 재즈라고 불리우는 것이 그것으로 하드 밥과 펑키 재즈의 차이는 펑키 재즈쪽이 보다 흑인적이고 종교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또한, 펑키 재즈라고 하면 재즈 메신저스(Jazz Messengers)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리 모건, 베니 골슨, 바비 티몬스, 지미 메리트, 여기에 아트 블래키라는 라인 업으로 일세를 풍미하였고 바비비 티몬스 작곡에 의한 <Moanin'>과 <Blues March>는 재즈팬들에게 큰 히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 매력은 테마 멜로디가 가진 독특한 애수에 기인할 것이다. 바비 티몬스는 캐논볼 애덜리 퀸뎃에도 참가하여 그때의 라이브 앨범 [Cannonball In San Francisco]도 큰 히트를 기록하였다. 티몬스 작곡의 <This Here>와 캐논 볼의 동생 냇 애덜리 작곡의 <Work Song>의 테마는 한번 듣고 계속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친숙한 것들이다. 보비 티몬스가 펑키 재즈에서 큰 공헌을 세웠다면 하드 밥에는 버드 파웰이 있었다. 버드 파웰은 얼 하인즈와 아트 테이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음악적 성장을 해왔지만 그뒤 밥을 완전히 소화하여 하드 밥과 모던 재즈 피아노의 스타일을 확립시키는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I Shoud Care>와 <Everything Happens To Me>등의 발라드곡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클래식 피아노를 듣고 있느 듯하며 재즈의 뿌리를 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버드 파웰은 정신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때문에 그의 앨범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확연히 구별되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들어서 싫증나지 않는 멜로딕 솔로가 하드 밥의 매력이다. 재즈는 종종 레코드 예술이라고 불리워진다. 그것은 악보에 의한 음악이 아니라 즉흥 연주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드 밥과 펑키 재즈의 매력은 친숙하기 쉬운 테마 멜로디에 이어 멜로딕한 솔로에 있다. 테마의 앙상블의 경우는 특히 에드립 부분을 악보에 옮기기란 쉽지가 않다. 만약 그대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라이브에서 느꼈던 그런 재즈적인 맛은 느끼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재즈는 이와 같은 느낌으로 발전해 왔지만 어느 시대에도 그 시대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뒤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모드 주법에도 관여 하였던 빌 에반스가 바로 그런 타입의 재즈맨이다. 빌 에반스, 스코트 라파로, 폴 모티앙과의 트리오는 그야말로 황금 트리오였다. 베이스의 스코트 라파로는 보통 베이스 연주자처럼 4비트로 코드의 저음부를 받쳐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고 피아노 프레이즈에 대립적인 음을 울리면서 진행하였다. 이것이 이 트리오만이 가진 독특한 맛을 내는 중요 요인이었다. 그러나 스코트 라파로의 교통사고에 의해 불과 4장의 앨범을 남기고 이 트리오는 해산하게 되었다. 인기 명반을 몇 장 잔생시킨 이 시기에도 차차 매너리즘 타파를 위해 2관 편성을 3관 편성으로 하는 시험적인 행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아트 파머와 베니 골슨에 의해 일어났지만 시대는 확실히 방향전환을 하고 있었다.
<아트 블래키의 본격적 활동>
1954년 2월, 아트 블래키는 뉴욕의 '버드 랜드'에 출연하기 위해 특별히 클리포드 브라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클리포드 브라운은 '53년 12월부터 뉴욕에 있으면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블래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 그는 이번 일로 뉴욕에서의 본격적 데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블래키 퀸텟의 진용은 아래와 같이 갖추어졌다. 클리포드 브라운(tp), 루 도날드슨(as), 호레이스 실버(p), 칼리 러셀(b), 아트 블래키(ds). 전원 블루노트에서의 레코딩 경험이 있고 1954년 2월 21일 무대는 블루노트에 의해 라이브로 녹음되었다. '버드 랜드'의 명사회자 피위 마켓이 소개하는 가운데 무대에 나온 그들은 실버 작곡의<{Sprit Kicks>를 연주함과 동시에 새로운 재즈 세계를 펼쳐보였다. LP 3장에 해당하는 많은 양의 녹음이 행해진 이 '버드 랜드'의 밤은, 50년대 전반 뉴욕 재즈의 저조함을 날려버릴 만큼 열광적인 환호를 얻어냈다. 이날 밤의 연주로 클리포드 브라운은 새로운 트럼펫 연주자로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다운비트지의 인터뷰 기사, 비평가 투표의 트럼펫 신인부문 제1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23살의 클리포드 브라운은 이날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또한 블래키의 리더 솜씨 만큼이나 실버의 뮤지컬 디렉터 솜씨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개개인의 솔로 워크와 같이 그룹으로서의 융화감도 뛰어났다. 밥의 성과 위에 올라선 하드 밥의 기본적인 특징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된 것이다. 하드 밥 캄보는 서해안에서도 활약하게 된다. 맥스 로치는 셜리 맨의 후임으로 1953년 가을부터 서해안의 라이트 하우스 올스타즈에 재적하였지만 프로모터 짐 노만의 권유로 자신의 그룹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때 멤버로서 그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클리포드 브라운이었다. 맥스 로치는 이전에 디지 길레스피를 통하여 브라운을 알게 되었고 개인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레코드를 통해 그의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도 음악적으로 맞는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54년 3월, 로치는 뉴욕으로 건너가 브라운에게 그룹 결성의 이야기를 건냈다. 브라운이 아트 블래키 퀸텟에서 활약하고 있었을 때였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서해안으로 돌아왔다. '54년 3월 중에는 헐리웃의 '티파니 클럽'에서 연주하였고 4월 8일에는 짐 노만이 그들을 프로듀서로 캘리포니아의 클럽 콘서트에 출연시켰다. 멤버는 변동적으로 교체되었는데 테너 색소폰에 소니 스티트, 테디 에드워즈가 연주하였고, 피아노에는 칼 퍼킨스, 베이스에 존 브레드쇼가 참가하였다. 그러나 조니 호지스 악단에 있던 해롤드 랜드(ts), 리치 파웰(p, 버드 파웰의 형제), 그리고 존 모로우(b)라는 인물들로 최종 결정을 보았다. 여기에 불멸의 캄보, 맥스 로치와 클리포드 브라운이 합세하여 퀸텟의 라인업을 갖추게 된 것이다. 머큐리 레코드의 프로듀서 봅 쉐드는 이 새로운 그룹에 주목하였다. 같은 회사의 재즈 전문 레이블 '앰아시' 소속으로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8월 2일 레코딩이 진행되었고 이 세션이 [브라운 & 로치 인코포레이티드] 제1탄이며 계속해서 다양한 편성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짐 노만은 8월 30일, 제2회 그들의 콘서트를 개최, 이때의 라이브를 [In Concert]라 명명하여 그의 레이블 GNP에서 발표하였다.
1954년은 하드 밥 탄생의 해로 브라운과 로치는 활동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마일즈 데이비스, 긴 터널을 빠져나와 하드 밥 개막 선언>
4월 29일, 마일즈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한 레코딩 세션이 프레스티지에 의해 행해졌다. J.J 존슨(tb), 럭키 톰슨(ts), 호레이스 실버(p), 퍼시 히스(b), 케니 클라크(ds)에 의한 6중주로 2곡, 리차드 카펜터 작곡의 <walking>과 디지 길레스피, 프랭크 파파레리 작곡의 <블룬 부기>등 타입은 다르지만 모두 블루스 넘버였다. 견실한 리듬에 뒷받침된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멋진 연주를 펼쳐 보였었다. 그는 '51년∼'53년, 메트로놈지의 폴 위너에 뽑히는 등 영예를 받기도 하였지만 '50년대 전반 마약과의 투혼으로 재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사이 행해진 프레스티지, 블루노트의 레코딩은 그와 같은 나날을 반영하여 결코 좋은 연주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54년 봄에 이르러 그는 고통스런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의 연주는 그간 그가 얼마나 힘든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증명해 보이는 연주였다. 이것에 이어 마일즈는 6월 29일, 같은 리듬군에 소니 롤린스(ts)를 가입시킨 퀸텟으로 롤린스의 오리지널 3곡을 포함한 레코딩을 행하였다. 그중 <Oleo>에서는 처음으로 금속제 하몬 뮤트를 사용하였다. 그가 뮤트 연주를 행한 것은 같은 해 4월 3일의 세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킵 뮤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자랑하는 날카로운 뮤트는 <오레오>에서 금속제 하몬 뮤트를 사용한 이래였다. 이렇게 하여 '54년, 마일즈는 자신이 가진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휘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기사회생의 작품으로 그는 앞으로 남은 재즈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셀로니어스 몽크, 파리에서 첫 솔로 레코딩>
셀로니어스 콩크는 파리의 사르 프레이에르 극장에서 행해졌던 '살롱 드 재즈'에 초대받아 출현하였다. 이때가 1954년 6월 7일. 보그 레코드에서 솔로 피아노로 그의 연주를 레코딩하였다. 오리지널의 <Round About Midnight>와 제롬 컨의 연주 등 모두 9곡이 녹음되었다. 불운한 시대의 연주자 몽크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올바른 평가, 쾌거라고 할 수 있는 레코딩이었다. 10인치 LP용 녹음이었지만 후에 몽크의 첫 솔로 앨범으로 [Solo On Vogue], [Monk Lands Deep]등의 타이틀로 재발매되기도 하였다.
<Jazz Messengers 데뷔>
1955년 2월 6일 호레이스 실버를 리더로 하는 레코딩 세션이 블루노트에서 행해졌다. 사장 겸 프로듀서 알프레드 라이온의 기획으로 멤버는 실버가 선택하여 전년 11월 13일에 이은 두번째로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케니 도햄(tp), 행크 모블리(ts), 호레이스 실버(p), 덕 왓킨스(b), 아트 블래키(ds)의 5중주단이었다. 실버와 블래키는 확실히 호흡이 잘 맞는 콤비였다. 이날의 녹음은 모두 4곡, 그중 3곡이 실버의 오리지널 곡이고 나머지 한 곡은 모블리의 오리지널 곡이다. 앞서 행한 녹음 4곡도 모두 실버의 오리지널이었다. 이것들을 모아 10인치 음반으로 제작하였는데 [호레이스 실버 Vol.1]으로 발표되었다. 명실공히 당초의 기획대로 실버의 혼(Horn)을 넣은 첫 리더작이 되었다. 이 그룹의 충실한 연주가 마음에 들어 실버는 같은 멤버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룹명은 'The Jazz Messengers' 로 이전 블래키가 자신의 밴드에 사용하였던 명칭이었다. 이들은 하드 밥의 최강 그룹으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각지의 클럽을 순회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재즈 메신저스는 11월 '카페 보헤미아'에 출연했고, 11일과 23일 라이브 레코딩 된 것이 블루노트 첫 12인치 음반이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전 25곡에 걸쳐 획기적인 '마라톤 세션' 감행>
마일즈 데이비스는'55년 가을, 컬럼비아와 가계약을 맺었을 당시 아직 프레스티지와의 계약이 남아있었다. 그 때문에 1956년 5월 11일 13곡, 10월 26일에 12곡을 한번에 녹음하여 프레스티지에서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런 상황에 이르기까지 마일즈는 계약 문제로 심한 입씨름을 벌였는데 그결과 수술후의 성대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연주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 이후 그의 목소리가 탁하고 거칠게 변하게 되었다. 2회의 세션으로 25곡이라는 많은 양의 레코딩과 아울러 한번만에 녹음되었다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5곡 모두가 뛰어난 연주로 평가받고 있다. 업 템포에서 슬로우한 발라드까지 마일즈의 트럼펫은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프레스티지에서는 이것들을 모아 4장의 LP로 발매하였다. [Cookin'], [Lelaxin'], [Workin'], [Streamin']이 그것으로 마일즈의 오리지널 퀸텟 불멸의 4부작 '마라톤 세션'이었다. 이것들의 하드밥이 남긴 귀중한 재산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피아노의 2대 혁명아. 빌 에반스와 세실 테일러>
1956년 9월, 두 사람의 신인 피아니스트가 각각 첫 리더 레코딩을 행하였다. 27세의 백인 빌 에반스와 23세의 흑인 세실 테일러가 바로 그들이었다. 빌 에반스는 55년 뉴욕으로 진출하여 대학 시절 친구인 먼델 로우(g)의 소개로 리버사이드의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에게 인정받아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 결과 9월 18일 솔로로<Waltz For Debby>등 3곡, 27일 테리 코티크(b), 폴 모티앙(ds)을 가입시킨 트리오로 8곡을 레코딩하여 [New Jazz Conception]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하였다. 한편 세실 테일러는 뷰엘 네이드링거(b), 데니스 찰스(ds)와 조직한 트리오에 스티브 레이시(ss)를 가입시켜 유명한 A&R맨 톰 윌슨의 손에 의해 마이너 레이블 트랜지션에서 9월 14일 레코딩을 하였다. 그의 자작곡 3곡을 포함한 7곡으로 [Jazz Advance]라고 발표하였다. 타입은 둘이 전혀 다르다고 말해도 좋은 정도로 차이가 있었지만 혁명아라는 시각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였다.
<맥스 로치 <Jazz Waltz>로 실력 발휘>
클리포드 브라운과 리치 파웰의 죽음뒤 맥스 로치는 남은 멤버 소니 롤린스, 조지 모로우와 같이 퀸텟의 진용을 구축하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죽은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케니 도햄(tp)과 레이 브라이언트(p)가 참여하였다. 1956년 10월 이들은 [맥스 로치+4]를 녹음하였지만 피아노가 빌 윌레스로 교체되고 '57년 3월에 녹음하였다. [Jazz In 3/4 Time]으로 발표된 이날의 연주는 모든 곡이 3/4박자로 행해 참신한 아이디어의 대결이 되었다. 이와같은 'Jazz Waltz'는 단발적으로 지금까지 몇번 있었지만 앨범 전체를 모두 이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4박자 일변도의 재즈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모던 드럼의 쾌거였다.
<존 콜트레인, 몽크와의 공연으로 도약>
존 콜트레인은 1956년 12월 마일즈 데이비스의 그룹을 돌연 탈퇴, 필라델피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약문제가 그의 뒤에 숨어 있었는데, 마일즈는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그에게 마약을 끊던가 밴드를 그만두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겨울을 보내고 마약중독을 극복한 모습으로 복귀하였다. 깨끗한 모습이 된 콜트레인은 셀로니어스 몽크의 권유로 봄부터 장기 출연이 약속되어 있어 'Five Spot'에서의 일을 몽크 쿼텟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몽크는 캬바레 카드를 드디어 재교부 받고 클럽 출연이 자유로워졌다. 가을까지의 'Five Spot'에서의 출연은 성공을 거두었고 뉴욕 재즈계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콜트레인에게 있어서도 몽크와의 공연은 상당히 의미 깊은 것으로 비약적인 음악적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의 첫 리더작 [Coltrane]도 레코딩할 수 있었고 소니 롤린스와 더불어 모던 테너 색소폰 주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몽크 그룹이 'Five Spot'음악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못하지만 윌버 페어(b), 쉐드 윌슨(ds)을 가입시켰던 이 쿼텟은 7월, 스튜디오에서 3곡의 녹음을 행하고 그외에도 많은 레코딩 세션에 참가하여 콜트레인 시대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찰리 파커 이후 오네트 콜맨 출현>
LA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로 근무하면서 음악의 길을 걷고 있던 오네트 콜맨은 그 사이 많은 재즈맨들과의 친분으로 컨템포러리 레코드의 레스터 케니히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그가 부는 플라스틱 앨토 색소폰 소리가 마음에 들어 레코딩 제안을 한 것이다. 1958년 2월 10일, 22일, 3월 24일 그의 레코딩은 행해졌다. LA에서 친분을 유지하던 돈 체리(tp), 빌리 히긴스(ds), 월터 노리스(p), 돈 페인(b)을 가입시킨 5중주단으로 9곡을 녹음하였다. 프리 재즈의 기수 오네트 콜맨의 실질적인 데뷔 앨범 [Something Else]의 탄생이었다. 그는 그후 찰리 헤이든(b), 빌리 히긴스(ds)와 트리오를 조직하였던 폴 블레이(b)의 권유로 돈 체리와 같이 참가하였다. 같은 그룹에서 10월, '힐크레스트 클럽'에 출연하게 되자 그도 같이 클럽에 출연하며 실력을 연마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마일즈 데이비스, 모드 주법의 도입으로 탈(脫) 하드 밥을 시도>
1958년 1월, 파리에서 귀국한 마일즈 데이비스는 존 콜트레인을 다시 멤버로 기용하여 예전의 오리지널 퀸텟을 부활시켰다. 여기에 캐논볼 에덜리를 새롭게 가입시켜 6중주단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 3관 6중주단에서 4월 2일, 3일 첫 레코딩을 행하였다. 재키 맥클린의 <Dr. Jekyll>, 셀로니어스 몽크의 <Straight No Chaser>, 존 루이스의 <Two Bass Hit> 등과 섞여 마일즈의 오리지널 곡이 2곡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중 <Milestones>는 종래의 코드 진행에 따른 것과는 다른 애드립 전개로 마무리되어 있다. 모드주법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운 연주였다. 코드진행으로부터의 애드립 해방, 이미 하드 밥의 정형화를 느끼고 있던 마일즈는 그 방법으로서 모드 주법을 도입한 것이다. <Milestones>는 그런 그의 음악세계의 첫 걸음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레코딩을 끝으로 레드 갈란드와 필 조 존스가 탈퇴하여 빌 에반스, 지미 코드 등을 받아들였다.
<Monterey Jazz Festival>
1958년 10월 3∼5일, 제1회 몬트레이 재즈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보다 4년 늦게 시작된 이 페스티벌의 개최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한적한 항구 몬트레이였다. DJ를 했었던 지미 라이온스가 프로듀스한 페스티벌로 뉴포트와 마찬가지로 가장 전통 있는 재즈 페스티벌이자 야외 콘서트였다. 제1회에는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맥스 로치, 데이브 브루벡, MJQ, 빌리 홀리데이가 출연하였다. 특히 빌리 홀리데이는 대관중 앞에서 행한 마지막 무대였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것으로 [Billie Holiday At Monterey 1958]이 그날의 무대를 기록한 음반이다. 반주에는 말 월드론의 피아노 트리오에 버드 데프랑코(cl), 베니 카터(as), 제리 멀리간(bs)이 연주에 참가하였다. 모두 11곡을 연주한 무대에서 빌리는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펑키 재즈 붐!>
아트 블래키는 1958년 가을, 그룹 멤버를 일신하였다. 리 모건(tp), 베니 골슨(ts), 바비 티몬스(p), 지미 메리트(b), 블래키(ds)의 멤버로 새로 바꾼 재즈 메신저스를 출발시켰다. 리 모건은 신예 중 최고의 트럼페터였고 골슨은 뛰어난 작·편곡의 귀재로 모두 디지 길레스피 악단에 있었다. 10월 30일 재즈 메신저스는 블루노트에서 첫 레코딩을 행하여 바비 티몬스의 <Moanin'>, 골슨의 <Blues March>등 6곡을 녹음하였다. 그것은 곧 이어 찾아올 펑키 재즈 붐의 도화선이 된 [Moanin']이라는 앨범이었다. 가스펠과 R&B의 요소를 도입하여 흑인의 필링을 강하게 부각시킨 펑키 재즈는 호레이스 실버와 밀트 잭슨의 작품을 대표적으로 내세우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58년 초두에 소니 클라크(p)가 재키 맥클린(as)과 [Cool struttin']를 녹음, 이것도 전형적인 펑키 재즈였다. 그러나 그 명칭과 함께 펑키 재즈를 세상에 넓힌 것은 티몬스가 만들고 재즈 메신저스가 연주한 <Moanin'>이 발표된 이후였다. 블래키는 이후 11월, 파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약 한 달간 머물면서 유럽에서도 펑키 재즈의 붐을 일으켰다.
<Mode Jazz>
마일즈 데이비스는 1959년 3월 2일과 4월 22일 레코딩을 위해 이미 탈퇴한 빌 에반스를 잠시 다시 불렀다. 3월 2일 이미 새로운 멤버가 된 윈튼 켈리를 가입시켜 블루스 넘버인 <프레디 플리로더>를 먼저 녹음하였다. 이어서 에반스(p), 콜트레인(ts), 캐논볼(as), 폴 챔버스(b), 지미 코브(ds)와 <So What>, <Blue In Green>, 4월 22일에는 <All Blues>를 녹음하였다. 빌 에반스를 가담시킨 6중주로 마일즈는 <Milestones>에서 시도하였던 모드 주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시험적인 앨범에는 빌 에반스가 적격이라고 마일즈는 생각하였다. 마일즈 데이비스에 의한 모드 재즈의 탐구는 [Kind Of Blue]에서 잘 정리되어 획기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여기에서 얻어낸 성과는 콜트레인과 에반스에게 이어져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콜트레인은 독자적으로 아틀란틱과 계약, 레코딩을 시작하였다. 에반스는 스코트 라파로(b), 폴 모티앙(ds)이라는 파트너를 얻어 12월 28일 [Portrait In Jazz]를 녹음하였다. 이것들에 의해 콜트레인도 에반스도 신세대를 향한 톱 재즈맨의 위치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모드 주법을 도입한 새로운 재즈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