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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기록화에 나온 행주치마.
매해 3월14일 고양시에서는 행주대첩기념제가 열린다.
임진왜란 당시 육전 중 가장 극적인 승리를 거둔 행주대첩을 기리는 행사다.
이 행사의 중심에는 항상 행주산성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행주치마'가 있다.
행주대첩에서 아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서 병사들을 도와 승전을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이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됐다는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실제 행주대첩에서는 접전 막바지에 석전(石戰)으로 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럴듯한 해설로 들린다. 하지만 실제 행주치마라는 말은 이보다 한참 전부터 쓰였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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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70여년 전인 1517년, 조선 중종대의 학자 최세진이 쓴 책인 사성통해(四聲通解)와 역시 최세진이
1527년에 작성한 한자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행주치마의 어원격인 '행자치마'란 말이 나와있다.
행자치마는 주로 절에서 수련하던 행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입던 앞치마를 뜻한다고 알려져있지만 정확히 어디서 비롯된
말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적어도 행주대첩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인 것. 더구나 행주대첩 당시 민간인, 특히 여성이 참전
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당시 행주산성은 근처에 민가도 없었고 이미 전쟁통에 근교 민가들도 모두 피난간 상태였다.
조선군은 산성 위에 2중 목책을 두르고 10배가 넘는 일본군과 접전을 펼쳤고 화약과 화공약품이 사방에 퍼지는 상황에서
민간인이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도 없었다.
병사들을 위해 돌을 나르는 아낙들의 모습이 비춰지는, 민·관협동의 아름다운 그림은 어디에도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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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
민간인 참전은 없었다고 해도 행주대첩의 역사적 중요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행주대첩이 없었으면 일본군이 조기에 한양을 내놓고 남하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사기가 크게 떨어져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고 한양 탈환은
평양보다 훨씬 장기전으로 갈 가능성이 높았었다. 이때 권율 장군이 이끄는 3000명 남짓한 조선군이 전략적 요충지였던
행주성으로 진출했는데, 이곳은 백제시대 토성으로 활용된 이후 큰 개·보수가 없던 산지로 여기에 목책을 2중으로 치고
화차와 신기전 등 화약무기를 배치해 주둔했다. 명나라군을 반격하려고 준비하던 왜군 처지에서 행주성을 먼저 공격해
함락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왜군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3만 대군을 7개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왔다.
행주성은 삼면을 한강이 둘러싸고 들어오는 통로는 좁았기에 조선군의 10배가 넘는 적이지만 훌륭히 막아낼 수 있었다.
조선군이 화차, 신기전 등 화약무기를 동원해 일점공격을 하면서 일본군 1군이 전멸했다. 하지만 왜군 총대장 우키타는
숫적 우세만 믿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우를 범한다. 압도적인 왜군이 밀어붙이자 조선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직전까지
갔으나 조선군은 석회주머니를 터뜨리고 화력을 우키타의 본군에 집중시키는 등 화력전에 나섰고 이에 우키타 본인이
부상을 입으면서 왜군은 참패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다음날 다시 재개됐다.
숫자 적은 조선군은 이틀에 걸친 접전에 지쳤고 왜군이 방어선을 뚫고 육박해오자 조선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권율장군은 구리 가마솥을 쓰고 지휘하다가 지친 병사에게 쓰고 있던 솥을 벗어 물을 따라 주었다고 한 일화가 전한다.
조선군은 화살까지 다 떨어지자 이때부터 성안에 모아두었던 돌을 던지며 최후까지 격전을 펼쳤다.
점차 조선군이 밀리고 있을 때, 기적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경기수사가 배 2척에 화살 수만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와
보급을 하러 왔으며 또한 수십척의 전라도 조운선도 함께 지나갔다.
이 배들을 본 왜군은 사기가 크게 꺾여 물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소문난 그 무섭다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북상한 것으로 오해한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