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회의 심각한 오류 중의 하나는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바울의 복음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서신서를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하여 계명에 순종할 것을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5,6
이러한 바울의 증언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계명과 구원이 전혀 상관없다는 것은 바울 서신을 크게 오해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회심 전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회심을 경험한 후에는 "율법에 순종하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마음의 변화였지
행함이냐 믿음이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 마음의 변화를 통하여 드디어 진실된 행함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었고
그가 전한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바울의 회심을 살펴보십시요.
외적인 율법적 행위로는 완벽한 바울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의 앞에 섰을 때(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빛을 만나 시력을 잃고 인간적으로 철저히 부서지고 고뇌하게 된 그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의 의의 빛 앞에서 깨져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비로소 자기의 외적인 율법의 의가 얼마나 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의 진실된 변화와 굴복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끝까지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외적인 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율법을 겉으로 만열심히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의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할례를 자랑하고 외적인 형식적 율법지킴을 자랑하며
자신은 구원받은 선민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 완전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겉으로의 율법의 행위들이 가식적 행위였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실로 하나님앞에서 변화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나 귀한 것임을 체험하고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마음의 할례의식을 통하여 이방인까지 당신의 선민으로 삼기 원하신다는
복음의 원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나 바울이 이해하고 있었던 구원의 틀은
"육적할례 받은 혈통적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저 멀리 이방인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육적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음의 할례 즉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 바울은
그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까지 포함된다는 그 깊은 예언적 진리(사56장)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바울의 극적인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요.
이것은 엄청남 깨짐이었고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이제는 혈통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영적 혈통들이 진정한 유대인이 된다라고 인식한 변화말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롬2:28,29
여기까지 갈라디아서의 다른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바울의 회심을 경험을 살펴보았습니다.
위에 로마서 2장을 언급한 것은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는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즉 혈통이나 육신적 할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포함된 선민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의 기준이
육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에 있다...라는 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사회를 엄청나게 뒤짚는 일대 혁신적 발언이었고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걸려넘어지는 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육신할례, 혈통 이스라엘)의 틀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시 유대사회의 문화의 틀을 이해하면
바울이 이야기한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며
이러한 혁신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있을때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직 깨지지 않은 유대주의적 사고의 누룩을 퍼트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을 왜 "거짓형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뒤엎고
여전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우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육적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마음의 할례로는 부족하고
그에 더하여 자신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육신적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의 마음의 동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변화 즉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경험했던 그러한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육적 할례로 자신들의 구원을 보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언급한 "율법의 행위"였습니다.
마음의 진실된 변화와 굴복없이
겉으로 행해지는 의식과 표식으로 자신의 구원의 증거를 삼으려는 행위
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위를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지목했던 것이죠.
율법의 행위란
마음으로까지 진실되이 율법의 요구에 굴복함 없이
겉으로 외형적으로 철저히 지키는 척만 하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에는
이 율법의 행위가 꼭 등장하는데
율법의 행위의 정체가 바로 그러한 기만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는데
그가 율법의 행위 대신 믿음을 강조한 이유는
위에 잠시 언급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이
인간의 내면에 진실된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과 진실된 의의 행돌을 유발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언급한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내면의 진실된 변화와 그로 인한 진정한 의의 행동을 강조한 것이었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의 요구를 무시한체
마음으로만 믿는다 하는 지식적인 동의를 믿음이라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론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이란
마음의 할례를 통한 진실된 변화와 그 결과 촉발되는 진실된 의의 행동 (하나님의 계명에의 굴복)이 구원이다...라는 것이었고
그가 지적한 다른 복음이란
그런 그리스도를 통한 진실된 변화와 율법에의 진실된 순종과 굴복없이
겉으로 행해지는 할례나 율법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으려는 기만적인 시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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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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