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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대 제1수필집『가곡천 그 여울을 따라』도서출판 海歌 간, 2018
해가수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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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 2018. 6. 5.
발행 | 2018. 6. 10.
지은이 | 이용대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34-4 (03800)
값 15,000원
ⓒ2018 이용대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글머리
가곡천 그 여울을 따라
압축적 표현의 방법인 암시와 폭넓은 함축을 담아내는 상징, 숨기며 드러냄으로써 피워내게 되는 시를 안고 멀고 긴 날 남모르게 혼자 앓아왔다.
시詩라는 짧디 짧은 글 한편으로 남에게 어떻게 나를 알 수 있게 하겠으며 용광로를 거쳐야만 하는 쇠물이지 않고서는 무엇으로 타자의 마음을 뜨겁게 두드릴 수 있겠는가.
그 통증과 동행하는 걸음으로 송판같이 무딘 가슴을 수시로 담금질 하며 차돌을 깨듯 절제시킨 언어들을 은유라는 밀실에 깊이 잠류시켜야 하는 시 창작의 호흡에서 숨고르기라도 할양으로 가끔 산문을 썼다. 때로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옆 사람과 뼈 없이 살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갈래의 상념을 한 가닥으로 뽑아낸 속내와 필히 담고자 하는 마음을 문자로 그려내는 역할에 보이지 않는 범위가 드러나고 있었음이 또 다른 이유였다. 허약한 염역念域을 확장하려는 부딪침으로 수많이 자판을 두드렸지만 어느 땐 허물어지지 않는 절벽과 마주친 적도 많았다.
나의 생각, 나의 사고, 나의 정신을 나타내 보인답시며
시로 응집해 보았고 수필로 풀어내려 했었어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늘 석연치 않았음도 실토한다.
이러한 구속에서 탈출해 보려는 몸짓으로 가곡천 그 여울을 따르다 보면 영혼에 자유가 스미게 하는 동해에 이르며 거슬러 올라가면 장엄한 태백산맥에 다다른다. 1백리 길, 돌고 돌아 흐르는 가곡천柯谷川엔 정겨움 차오르는 솔밭들이 있고 사계절 피고 지는 강 꽃과 더불어 갈대 어우러진 천변이 동반한다. 이리 저리 산모룽이를 감싸며 구름같이 너울지는 물굽이 그자체가 바로 굴레 벗은 시詩인 것이요 철따라 채색되는 산하가 자연적 수필隨筆임을 여기서 깨닫는다.
나는 이 모천母川에
영원히 깃들고 싶은 멧새이고.
2018년 봄날에
가촌 이용대
목차
글머리 _10
가곡천 그 여울을 따라
1부 : 2003-2006년
못 지킨 약속 _18
눈물이 돌石이 되어도 _23
보석보다 귀한 웃음 _27
공사판에서 _32
‘남’이라는 이름 셋이 있었네 _35
2부 : 2007-2011년
침입자 _40
황토黃土에서 만난 국화國花 _45
침묵이라는 것에 대하여 _50
흔적 _53
발자국 _56
찹쌀떡 _57
힘없는 다툼 _60
산달섬 그 부근에 청마靑馬가 _63
신선한 순간 _68
3부 : 2012년
친구라는 말 _72
조연助演 _74
명품 _76
산골짜기에 뜬 미소 _78
해를 넘긴 엽서 _80
피붙이 _83
가곡천변柯谷川邊 _88
고개를 들자 _90
내방에 있는 나무의 유품 _92
미물은 없다 _96
강 건너 맛 집 _98
4부 : 2013-2015년
소미원小味院의 고라니 _104
나무 _109
소牛 _113
스승을 생각하며 _116
겨울 새벽 _118
하물며 _119
설촌雪村 _121
입술 맛 _124
토마토가 익는 밤 _126
강냉이 여무는 밤 _127
볏짚을 걷다가 _128
산촌일기 _130
5부 : 2016-2018년
군불을 때다가 _134
소낙비 온 뒤 _136
어떻게 이들을 말렸어야했나 _140
농부, 그 깊은 눈을 가진 사람 _145
생명에 대한 예의 _149
6부 : 시설詩說 : 시 같은 소설
셋방살이 _154
겨울 이야기 _157
7부 : 기독여성신문 논설
태극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다 _164
존재의 감사 _167
추수감사절의 실질적 의미 _170
아침마다 새롭게 _173
엠마오 길의 동행 _176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_178
에필로그 _181
1부 : 2003-2006년
못 지킨 약속
초등학교, 모교 –
학교 앞 개울 건너편 산에 큰 시루떡을 잘 잘라 똑바로 새워둔 듯 한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 그 아래로 덕풍계곡1)과 신리2)– 동활리3)를 거쳐 오는 맑고 차가운 가곡천4)이 학교 부근의 청평들을 감싸 굽이돌며 해당화 피는 동해안으로 그림같이 흘러가고 있다. 작지만 많은 졸업생을 배출한 오래 된 초등학교5) 뒤로는 높은 학바위에서 뻗은 산줄기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오다가 갑자기 깊고 푸른 솔밭을 만들고 있다.
일요일의 운동장과 교사校舍는 산 속의 작은 호수같이 고요하고 조용했다. 붉은 벽돌로 반듯반듯 금을 그어놓은 것 같은 꽃밭들이 남의 집 마당에 들어선 듯 낯설었다. 수줍은 양 피어있는 분꽃들과 조그마한 몸집의 여학생들같이 옹기종기 모여 핀 채송화 무리, 그리고 언니들같이 죽죽 키가 자라 서 있는 쑥부쟁이 꽃들이 바람처럼 스치는 구름들과 살짝살짝 눈 맞춤을 하고 있었다. 6학년 교실 화단에 외롭게 자라난 매화나무, 교무실 앞에 있는 키 크고 멋진 향나무, 개울 쪽 측백나무 울타리에 기대어 미끈하게 서 있는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 그리고 운동장 후문에 금관같이 곧게 뻗어 올라간 한 그루의 향나무 자태는 품위 있던 옛 모습 그대로였다.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신비롭도록 선명한 병아리 색으로 물들어 어린 우리들을 자주 그 밑으로 이유 없이 모이게 했던 은행나무 잎은 매우 특별했었다. 옅은 우유냄새를 풍기던 잎은 우리로 하여금 마냥 씹어보고 싶게 만들 정도의 맑고 깨끗했다. 이를 주워 부채처럼 곱게 펴 책갈피에 차곡차곡 끼워두곤 했었다. 금관 향나무 또한 그 옆에 가기만하면 제삿날 저녁 같은 은은한 목향을 맡을 수가 있었다. 또 그 금관 향나무는 우리가 숨바꼭질하기에도 딱 알맞은 놀이터였다. 향나무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 살그머니 숨어 있으면 마치 한 마리의 사람 새가 되어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람한 근육질로 높이 자라나 올라가 볼 엄두도 나질 않았다. 껍질 또한 매우 두꺼워져 노목다운 나이 티를 흠씬 풍기고 있었다. 향나무 오른편 구석엔 높다란 수양버들 나무와 작은 호수가 꾸며져 있었고 호수 옆으론 옹달 샘터가 있었는데 거짓말같이 다 사라지고 난데없는 배드민턴장이 을씨년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옆구리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쓸쓸함이 뒹구는 가랑잎과 함께 사르르 스치고 지나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와 운동장의 큰 바람막이가 되어 준 측백나무 울타리 위로 조무래기 노랑나비 한 떼가 방향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측백나무들의 키를 잘 맞추어 가며 이발을 시킨 것 같이 가지런히 다듬어 놓아 운동장 둘레가 마치 ㄷ자모양의 초록 천막을 둘러쳐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실로 30여 년만의 재회로 젖어 오는 것은 비단 서글픔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반가움도 함께 깊이 교차되었다. 옛날엔 그렇게도 높다랗게 보였던 목조교실들은 모두 없어졌고 그 자리에 현대식 콘크리트로 전부 개축하였으며 상하수도도 잘 설치되어 있는 듯 하였다. 교실들에 대한 짙은 향수도 그랬지만 오랫동안 그대로 잘 성장 해 온 나무들과의 재회에 따른 초등학교 시절의 수많은 옛일들이 초가집 굴뚝의 저녁연기처럼 눈언저리께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무척 넓고 크게 보이던 운동장은 깨끗이 꾸며진 어느 연구소의 정원같이 아담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도 싫던 모래땅 운동장은 먼 사랑의 여운같이 얇은 살구 색으로 남아있어 말없이 서 있는 나의 발바닥을 한없이 보드랍게 감싸주었다.
사다리타기, 술래잡기, 군기놀이, 발야구, 자치기, 제기차기 등의 놀이를 하며 놀던 또래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운동장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무명 횐저고리에 광목 검정치마였지만 그것도 좋아라 하고 뛰어 다니던 여학생들이었고 머슴애들은 순전히 빡빡머리에 대충 홑바지 차림들이었다. 치마를 펄럭이며 고무줄 넘던 여자아이들은 우리 보다 먼저 할머니나 외할머니가 되었다는 소문은 벌써 전에 들었다. 그러한 동창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의 이름조차 이제는 정말 희미해져 버렸다. 얼굴들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도 이처럼 변했는데 사람이라고 변하지 않고는 배길 수 있었으랴.
이 중에서 한참동안 발을 멈추고 오랜 생각에 잠기게 했던 것은 운동장 후문[지금은 정문이 되었다] 야트막한 둔덕에 우뚝 서 있는 겹 벚꽃 나무 아래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이 겹벚꽃 나무 아래서 우리는 선생님이 선창하는 대로 큰소리로 국어책을 읽었다. 대터竹田 비비골6) 쪽에서 훈훈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과자 부스러기 같이 먹고 싶을 정도의 고운 꽃잎이 폴 폴 흩날렸다. 공책과 교과서 위는 물론 까까머리 위로도 우수수 눈발처럼 꽃잎이 마구 쏟아져 내렸었다. 그러면 선생님을 아예 무시한 채 누구랄 것 없이 일어서서 소릴 지르고 박수를 치고 난리를 떨었었다. 그런 행동의 선봉장이 매번 나였었다. 이상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떠드는 그러한 나의 어릴 적 성격 때문에[침착치 못 한 것] 참다못한 선생님은 대표로 나에게 큰 벌을 주었다. 그리곤 급장을 그만두게 했다. 그 후 4학년이 되어서야 다시 급장에 뽑힐 수가 있었으니…
이 겹벚꽃 나무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든 우리의 모습과 어린 돼지 목소리 같은 우리의 소리를 모두 들은 바 있는 증거 나무이었다. 나이가 들어 검게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늠름하면서도 높다랗게 가지를 뻗고 있는 겹벚꽃 나무를 안고 뺨을 대며 속삭였다. “너 알고 있겠지만 나 야단 맞던 일 끝까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 비밀로 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말 안 했어. 그러니 가끔 찾아와야 돼, 약속해?” 벚나무가 대답했다. “너 대통령이 되어서 다시 온다 하드니 어떻게 됐어?” 이번엔 벚나무가 물었다. “……”
대답을 잊은 나는 앞산의 높다란 병풍바위를 건너다 보았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강 두루미 두 마리가 동무하며 회색 종이비행기처럼 소리 없이 빗기며 지나고 있었다. 겹벚꽃 나무와 정말 오랜만에 서로 마주 보며 귓속말을 주고받았지만 벌 받든 일이나 대통령이 안 된 나의 약속이 생각나 양 볼에 좀 쑥스러운 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내 앞에 있는 작은 돌맹이 하나를 괜히 냅다 발로 차 멀리 보냈다. 어릴 때도 그랬듯이.
모처럼 초등모교에 들려본 길이라 좀 오랫동안 서성이어 보았지만 철없이 까불며 재미있게 뛰놀던 죽마고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교문 작은 돌계단에 앉아 눈을 감고 행여나 하고 기다려보아도 귀에 익은 목소린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찾아오길 기다리는 매화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측백나무, 겹벚꽃 나무가 잊지 못할 초등학교 일들을 잘 지켜 주고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문득 교실에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깊은 낮 잠 한번 푹 자고 싶어졌다.
2003.09.04.
* 삼척시 가곡면에 있는 모교 오저초등학교에서. 이땐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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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곡면 풍곡리 덕풍에 있는 절경 계곡
2) 삼척시 도계읍 신리, 전통 농촌 가옥 굴피집이 남아있는 청정 오지
3) 가곡면 동활리, 소금강 같은 이곳을 지나 태백으로 간다
4) 가곡면을 지나 동해로 가는 작은 강
5) 가곡면 오저에 있는 오저초등학교
6) 가곡면 오저 2리에 있는 마을의 산골짜기
눈물이 돌石이 되어도
사랑이란 매우 여성적 단어다. 사랑을 사랑思郞이라고 달리 생각해 본다. 순수 이성적異性的 측면으로 –사내를 생각한다–라는 여성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남성이 하는 사랑은 충忠이다. 충忠, 즉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 오직 한 여성을 마음 가운데 두고 있는 것, 목숨을 버릴 정도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특정 여성에 대한 생각이 남성 쪽에서 보는 사랑이 아닐까 한다.
‘사랑’이란 참 묘한 것이다. 사랑이란 큰 테두리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이데아[idea 이상향]로 있는데 그 안에서 각자 다른 모습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똑같은 사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원형은 우리의 생각 속에 있지만 아무도 ‘이것 이다’ 라고 정형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없다. 이것은 신분과 처지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아름답고 어느 것이 덜 아름답다고 단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천하게 생각하면 장난의 말 같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정말 조금이라도 상처주지 않기 위해 내가 같이 있는 것보다는 보내줌으로써 보호해주고 싶은 지고지순한 결단으로 이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달콤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반半은 아픔이다.
사랑은 과정이지 목표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사랑을 마치 만남의 목표로 생각한다. 즉 사랑은 합일로 가는 출발의 진행이지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결혼해서 그 다음은 ‘함께 하는 생활’로 가는 것이다. 결혼 후의 사랑은 애정과 우정과 인정이 어우러진 합혼체合魂體로 변한다.
그런데 사랑은 늘 미완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상하게도 사랑의 완성은 없다. 사랑하여 마침내 결혼했다고 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사랑만이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여러 가지의 상호관계가 얽혀져 상호이해와 제3의 형태인 배려나 고려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미완의 사랑은 어떤가. 그리움으로 변한 사랑이 생각의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원인은 두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은 흔적 때문이다. 이 흔적이 사람을 한없는 아쉬움의 미련과 아울러 아늑한 과거로 자꾸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이 흔적으로 인하여 기다리고 애달파 하게 된다.
호수에 나가 돌을 던짐은 돌 던지는 연습을 함이 아니다. 마음을 던져보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나서고 싶은 것도 바람의 강도가 얼마나 쎈가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쫓아 그 사람의 모습을 찾아 나서는 방황의 아린 몸짓이다. 바램에 목을 높이다 보니 목이 댓 자나 늘어난 것 같다. 기다림의 세월이 쌓이다 보니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키가 열자나 자란 것 같다.이 모든 것은 미완의 사랑 때문인 것이다.
만나기로 한 날자와 시각 그 장소에 나가 16년간이나 기다렸다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긴 세월이지만 지금까지도 기다리는 마음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 사람이 꼭 나타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온다 했다 한다. 그 사람이 온다했는데 못 온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어떻게 자기가 먼저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다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다시 온다고 한 사람은 남자다.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습니까? 그는 오히려 이 기다리는 일조차 까맣게 잊어 버렸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와 재회가 너무 길어져 이제는 깊은 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은 미움으로 변화되고 나아가 원망으로 고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작별할 때 차라리 다 털어버리고 보냈어야 했는데… 그래도 남은 찌꺼기가 있었다면 그것마저 다 없앴어야 했는데… 그랬었다면 지금 와서 이토록 한 사람의 포로는 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말씀드리기 참으로 애타는 사연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김에 정말 좀 더 기다리기 바랍니다. 떠나 간 그 사람인들 무심하겠습니까. 그 사람도 사람인데.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에 단 한번은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꼭 찾아 올 것입니다. 당신이 기다리는데 그 사람인들 당신을 잊었겠습니까.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올 사람이 이토록 못 옴은 못 올 사정이 넘지 못할 태산 같은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기다리며 뿌린 눈물이 쌓여 돌이 된다 해도, 지나간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이제는 정말로 끝까지 버터야 합니다. 영영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 하다가 드디어 그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가슴이 터져라 패버리십시오. 직성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패십시오. 그래도 정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안고 콱 죽어 버리십시오. 이런 사람은 사람도 아닙니다. 요렇게 못난 인간은 남자건 여자건 좀 맞아도 쌉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을 밧줄로 칭칭 매고 강물에 확 빠져 버리십시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순애보殉愛報는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5.8.18.
......................
* 꼭 다시 오겠다 하고 떠난 연인을 16년간이나 기다리는 여성이 지금 실존하고 있다.
보석보다 귀한 웃음
사람이 사람을 진정으로 서로 생각한다는 것은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숨 막힐 듯 헝클어지는 세상살이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처럼 기분을 가볍게 하는 것이라곤 별로 없다. 아울러 생활로 억눌린 심리적 정서를 풀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청량제가 될 것임에도 분명하다.
오십을 넘기면서 새삼 문학의 묘미를 느끼고 창작에 심취해 보려고 애쓰는 문인*이 있다. 멋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멋을 아는 사람이고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자세 가운데서도 절제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한다. 이 분은 늘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한 연후에 간혹 차라도 한잔 같이하자고 연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나의 일정을 전혀 묻지 않은 채 낮 12시경 전화를 걸고서는 다짜고짜로 강화도를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 이 사람의 평소 몸가짐으로 보면 참으로 엉뚱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순간 좀 당황도 되었다. 그러나 급한 일들을 오전에 어느 정도 처리한 터라 강화도에 간다 해도 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었기에 쾌히 동의했다.
하기사 강화도의 풍광은 언제 보아도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섬이다.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뿐더러 서해안의 개펄과 숲으로 둘러 싸인 고즈넉한 자연풍치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부침을 거듭한 역사 속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강화의 저녁노을은 또 어떤가. 해변에 홀로 서서 낮게 저물어 가는 낙조를 바라보노라면 내 영혼마저 서녁의 검붉은 노을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가는 듯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이 사람이 굳이 나에게 동행하자고 제의해 온 것은 내 삶의 피곤을 잠시 잊게 해 주려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강화도로 미처 떠나기에 앞서 그 상쾌 감이 좋은 기분으로 상승되어 밀려왔다. 결과는 둘째로 치고 이러한 문우가 먼저 새삼 고마웠다.
이 사람은 멀리서 내가 보이기 시작만 해도 해맑은 웃음을 한껏 나타내 주었다. 실은 이 문우의 외모 상 가장 큰 특징은 웃음이다. 속으론 말 못할 사정에 쌓였다 해도 나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한 번도 찡그린 얼굴을 해 보인 적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깊은 마음을 베푸는 것임이며 좋은 사이에 대한 예의도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생활의 고충과 고민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면 얼굴부터 먼저 이지러지는 법이다. 그런데 모르긴 몰라도 나를 만날 때만큼은 그렇지 아니했던 것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것에 항상 감사했고 이 사람의 훌륭한 장점 중에 하나라고 오래 전부터 여겨왔다. 그래서 이 사람의 별명을 스마일이라고 지어주었다.
밴댕이 밴댕이해도 진짜 어떻게 생긴 것이 밴댕인지는 여지껏 살면서도 확실히 잘 몰랐다. 강화 풍물시장 난전에 밴댕이회를 앞에 놓고 같이 간 이 문우와 마주 앉았다. 이 문우의 말에 의하면 베레모 여인이라는 회를 파는 여자가 강화시장 내에 있는데 그 사람의 미소가 참으로 매력적이라고 했었다. 바로 그 집 난전 식탁에 마주 앉은 것이었다. 베레모 여인은 물론 그와 함께 장사하는 그 여동생의 미소도 남달리 좀 매력이 있기는 있었다. 자매 모두 다 소리 없이 살짝살짝 흘리는 웃음은 아무나 만들어 내는 그런 웃음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 베레모 여인보다는 나와 마주 앉은 이 문우의 미소가 더 좋았다. 생활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체질적으로 잃지 않고 있는 것 같은 해맑은 웃음은 마주할 때마다 나의 피곤함을 잠시 가시게 해 주곤 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재미있는 말들을 천진난만하게 많이 들려주었다. 그것 모두가 다 진심에서 우러나오기도 하거니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기에 이야기가 지루하다거나 듣기 싫게 들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속 자체가 아주 없어서 속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마음씨 좋은 사람을 가리켜 밴댕이 속이라고 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속된말로 속이 아주 좁아 터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말조차 곤란한 오해를 곧 잘 하는 사람을 일컬어 ‘밴댕이 속 같다’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도 분간이 잘 되지 않고 있다. 하여튼 이 사람은 나와 같이 할 때는 어린아이같이 혹은 절친 같이 그렇게 움직였다.
약간 흐린 듯 한 강화의 봄날 오후 산과 들은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간간이 스치는 물새들의 날개 소리는 마치 구름들이 서로 비켜 가는 하늘 소리같이 들려왔다. 푸근한 봄기운에 고단함을 잔득 느낀 나는 혼자 민박집 사랑채에서 달고 깊은 오후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고들빼기를 꼭 캐야 한다면서 강화농촌의 파란 들판 길로 혼자 나섰다. 바구니를 들고 논둑길로 살랑살랑 걷는 뒷모습이 흡사 자유를 찾아 한없이 날아가는 작은 풀나비 같았다. 가다가 가다가 날이 저물면 훨훨 다시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안온한 강화 잠에 그만 푹 빠져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푸른 들판을 나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나는 누가 차려준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반찬은 단 한 가지 고들빼기 장아찌뿐이었다. 평소에 잘 먹어보지 못한 것이라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보나마나 그 맛은 매우 쓸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눈 딱 감고 고들빼기 반찬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맛은 지금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것으로 입에 딱 맞았다. 고들빼기 단 한 가지 반찬으로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해 치웠다. 그때 누군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맛이 어때요? 하고. 고들빼기 있으면 좀 더 주세요 라고 나는 꿈속에서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는데 바로 오늘 강화에 같이 가자고 조른 그 문우였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고들빼기 반찬을 만들었느냐고 내가 물었다. 이것은 자기 마음과 자기 솜씨가 함께 버물어진 고들빼기에 사랑이라는 양념을 골고루 잘 섞어서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순박한 웃음을 다시 더 한번 활짝 지어 보였다.
그때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만 일어나 가자”라는 목소리가 꿈속으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화들짝 민박집 잠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벌서 저녁 8시나 되었다. 그 동안 이 문우는 뜯어 온 고들빼기들을 다 다듬고 얼굴 손발을 모두 씻고 난 후였다. 아름다운 미소와 맛있는 고들빼기 꿈을 장장 2시간동안이나 꿈 꾸었든 것이었다.
200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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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노순
공사판에서
오랫동안 운영해 오던 회사를 뼈아픈 아쉬움 속에 정리하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만 했다. 중국 경제의 상승으로 경공업제품의 수출은 벌써부터 원가 면에서 중국과 경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연관을 맺어왔던 좋은 바이어들은 결국 중국으로 거래선을 돌리게 되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나니 경제적인 곤란이 당장 엄습했다. 먼저 딸의 등록금이 무엇보다 문제였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동안 막노동이라도 나가야겠다 생각하고 동네 인력회사를 찾아 이름을 등록했다. 전혀 경험은 없었지만 단순 노동이라 참을성만 있다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열흘간만이라도 계속 일한다면 모자라는 딸의 등록금을 채울 수 있었다. 며칠 후 인력회사에서 처음 만난 하룻 동료와 함께 지정된 공사장을 찾아 일찍 나섰다.
시키는 대로 또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되겠지 했는데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경험 있는 일용직 일꾼들은 알아서 척척했다. 하지만 여지껏 막 노동 한 번 해 보지 못한 나는 모든 것이 서툴렀고 너무나도 힘들었다. 오전 내내 무거운 것들을 운반하고 나니 온 몸이 얻어맞은 것 같이 쑤셔왔다. 속옷까지 땀에 흠뻑 젖었다. 작업장이 공사장 맨 꼭대기라 물 한 모금 마실 곳도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볼을 타고 줄줄 흐르던 땀이 말라 입술가로는 허연 소금기가 서렸다. 운동화 밑바닥을 뚫고 올라온 못에 발바닥이 찔려 그 통증이 걸음마저 몹시 어렵게 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중간중간 연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혹해 왔다. 하지만 딸의 모자라는 등록금 생각이 쉽게 포기하려는 마음을 자꾸 눌렀다.
피곤한 목구멍으로 뜨거운 점심을 빨리 마치고 남은 짧은 휴식시간에 혼자 외딴 곳을 찾아들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드릴 마음만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늘지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땀이 비탄과 함께 뒤범벅되어 온 얼굴을 적셨다. 그 때 공사장 책임과장이 나를 불렀다. 일을 그만두라고 하려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맨 아래 일층에 가서 혼자 공사자재들을 하나하나 보기 좋게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집단이 아닌 혼자 하는 일이었기에 보다 수월해 보였다. 창고 같은 곳이라 좀 시원하기도 했고 갈증이 나면 물도 쉽게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공사 과장은 여러 면에서 아주 서툰 나를 한 눈에 파악하고 그렇게 배려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한 열흘간은 계속해야 된다면서 나보고 매일 나오라고 했다. 열흘간의 노임을 얼핏 계산해 보니 딸의 모자라는 등록금보다 조금 상회하였다. 몸은 온 데가 다 아파왔지만 다행이다 생각하니 마음은 좀 놓였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 공사장의 현장과장을 일부러 찾아갔다. 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건축공사판에 나왔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고 박 과장이 말했다. 그 사람에게 주려고 준비해간 운동화 한 켤레를 감사와 함께 전하고 돌아 왔다.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하는 모습을 그 과장이 보고 느끼게 하여 주신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라고. 딸은 이제 두 학기만 더하면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2006.8.14.
‘남’이라는 이름 셋이 있었네
이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다. 삼우회1)에는 공교롭게도 쓰리three ‘남’이 있다.
먼저 한 분의 ‘남’은 미국 서부극에 나오는 보안관과 같은 인상의 영화배우 모습으로 훤칠한 풍모를 가진 분이다. 국회의원을 지낸 이 분은 마치 젊잖은 시골 훈장님 닮은 얼굴로 아주 가느다란 궐연을 피우면서 길게 나누는 재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야기의 논리 정연함에서 의정단상에 나가 국정을 논하던 정객의 옛 모습을 손색없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우회는 복잡한 거리 종로 3가의 YMCA 건물 뒤에 있는 ‘시골집’이라는 구옥에서 만난다. 일산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좀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아주 큰 특별한 일이 아니면 빠짐없이 참가해 왔다. 툭하면 곧잘 빠지게 되는 회원들에게 실천으로 교훈하고 있음을 무언중에 느끼곤 한다. 우리는 이 분에게서 정확한 시정뉴스를 전해들을 수 있어서 좋다. 또한 극히 필요할 시엔 이것저것을 따지지 않고 선뜻 좋은 협조를 아끼지 않는 분이다. 이것은 이 분의 깊은 애향심으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망향의 배려인 셈이다. 오랜 삼우회의 참여 뒤에 얼마 전 수필가로 등단했다.
또 한 분의 ‘남’은 서울 종로에서 보면 역시 거리가 먼 광명시에서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시골집’으로 온다. 서로 대하면 마치 산골에서 아랫마을 큰집에 다니러 온 오촌 아제비2) 같아서 좋다. 이 분과 마주하면 우리는 다 친근한 조카들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분의 최근 시들에 대해 궁금함이 더하다. 스스로 밝혀 왔듯이 순전히 독학으로 오직 시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결실에 따라 K일보와 H문학지를 통하여 오래전 문단에 등단했다. 이 분의 시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고독한 들풀’의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그의 최근 시집 이름도 <유배지로 가는 길>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현재 그 어떤 사안들에 대한 판단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명확한 논리를 펼친다. 반대할 것은 반대하고 찬동할 것은 분명히 찬동하는 시인이다. 몇 년 전엔 같이 힘들게 살아 온 부인과 사별하고 아내의 분신 같은 갈대를 자주 노래한다. 탄전문학의 선두자로서 한국에 몇 안 되는 광부 시인중의 한 분이기도하다. 젊은 날 실제로 갱도 막장에 들어가 채광을 했든 석탄산업 역군이었다. 하기에 이분은 고단한 삶의 애환도 숱하게 보고 또 느끼며 간직하고 살아 온 시인이다. 이제 와서는 몸이 많이 불편하여 보는 우리로 하여금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남’이라는 한 분은 한국의 중견 여류 수필가로 종로구 문인협회 회장에 추대되어 종로문학을 이끌고 있는 분이다. 접시꽃같이 예쁘장하고 하얀 피부로 나이에 한참 뒤지는 젊은 모습이다. 그 자상함은 누나 같고 언니 같다.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일본어도 유창하다. 이 분의 애국심이나 애향심은 그 누구도 섣불리 견줄 수 없다. 특히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속엔 언제나 소녀 같은 정서가 넘쳐나고 있어 그 추억이 눈물겹다. 동심의 삼척 모습들을 활동사진처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옛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려준다. 이 분도 최근 들어 소소한 몸 아픔이 자주 있는 모양이어서 초동初冬으로 가는 우리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이러한 ‘쓰리 남’이란 다름 아닌 바로 김정남 수필가, 정일남 시인, 김옥남 수필가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세 분이 다함께 모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꼭 한 분이 모임에 빠진다. 그 이유는 건강문제다. 연세들이 깊으신 관계로 그러하니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뵙고 싶은 마음이 되어 몹시 기다리게 한다.
삼우회 회장님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강원江原의 대표시인 이성교 선생님과 더불어 이 세 분은 서울 삼우회 뿐만 아니라 고향 삼척의 문학발전을 위해서도 오래 계셔주어야 한다. 형제애와 같은 서로의 아낌을 남김없이 베푸는 삼척 출신 문우 여러분들도 이러한 ‘쓰리three남’을 문학행로文學行路에서 영원히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200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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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에 사는 삼척출신 문인들 모임
2) 아저씨의 방언. 오촌 당숙의 강원도 사투리
2부 : 2007-2011년
침입자
내가 사는 동네 뒷산 이름이 봉제산鳳嚌山1)이다. 마치 봉황이 앉아있는 형세라 해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한다. 산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심 가운데 있는 자연공원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알맞다. 울창한 굴참나무가 들어선 작은 골짜기엔 아직도 산꿩과 다람쥐가 살고 있는 서울의 몇 안 되는 청정지역이다.
고향에서 가져 온 호미와 곡괭이로 이 산자락 끝 숲 속 빈터에 약 대여섯 평 남짓의 텃밭을 만들었다. 야채씨들을 잘 뿌린 후 어느 정도 기일이 지나면 작고 조그마한 싹들이 돋아나겠고 이러한 신기함을 보고자 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한편으로 이 채소들을 솔솔 잘 가꾸어 가며 실하게 키워보는 야릇한 재미도 기대했다. 무공해 무 거름으로 자라난 이것들을 때가 되면 조금씩 뜯어 식탁에 올려보는 즐거움도 좀 가져보고자 한 것도 사실이었다. 울타리도 없는 판국이라 간혹 몹쓸 행인이 남몰래 뽑아간다 해도 뭐 그리 크게 아쉬워하지는 말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정성껏 흙을 일구고 조심조심 열무씨부터 뿌렸다. 전에도 그랬듯 씨를 뿌리고 나면 나름대로 조그마한 궁금증이 저절로 생기는 법이다. 씨는 좋은 것이었는지… 흙은 괜찮았는지… 너무 깊게 묻지는 않았는지… 비도 간간이 내려 물기는 늘 흡족해야 하는데 등등… 이러한 생각들을 하며 하룻밤을 지새고 새벽산책 겸해서 일찍 열무밭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어인일인가. 열무밭이랑을 누군가가 몽땅 다 홀딱 뒤집어 놓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울화가 한꺼번에 절구공이처럼 치밀어 올랐다. 내 이놈을 발견하면 그냥 두지 않으리라. 이 괘씸한 놈, 붙잡기만 해 봐라. 괜한 심술이 났다 해도 그렇지, 씨를 뿌린 후 싹도 나기 전에 더더구나 이틀 밤도 채 지나기 전인데 이렇게 참혹하리만치 난장판을 해 놓다니… 이리 저리 아무리 따져 봐도 이러한 심보에 대한 족한 이해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전혀 뜻밖의 일이라 잠시 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건 정말 심했다고 생각하니 무어라 할 말조차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누가 이렇게 휘저어 놓았단 말인가.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된 것이었기에 순간적으로 확 달아올랐던 열기를 스스로 가라앉히려고 숲 주위를 일부러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렇게 하는데도 머리끝에는 잔열殘熱에 의한 흥분이 계속 남아있었다. 이것마저 좀 더 식힐 겸해서 밭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아 엉망이 되어버린 열무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아주 잘 생긴 비둘기 한 마리가 열무밭 언저리에 겁 없이 턱 날아와 앉는 것이 보였다. 이 비둘기는 사방을 면밀히 경계하면서 밭 주의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대한민국 육군을 명예롭게 제대한 사람이라 이 비둘기의 수상한 행동 하나하나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엄격한 신상파악을 거친 후 차출되어 파견된 비둘기부대의 전초병임이 분명해 보였다. 주위를 다 살핀 첨병 비둘기는 모든 상황들이 이상 없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듯했다. 그리곤 천천히 무전기 안테나를 뽑아들었다. 어디에선가 은신하며 잠복중인 본대本隊의 작전 팀에게 획득한 정보를 속속 보고하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약 1분 후 쯤 됐을까 두 마리의 비둘기 선발대가 추가로 날아 와서 관측 비둘기와 은밀히 접선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 세 마리의 비둘기는 결코 먼저 열무밭에 뛰어 들지 아니했다. 다만 밭 주위를 빙빙 돌아보고만 있었다. 혹시 폭발물이나 설치하지 않나 하고 사방을 경계하면서 합동 수색을 다시 한 번 더 철저히 하는가 싶었다. 이러면서 최후의 행동개시명령을 상부로부터 기다리는 듯 했다.
나의 입가에서는 묘한 웃음이 흘렀다. 열무밭 무단 침입자들은 바로 이 놈들이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놈들이 진범이라는 것에 서서히 심증이 굳어갈 즈음 한 떼거리의 비둘기들이 삽시간에 열무밭 언저리로 날아들었다. 열무의 1차 파종의 결과는 이것으로 이미 포기해 버린 나였다. 그렇기는 했지만 하도 어이없는 일이라 이것들이 하는 짓거리를 그냥 내버려둔 채 끝까지 좀 더 자세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차후엔 보다 더 완벽한 파종 보호 작전을 세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 비둘기는 역시 용감했고 주도면밀했다. 이십 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대장 비둘기가 서슴없이 열무밭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날렵하고도 신속한 동작으로 흙 속을 부리로 뒤지기 시작했다. 어제 발견하지 못했든 남은 열무씨를 샅샅이 찾아내는 정밀획득 작전을 솔선수범으로 감행함이 분명했다. 씨를 뿌린 나도 그 량이 얼마였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두목 비둘기의 판단으로는 먹이 감의 량이 아직은 많이 남았다 싶었든 모양이었다. 대장 비둘기가 고개를 한번 크게 번쩍 처 들었다. 뭐하고 있느냐는 듯한 대장 비둘기의 나무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비둘기들이 일시에 우르르 밭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잔량의 열무씨를 향한 무차별 총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가관이었다. 완전 식사상황에 몰입한 이 비둘기 부대의 습격엔 아예 주인의 눈초리 따윈 형편없이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비둘기의 모습들이 너무나 당당했고 또 그 오만방자함에 헛웃음만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밭 주인이 일어서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너는 서 있어라 우리는 전진 또 전진한다는 그러한 막무가내식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아주 얕잡아 봄과 동시에 사람을 한없이 비웃는 비둘기들의 분명한 무단침입이었다.
손바닥만 한 열무밭이 이들의 확인공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것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나 할까. 그것은 국제법상 불법침탈이다. 국내법으로는 도둑질이다. 그러나 어느 법으로도 적용할 수 없는 무법의 횡포였다. 하지만 비둘기나라의 법률과 우리의 법률은 크게 다른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게 아닐 성 싶어 보였다. 이러한 것은 오직 그들의 절대적 생명보전의 정당행위였던 것이었다. 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것은 신나는 먹이 정복의 개척지였던 것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조그마한 위험이라도 의식해서인지 점점 더 속전속결의 작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사생결단의 전투에 나선 저들인지라 나도 이번 일은 그냥 그들 뜻대로 끝내고 싶었다. 사람이 저 저지능底知能의 금수와 치사하게 어찌 먹이 싸움이나 영토전쟁을 벌여야 하겠는가. 한 번쯤은 사람답게 기꺼이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이번의 승리는 너희들 것임이 분명하다해도 다음번에는 꼭 그렇지 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둘기들과 젊잖은 전쟁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열무밭 무단 침입자들에 대한 파악은 이 한 번의 패전으로 필히 마감해야 된다는 각오를 다졌다. 어떠한 방법으로 이들의 불법침공을 사전에 방어해야 된다는 것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이 후 두 번째 파종부터는 사람 쪽에서만 완벽한 승리의 웃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꼭 알리고 싶었다.
2007.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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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강서구에 있는 높이 105미터, 총길이 7킬로미터의 산
황토黃土에서 만난 국화國花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國旗와 국화國花가 있다. 국기는 물론 나라꽃에 대하여서도 어릴 때부터 항상 경건심을 가지고 살아 온 것이 모든 국민들의 공통된 정서 중 하나다. 광복된 후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도 나도 무궁화를 심었다. 그래서 대한반도 어느 곳 어디를 가나 집 가까이에서 늘 볼 수 있는 꽃이 무궁화다. 일제강점기 목숨을 내놓고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가슴에 피우며 살던 나라꽃이다. 흙먼지 날리는 중국에서, 풍찬노숙의 사할린에서, 낯설고 물선 구라파 미국 등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늘 품고 간직하던 꽃이 무궁화 꽃이었다.
어렸을 적 농촌 고향 울타리에 섰던 이 꽃들에게 진딧물이나 벌레들이 기생하는 것을 보았을 땐 무척 안타까움에 젖어들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그려보게 했던 것도 태극기와 무궁화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사회 일에 몰두하게 되면서부터 이 꽃에 대한 깊은 관심이 멀어져 갔던 것도 사실이다.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달로 이름도 다 알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꽃들이 개종되어 사람의 관심을 더 깊이 끄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더구나 개방의 물결을 타고 외국 꽃들이 부지기수로 밀려오기 시작한 후로 이 꽃은 우리에게서 완전 무관심 속으로 사라져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인천에서 아주 가까운 중국 연태시 옆에 있는 롱쿠龍口1) 지방에 급한 일로 출장을 간 일이 있다. 7월 29일이라 우리나라나 이곳이나 뜨겁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일을 마치고 중국회사 사장의 배려로 롱쿠시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유명한 황금 모래해변金沙海邊을 보기 위해 갔었다. 포장과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가며 가야하는 길이었다. 그 길 대부분은 초원을 헤집고 가는 거친 황톳길이기도 했다. 허허 벌판 낮선 풍경만이 이어지는 초행, 경이롭기도 했지만 한편 불편했다. 짓눌릴 정도의 검푸른 수림 지역을 벗어나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잡초들만 제 멋대로 자라나고 있는 넓디넓은 초원을 막 지날 때였다. 눈에 무척 익은 듯한 나무 한 그루와 환하게 핀 꽃송이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더 정확히 확인해 보려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무궁화였다. 척박하고 메마른 황토 속에서 수없이 스쳐간 풍상을 뚫고 연청백색 40-50여 송이 꽃을 피우고 있는 무궁화. 순간 울컥하고 치미는 감동이 곧바로 목 줄기를 살짝 넘었다. 나의 발길은 이러한 뜨거운 감동만 느낀 채 차마 그 곳을 도저히 그냥 벗어날 수 없었다. 정수리가 불길에 타고 있는 것같은 따가운 폭염 속이었지만 중국인 기사의 양해를 구하여 차를 세우고 그 꽃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나무 외엔 그 어느 곳에도 무궁화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여기 이렇게 홀로 뿌리를 내린 채 수많은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라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그 무궁화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와락 다가왔다.
찜통 같은 더위로 인하여 물을 뿌린 듯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개의치 않으며 아련히 떨려오는 손길로 그 나무를 어루만졌다. 목피며 이파리 가지 모양 등 모든 것이 두메산골 내 고향집 울타리에서 언제나 피고 있는 무궁화와 똑같았다. 성장하는 동안 자연적으로 말라버린 밑 부분의 필요 없을 가지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정성껏 골고루 제거해 주었다. 이 나무의 생존활동을 무법으로 침범하고 있는 주변 잡초들을 모두 다 뽑아 버리는 동안 마치 동포를 만난 것 같은 흥분에 자꾸 사무쳤다. 그것은 단순히 물과 햇볕에 의해 흙에 뿌리내리고 자라난 잡목중의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풍랑 거친 어느 날 가족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혼자 배를 타고 조업을 나섰다가 해풍에 밀려 이곳까지 온 한국인 해난사고자의 넋이었을까. 느닷없는 돌개바람이 무섭게 휘 몰아치는 날 어쩌다가 하늘로 말려 올라가버린 아주 작은 무궁화씨 하나가 먹구름 광풍만이 가득한 허공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불현듯 떨어져 다다른 곳이 이곳이었을까. 그리하여 고향 땅인줄 알고 있다가 그만 소롯이 스며오는 물기에 싹을 틔우고 움을 내보내 자라버렸을까. 아니면 무명의 한 한국백성이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이곳까지 건너와 살다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망향의 눈물처럼 무궁화씨를 땅 속에 심은 후 숨을 거둔 것이 이 나무 한 포기였었나. 이 무궁화나무는 말이 나무였지 내 눈에는 한 사람의 외로운 동포였다. 조국의 무관심 속에서 오래 동안 버려진 민족의 슬픈 넋이었다.
땀으로 세수를 하다시피 손으로 얼굴을 닦아가며 짧은 시간 돌보아 준 이 무궁화나무 옆에서 하루라도 함께 잠을 이루고 돌아오고 싶었다. 울타리랍시고 주변 돌들을 주워 모아 빙 둘러 놓아주고는 다시 한 번 더 꽃과 나무줄기와 나뭇잎을 손으로 가만히 만져 보았다. – 너는 오늘 나와 만나기까지 그 얼마나 무서운 공포의 밤을 감수하고 조상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지새웠던가. 너는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꽃이요 후손이다. 내 돌아가면 필히 너의 소식을 전해 주리라. 이제 너는 외로운 꽃이 아니다. – 그러나 언제 다시 찾아 와 볼 수 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로운 무궁화나무를 뒤로하며 돌아올 때의 마음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폭우 내리는 호텔 창가에서 오래도록 그 무궁화나무를 그려보았다. 어두운 초원 그곳 애처롭게 고개 떨군 채 비정한 밤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었을 무궁화가 내내 떠올랐다.
<시>
무궁화
― 중국 연태시 롱쿠에서
형제가 그리우면 산에 올라
아리랑을 부른다
가고픈 고국산천을 억 만 번 그리면서
누이가 보고 싶으면 마당가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국 땅을 바라보며
봉오리마다 머금은 망향의 이슬 적셔
불어오는 해풍에
날려 띄운 이파리들
조국 소식은 언제나 베갯머리를 뒤척이고
이국의 빈 하늘이 서러워 울음할 때
깨금발로 기다려온
귀국선의 고동 소리
한마디 무어라 달리 말은 못해도
롱쿠龍口에서 마주한 청백색의 꽃잎마다
동족의 실핏줄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 제3시집 바위도 꽃을 피운다 96쪽에 실린 시
2007.8.1. – 200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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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연태시에 있는 작은 도시.
이 곳 허허벌판 초원에 오직 홀로 자라나 꽃을 피운 무궁화
한 그루를 만났다.
침묵이라는 것에 대하여
난세엔 현자도 침묵한다 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침묵엔 두 가지가 있다. 모든 상황의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은 정말로 어떤 경우를 잘 모를 때도 그러하다.
한때는 나도 나의 일에 대하여 깊이 침묵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느 시대고 간에 난세가 아닌 때가 없었듯이 인생도 그렇다. 예고 없는 문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동시다발로 나타났다간 지나갔다. 삶의 어려운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또는 순서 없이 닥쳐왔다가는 머무르지 않고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천신만고 끝에 해결된 것도 있고 그냥 흐지부지 묻혀버린 것들도 많다.
내가 절주絶酒하게 된 것도 몇 가지 그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도 있다. 술을 마시게 되면 과언過言과 과용過勇과 과욕過欲이 생기게 된다. 수십 년 전 문득 한 순간에 나는 이러한 과심過心들이 무척 싫어졌다. 그래서 그 후 내 인생에 있어서도 한 때 오랜 침잠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 큰 욕은 멎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이 아님도 잘 안다. 하지만 침묵하며 감내해야만 했던 억울한 일들이 틈틈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심사숙고 끝에 말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사람은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고 또 말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즉 이 ‘때’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말의 ‘내용’이 ‘때’라는 것과 맞먹는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말에 있어서는 두 가지 즉 그 –때–와 –내용–의 무게가 막중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어느 정도 옳게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는 입을 꾹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언경에 이르기를 “세치 혀로 저 산을 태운다.”라는 경구가 있다. 말이란 조심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이러한 경구를 억 만 번 되뇌인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연설과 침묵이라는 단어를 대칭 시켜놓고 본다면 침묵도 일종의 깊고도 신중한 언어이다. 연설은 소리로 하는 의사 표시이고 침묵은 소리 없는 의사 표현인 것이다. 옛 성현의 말 중에 이르기를 선비의 조건 중에는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이 뚜렷해야 한다고 했다. 그 중 두 번째 자리에 올려놓은 것도 말言인 것임을 두고 볼 때 말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참말’을 해야 할 때에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침묵해야 할 무거운 말과 지금은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말,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말이 있다. 그리고 정말로 말을 아껴야 할 때도 있는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못들은 척 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바른말, 옳은 말, 맞는 말, 긍정적인 말이다 아니다 분명히 해야 할 말을 잘 가려서 할 줄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엔 무서운 절제와 예리한 판단과 가슴을 억누르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현자란 꼭 어리석은 자와 비교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독학으로라도 학문을 많이 터득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실천하는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는 지혜로운 말이 현명한 말이 될 것이다. 연설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라는 말은 무조건 침묵하라고 하는 교훈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참말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성삼문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도 할 말을 다 하고 꾸짖을 것은 다 꾸짖은 후에 숨져간 충절의 선비였다. 그래서 나는 웅변도 금이요 침묵도 금이라는 것이다. 즉 둘 다 마음의 표시로써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지내야할 때가 있지만 아무튼 우리는 짧은 생애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 무언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말을 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말해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가면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2007.8.09.
흔적
어느 시인이 나의 시 <흔적痕跡>을 보내 달라고 해서 팩스로 보내주었다. 내용인 즉 그것은 곧 나의 흔적이기도한 것을 시로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기뻣던 일도 있지만 삶 속에서 아팟던 것들이 대부분 흔적으로 남는다. 오늘은 흐린 날씨만큼이나 앞날이 불투명하게 보인다. 우울한 마음을 비집고 이어지는 희미한 생각 속으로 조금 이나마 혼자 웃게 하는 작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는 바람에 냉방도 소용없을 정도로 후덥지근한 전철 안이었다. 전철이 멈추자 남자 어린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그러나 앉을 자리는 없었다. 할머니도 그렇고 또 어린이 승객이고 해서 자리에서 선뜻 일어나 두 사람을 앉게 했다. 자리에 앉은 꼬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주 해맑으면서도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빛, 웃음, 희고 작은 손…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녀석도 금방 따라하는 것이었다. 열 번 정도인가 윙크를 서로 주고 받고나서 그 꼬마는 나에게로 왔다.
“어디 가세요?” 입술도 겨우 열리는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어디 가는 길이냐?” 말을 시켜볼 요량으로 대답대신 질문을 하였다. “아빠한테”라고 꼬마가 대답했을 때 이 꼬마의 할머니는 벌써 다음 역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전철이 멈추고 꼬마는 할머니 치마를 꼭 잡은 채 차 밖으로 나가면서 자꾸 뒤 돌아 봤다. 꼬마가 내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전절은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통하여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가 얼른 손을 들어 바이바이 라고 답례 했을 때 전철은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이내 그 꼬마와 할머니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때의 그 장면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어린이의 얼굴조차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기억하는 것은 짧고도 작은, 그러나 귀중하게 여겼던 만남 때문인 것이다. 만남과 흔적, 뒤돌아보면 하나같이 아련하다. 아름다운 것 보다는 애틋한 일이 더 많다. 이 일을 포함하여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일들이 한 두 번 쯤 문득문득 꿈결처럼 떠오르는 요즘의 일상이다.
흔적
이삿짐을 들어낸 텅 빈 방마다
살아 온 그림자 줍고 쓸다가
삶 먼지 뽀얀 화장대 밑에
흘러 간 세월 조각 달력 한 장 줍는다
빠알간 동그라미는
무슨 날이었을까
적어 놓은 글씨도 희미해져버렸다
눈 감고도 눈에 익은 문고리마저
어제부터 낯설어 헛짚어 지고
부엌 벽에 묻어 있는 남은 정까지
챙겨놓은 열쇠와 함께 두고 가야 한단다
마지막 나서는 문지방 틈에
못다 푼 꿈같은 때 묻은 동전 한 닢
가만히 주워든 손바닥 위로
속 설움 떨어지는 눈물에 젖고
어깨로 쌓여 온
고단했던 흔적들이
그래도 나의 것이라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야윈 등에 고이지고 문을 나선다
― 첫 시집 처음 만난 그날처럼 98쪽에 실린 시
2007.9.12.
발자국
영혼마저 몹시 고단한 날에는 시를 쓴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날
나는 내 차가운 혼을 보듬으며 끌어안는다.
그래서 내 시는 고독이요 눈물이요 치유하기 위해 흘리는 짜가운 피다.
어둡고 추운 빙벽에 유골로 영원히 새겨가는 희고 검은 화석이다.
2007.11.11.
찹쌀떡
“찹 ․ 싸 ․ 알 ․ 떡~, 찹쌀 떠 억–”
칼바람 불어 제키는 겨울 골목길에 이 소리가 처량한 야상곡으로 울려 퍼진다. 서울에서 찹쌀떡 장사를 나선 사람이 누군가 하는 궁금함 보다 이 목소리를 따라 생각은 오래 전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옷감도 대단히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난방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는 일은 별로 없다. 웬만한 추위쯤은 이젠 신경 쓰지 않는다. 한파로 인하여 동사했다는 뉴스를 들어본 지 오래다.
1960년대. 갑자기 밀어 닥치곤 했던 강원남부의 겨울철 추위는 대단했다. 방안 윗목에 떠다놓은 대접의 물이 자고나면 얼어 있을 정도였다. 돌 같이 결빙된 폭포수나 강물은 다음 해 삼월이 되어서야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초겨울에 내린 눈도 다음해 삼월 중순쯤부터 녹기 시작하던 중학교 때의 동한凍寒은 북국을 방불케 했다. 동장군이라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짧은 해 금방 어두워지는 높은 산길을 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도 간혹 들리던 때였다. 팔구십도 경사의 험준한 산악으로 이루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딴 곳 보다 추위가 훨씬 더 했다. 지붕 위로 햇볕이 머물다 가는 시간이란 겨울 하루에 고작 서너 시간 정도였다. 살을 에이는 한파 속에서 내복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 등교하는 반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모두 씩씩하게 겨울을 견디며 공부했다.
당시 나는 고향집이 멀리 떨어져 있던 관계로 태백시에 있는 친척집에 하숙을 했다. 내가 기거하는 방의 한 쪽 창은 유리로 하여 행길가로 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되던 해 겨울밤이었다. “찹 ․ 싸 ․ 알 ․ 떡– 찹 쌀 떡–”하며 떡을 사라는 목소리가 꽁꽁 언 하늘을 타고 몹시 구성지게 들려왔다. 매우 어려운 집의 아이가 가사에 보태기 위하여 어두운 골목을 돌며 찹쌀떡 장사를 나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귀에 좀 익은 듯한 어린 목소리의 가냘픈 외침이라 생각되어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산골의 눈바람으로 인하여 귓밥이 곧바로 꼬들꼬들 얼어버릴 정도의 맹추위는 탄광지역 전체를 무겁게 점령하고 있었다. 콧속이 먹먹할 정도의 냉랭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동토凍土의 밤기운 속에서 나와 딱 마주친 그 떡 장수는 다름 아닌 우리 반 친구였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무안감에 나는 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히려 당당했다. “야 이리와. 너 떡 먹고 싶어서 나왔지? 자 이거 받아. 그냥 줄께 먹어 괜찮아” 콧등이 빨갰으면서도 빙그레 웃으며 그 친구는 두터운 장갑을 벗고 주저 없이 찹쌀떡 3개를 선뜻 내 손에 들려주었다. 얼떨결에 떡을 받아든 나는 눈사람 같이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떡 장사는 다시 하 번 씩 웃으며 삭막한 골목길을 돌아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친구의 가정사정이 몹시 딱한 처지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외로운 친구였다. 남들은 따뜻한 방에서 공부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벌이를 돕기 위해 용감히 밤거리로 나섰던 것이었다. 우리 나이 14살 때, 나와 그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이 밤에 들려오는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가 그 친구와의 일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시베리아만큼이나 추웠던 길거리에서 나에게 선뜻 떡을 건네주던 장면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 친구에게 아무것도 해 주질 못한 채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고산지대의 태백을 훌쩍 떠났었다.
2008.2.01.
힘없는 다툼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1) 옆에 작고 아담한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비둘기 떼가 간혹 후두둑 날아와 어린이들이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정신없이 쪼아 먹기도 하는 곳이고 주인 몰래 집을 빠져 나온 반려견들이 용감하게 마실 나들이를 하기라도 하듯 멋대로 놀이터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 놀이터 옆 빈 장소에 2년 전 구청에서 깨끗한 현대식 경로당을 지어 놓았다. 1층은 할머니들 전용 방이고 2층은 할아버지들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편리한 구조로 잘 꾸며 놓은 듯 했다. 몇 사람씩 힘없이 모여 앉아 소일을 하는 노인들을 볼 때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연로하셔서 힘이 무척 부치는데도 부모님은 지금도 농사일을 계속하신다. 힘든 것을 참아가며 절기에 따라 수확되는 농산물을 아들딸들에게 보내 주셨다. 몹시 고되어도 이것이 농사를 계속 짓는 몇 가지 목적 중 하나이며 그래서 땀 흘리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신다고 하셨다.
이 노인정엔 어느 땐 삼십 명 이상의 노인들이 나와 있는 것 같다가도 또 어느 땐 서너 명 쯤 보일 때도 있었다. 적게 보일 때는 적막한 분위기가 맴 돌아 무척 쓸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숫자가 더 적을 때는 어느 분이 또 세상을 떠나셨나 하는 슬픈 생각이 나곤 했다.
예배를 좀 일찍 마친 가을 날 정오였다. 모처럼 맑고 따뜻한 햇볕이 마치 고향집 마당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교회를 나와 혼자 집으로 가던 중 바라본 놀이터에는 벤치에 앉아 철없이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고향 산촌에서의 어릴 적 생각이 먼 구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옛날 농촌에서는 대부분 손으로 직접 만든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았다. 기껏해야 공기놀이, 자치기 그리고 새끼줄을 뭉쳐 만든 작은 공을 차는 것 등 몇 종류 안 되었다. 지금 어린이들은 공장에서 만들어 내다 파는 것들을 사서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
그렇게 멀고 깊은 동심에 젖으며 걸을 때였다. 경로당 앞에서 갑자기 소리를 크게 질러대며 다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가시나야 니가 잘 못했으면 잘 못했다고 하지 뭐라꼬 궁시렁대노?” 천하를 호령하던 젊었을 때의 사나이 힘찬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팔십을 넘긴 할아버지의 힘 빠진 타령조에 불과한 음성이 들려 왔다. “시끄러워 저리가. 머슴애가 뭐 그리도 말이 많노.” 앙칼졌던 아낙의 목소리가 아니라 흰 머리칼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할머니의 빛바랜 대응이 오히려 더 구성지게 들렸다. 다투고 있는 두 분의 연세는 이미 구십에 다다른 듯 수많은 잔주름과 검버섯이 젊었던 얼굴을 막무가내로 잠식한 지 오랜 것으로 보였다.
각자의 감정이 힘 있게 서로 맞부딪쳐 일어나는 불꽃 튀는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썰물이 지고난 뒤의 텅 빈 공간으로 울려 퍼지는 허망한 메아리 같이 들렸다. 황혼 속에서 마지막 솟구쳐 보이는 한 오라기 작은 혈기만 조금 묻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를 보고 “가시나”라고 소리치는 할아버지의 말에서나 할아버지를 보고 “머슴애”라고 하며 대드는 할머니의 대꾸에 나는 왠지 측은한 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이미 깊어진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동년배의 남녀가 서로 만나면 아직도 상대가 “가시나”로 보이고 또 “머슴애”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면 어린이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혼자 그냥 바라보며 웃었다. 싸워봤자 얼마나 더 싸우겠는가. 서로가 약간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것도 금세 힘이 부칠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여기고 있음인지 그 분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적극적으로 말리려 하지 않았다. 큰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만 잠간 돌렸을 뿐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던 비둘기들이나 마실 나온 꼬마 강아지들조차 별 미동도 않고 제 할일만 계속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도 이 다툼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2008.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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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양천구 목3동 성일침례교회
산달섬1) 그 부근에 청마靑馬가
2008. 7. 31. 무더운 여름, 말로만 듣던 무주 덕유산을 지나 산청휴게소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후 천천히 통영 거제로 들어섰다. 난생 처음 가보는 남해의 잔잔한 수면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흥분된 여정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었다. 이은상의 가고파가 은은히 귀에 들리는 듯 통영을 옆으로 끼고 거제대교를 건넜다.
1592 임진년 애끓는 충무공의 호령소리와 함께 견내량 대첩의 물보라 일던 바다가 가까이 보였다. 거제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약 20여 분 섬 길을 돌아가니 방하리가 나왔다. 방하리 사거리에서 왼쪽 청마로를 따라 바라보이는 우뚝 선 산방산이 멀리서 반겨주었다. 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산달도로 가는 작은 선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제도의 품에 아기같이 꼭 안겨 있는 산달도, 넉넉한 물결 차오른 다도해의 해경海景은 오히려 거대한 호수였다. 그래서 산달도는 푸른색 큰 호수 가운데 솟은 꽃동산이었다. 수십만 평에 걸쳐 설치한 굴 양식장은 망망한 남해의 천연 목장이었고 산달섬은 하루 종일 바다에서 일하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목동들의 안온한 휴식처였다.
산달도 주소는 경남 거제시 거제면 법동리로 면적 2.97㎢, 해안선 길이 8.2㎞, 인구 137명[2006]이었다. 거제도와 한산도閑山島 사이의 거제만巨濟灣 한복판에 위치했다. 섬 중앙에는 3개의 봉우리三峰가 있으며, 봉우리들 사이로 철 따라 달이 떠 산달도라고 일컬어졌다 한다. 1470년[조선 성종 원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수영水營이 있었다. 섬 가로 난 일주도로를 따라 띄엄띄엄 세워놓은 가로등 불빛이 차오른 밀물에 흔들리며 어리고 있을 뿐 섬의 밤은 바다 속같이 고요했다.
산달섬에 도착한 다음 날 8월1일 10시 20분, 섬을 나가는 페리선으로 둔덕면 방하리에 있는 청마 기념관엘 가고자 남해 물결을 다시 갈랐다. 사실 목월 동탁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많이들 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친일이라는 설왕설래 때문인지 청마작품에 대해서는 요즘 좀 잠잠한 편이었다. 그러나 청마기념관으로 가는 도로를 문인의 이름을 따서 ‘청마로靑馬路’라는 이정표를 세워놓았음을 보고 가슴이 벅찼다. 문득 김유정역이라든지 가산 이효석의 봉평 마을이 생각났다. 먼 훗날에 내가 태어난 내 고향 가는 길도 ‘가촌로佳村路’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는지… 기념관 가기 전의 정면에 특이하게 높이 솟아있는 돌산 산방산이 보였다. 꽃다운 산 산방산山芳山인 것이었다. 건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2층으로 된 산뜻한 청마기념관은 청마의 조용한 고향 동네 한복판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가에 세워 놓은 몇 개의 시비 옆에 있는 청마의 전신全身 동상은 안경을 벗고 나서서 금방이라도 입을 열고 무어라 시론을 말하려는 듯도 하였다. 마당 옆에는 350년이나 된다는 11m 높이의 굳건한 팽나무가 시인이 태어난 방하리 마을과 시인의 유혼을 밤낮으로 지켜주고 있었다.
청마는 1908년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에서 출생했다. 11세까지 한문을 공부했고 바로 일본으로 유학했으며 1926년 동래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했다. 1931 문예월간 제2호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37년 당시 정지용의 시에 감동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경상북도 문화상 및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 195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경주여중고, 경주고, 경남여고 교장을 거쳤다. 1967년 부산남여상 교장 재임 시 부산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향년 60세에 급서했다.
청마는 일종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이념으로 인생의 공허를 뛰어 넘어 새로운 초월의 세계를 추구하며 탐구해 가는 이상향의 시인이었다. 6․25당시 종군 문인이었고 그는 원고를 많이 고치는 시인으로 되어있다. 기념관에 배치된 사진 속에는 그가 만났던 김춘수, 서정주, 김상옥, 이상, 김정숙[목포 제자], 김달진 시인 등이 있었다.
그리움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쎈 오늘도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그 문학 기념관 옆에 있는 생가生家는 산방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있었다. 선조 때부터 파놓은 굴우물 물은 아직도 많이 고여 있었다. 기념관에서 약 2km 떨어진 왼편 산 중턱에 그의 유택이 있었다. 해풍이 불어오는 솔밭에서 묘소를 찾아오는 길손에게 지나간 옛 유명 시인은 모든 것을 시로 말해주고 있었다.
목숨 / 유치환
파슬 파슬 불꽃이 어디고 옳아 타듯이
지금 저 하루살이 꽃망울 위에 붙어 타는 것이여
싸늘한 재만을 남기고는
불꽃이 온 데 간 데 없어지듯
그날 나의 덩치만 두고 내게서 가버릴 것이여.
― 이 시는 유치환의 무덤 앞에 있는 시비의 시임
묘지 옆으로는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심어놓은 한그루…의 시비[손자가 봉헌한 것임] 와 행복, 바위, 낮 달, 울릉도, 동백 꽃 등의 시비가 그의 초월적 시 정신세계를 향한 열정을 조용히 그러나 거울같이 맑게 나타내 주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한 묘지에서 바라본 전방은 멀리 남해의 아스라한 물결이 영원으로 흐르듯 스치고 있었다.
유치환.
청마는 하늘로 날아가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의 거제 한적한 곳에 남아있는 그의 숨결. 한 시대 한 시인이 토닥여준 우리의 정서는 그로인하여 지금도 동백꽃처럼 언제나 피고 지리라.
2008.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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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남 거제시에 있는 작은 섬
신선한 순간
내가 사는 동네 봉제산 밑에 몇 년 전 서너 평 남짓한 텃밭을 일구어 두었다. 화단 같이 손질하며 돌보아 오는 그 곳에 매년 열무씨를 뿌렸고 들깨, 고추모 호박씨도 함께 심었다. 뿌리고 심고 돌보고 또 다 자란 것부터 뽑아 오고 따 오면서 계절이 무르익음과 시절이 오고감을 보게 되는 곳이었다. 가금 아침저녁 텃밭을 찾아가 자라는 야채들을 보고 있으면 잠시 잠시 잊었던 내 심성과 또 고향을 되살리기도 했다. 한 해가 지나는 길목인 눈 내리는 겨울이 옴도 이곳으로부터 직감하게 되었다.
일본 지진이다 중국 황사다 하는 세상 기후에 아량 곳 하지 않고 올해도 꽁꽁 얼었던 땅은 어느듯 풀렸다. 목련도 오리주둥이 같은 연노란 봉오리를 내민 지 며칠 되었다. 차가운 공기를 밀친 가지 끝에서 노릿노릿한 산수유 꽃이 돋더니만 엊그제는 진달래가 성급히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꽃가게에서 사온 씨앗 봉지를 챙겨 들고 포근해진 어제 저녁 호미를 찾아 텃밭으로 갔다. 지나간 해의 낡은 생각과 그 흔적들처럼 수북이 쌓여 있던 낙엽을 부끄러운 일들을 치우듯이 모두 걷어 냈다. 작년의 폭풍우와 가뭄을 이기며 자라다가 가을을 지나자 불필요한 육질을 미련 없이 탈수시킨 채 겨우내 서 있던 고추대와 들깨 대궁들도 애정어린 손길로 다 뽑아냈다.
굳어져 있는 흙을 파 뒤집은 후 흙덩이를 맨손으로 골고루 잘게 부셔 폈다. 그러다가 흙 한 줌을 쥐고 가만히 손바닥에 펴 보았다. 모든 생물들이 언젠가는 돌아가 최후엔 썩어버린 후 이것으로 남게 되는 유적물이었다. 여기서 싹이 나고 여기서 자라다가 때 되면 여기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다음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그 흙이었다. 다시 한 번 더 천천히 텃밭의 흙을 매만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고랑을 판 후 열무씨앗 봉지를 뜯었다. 사람 품속에서는 털끝만큼도 꼼짝 않는 씨앗들이다. 그런데 맛도 냄새도 없는 흙속에 이 씨앗들을 뿌리면 영락없이 싹이 돋고 자라게 하는 비밀이 언제나 궁금했다. 생물학적 이론은 알고 있다 해도 이 모든 작용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지는 기본적 원리란 참 오묘하기만 했다.
윗 쪽 몇 발짝 높은 곳으로 난 산길에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다가와 모이를 쫒고 있었다. 눈이 서로 마주치는데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채 마치 나와 같이 열무를 심는 듯 하는 자세였다. 농부가 땅을 사랑하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정성 것 열무씨를 흙에 넣고 조심조심히 흙을 덮었다. 캄캄한 흙속에서 며칠 최선을 다하여 발아하다가 한 일주일 후면 파릇파릇한 싹들이 이랑을 따라 일 열로 돋을 것이다. 화초 같은 무공해의 몸짓을 하며 나타나는 귀여운 자태를 처음으로 보게 될 때는 언제나 신선했다.
2011.4.10.
3부 : 2012년
친구라는 말
서로 친한 모습이 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가까운 사람 사이를 일컬어 ‘친구’라 한다. 친구란 어려운 길을 같이 걸어 주기도 하고 옆에 있기만 해도 크고 작든 간에 위로가 되며 큰 힘이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흐렸던 기분이 싹 바뀌어 버린다. 약해지는 의지에 다시 용기를 공급해주는 사람 바로 그러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조그마한 기쁨도 자기일 같이 여겨 동일한 즐거움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생겼다.
청소년들의 배움터에서 집단 따돌림과 때림 괴롭힘 등이 자주 자행되며 그 질이 점차 악해지고 있다 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보도하는 대중매체의 표현으로 ‘친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학교 주변에서 또는 교실에서 학생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런 비행에 대하여 ‘친구’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알맞지 않다. 특히 배움을 같이 하는 학교의 순진무구해야할 청소년들에게서 이런 일은 있어서도 또 있을 수도 없는 악랄한 행위다. 집단 가해로 인해 어린 생명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마저 가끔 초래한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친구’가 절대로 아니다. 그냥 ‘또래’이고 ‘아는 아이’일 뿐이다. 이것은 ‘좋잖은 아이‘라는 말보다도 더 낮은 말로 일컬어도 모자랄 정도의 악행이다.
나쁜 아이들 여럿이 짜고 한 아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학교조차 가기 싫게 만든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아물지 않는다. 성인의 세계에서도 그러할진데 피해를 당하는 어린 청소년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더 강한 보복이 두려워 받는 괴로움을 호소하지도 못한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골방에서 혼자 신음한다. 그러다가 미처 꽃 피우지 못한 채 목숨을 버렸다는 봉오리들을 생각한다. 이러한 일들을 일찍 좀 알아서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는 어른들을 얼마나 원망하다가 사라져 갔을까.
이 순간에도 어느 학교 어느 골목길에서 비인간적 행위가 계속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다 미성년자들이다. 피해 청소년과 더불어 가해 청소년도 함께 빨리 치료해서 원상으로 회복 시켜야 한다. 이것은 분명 어른들의 몫이다.
친구 사이에 있었던 모범된 동양의 교훈으로 관포지교가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가까운 예로 오성과 한음지교가 있었다. 그 외에도 훌륭한 우정관계가 많이 있다. 동료가 되어 훈훈한 정서를 공유함으로 뜻을 나누고 희망을 토론하는 사이가 ‘벗’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마음이 우정이다. 친구나 지우, 벗이라는 말 속에는 괴롭힘이라는 뜻은 절대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괴롭힘과는 정반대인 아름다운 사람 사이가 ‘친구’이다.
2012.2.03.
조연助演
모 잡지 2월호에서 애석한 기사 하나를 읽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강영우[69세]박사가 췌장암으로 곧 세상을 떠날 것이라 했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백악관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냈다. 2008년, 120만 회원인 국제로타리재단에서 단 1명에게 수여하는 ‘지구촌 인권 박애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루스벨트 홍보센터 강당의 기념의자에 새겨진 127명의 위인 중에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지구상 장애인들의 인권신장 노력 및 그에 대한 기여와, 장애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인류평화를 위하여 국제적으로 애쓴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를 그만큼 끌어 올린 것은 이름 밝히기를 늘 주저한 ‘석은옥’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50년 전 맹아학교 학생이었던 강 박사를 만난 그녀는 당시 여대 영문과 1학년의 아가씨였다. 많은 사람들의 의아함 속에 결혼한 석은옥의 내조는 강영우에게 있어서는 하늘이었다. 강 박사는 주연으로 떠올랐지만 그 뒤에 숨어 헌신한 아내 석은옥의 조연助演 역할은 위대함 그대로 였다.
지금도 그녀는 겸손한 조연으로만 머물기를 바란다. 하지만 올바른 주연은 이러한 조연자를 결코 잊지 않는다. 스스로의 업적 보다 오히려 조연에게 더 깊이 감사한다. 아내의 생일날 밤, 케익을 자를 때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박사 4명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고. 그 때 강 박사가 말을 고쳤다. “박사 4명을 만든 사람, 바로 당신이 석 박사입니다. 그러니까 박사가 5명입니다.”라고. 이러한 과거를 잊지 않고 글로 남기며 그는 담담히 이 땅과 이별하려 한다.
피땀 흘려 농사지으며 아들을 장관으로 만든 무학의 부모가 있었다. 풀빵 장사를 하면서도 자녀의 장래를 위하며 정직하게 살다간 어머니도 있었다. 수 백 킬로미터의 험난한 철로를 완결하고 마침내 개통의 첫 기관차가 레일을 달리려고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목숨을 잃었으며 또 충실하게 일 했던 무명 철로건설노동자들을 생각하고 헤드 앞에서 기관사는 먼저 모자를 벗고 묵념했다.
그 외에도 주연主演이 빛나게 한 조연들이 많다. 이들은 이름 없는 뒷바라지를 마다 않고 부분 부분에서 언제나 충실했다. 나타나지 않고 주연에 가려진 조연이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주연과 함께 그들도 빛난다. 그래서 세상엔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다. 모두가 다 주연일 뿐이다.
2012.2.05.
* 강영우 박사는 애석하게도 이미 고인이 되었다.
명품
명품이란 유명 제품의 또 다른 말이다. 어느 제품이든 명품이라 하면 상당한 고가에 팔리고 있다. 이러한 유명세를 타고 모조품까지 만들어져 활개를 친다. 전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말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짝퉁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지금은 질보다 상술과 홍보에 의해 떠오른 명품이 많다. 무엇이 어째서 유명하다는 것인가.
고래로 수공제작에 통달한 장인이 지극한 예술혼을 불러 모으며 만든 것을 명품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제품도 제품이거니와 그 속에는 무한한 열정과 창작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의미를 깊이 새길만한 임자가 나타나면 그냥 건 낼 수도 있고 또 고가를 치르기도 한다. 그래서 명품은 무가품無價品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런 물건을 구하면 가보로까지 여겨 보관한다. 두고 아끼며 미적 감각을 되새겨 음미하는 애장품으로 관리한다.
그런데 시중에 나도는 명품은 그렇지 않다. 제조사의 이름이 우선한다. 또 공장에서 다량으로 생산된다. 장인 혼을 쏟아 부으며 정성으로 제작된 것을 찾기 보다는 브랜드를 먼저 보며 부의 과시로 소유하려는 구매자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의 가격을 봐도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비싼 값이다. 그야말로 거래물품에 불과하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소유자의 인격보다는 겉을 치장하려는 물욕에 의함이 다분하다. 부유함의 상징만을 위하여 명품이라 자랑하며 아무데서나 보이는 으스댐의 극치다. 고도의 예술적 가치나 인품이 깃든 면을 생각지 않은 가공이요 허세일 뿐이다.
진정한 명품이란 희소성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귀함 자체로서의 진가를 보유한다. 명품이라 하면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마구 나돌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희귀성마저 조장한다. 물건의 명품을 자랑하기 보다는 사람이 먼저 명품이 되어야 옳지 않은가. 쌓아올린 고매한 품성과 함께.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도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2012.3.07.
산골짜기에 뜬 미소
지금까지 보아온 귀한 미소微笑 중 하나를 2012.3.9일 인터넷 뉴스 판에서 발견했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 다른 점이 여럿 있지만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나타낼 수 있는 감정표정이다. 슬픈 웃음, 쓸쓸한 웃음, 비웃음, 어이없는 웃음, 은은한 웃음, 따뜻한 웃음, 흐뭇한 웃음, 환하고 밝은 웃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감정을 얼굴로 그리는 육신 언어중의 하나다. 귀한 미소라 함은 사심이나 악심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을 때의 경우를 뜻한다. 사악함이 묻어 있지 않은 웃음이란 완전 소통 단계에서 오는 전적인 동감의 표시이며 종교에서는 천사의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함양군 안의면 기백산 기슭에서 염소 30마리를 키우면 산다는 78세 된 ‘정갑연’ 할머니의 미소가 그것이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세월을 산지에서 자급자족하며 홀로 살았다. 마릿수를 불려 염소를 팔았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새끼를 무료로 분양하며 화전을 일구어 주부식을 해결했다. 올 해 들어 급속도로 기울어진 건강을 염려한 정 할머니는 생애의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면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을 한 후 평생 동안 모은 1억 원을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부 못하는 청소년을 위하여 내 놓았다. 어느 날은 천 원, 어느 날은 오백 원… 42년간 저축한 내용이 빼곡히 찍힌 통장의 잔고였다. 차곡차곡 평생동안 쌓아올린 생의 낟가리였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거든 집과 염소는 면面에서 잘 처리하여 좋은 데 꼭 써 달라고 당부했다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통령이 비서관을 보내며 ‘정’ 할머니를 찾아 만나도록 했다. 비서관의 가방에는 대통령의 편지가 들어 있었고 글을 모르는 할머니 앞에서 면장이 대신 읽어주었다. “봄볕보다 더 따뜻하고 훈훈한 정갑연 님의 미담을 접하고 깊이 감동했습니다.”라는 대통령의 전언이었다. “험한 산골짜기의 누추한 집에까지 사람을 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격려해 주시니 평생 잊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감사의 웃음을 띠며 말했다. 동행한 취재진들에게 보인 그 미소가 기백산 줄기 따라 먼 하늘에 은은히 퍼지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천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필경 함께 미소 지었으리라 여겨졌다.
2012.3.10.
해를 넘긴 엽서
서울 종로에서 강서구 등촌동까지 엽서가 오는데 6개월 11일 걸렸다.
전국적으로 일일 생활권에 접어든 지 오래고 국가와 국가 간의 교통거리도 엄청나게 단축된 현재다. 북경에서 아침을 들고 서울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할 정도로 빨라지고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리 급한 일이 아니고는 시간적으로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가끔 고향을 찾아 가는 길도 그렇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전 연로하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반가워 하시기도 하지만 저녁밥은 입에 맞게 간이 된 반찬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시 쯤 도착할 것이라는 말은 못 드린다. 각 지방행정청에서는 고장 곳곳의 밝혀지지 않았던 명승지를 오래전서부터 샅샅이 발굴하여 많이 홍보하고 있다. 찾아가기가 편리하게 길도 잘 만들었고 조경도 지형에 어울리게 꾸며 놓았다. 타 지방도 마찬가지지만 강원도는 더욱 그렇다. 차를 몰고 가다가 마음 끄는 풍광이 눈에 뜨이면 멈추고 머물다 가게 된다. 그래서 고향집에는 대체로 예상시각보다 훨씬 지나서 들어간다. 기다리던 어머니는 늦게 온 나를 보고 화도 좀 내시지만 금방 얼굴이 환해지신다. 도로와 다리가 잘 놓인 관계로 지방 어디든 왕래하기가 그만큼 여유로워졌다. 때문에 무인지경 산간도로에 저녁 어둠이 오는 것도 이젠 그리 위험하지 않다. 여행객들도 전과달 리 시간에 그다지 구애 받지 않고 저녁이나 새벽에도 쉽게 이동한다. 자가용의 편리함이다.
그렇지만 서울 시내인 종로에서 등촌동까지 오는데 반년이나 걸렸다. 사람이 그렇게 온 게 아니고 ‘엽서’가 그랬다. 2011년 10월 10일 필자의 제4시집 저 별에 가기까지를 출간했다. 86편의 시를 실었는데 최○○선생의 희망의 실마리라는 칼럼 집을 보내 온 답례로 이 시집을 보냈다. 잘 들어갔을 것으로 믿은 마음으로 그 뒤 최 선생에게 확인전화를 하지 않았다. 이 시집을 잘 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최 선생의 회신 엽서. 이 엽서를 나에게 붙인 지 반 년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내용을 공개하면 이러하다.
“이○○선생님. 반갑습니다. 귀한 시집 ‘저 별에 가기까지’ 잘 받았습니다. 두고두고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문운이 빛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1.10.21. 문학공간사 최○○배상”
10cm×14.8cm의 작은 엽서. 이 엽서를 받아 드는 순간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마음을 실어 쓴 육필의 글이 귀중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엽서가 갈 곳을 잃고 어디서 헤매하다가 지금에야 내 손에 쥐여졌을까 라고 생각하며 늦게라도 온 것이 대견하고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작년 10월 중순에 발송한 것이니 가을을 지나 겨울을 넘겼다. 새봄을 벗어나 봄이 물러날 무렵에 도착한 이 엽서. 최 선생의 칼럼 집 책갈피에 넣어 두기 전에 전화를 했다. “어찌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직 일면불식인 최 선생의 말이었다. “한강이 너무 깊었나 봅니다.” 필자의 이 말로 우리는 전화기에 대고 동시에 껄껄 웃었다.
부산도 케이티엑스로 3시간 만에 도착하는 시대이고 미국까지도 10일이면 어디든 편지가 도착한다. 인사동과 등촌동 사이가 가깝고도 먼 거리로 보였다. 오래 걸렸더라도 이렇게 온 엽서가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기념적이기도 하여 그의 칼럼집 갈피에 잘 넣어두었다.
2012.6.21.
피붙이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아주 짧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형님. 고향에 오실 때 오신다는 문자를 꼭 좀 보내 주십시오. 만나고 싶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은 채 그가 편지로 알려준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편지는 잘 받았으며 내용도 알겠다” 고만 문자로 회신했다. 그 후 마침 조부님 기일이 되어 고향 가는 길에 한산한 산골 휴게소에서 저장해 두었던 번호로 그에게 문자로 알렸다.
그 이름은 김상준. 50년 전의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동네 길 담 모퉁이에서 혼자 울고 있는 빡빡머리 아이를 보았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공책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가 그런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새 공책 5권과 연필을 주었었다.
상준이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은 모태의 특급청각장애를 동반한 말 한마디 못하는 농아였다. 연세가 아주 많았던 상준이 아버지는 이들을 데리고 당시 엿장수와 고물장수를 하며 근근이 풀칠을 하며 살았다. 상준이는 다행이 청각장애나 농아가 아닌 정상적인 보통 남자 아이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기 전까지 날짜가 남아서 고향집에 머물렀다. 그 때 들은 상준이네의 가족사史는 더할나위 없도록 마음이 찡했고 아팠다.
상준이 아버지는 이 식구들을 거느리고 경북지역으로 이사 가던 완행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쩔 수 없었던 열차 승무원은 다음 역에서 시신과 그 식구들을 내리게 했다. 시신은 기차역 역무원들이 임시로 어디에 묻어주고 처리했다 했다.
바위처럼 기댓던 가장家長이 졸지에 사망하여 없어졌으며 또 생전 보도듣도 못했던 낯선 기차역에 남게 된 농아 식구들은 미칠 정도로 당황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참담함에서 벗어나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의 선택은 오직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결국 그것뿐이었다. 지명도 몰랐고 차비 한 푼 없었던 막막한 네 식구는 서로를 의지한 채 걸어서 지금껏 살았던 고향을 찾고자 되돌아 나섰다.
쫄쫄 굶으면서 앞만 보고 걸었다. 날 저물면 숲에서 웅크리고 지친 잠을 잤다. 손짓 발짓하며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제 살던 곳을 향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상준이는 말은 할 줄 알았지만 촌뜨기 어린이가 누구에게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설명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옛 시절 낯선 시골집들로부터 밥 동냥도 수월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어느 날 밤은 빈 배를 물로만 채우며 옥수수 헛가리 속에서 납덩이 같은 육신을 뉘였다가 일어나 돌아오는 길을 살피며 걸었다. 나이 많은 상준이 외할머니가 앞장서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식구를 억지로 이끌고 용케 고향으로 다시 왔는데 그들의 건강은 아사 직전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옷차림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을 한 채 동네로 되돌아 와 곧바로 찾아든 곳이 우리 집이었다. 안도와 슬픔으로 눈물 반 콧물 반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서 통곡하는 그들의 표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좀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기막힌 사연의 절규는 장애자들이 더 격한 법이다. 울며 뭐라고 하소연하듯 부르짖는 그들의 몸부림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했다. 허급지급 우리 집에서 내준 따듯한 식사로 우선 기운을 차린 네 식구를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다들 찾아왔다. 고향이라고 이렇게라도 찾아왔구나…. 온 동네 사람 모두는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엉엉 울었다.
마침 우리 집 행랑채가 비어있어서 상준이네는 한 달가량 그 곳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이 합동으로 지어 준 새집으로 갔다. 그 후 보은이라도 하듯 상준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동네 일을 더욱 성심껏 도와주며 살았다. 특히 우리 집 농사일엔 자기의 일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거들어 주었다.
상준이는 어려운 중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하였다. 입학금은 나의 조부께서 대 주셨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지방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연수를 마친 다음 면사무소 하급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아무 일가친척이 없었던 상준이의 공무원채용에 필요한 재정 및 신원보증도 조부께서 기꺼이 서 주셨다. 어려운 신분임을 자각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상준이는 어디서나 모범공무원으로 칭찬을 받으며 성장했다. 자기 아버지가 묻혀 있던 쓸쓸한 간이역 부근을 찾아가 수소문하여 유골을 잘 수습하였다. 그리고 외할머니 어머니 묘가 있는 우리 동네 야산에 나란히 같이 모셨다.
그가 어떻게 성장하고 또 무엇을 한다는 소문은 간간히 들려오는 고향 소식으로만 조금 접할 수 있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다. 내가 고향집에 도착한 그날 저녁 상준이가 차를 몰고 찾아왔다. “형님. 할아버지께서 저의 입학금을 내 주신 후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상준아, 이 입학금은 나에게 갚으려 말고 나중에 형편 되면 형님에게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님, 제가 공책이 없어 울고 있을 때 형님이 공책 다섯 권, 연필 두 자루를 선뜻 주셨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형님을 찾아뵈어서 정말 송구합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목메어 말한 후 고개를 떨구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여동생은 지금 어찌하고 있나?” 사람을 보면 히죽히죽 잘 웃기만 하던 단발머리 농아 상준이 여동생, 그 여자 아이가 궁금해서 물었다. “예, 형님. 제가 지금 00면 면장을 하고 있지만 결혼은 안 했습니다. 세상에 단 두 남매 남은 저로서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여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습니다. 저가 결혼하면 불쌍한 그 애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해질까봐 도저히 결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마시는 소주 몇 잔을 말없이 연거푸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도 한 잔 권하며 손을 잡았다. “상준아… 너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래… 그게 식구고 피붙이라는 것이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하는 앞 산 위의 별들을 바라보며 이 감동을 깊이 공유하려는 듯 서로 다음 이야기를 바로 잇지 못했다. 우리의 모천母川인 가곡천柯谷川1) 물바람이 강가에 앉은 그와 나의 어깨를 잠시 감싸주고 지나갔다.
201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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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가곡면 가운데를 흘러 동해로 가는 작은 강
가곡천1)변柯谷川邊
이번 추석 전날 날씨는 면경 같이 매끄럽고 쾌청했다. 간간이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볏짚가리 사이로 들리는 산농의 밤 동네. 구이산2) 위로 불쑥 솟은 한가위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때문에 너무 밝아 달月로 보이지 않았다. 언제면 이런 추석 달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뜬 달은 깨끗하다 못해 둥근 얼음조각 같았다. 영 잠이 오지 않아 갈대 무성한 가곡천변에 나가 혼자 오래 걸었다.
주황색으로 감이 익어가는 텃밭에서는 귀뚜라미가 달빛을 핥는 소리를 내면서 보름밤을 더욱 심연으로 이끌었다. 툭툭 튀어 나와 떨어져 땅으로 구르는 알밤이 나를 놀라게 하여 겸연쩍게 웃기도 했다. 그 알밤을 쫒아 쪼르르 길 가운데까지 달려 나오던 산 다람쥐는 사람이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겁도 없이 냉큼 도망가지 않았다. 수위가 낮은 탓에 소리 없이 흐르는 가곡천 물 다리께로 달빛을 밟으며 다가갔다. 교각 아래 얕은 여울물엔 금비늘이 좍 깔려 있는 듯 달빛 조각이 무수히 반짝였다. 밤이 깊을수록 투명하다 못해 푸른 끼를 띠는 달빛에 젖으며 고추밭을 지났다. 붉게 익는 고추의 미끄러운 표면은 물론 밭둑 너머 제방에 섰을 때 반질반질한 갈색 도토리 껍질에도 달물이 흠뻑 묻어 있었다.
태양이 야망으로 불타는 얼굴처럼 보인다면 교교한 달빛은 창백하다 못해 까닭 없는 숙연함을 한껏 불러왔다. 발가벗고 뛰어들어 놀던 용소龍沼3)는 밤 이슥토록 무어라 웅얼댔다. 물가 큰 바위에 산 짐승처럼 앉아 귀를 세우자 많은 옛 이야기들이 도란도란 재생되었다. 그러나 코 흘리게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소식조차 듣기 힘들었다. 어렸을 적 무척 귀여워해 주셨던 어른들은 다 영택에 들어가 입을 꾹 다물고 계셨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오가든 귀향차량의 불빛도 드문드문해졌다. 옷자락에 촉촉이 묻은 이슬을 대강 털고 들어와 별장 같은 잠자리에 누웠다. 산 속의 가랑잎 위 같기도 한 추석 전날 밤의 아늑함이 절간처럼 깊어갔다.
추석 당일 아침, 금빛 햇살은 누런 콩 이파리에 맺힌 이슬로 석류알 같은 물 보석을 촘촘히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들 차례를 지내느라 그래선지 마을은 반나절이나 어항 속 보다 더 고요했다.
추석을 쉰 다음 날 어제 새벽 4시, 고향을 등지고 태백산맥의 꼬불꼬불한 산간도로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가곡천 달은 먼 영월까지 동행하다가 해가 뜨자 제 혼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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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 삼척 가곡면 필자의 고향 강
2) 필자의 고향집 앞산
3) 고향집 앞으로 흐르는 가곡천에 있는 소沼
고개를 들자
작년 가을인가?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을 보았다.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가던 학생이 전방 주시 부주의로 자동차와 충돌하여 큰 사고가 났다. 나 역시 날아 온 문자를 보며 걷다가 마주오든 사람과 몇 번 부딪친 경우가 있다.
오래 전부터 TV를 백치를 만드는 상자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었다. 사고하고 대화를 해야 하는 사회생활에서 이러한 것들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적잖게 하기 때문이다. 대화하며 그 대화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한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것은 말을 많이 한다거나 수다를 떠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삐삐 시대를 지나 휴대폰만 잔뜩 보급되던 때에는 그래도 덜했다. 바쁘고 복잡한 일상이지만 전철을 타거나 버스에 앉으면 잠시라도 책 읽기에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책을 읽으면 독서해서 좋고 또 잡념도 잊어버리게 된다. 어느새 목적지에 금방 도착하는 것 같아 지루하지도 않다. 종전에는 탑승객들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다양한 기능을 장착한 S폰이 대중화 되면서부터 너무 많이 달라졌다. 손가락을 굴려 가면서 화면을 선택하고 살펴보느라 차를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숙인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는다.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아파 신음해도 잘 알지 못한다. 노인, 장애자, 임산부 등 앉아 가야만 할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앞에 장시간 서 있는데도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은 물론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몇 해 전만해도 전철 안에서 동행자나 혹은 옆 사람과 애기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제는 차 소리와 차내 방송소리만 들릴 뿐 조용하다. S폰이 나오고부터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새롭고 편리한 통신수단이 개발된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사회의 급속적인 변화에 둔감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대 따름의 완급은 이성적으로 조절할 필요는 있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모두 사람을 위함이 그 목적이다. 그런데 눈부신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성의 지나친 저하를 초래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악이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며 사람을 생각할 때 없든 정도 또 훈훈한 이웃애도 생기는 법이다.
고개를 들어야 한다. 대화와 인성人性의 단절을 벗어나 우주와 자연과 사람을 바라보며 따뜻한 인간성을 항상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옆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 못하는 통신기기가 되기 보다는 사람의 삶을 보다 원활하게 하는 첨단통신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2.10.17.
내 방에 있는 나무의 유품
강서구 등촌동 마을 뒤에는 봉제산이 늘 푸르게 펼쳐져 있다. 고도 105m에 남북으로 이십 리 정도의 능선을 뻗고 있는 공원 같은 산인데 강서 양천 구민들에게는 천혜의 산책길이다. 이곳엔 갖가지 수목이 자생으로 어우러져 잘 자라고 있다. 이름 모를 산새들도 20여 종 넘게 서식한다. 다람쥐 꿩도 깃들어 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골물에 가재도 발견됐다. 토종 야생화들은 도래종들과 어우러져 피었다 지곤 한다. 우거진 나무 중에는 껍질이 두껍게 된 고목이 많이 있고 더 높이 솟고 싶어 푸른 잎을 무성하게 내고 있는 고목들도 흔하다. 이에 뒤질세라 어린나무들도 쑥쑥 키를 뻗는다. 나는 이 산을 그린랜드Green Land라고 자주 말한다.
지인과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폴더 자판을 얼른 보니 발신자가 이 위원장1)이었다. “이 선생, 이 선생이 새벽마다 나가 운동 하는 산기슭에 지금 무슨 공사를 하려는지 통행금지 줄을 치고 포크레인이 오고 그래요. 이곳은 이 선생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또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좋아 하는 숲이잖아요.” 느린 말 속도였지만 다급하게 알려 주었다. 전화를 마친 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미 구청에서 작년부터 공사계획을 세웠고 견적을 받아 공사업체를 선정했을 것이다. 근래는 관청에서 공사를 할 때 주민들의 입장을 먼저 물어본 후 결정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직권으로 공사를 집행할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위원장이 나에게 알려 줬어도 내가 그 공사를 수정하거나 막을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무슨 공사를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중장비들이 와 있다는 지역은 내가 자주 오르는 바로 그 산기슭이었다. 4–50년 된 높다란 상수리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싸리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아카시아 등이 즐비하게 서식 하는 곳이다. 올 해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마치 고향 산 속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 올라 까치들이 날거나 걸어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만이라도 답답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하루는 들고양이가 부러진 나무를 타고 높이 올라가 있었다. 이를 발견한 까치들이 자기 집을 침범 하려는 줄 알고 무리지어 다가와 소리치며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까치들로 인하여 눈과 귀가 혼란해진 들고양이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나무에서 내려왔다. 떼까치 소리로 시끄러웠던 산은 다시 호수같이 조용해졌다.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낙엽은 몰려 나는 들새들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처럼 자연의 순수함에 젖게 하는 풍경을 선물처럼 가까이 던져 주듯 귀한 자연생태의 청정공원이었다. 서울 한 복판이지만 언제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며 좋은 휴식공간은 물론 걷기에 알맞은 산책로를 품은 봉제산이었다.
서울에서 진달래가 피는 것을 가장 먼저 보게 하는 곳이 이곳이다. 가을이 한 발짝씩 깊어 감을 알아차리게 하는 곳도 이 숲이다. 나무 잎 수북이 쌓인 산기슭을 들락날락하며 문학적 사색도 철 따라 많이 했다. 오래 된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성자聖者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서 이에 대한 느낌을 시로도 몇 편 썼었다. 힘들고 지쳤을 때 종종 숲에 올라 마음의 여유를 취하기도 했었다. 때로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손잡고 찾아 와 멧새 같이 뛰놀며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비가와도 이 숲에 들었고 눈이 내려도 나가 걸었다. 팽팽한 강추위가 서울을 꽁꽁 얼게 하는 새벽에도 빼놓지 않았다. 이곳엔 정장을 한 듯 늘 검은 색을 하고 적당한 간격으로 서 있는 40여 그루의 큰 상수리나무가 있는데 그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나무가 있다. 중간 크기 정도인 이 나무을 친구처럼 안고 늘 심호흡 운동을 해왔다. '이 위원장'의 전화 소리 여운을 되씹으며 차를 몰고 오는 동안 친구 나무에 대한 염려가 가득 지펴졌다.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신을 갈아 신고 숲에 올라갔다. 굴삭기로 흙을 파낸 자리에 작업자들이 열심히 흙을 다시 고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나무들엔 붉은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자르기로 예정한 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끼는 나무도 붉은 테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현장감독을 찾았다. 이곳을 소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말하며 감독은 본 작업의 세세한 진행과정과 마무리 범위를 설명했다. “이 나무를 꼭 잘라야 합니까?” 내가 아끼는 나무를 지목하며 물었다. “원래는 열네 그루를 베게 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의 건의로 네 그루만 부득이 베기로 했습니다. 여기 저기 해서 열 그루는 베지 않아도 되겠기에 살려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이 나무와 주변의 세 그루는 공사상 할 수 없이 베 내야 합니다.”라는 설명이었다. 공사감독은 나에게 다시 한 번 더 양해를 위한 설명을 친절하게 마치고 바삐 가버렸다.
곧 잘려나갈 그 나무를 상심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까지는 여느 때와 같이 푸르고 싱싱하게만 보였던 나무. 그런데 지금은 풀이 죽고 닥쳐 올 절망에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힘 풀린 발을 옮겨 다가가 둥치를 꼬옥 안고 뺨을 댄 채 중얼 그렸다. “나무야. 너를 베지 않게 해주지 못해 정말 마음 몹시 아프다. 너를 붙잡고 오랫동안 운동하게 해 줘서 고마웠다. 네가 잘림으로 주변에 선 다른 나무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잘리더라도 너를 멀리 가져가 버리지 않도록 말해 줄께. 이 공원에 너의 몸체로 만든 나무토막 의자로 라도 만들어지게 해서 여기 남게 하였다가 네가 자란 이 땅에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말해 줄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둘렀던 팔을 푼 후 윗 쪽에 뻗어 있는 생生가지 하나를 꺾어 유품처럼 손에 꼭 쥐고 돌아섰다.
201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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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우궁 선생
미물은 없다
가늘고 마른 나무 가지를 검고 뾰족한 부리로 알맞게 절단하여 열심히 물어 나른다. 센 바람과 간혹 돌개바람이 불어 와 높은 곳에다가 힘들게 쌓아가든 가지들이 몇 개 땅 바닥으로 떨어진다. 썩었거나 불량품이다. 또 잘 못 조립된 것들이다. 튼튼한 가지만 물어 오려고 했는데 부실한 것도 물어올 때가 있다. 잘 쌓으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너무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쓸 만한 나무 가지가 실수에 의해 땅으로 떨어져 버릴 때는 아래를 오래 내려다본다. 손이 없으니 땅 바닥으로 떨어진 것들을 이내 주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물끄러미 있다가 포기해버린 듯 다음 작업을 계속한다. 한 마리가 가지 하나를 또 물어 오면 한 마리는 둥지에 남아 부리로 이것저것 건드려 가며 든든한 둥지를 계속 조립한다. 까치 한 쌍이 살을 에이는 겨울 추위 속에서도 후손을 잉태하는 꿈을 꾸며 마침내 집짓기를 끝낸다.
반려견들이 산기슭으로 주인과 자주 산책을 나온다. 이것들도 마냥 자유를 누리듯이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저곳 뛰어 다닌다. 털갈이 일 때뿐만 아니라 이 통에 털이 빠지기도 한다. 그것을 까치는 예의 주시한다. 천방지축으로 왔다 갔다 하던 반려견들이 사라지고 기슭은 다시 고요해진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그들은 인내하며 기다린다.
무어라 서로 몇 마디 짖더니 한 마리가 재빨리 내려 와 앉는다. 반려견이 남기고 간 부드러운 털을 부리로 몇 번 찍어 입안 가득히 물고 둥지로 날아오른다. 수직 상승이 힘들었든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저 가지에서 더 높은 가지로 지그재그하며 날아 집 언저리에 도착한다. 둥지 안에 있던 까치는 무슨 작업을 하는지 꼬리만 몇 번 밖으로 내보인다. 그리고 한 참 후 둘이서 거의 동시에 내려와 가랑잎 사이에 남아 있는 동물의 털을 쪼아 입에 문다. 그리고 다시 집을 향해 비상한다. 높은 가지 사이에 마련한 둥지바닥에 마지막 작업으로 보드라운 털들을 깔아 보금자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만의 편함이 아니다. 내년 봄 알에서 깨어날 새끼들을 위한 포근한 산실 준비다. 누가 이 까치를 미물이라고만 하겠는가.
2012.11.23.
강 건너 맛 집
첫 추위를 몰고 오는 냉기가 산골짜기를 가득 채우다말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급경사로 치솟은 험준한 산 정상은 시퍼런 하늘을 힘겹게 이고 있었고 두꺼운 목피木皮가 얇아져버린 듯 나무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능선을 이은 나목이 노마老馬의 목 갈퀴같이 뻣뻣하게 늘어섰으며 동강東江과 서강西江도 혹한을 대비하려 수변을 꽁꽁 얼리고 있었다. 오후 4시경쯤 당도한 영월군역寧越郡域은 차가운 겨울 산 그림자가 일찍 멀리서 부터 점령해왔다. 청령포淸泠浦 소나무 숲을 휩쓸며 달려 나온 눈바람이 종잇장 보다 더 가벼운 가랑잎만 이리저리 굴리고 다녔다. 해 그름과 함께 더욱 매서워지는 한기가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는 영월 시가지. 간간히 승용차 몇 대만 지나가고 있을 뿐 노변 가게들도 일찍 출입문을 굳게 닫아 창마다 무거운 침묵에 들었다.
겨울 객이 되어 영월 큰 다리를 건너기 전 빈 자리에 정차하고 휴대폰을 눌렀다. “아, 도착 하셨어요? 중동에서 시내로 지금 나가는 중입니다. 어디쯤 계세요?” 토요일인데도 사무실에 출근하였던 김 면장1)의 목소리는 예년의 반가운 감정 그대로 였다. 옷깃을 세우며 내다본 차 밖은 일찍 켜진 가로등이 온기를 잃은 채 억지로 눈을 뜨고 날 저무는 산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년 전의 일이었다. 김삿갓2)면사무소에 생전 처음으로 들렸을 때 마중 나왔던 김 면장의 모습은 오랜 지인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눈 잎이 폴폴 날리던 이른 초겨울 마당 훤히 내다보이는 면사무소에서 직접 커피를 뽑아 고사목으로 만든 테이블에 놓으며 조우를 반가워했다. 벽면에 걸려 있는 나의 시 작품 액자를 쳐다보며 처음 만나는 사이답지 않게 곧바로 친숙한 이야기로 인사를 건넸다. 면장의 성품이 그래서인지 사무소 분위기도 정다웠고 훈훈했다.
그 후 김삿갓면에 들렸을 때 면사무소를 방문한 주민들에게 일부러 면장의 인품에 대해 의도적으로 물어 보았다. 부임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했지만 면장은 덕스러운 행정관이었고 주민들과 함께하는 감성적 공무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면민들은 면장을 통하여 쌓였던 문제들도 거의 해결돼 가고 있다고 했으며 군 의회 모 의원은 이 면面이 이제 매우 안정되었다는 평가도 나에게 들려주었다. 김 면장을 통하여 주민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김삿갓 면面의 이장里長이라면 누가 관광 와서 시詩가 뭐냐고 물었을 때 모른다 하지 말고 잘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이다.” 라면서 전全 이장들이 모이는 날을 잡아 시詩 강의를 부탁해 왔었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땐 면장 본인의 차에 필자만 태우고 면面 곳곳을 돌며 이곳 저곳을 소상하게 소개해 준 공무원이었다.
어둠이 짙어가는 영월 시가지를 쌩 하게 내달리는 칼바람의 강도는 점차 더 거세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기가 차가울수록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이 별마로천문대3) 위에 무더기로 돋아 성탄 전구처럼 반짝였다. 그가 일러준 장소를 친절한 택시기사가 쉽게 데려다 주었다. 시내 뒤쪽 한적한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미리 전화해둔 탓인지 방안은 따뜻이 데워져 있었다. 필자를 알아본 주인이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한약 차茶를 내 왔다. 두 사람이 마주 할 저녁상은 산나물을 밑반찬으로 하여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영월 콩으로 만들었다는 손 두부찌개의 국물이 같이 넣은 한우 쇠고기와 함께 조금씩 데워지기 시작했다. 차 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곧이어 노크소리와 함께 “어서 오세요.〰”하며 김 면장이 들어섰다. 벚꽃이 떨어질 때쯤 별장 같은 중동면 녹전초교 방문 때 만난 후 약 8개월 만의 재회였다.
사실 나는 일 개 무명의 문인에 불과했다. 간혹 필자의 작품을 좋게 평가해주는 문학인이나 단체도 있지만 송고하고도 원고료조차 크게 기대하지 않는 처지였다. 도식적이고 보수적인 행정관료의 일반적 형태로 볼 때 어느 한 면의 면장이 나를 이렇게 대우해주지 않아도 직무수행에는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성향이 같고 천성적인 정서가 비슷해서인지 김 면장은 본인의 딸 결혼식에도 제일 먼저 필자를 초청했었다. 나는 당일 새벽 서울에서 먼 영월 대교회大敎會4)까지 달려왔었고 순서에 따라 결혼 축시를 낭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축시를 서예가에게 미리 의뢰하여 만든 족자로 준비해 가서 낭송을 마침과 동시에 신랑신부에게 정중히 건네주었다. 3년 전에는 면장이 근무했던 면의 작은 산마루[와석재]에 필자의 시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영월 군수郡守도 월 조회 시 모든 직원들이 모인 강당에서 직접 시 한 편을 6년째 꼭 낭독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과연 「시가 흐르는 충절의 고장」 영월임엔 틀림이 없는 군郡이었다. 나는 삼척시 가곡면 태생이지만 영월과 맺어진 이런 깊은 인연이 어느 땐 전생의 끈인가 라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예기치 않은 인정人情이 생기고 이것이 선비의 마음으로 이어지는가 싶었다. 김 면장은 필자의 아들 결혼식에 부인과 동반하여 삼척시 도계읍까지 와 주기도 했었다. 나는 그 때 이 두 분을 노부모님께 인사 시켜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마늘 양념 냄새를 풍기며 뽀글뽀글 끓고 있는 두부찌게를 뒤집다 말고 김 면장이 물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인데 부모님은 울진 친척집으로 가시고 오늘 밤 고향집에 안 계서서 오랜만에 영월에서 하루 밤 묵고 갈까 합니다.” 조미료를 전혀 치지 않고 담갔다는 고랭지 배추김치에 생두부 조각을 싸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아, 그러면 천천히 소주 한 잔 하시고… 차는 여기에 그대로 두세요. 잠은 영월 게스트 하우스에서 주무시게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펜션인데 깨끗하고 따뜻할 것입니다. 내일 아침 식사비는 제가 지금 함께 낼 테니 이 집에 오셔서 드시면 되고요.” 별미 음식과 따뜻한 정을 받아서만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에는 변치 않는 마음이 최고인데 이렇게 주고받는 친분을 어떻게 하면 고이 간직하며 오래도록 지닐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나마 몇 자 쓴다고 하는 글밖에 없으니 말이다.
꽃무늬가 그려진 두꺼운 커텐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면장님… 고맙습니다. 면장님 같은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월은 언제나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유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감이 절로 묻어나는 음성이 목 줄기를 타고 나왔다. “설에 지나실 적이나 새 봄이 오면 다시 오십시요, 이 선생님.” 면장도 다음을 위하여 이야기를 아껴두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추워서 그런지 식당 집 마루의 벽시계가 몹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홉 번을 쳤다. 밑바닥에 조금 남은 소주를 병을 기울여 다 비운 후 약간 붉어진 얼굴로 일어섰다. 탄광갱도 같이 차갑고 새까만 밤바람 속으로 나서며 돌아다본 음식점 이름이 ‘강 건너 맛 집’이었다.
201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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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진문 면장, 후에 영월읍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2) 김삿갓 묘가 있는 영월군 김삿갓 면[옛 하동면]
3) 별과 정상과 고요의 뜻으로 영월군 봉래산[해발 800미터]
정상에 선 천문대.
4) 영월 시내에 있는 역사 깊은 감리교회
4부 : 2013-2015년
소미원小味院의 고라니
이른 봄 –
영월의 이른 봄은 상큼하면서도 어깨가 떨릴 정도로 춥다. 하지만 소미원1) 마을을 찾아 가는 개울 옆 길 오른쪽에 솟은 운교산雲橋山2) 모습은 볼수록 절경이다. 빽빽하게 어우러져 있는 크고 작은 소나무들로 인하여 숲속은 겨울에도 어두컴컴하다. 그래서 산 전체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없다. 돌 기슭께로 조르르 흘러내리는 명산약수3)는 오가는 이 하나 없어도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종일 맑은 소리를 낸다. 좁은 산간로에 일찍 얼굴을 내민 민들레꽃이 군데군데 혼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쪼인다. 이파리 하나 없는 알싸한 향기의 생강나무 꽃이 어느새 피어 골바람에 다같이 흔들린다. 겨우내 말라 헝클어진 잔디 사이로 무턱대고 뜯어먹어도 될 만큼의 연한 풀잎이 조금씩 돋고 있다. 산 중턱 쯤엔 팔을 서로 맞잡고 서 있는 노송의 푸른 끼가 벌써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산꼭대기로는 때 아니게 늦은 눈이 내려 찾아오는 봄의 행보를 더디게 한다. 기한이 차서 떠나야 하는 겨울과 새로 오는 봄은 몇며칠 동안 밀고 당기며 작별연습을 반복한다. 하지만 유수량流水量을 더해 가는 개울물 소리는 이미 해동이 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다종의 색을 띄며 점점 겨울이 물러가고 있는 이 고장의 초봄 풍경이다.
소미원 –
김삿갓면의 망경대산望景臺山4) 줄기와 중동면 운교산 사이로 난 산골길을 약 1킬로미터 정도 들어가면 자연이 숨겨놓고 있는 청정의 작은 마을이 나왔다. 차들이 왕래하는 큰 길에서 한참 산 안에 위치해 있는 동네고 보니 나무 끝에 이는 하늬바람 소리뿐 적요하기만 했다. 왕조시대 교통로가 아주 험악했던 때 강원도 정선에서 경북 봉화로 가려면 이 소미원을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가파르고 험준한 해발 600미터의 수라리재와 삿갓봉이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마을 뒤에 높이 솟아 있었다. 정선에서 걸어 이 재峙를 돌고 돌아 산 정상에 오른 후 소미원 짙은 솔밭 길을 내려 와 골을 빠져나가야 했다. 마을 사방으로는 경사 급한 산이 천연 토성같이 에워싸 있고 그 길을 오직 도보로서만 오가야 했던 옛적의 통로였다. 그러니 혼자 걸을 때면 무서움이 절로 들 지경이었다. 몇 사람이 동무하여 걷는다 해도 해가 떨어진 후엔 더 이상 밤길을 갈 수도 없던 곳이었다. 소미원의 전래 이야기로는 바로 이곳 마을 회관 자리에 무주객사無主客舍라 하는 원院 터가 있었다고 했다. 날 늦은 행객을 위하여 간단한 숙소를 지어놓아 하룻밤 무료로 묵어갈 수 있게 했다는 장소다. 처마 밑에 둔 독엔 유숙객이 밥을 지울 수 있게 쌀을 늘 채워놓았다. 엽전 꽂이를 문 앞에 설치해 놓아 조식 후 길을 나설 때 형편대로 몇 푼 남기고 가게 하여 그 돈으로 다시 쌀을 사 채워놓았다 했다. 베풂과 온정의 장소였으며 지친 나그네의 하룻밤 휴식 터가 바로 소미원이었다. 고려 마지막 34대 임금 공양왕이 이 마을 뒷산에 있는 수라리 재를 넘어 동해안으로 난 귀양길을 걸었다는 전언으로 비추어 보아 먼 조선조 어느 때부터 생긴 소미원에 얽힌 이야기였다. 마을 중앙지점 언덕진 곳에 근래에 지은 마을회관은 현대식으로 잘 꾸며놓았다. 그리고 회관 바로 옆에 무주객사 원 터를 재현해 놓고 방문객들에게 미담을 전하고 있었다. 회관 안에는 최신품 보일러를 설치하였으며 주방시설이 깔끔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넓은 방에 혼자 일숙一宿하기에는 더 없이 적적했다.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통 잠을 이룰 수 없어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초롱초롱한 별빛은 무더기로 반짝였다. 그런데도 그 유명한 영월의 두견새는 울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새끼를 멀리 떠나보낸 어미 소의 가슴 꺼지는 울음소리가 밤 밭둑을 넘어 구성지게 퍼져나갔다. 낯선 사람의 낌새를 느낀 동네 멍멍이가 악의 없이 몇 마디 허공에 대고 짖어대다가 잠에 다시 떨어졌음인지 이내 고요해졌다.
고라니와의 만남 –
그 때였다. 어둔 길 저 쪽 가로목街路木 사이로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머리칼이 쭈뼛해졌다. 순간 마을회관 마당을 밝히는 외 가로등 밑으로 어떤 짐승의 조그마한 머리가 얼핏 보이는가 싶더니 갓 태어난 송아지 같은 모습이 곧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고라니였다. 다가오던 걸음을 문득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을 뿐 달아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쪽도 혼자였다. 배가 고파였을까? 어미를 잃었거나 길을 잘못 들어서였을까? 야간을 택하여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동 중이었을까? 긴장감 도는 둘 사이를 차가운 산바람이 가랑잎만 몇 개 굴리며 스쳐갔다. 날씬하고 긴 다리, 꼬리는 아쉬우리만치 짧았다. 창 같이 날카로운 뿔도, 송곳 같이 사나운 이齒도 없었고 어느 것 하나 위협적인 형상이 아니었다. 직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가 가로등 불에 비쳐 서리태 같이 빛났다. 사람이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도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있던 당근 몇 개를 들고 나왔다. 그렇게 하는 동안 고라니는 겁도 없이 마당 한 가운데로 좀 더 들어와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당근 한 개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그 앞으로 굴려주었다. 자기 앞으로 오는 당근을 앞발로 탁 멈추게 하고는 이내 달게 베어 먹기 시작했다. 아! 배가 몹시 고팠구나….
지금도 무주객사는 이러하듯 굶주려 인가를 찾아 온 고라니에게도 먹을 것을 제공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낮에는 인간이 사는 마을 어귀에조차 접근 못했을 고라니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주린 배를 끌고 힘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섯 개나 되는 당근을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나는 아예 이만치 물러났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꽤 오래 동안 먹잇감을 찾지 못했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혹시나 하여 넓은 그릇에 물을 떠다가 멀찌감치 놓아보았다. 당근을 말끔히 다 먹은 후 고라니는 마실 것을 발견하곤 물그릇에 접근했다. 갈증에 몹시 시달렸다는 듯 떠다놓은 물마저 핥아 마셔 없앴다. 때마침 재 넘어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리는 것으로 봐서 밤이 꽤나 깊었을 거라 여겨졌다.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인 고라니는 천천히 방향을 돌려 처음 서로 눈이 마주쳤던 곳에 이르자 멈칫 뒤를 돌아봤다. 산으로 가겠다는 뜻이었을까. 잘 가라는 의미를 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다 속 보다 더 짙은 산골 어둠속으로 고라니는 뒷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홀로 잠을 청하며 –
높은 산꼭대기의 희끗희끗한 잔설을 쓸며 내려오는 밤바람에 오싹 한기가 스며들어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었다. 침묵하기만 하는 밤은 자정을 훌쩍 지나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고라니와의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인하여 밖에서 몇 시간 서성인 관계로 추움과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까풀이 먼저 아파오더니 외로운 졸음이 거미줄처럼 내려왔다. 이른 봄 싸늘한 골바람은 홀로 자는 창문들을 계속 흔들어 댔다. 잊고 있었던 허허로움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싫어 눈을 꼭 감았다. 뒷산에서는 쏴아 하고 솔바람이 계속 일었다. 산으로 돌아간 고라니는 어느 소나무 숲을 지금 지나가고 있을까. 춥지 말기를, 배고프지 말기를, 그리고 아프지 말고 오래 살기를 생각하다가 모든 것을 지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01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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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화원2리의 옛 지명. 영월에서도 가장 청정지역이다.
2) 망경대산 맞은 편 김삿갓면 외룡리와 중동면 녹전리 사이에 솟은 산으로
해발 925m의 소미원 앞산이다.
3) 소미원 가는 길옆 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약수
4) 영월 김삿갓면과 중동면 사이에 있는 1,088m 산으로 소미원의 뒷산
나무
― 우리와 함께 사는 자연의 벗
수목들이 편만하게 우거진 야트막한 산길을 걸었다. 고목 아래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한적한 길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아름드리 나무를 가만히 안으며 꼭대기를 쳐다 보았다. 이렇게 큰 나무로 자라기까지 겪어야했던 숱한 시련과 어렵게 헤쳐 왔을 역경의 상흔을 옹이들로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봄
씨앗이 땅에 떨어진 후 어느 것은 물기조차 맛보지 못한 채 사라진다. 용케 생기를 유지한 씨앗은 땅 속에서 춥고 어두컴컴한 겨울을 참고 기다리다가 지온이 오르면 마침내 미세한 움직임으로 발아를 시작한다. 얼음이 수정과水正果처럼 녹고 솜털 같은 봄바람을 타고 멧새가 여기저기서 지저귀기 시작할 때 연노란 싹을 틔운 씨앗은 껍질을 사르르 가른다. 잔설이 사라지고 진달래가 벌기도 전에 너도나도 서둘러 세상 밖으로 앙증맞은 작은 잎을 쏘옥 내민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채 조상이 물려 준 색깔의 꽃을 온 힘을 기울여 피우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이쁘다며 다정한 손으로 살짝살짝 쓰다듬어 줄땐 실눈을 하고 배시시 웃는다. 거친 땅속을 용감하게 뻗어 나가는 뿌리는 더없이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지나가던 곤충이라도 자주 찾아들면 남모르는 미소를 지으며 한껏 흐뭇해한다.
여름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은 햇빛과 바람과 비다. 한껏 햇볕을 즐기며 바람을 잔뜩 들이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채 위를 향해 자란다. 온 천지에 녹색이 짙어 가고 구름은 점차 두꺼워진다. 빗방울이 굵어져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사정없이 대지를 향해 내리칠 때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가능한 만큼의 푸른 잎을 활짝 편다. 듣도 보도 못한 태풍이 풍마風魔처럼 불어닥치면 큰 나무들은 가지를 부비며 결사항전에 들어간다. 큰 나무들의 저항으로 보호받은 작은 나무들이 폭풍을 함께 이긴 후 하루하루 몰라보게 쑥쑥 자란다. 광풍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면 생전 처음 보는 새들이 옛 새들과 함께 숲에 깃들어 쉬기도 하고 가지와 가지를 오가며 씩씩하게 날기도 한다. 어떤 새는 나무 가지 위에 작은 둥지를 튼 후 무한한 염려와 함께 가만히 알을 낳는다. 부화된 후 어리게만 보이던 새끼들에게 바람을 박차며 날 수 있는 훈련을 시킬 땐 나무 또한 뿌듯함을 같이 느낀다. 꼭대기까지 보내고 보내도 모자라는 수액을 쉼 없이 생산하기에 밤낮없이 바쁜 뿌리는 그 물의 일부를 땅을 위해 밖으로도 내준다. 모든 생명들은 나무가 주는 맑은 샘물과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유지한다. 신선한 산소를 무제한으로 공급함을 넘어서서 더위에 지치고 여정에 피곤해진 이들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고 아늑한 쉼터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가을
어느덧 하늘이 높아지고 고추잠자리들이 저공과 고공비행을 교차하며 시작한다. 알차게 여문 열매로 인하여 더욱 무거워진 체중을 유지하다 못한 가지는 아래로 점점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기러기 떼가 새벽 찬 공기를 비행기같이 가르며 북향으로 진로를 틀 무렵 무서우리만치 푸르렀던 수많은 잎의 색깔도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다. 가지 끝에 별 같이 달려있던 꽃이 맺혀 된 과육의 표면으로 붉은 물감이 염색이 되듯 나날이 번진다. 목피에 찰싹 달라붙어 무성하게 퍼져가던 밑둥의 이끼들도 이제 나무에게 고마워하며 녹색 알갱이들을 살며시 뿌리에 저장한다. 사람은 실하게 익은 열매를 달콤하게 맛보며 가을이 깊어감을 새삼스럽게 알아챈다.
겨울
옷처럼 감싸주던 이파리를 매몰찬 북풍이 다 떨구어 버린다. 낙엽은 주저 없이 뿌리로 돌아가 땅을 기름지게 해야 할 차례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해는 어느덧 짧아져 그 뒤를 따라 느닷없이 침범하는 무서리는 겨울 외투를 서둘러 준비하게 만든다. 잘못을 저지른 일 하나 없는데 벌 받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며 서 있어야 하는 혹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나무들은 동면에 들어갈 채비를 준비한다. 날은 흐려지고 앙상해진 가지 위로 희고 차가운 눈은 사전 연락도 없이 풀풀 내리기 시작한다. 영하에서만 머무는 체감온도로 추위를 몹시 느낄 때쯤 입을 굳게 다물며 다시 또 길고 깊은 묵상의 시간으로 잠입한 수도자 자세를 취한다.
이처럼 나무의 모습은 늘 순응적이고 우호적이다. 가꾸어 주는 것만큼 내어 주며 사람과 더불어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계절을 전혀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변모하는 나무를 가까이서 보며 또 다른 이치를 사람은 심오하게 깨닫는다. 천하절경이어도 나무가 없다면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울창하게 선 경건한 모습의 나무가 함께 어우러진 비경을 찾아 즐기돼 사색하며 자성하는 현자가 되라고 성현은 언제나 타이른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수 백 년 수령의 나무를 마구 잘라내고 군락을 이루던 성목成木은 물론 그 주위환경조차 무분별하게 파괴한다는 것은 천혜天惠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과 목적은 항상 친자연적이며 순리적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8]하셨다. 정복은 발견과 개발이요 다스림이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라는 취지다. 남획이나 무자비한 살생은 절대로 금하라는 말씀으로 알아야 하며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라는 명령이다. 나무로서 생성소멸을 직시하며 동시대에 공생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타 생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 덕목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2013.5.23.
소牛
투박한 송판으로 짠 널빤지 문이 반쯤 찌그러진 채 비스듬히 걸려 있다. 돌쩌귀는 녹슬고 깊이 박혔던 중中못도 몇 개 삐져나와 출입구 귀퉁이가 너덜댄다. 문지방 역할로 걸쳐 있던 통나무 아래의 진흙은 흉하게 허물어져 큰 구멍이 훤히 뚫려 있다. 거미줄이 멋대로 처진 컴컴한 마구간 안은 찬 공기만 가득 차 을씨년스럽다. 거름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외양간 바닥엔 가랑잎과 쌀겨가 섞인 먼지만 구서구석 푹푹 쌓여 있다. 소죽가마 언저리 위로 길게 걸쳐 있던 여물통을 떼 내어 땔감으로 썼는지 걸쳐놓았던 자국만 양쪽에 선명히 남아 있다. 워낭소리 간간히 울리던 소의 얼굴이 어렴풋하게나마 눈앞을 스친다. 송아지 울음조차 아주 멀어진 빈 마구간. 이것이 현재 농촌 모습의 한 단면이다. 가장 유익한 짐승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을 때면 항상 소를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이렇게 서두에 써본 요즘 풍경이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 온 후 감나무에 고삐 줄이 메인 채 그늘에서 졸고 있던 소를 데리고 꼴을 먹이러 나갔다. 개울가에 도착해 고삐를 뿔에 단단히 감은 다음 방목을 했다. 소로 봐서는 아주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같은 동네 소들이 20~30마리 정도 모여 개울가를 오르내리면서 함께 싱싱한 풀을 뜯었다. 우리는 우리 대로 삼삼오오 농촌 특유의 재미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술래잡기, 군기놀이, 달리기… 그러다가 땀이 많이 나면 냇물에 들어가 멱을 감았다. 노래도 불렀고 공기놀이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질 때면 소년소녀들은 자기네 소를 찾아 앞세우고 모기 연기 알싸하게 풍기는 집으로 돌아왔다. 둔한 것 같은 소도 자기가 사는 집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른 척 그냥 놔둬보면 혼자서 제집으로 가는 길을 잘도 알아차리며 찾아들었다. 길 옆 논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곡식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그것에 입도 데지 않고 앞서 걸었다. 오고 가는 길가의 곡식이 좋은 먹이 감이었는데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의 여름 일상은 이러했다. 이렇게 정다웠던 소도 멀리하고 필자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고향집을 떴다. 반년 후 방학을 맞아 귀향하여 소를 만났을 땐 소도 필자를 기억했다. 재회를 대단히 반가워하고 있음을 그 큰 눈빛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의 배설물은 논밭엔 좋은 거름이 된다. 사막지대나 나무가 흔치않은 나라에서는 절대적인 땔감으로 이것을 사용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도 있다. 성우成牛가 된 후에는 농기구로서 옛 농경사회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동력이었다. 농부와 호흡을 맞추며 논과 밭을 경작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동료 일꾼이었다. 어찌 이것뿐인가. 어떤 송아지나 소는 주인집 자녀의 학자금이나 혼사비용을 위하여 흔쾌히 팔려갔다. 그것만이 아니다. 죽어서는 고기를 제공하고 털을 남긴다. 뼈는 사람을 위한 좋은 보신 식재료가 된다. 가죽은 흥을 돋우는 큰 북 작은 북을 만드는데 쓰이고 또 전장에서의 군수품으로도 요긴히 쓰였다. 뿔은 우각새라 하여 한방 약재로 사용되어 사람의 건강을 돕는다. 그리고 좋은 장식품으로 조각되어 새로운 임자를 만난다. 우직한 성품으로 주인 옆에서 주인과 함께 그리고 주인을 위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와 같이 버리는 것 하나 없다는 짐승이 소牛였다. 하지만 농촌에는 경운기에 밀려 농부와 함께 농사 짓는 소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어졌다. 어느 틈에 농기소農器牛라는 이름에서 그냥 한우韓牛 육우肉牛라고만 불리워졌다.
소를 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오고가던 농촌풍경은 없어진 지 오래다. 마당 입구에 둔 개집에서 강아지가 껑충껑충 뛰어 오르며 외양간에서는 머리 큰 소가 내다보고 있어야 비로소 농촌 같았는데. 이제는 삽적거리1)에 참새조차 잘 내려앉지 않는다. 종일토록 지나는 사람 보기 힘든 농촌의 모든 곳은 텅텅 빈 채로 낡아가고 있다.
201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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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 주변이라는 뜻의 강원도 사투리
스승을 생각하며
사제지간師弟之間이란 가깝고도 먼 사이다. 가깝다는 것은 사람의 인격형성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를 말한다. 멀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항상 우러러 봐야 할 분이 스승이라는 뜻이다. 선생이란 학생이 다가오면 언제나 마다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학생이 스승에게 다가가기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감동케 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화를 가끔 읽는다. 그것은 사표師表가 되며 후학의 모범이 된다. 위대한 정치가, 탁월한 음악가, 만인을 감동케 하는 문학가… 무한한 영감으로 인류의 편익을 추구하며 완성시키는 과학자 의학자 등, 이 모든 것들에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류와 사회를 먼저 앞세우면서 언제나 원대한 안목을 지녔던 스승은 위대했다. 무한히 존경을 받는 그런 스승이 된 사람이 또 다른 스승을 배출시키는 모습을 볼 때 스승이란 영원한 선현의 위치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스승은 학생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장소를 학교라 한다. 학교란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배움터지만 한 편 스승을 만들어 내는 도량이다. 그런데 실망을 안겨 주는 것 중 하나로 학교가 오래전부터 지식과 학문을 사고파는 시장이 되었다는 현실이다.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분들의 명치끝을 찌르는 일이다. 몰지각한 일을 발생시키는 부류는 극히 일부겠지만 이 일부가 전체를 흔드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고언告言이 있다. 현실에 맞게 풀이해 보자면 군君은 국가를 이끌어가는 왕이며 사師는 부단히 배출되는 스승과 견고한 가치관을 유지하는 사회다. 부父는 부모인 동시에 행동의 기본 질서가 되는 윤리의 근원이다. 이것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와야 그 사회가 튼튼하다. 이 사상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 만사의 근간根幹이 된다. 하나라도 뺄 수 없는 삼각구도는 변화할 수도 변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의 변화란 곧 변질을 뜻하기 때문이다. 진리나 진실은 변화 되어서도 또 변화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가 허용되는 부분은 따로 있는 것이다.
뚜렷한 이름은 남기지 못했지만 훌륭한 사제지간을 유지하면서 살다간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다 귀하고 값진 인생을 살았다 할 것이다.
2013.11.08.
겨울 새벽
간 밤 초저녁에 한 부엌 가득 지폈던 군불 온기가 구들장에 아직 미지근하게 남아 있다. 마루문 열리는 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잠깬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 와 쳐다보며 배고프다는 듯 칭얼댄다. 군불아궁이에 장작을 더 넣은 후 솔가리로 불을 지피고 둥근 앞산을 바라본다. 밤새도록 혼자 가곡천을 밝히며 지내다가 핼쓱해진 새벽달이 학바위 산1)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다. 돌돌돌 소리를 내던 물여울도 꽁꽁 언 얼음에 덮여 목청을 잃고 고요하다. 대설예보에 잔뜩 긴장했던 나무들이 으스스 떨며 내려다 보는 빈 논밭엔 때 아닌 서릿발이 안개처럼 뿌려져 있다. 콩 수매 때문에 모였던 사람들이 통나무 불을 피우던 강변 주차장의 빈공간이 방학에 들어간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어진 것 같아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부산하게 콩 부대를 실고 오가던 경운기들의 얇은 여음이 귓가로 희미하게 맴돈다. 산간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끊길 듯 간간히 꼬리를 무는 불빛이지만 넘어탕실교2)를 건너오는 차는 없다. 마른기침 한 번하고 앙상한 감나무 아래를 돌아서며 이름 하나 떠올린다.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가 공중으로 사라지는 새벽 굴뚝 연기처럼 희미하다.
2013.12.20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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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곡면 오저리의 서쪽 뒷산
2) 필자의 집으로 건너오는 다리 이름
하물며
정월의 차갑고 짧은 겨울 해가 서쪽 산 정상 가까이로 기울었다. 이미 기운 해, 한 뼘 정도만 더 가면 햇빛도 완전히 사라지는 시각이었다. 검은 강아지와 갈색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이들의 어미 개를 풀어 데리고 텃밭 부근 산기슭에 갔다. 어미 개는 목줄을 단 채 였다. 평소엔 긴 목줄에 매어 두었는데 끈을 반쯤을 풀어 놓아주니 그게 그렇게도 자유로운 모양이었다. 나를 힐끔힐끔 보며 밭으로 논으로 이리저리 사방 멋대로 새끼들을 달고 뛰어다녔다. 나는 나대로 작년에 베어 놓아 잘 말라 있는 나무를 한 아름씩 안고 집 마당 모탕으로 반복하여 옮겼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쯤 나무 나르기를 마친 후 저녁먹이를 주려 검둥이 식구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어미 개와 강아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씩 불러도 대응하는 숨소리조차 없었다. 한 식구가 완전히 실종된 것이었다. 텃밭 위로는 곧바로 험한 뒷산인데 이들이 분간 못하고 그곳을 올랐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넓고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뒷산이라 날은 저물어 오고 이들을 어떻게 찾아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날이 더 캄캄해지기 전에 어떠하든 찾아내야만 했다.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재빨리 등산화로 바꿔 신고 산을 오르기 위해 산 숲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갈색 강아지 두 마리가 황급히 나타났다. 나를 보자마자 강아지들은 곧바로 가파른 산을 허겁지겁 되돌아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힘겹게 다다른 산 중턱 잡목 사이에 검은 강아지와 어미 개 검둥이가 있음을 바로 발견했다. 어미개의 목줄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검은 강아지는 움직이지 못하는 어미 옆을 마치 지키기라도 하고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나보다 먼저 되올라간 갈색 강아지 두 마리는 어미 개 뒤에 앉아 나와 제 어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2014.1.09.
설촌雪村
향기 없는 꽃이라지만 지상에 와 닿는 눈송이는 처음 만나듯 항상 새롭다. 겨울 올림픽은 먼 나라 소치sochi1)에서 열리는데 게임에 필요한 눈을 가곡柯谷에 다 쏟아 붓고 있는지 천지는 온통 은백색이다. 군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조아리고 겸손하다. 고고함을 접은 부부소나무2)도 백목白木이 되어 부동의 침묵에 잠긴다.
가곡천柯谷川 여울물소리가 꽁꽁 언 얼음을 비집고 나와 나직한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이 생소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건너 마을 야트막한 밭 밑으로 난 국도를 그나마 엉금엉금 기어가던 차량 행렬이 뚝 끊긴다. 이따금 제설차가 이마를 기웃이며 힘겹게 오르내리지만 퍼붓는 눈을 다 감당하지 못한다. 솜타래 같이 굵어진 전깃줄이 눈 무게를 힘겹게 견뎌내고 있다. 작대기로 툭 건드리자 넓은 폭포의 물보라처럼 뿌옇게 쏟아지며 날린다.
몰려 날던 참새 떼는 물론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짖던 산 까마귀도 일찌감치 사라진 모양이다. 진공이 된 하늘과 산골은 무풍지대에 빠져 귀가 멍멍해 온다. 하얗게 된 전봇대에 붙어 있는 농로등農路燈이 들새가 켜놓은 작은 촛불처럼 주변만 우유 빛으로 조금 밝히고 있다.
언덕이건 구릉이건 골고루 덮어주는 눈이 각진 바위도 둥그스름하게 만든다. 날 풀리면 흔적도 없을 설경임을 생각하며 가래로 창고 쪽과 헛간 강아지 집으로 가는 길을 낸다. 대설에 일찍 잠을 깬 초겨울 태생 강아지가 껑충껑충 멋모르고 뛰어 오른다. 혼자 서럽게 사는 암 닭이 눈 치우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 안에 멀뚱히 서 있다. 철망 문을 열어줘도 나올 엄두를 못 낸 채 제 잔 자리만 맴도는 꼬꼬. 한 줌 뿌려주는 모이를 눈 인줄로 여기는지 입도 대지 않는다. 별것이라도 찾을까 하고 눈 치우는 데마다 강아지와 들새가 내 뒤를 쫓다가 내가 허리를 펴면 저만치서 같이 멈춰 선다.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운 냉기를 헤치며 뒤안 미닫이문을 연다. 십구공탄이라 불리지만 실은 스물 두 구멍인 연탄을 보일러에 갈아 넣으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태백 동네를 잠시 생각한다. 밤새도록 제 몸을 고루 연소시키느라 내 뿜는 알싸한 유황 냄새가 오히려 따뜻한 기분을 준다. 사랑도 마음을 여지없이 살라야 연인을 포근하게 할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슬며시 떠오른다.
비누냄새 풍기는 하얀 눈 살肉 위에 소롯이 물드는 사랑 한 점 찍어본다. 계절과 장소에 관계없이 활활 타면서도 보이지 않는 불꽃, 그런 사랑을 남몰래 하고 싶어진다. 먹이가 급한 들새가 위험을 무릅쓰고 문 열린 뒤 안으로 포로롱 날아든다. 배고픔은 겁도 지워버리게 하는 건가. 생각하는 연인을 만나려면 용감하게 뛰어들어야 이룰 것이라는 가당찮은 생각에서 퍼뜩 깨어난다.
눈雪에 잠기는 고요가 마을을 점점 숨 막힐 정도로의 적막감으로 덮는다. 조금 남은 온기마저 찬 공기에 빼앗기며 온돌 구들이 차츰 식어온다. 장작을 더 때기 위해 아궁이에 마른 솔잎을 먼저 깔고 불을 지핀다. 땔감 밑에서 화르르 이는 불꽃이 정다운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밭가에 홀로 선 향나무가 적설로 인하여 어깨 아프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행랑채 너머로 보인다. 가득 쌓이는 눈 밑으로는 벌써 봄기운이 꼼지락대고 있을 텐데도 이러하다.
201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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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러시아 소치
2) 필자의 집 앞 제방에 서 있는 나이 많은 두 그루의 큰 키 작은 키 소나무
입술 맛
보석이다. 이것은 순도 백의 연체루비ruby다. 7월 생일을 5월에 맞은 듯 하다. 초록 벨벳velvet의 단조로운 꽃받침이 원석을 받쳐주고 있다. 작게 뭉쳐진 알갱이들을 햇볕이 반짝반짝하게 닦아준다. 그래서 불덩이가 윤을 내며 타고 있는 것이다. 타지 않고는 이렇게 붉을 수 없다. 마침내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 한다면 아주 냉정한 정염이다. 참다참다 어쩌지 못하여 끓어 오른 사랑이지만 손대도 뜨겁지 않은 얼음 같은 절제다. 어느 것은 보이고 어느 것은 풀 섶에 숨어 몰래 밖을 내다보는 처녀의 속내다.
함부로 건들거나 아무렇게나 범치 못하게 가시망도 치고 있다. 가시라 해야 찔려도 그리 아프지 않는 털 침에 불과하다. 이것으로나마 저항해 보려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앙증맞은 ‘앙탈이다’라고 여기니 헛웃음이 난다. 가시를 무시하고 손을 댄다. 소년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조심히 갔다대는 손끝이 왠지 떨린다. 세게 잡으면 부서지고 살짝 당기면 잘나오지 않는 그런 수줍음이 단단하다.
그러나 대부분 순순히 응한다. 잘 빠져나온 것을 곱게 들어 한 알 한 알 고지바가지에 채운다. 색깔이 바가지 안을 차츰 불그스름하게 하게 한다. 온갖 자태를 뽐내던 꽃들이 다 지고난 후에라야 떠오르는 해맑고 선명한 앵혈이다.
들새도 멧새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산모퉁이 외딴 곳이다. 울창한 참나무 잎을 뽀얗게 뒤집으며 상큼한 하늬바람이 간간이 불어온다. 연청색 스카프 같은 하늘이 산머리에서 펄럭인다. 진한 립스틱을 덧칠한 알갱이에 입술을 대 본다. 코 주변으로 풀잎 내음이 살짝 감돈다. 찌르르 맛 샘 신경으로 신호가 온다. 새콤하면서도 뒷맛이 달콤함을 감지한다. 이런 입맞춤 한 번 한 적 없는 이는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사람일거라 여긴다.
자연이 혼합해 내는 색조가 볼수록 경이롭고 그 투명함이 신비를 더할 뿐이다. 흙과 물과 햇빛이 어우러져 우러나며 익는 산딸기를 유심히 본다.
2014.5.27.
토마토가 익는 밤
슬픈 꿈에서 깨어나 고요한 어둠 속에서 기도한다.
깬 잠 다시 들지 못하는 새벽 세시,
피워 놓았던 모기향도 다 타 접시 위에 동그라니 재만 남는다.
일어난 김에 임 시인이 의뢰한 10편의 시 중에 2편의 시 해설을 쓰다가 댓돌 밑에서 들려오는 이른 귀뚜라미 소리에 문득 귀를 기울인다.
저 귀뚜라미는 밤에만 울어야 하는 무슨 까닭이 있는지.
제방에 심은 호박이 이미 익어가는 8월, 다음 달이면 추석이 온다 한다.
컴컴한 마당에 나가 쳐다본 밤하늘.
비 머금은 구름 속에서 몇 개의 별이 공중에 박힌 장식전구처럼 드문드문 반짝인다.
물 한 잔 마시고 자려는데 생뚱맞게 토마토 생각이 난다.
어둠 속에서도 텃밭에서는 빨간 토마토가 달게 익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한 소쿠리 가득 따 주고 싶어진다.
2014.7.26.
강냉이 여무는 밤
훤칠하게 자라나 무수한 십자가를 세우던 옥수수 무리가 곳곳에 쓰러졌다. 창고 지붕의 슬레이트가 날아갈 정도로 방향 없이 불던 장마철 강풍 때문이었다.
쓰러져 있는 대궁을 낫으로 자르며 정리하다가 옥수수 어린 송이를 몇 겹으로 감싸고 있는 보호본능에 혀를 내두른다. 우직하게 드러낸 여덟 가닥 억센 뿌리의 힘으로도 바람 공화국의 횡포를 이기지 못했나 보다. 단단한 속심도 없이 기 쓰며 버틴 결과 용케 원형을 보존한 긴 잎사귀들은 바람이 자자 일제히 수면의 부동자세를 함께 취한다.
팔려간 형제와 쓰러진 이웃을 생각하며 성큼 8월로 다가가는 강냉이 송이의 여린 껍질을 조심히 만져본다. 태풍 북새통에도 제 할일 다하듯 여무는 대견한 모습에 늘어진 수염을 살갑게 쓰다듬어 준다. 딱히 보내줄 곳 없는 아쉬움이 이랑을 살짝 적신다. 중복을 넘기는 옥수수 밭에 밀림 속 같은 어둠이 내린다. 북극성 찬연한 하늘. 올해 따라 반딧불이 조차 왠지 별로 날지 않는다.
2014.7.29.
볏짚을 걷다가
베어짐과 동시에 낱알을 다 털린 채 제 자란 물 뗀 논바닥에 길게 널려 있는 볏짚을 걷는다.
혼자 처음 재배한 벼농사여서 그런지 남모를 정이 더 깊다.
반 아름 정도씩 가지런히 모은 후 제 짚으로 단을 꼭꼭 묶는다.
모으는 볏짚 속에 덜 털린 노란 이삭을 간혹 발견한다.
볏짚 사이사이에 끼여있는 벼를 볼 때마다 아까움과 함께 결실의 소중함을 다시 느낀다.
일손 때문에 다 털지 못하고 마는 아쉬움, 곡식알을 빠짐없이 챙길 수 없는 것이 농부의 곤한 육신이다.
조금 쉬어야겠다 싶어 허리를 펴고 말라버린 잡초사이에 박힌 푸석돌 위에 걸터앉는다.
여기서는 잘 생긴 돌 못생긴 돌을 구분하지 않는다.
돌도 모두 체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둥글게 높이 솟아 있는 구이산1)의 단풍 내림이 완연하다.
초록색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잎들이 맑은 햇살에 한층 선명하다.
보다 먼저 잎 색이 변하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초록과도 잘 어울리고 있다.
돌에서 일어나 쌓은 볏짚 위에 훌쩍 드러눕는다.
친근하면서도 따뜻하다. 눕자마자 저절로 눈에 확 들어차는 하늘이다.
와– 어쩌면 저토록 파랄 수 있을까.
온 몸이 금세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정성껏 키워왔던 볏짚 위에 누워 쳐다보는 구름 한 점 없는 시월 하늘, 그리고 수를 놓는 듯 차츰 각가지 색으로 물드는 가을 산. 내 영혼은 푸른 허공에 일획의 금을 긋는 가벼운 새가 된다.
201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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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 가곡면 탕곡리의 주산主山
산촌일기
서울 다녀온 며칠 사이 산과 들이 겨울 티를 완전히 벗었다. 작년 늦가을 추운 바람을 맞으며 어머니와 심은 마늘이 투명 비닐 구멍을 뚫고 나와 한 자尺 이상 자라고 있다. 파릇파릇한 새 잎들이 화초처럼 귀엽다. 이 비닐을 모두 걷어내고 사이사이 마늘과 함께 자란 잡초를 뽑으며 땅을 맨 후 복합비료를 주었다.
뒷산 할머니 산소 앞에 자란 산 참두릅을 따려고 검둥이와 올랐다. 진달래 생강나무 꽃은 이미 다 졌지만 보아주는 사람은 없는데도 산철쭉이 군데군데 환하게 피어 있다. 할머니 생전의 모습과 주고받았던 말들, 그 음성을 기억하며 두릅을 땄다. 끓는 물에 대쳐 물기를 짠 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상큼한 향이 콧등을 지나 이마까지 도는 나물이다. 두릅을 꺾다말고 그루터기에 앉아 쳐다보는 솜사탕 같은 봄 구름이 산불 번지던 오목리1) 하늘 위로 지나갔다. 뒷산에서 내려다 본 고요한 봄날 오후, 힘들게 심었던 감자와 옥수수는 늦은 눈 거센 바람 찬 비를 이기고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비어 있던 밭 일부에 밑거름을 주고 비료를 친 후 경운기 헤드를 몰아 밭 갈기를 마쳤다. 그리고 곧장 골타기로 밭골을 타고 들깨며 수수 씨를 뿌렸다. 뿌린 씨를 고무래로 다 묻기까지 팔이 아프고 몸은 지쳤지만 흐뭇히 추수할 순간을 생각하며 농부는 신고身苦를 참고 견딘다.
밭 가는 로타리 날을 교체하고 있는데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 셋이 음료수와 빵을 챙겨들고 찾아왔다. 한 학생은 마루에 앉아 내가 암송하라 했던 시 1편을 다 외워보였다. 학생들과 함께 햇고사리 꺾으러 잠시 산에 올랐다. 어린 제자들과 소풍하는 것 같아 내 중학교 때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서울과 전남 광주 그리고 삼척 문인들 전화가 왔다.
올해는 누군가가 자주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점점 쇠약해 가시는 어머니를 위하여 80넘은 이모가 보내준 소뼈 사골을 해질녁 뒤안 알루미늄 솥을 행구고 고았다. 장작불이 잘 타서 금방 뽀얀 국물이 우러났다.
문학지에서 시 원고 청탁이 와 밤에 보냈다.
자기 전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얼굴이 볕에 타서 까매져 있었다.
어깨 팔 다리 엉덩이가 아파 좀 나을까 하여 여기저기 파스를 붙였다.
이제 곧 고추를 심어야할 때가 다가오고 모내기, 또 그 넓은 밭에 콩 파종을 해야만 할 시기도 멀지않았다.
그리고 농약을 치고…
농부의 몸은 좋은 성능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농기구며 농기계다.
혼자 기거하는 방,
장작을 때서 따뜻하지만 홀로 선 해바라기 모습 같은 외로움이 옆으로 다가와 같이 눕는다.
201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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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가곡면 소재 오목리
5부 : 2016-2018년
군불을 때다가
가곡의 연말 하늘은 잔뜩 흐렸고 싸늘한 산바람이 가랑잎을 몰고 온다. 눈이라도 금방 내릴 것 같은 앞산 위의 허공이 손에 잡힐 듯 멀다. 험한 산비탈에 선 소나무들이 날씨보다 더 추워 보인다.
조금씩 식어가는 방에 있자니 발가락부터 점점 차가워 온다. 당숙모가 준 햇팥을 씻어 어머니가 팥죽을 쑤신다며 어렵고 느린 몸짓으로 레인지를 켜시는 소리가 주방에서 얼핏 들린다. 몇 편의 글을 읽다가 찬바람 부는 밖으로 나와 장화를 신고 목장갑을 낀 후 장작부엌의 아궁이 마개 판을 옮긴다. 황토부뚜막은 그슬려 있고 무쇠솥은 녹슬었지만 내 방을 따뜻이 해 주는 불골이 정답다.
바싹 마른 들깨 대궁을 한 줌씩 꺾어 불쏘시개로 아궁이 밑에 먼저 넣는다. 그 위에 장작 몇 개를 올리고 신문지를 구겨 넣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뿌지직… 선 붉은 불길이 오른다. 마른 나무 잔가지와 참나무 장작을 아궁이에 더 넣은 후 허리를 펴고 주변을 기웃 거린다. 겨울 청보리가 파랗게 웃돋은 밭가에 먹을 것을 찾던 야윈 까치들이 뒷짐을 지고 서있다.
거침없이 자라다가 늦가을쯤 돼서는 스스로 알고 바싹 말라버린 가곡천변 갈대 무리들이 한풍에 서걱댄다. 높은 가지에 맺혀 있어 따지 못한 채 그냥 둔 홍시가 꽃이 핀 것처럼 붉게 있다. 콩 타작이 끝나 깨끗이 정리된 농로를 따라 누가 올 것만 같은데 실은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다. 어스름해 지기 시작하는 다리 머리께의 길 등에 아르곤 불이 스르르 켜진다.
저녁 먹자는 어머니의 가는 목소리가 문풍지를 타고 들린다. 입에 맞게 팥죽을 잘 쑤던 남南이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향긋한 동치미 반찬에 따끈한 죽을 나누어 먹던 생각이 떠올라 눈가가 살짝 젖는다. 오늘이 동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016.1.12.
*남南이
소낙비 온 뒤
옥수수
소나기가 한바탕 폭포같이 퍼붓다 돌아간 뒤 늘어졌던 나무 가지들이 강바람 방향에 따라 잔잔하게 흔들린다. 집단으로 안테나를 달고 일기예보를 전하려는 듯 하늘을 가르키는 옥수수 꽃대들이 제방 아래서 장관을 이룬다. 합동 발레를 하듯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채 한들거리는 긴 옥수수 녹색 잎들이 한결 투명해 보인다.
칼바람 쌩쌩대던 이른 봄, 차가운 돌밭의 잔돌들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줄지어 두 알씩 정성껏 심었던 옥수수다. 허리가 꼬이고 고개가 꺾일 정도로 말라가던 긴 가뭄이었지만 농부가 대주던 양수기의 물 덕분으로 해갈하며 자랐다. 머리가 어지로울 지경으로 흔들어대던 강풍을 질긴 다리와 꿋꿋한 뱃심으로 이겨냈다. 해가 난 날엔 웃다가도 구름 낀 어두운 밤엔 무서워 하면서 용케 잘 자라났다. 7월에 접어들자 어느새 생 머리칼 같은 검붉은 수염을 길게 뽑아 내렸다.
비는 다시 세차게 내리지만 창문을 열어놓고 짙은 푸른색으로 부풀어 오르는 들판을 내다 본다. 옥수수 두 송이를 양 옆구리에 야무지게 끼고 선 그들 무리에 눈이 멈춘다. 애지중지하듯 겨드랑이에 바짝 붙이고 있던 송이를 머잖아 모두 내준 후 대궁마저 잘려나갈 처지다. 하지만 아직은 초록 아이스크림 같이 곧게 돋은 옥수수 대궁들이 정원의 관상목 같은 정이 간다.
심어주었고 키워주었으니 이제 당신께 옥수수를 드린 다음 당신 손에 잘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려는 듯 내 쪽을 돌아본다. “고마웠다”고 그리고 “내년에 다시 보자”고 하면서.
콩 나라 사열식
일시에 일어선 초록군모의 행진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멈춰서 있다. 수십만 대군이 총 집합하여 차렷 자세를 취한 장엄한 일열 종대들을 방불케 한다. 두꺼운 땅 껍질 안에 잠복해 있다가 한꺼번에 솟아 오른 여린 싹들의 생존 전선에서의 승리다. 녹색의 싹들이 동시에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민 모습. 엄숙하다 못해 숙연함이 이랑마다 물결처럼 일렁인다.
일주일이면 거의 돋아난다는 콩 싹. 그러나 십여 일이 넘어가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물기가 잘 스미기는 하지만 대신 수분이 금방 증발하는 규사토 논에 콩 씨를 넣은 것이 근심의 화근이었다. 한 달째 계속되는 한발을 참다못한 나머지 콩 씨 파종기를 놓칠까 염려하여 바싹 마른 논을 갈고 대담하게 씨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새벽마다 다가가 살펴보기를 열흘 째 아무 미동도 없는 고랑과 이랑은 무거운 침묵의 일관이었다. 누구는 콩 씨가 제대로 파종되지 않았나 싶다 했다. 그렇다면 파종기계에서 5kg자리 2포나 소비된 그 많은 콩 씨들이 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또 누구는 콩 씨가 이미 말랐을지 모른다 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속히 땅을 뒤집고 다시 콩 씨를 파종해야할 노릇이었다.
60년간 농사를 지었다는 동네 할머니가 와서 콩 씨를 파 살펴보고는 좀 기다려 보라 했다. 기다리면 올라 올 것이라 했지만 파종한 지 13일째가 되어도 내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초조만 더해갔다. 올해 콩 농사는 접어야 하나보다 라는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왔다. 15일째 되는 내일도 오늘과 똑 같은 현상이라면 절기는 늦었지만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콩 씨를 다시 뿌리기로 마음 굳혔다.
15일 째 되는 새벽이었다. 여명의 시각이 잠시 흐른 뒤 희미하게 밝아 오는 들녘 속으로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의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콩 싹이 거친 땅을 뚫고 올라오기 직전의 땅 금이 생기고 있음을 발견했다. 흙을 밀치며 봉긋봉긋 머리를 들기 시작하는 콩밭 땅거죽의 변화를 대번에 눈치 첼 수 있었다. 감격스럽다 말고 무섭기까지 했다. 귀밑으로는 서늘한 소름이 살짝 돋다 사라졌다. 뽀얀 먼지만 일던 마른 땅이었지만 뿌리를 먼저 길게 내린 후 싹을 뽑아 올리기까지 자기와의 투쟁 결과를 이 순간 확연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누가 저 작은 콩 씨 하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콩 싹을 여린 풀이라 여겨 함부로 밟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꼬박 7일을 더 애쓴 끝에 이루어 낸 절규 같은 승전가가 눈물겹게 들려오는 듯했다. 엄숙한 마음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일시에 내민 어리디 어린 연초록 싹에 존경의 입을 맞추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아서였다.
때마침 내린 한낮의 소나기를 맞고 난 바로 서너 시간 뒤 콩 나라 초록제복의 병사들은 키를 3센티나 쑥 올려 세웠다. 가뭄 끝에 찾아온 우악스러운 소나기, 그러나 그들에겐 절대 필요한 비료였고 성장의 감로수였다. 이랑마다 한꺼번에 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산마저 흔들 정도로 우렁차게 퍼져갔다. 저것이 바로 콩 제국 수십만 대군의 숨소리요 발자국 구르는 소리이며 생존투쟁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연병장의 근엄한 사열식이었다.
하늘을 떠돌다가 온갖 영양소를 각테일하여 퍼붓는 소나기는 축제장의 축배였다. 열기 가득한 콩밭의 뜨거운 온도를 지나는 가곡천 강바람이 조금 식혀 주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넓고 긴 여름과 가을의 노란 결실을 향해 실패 없이 씩씩하게 행진해 나가기를 기대하겠다는 듯 흰 구름이 시루봉 위에서 손짓하며 지나갔다.
2016.6. 29.
어떻게 이들을 말렸어야 했나
검둥이가 갑자기 으르렁 대며 짖는다. 왜 그러는가 하여 마루문을 열고 살펴 보니 야옹이가 고추건조기 위를 째려보고 있다. 등은 까맣고 배엔 하얀 털을 한 비교적 몸집이 작은 고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내빼지 않고 꼬리를 다 거두지 못한 채 건조기 뒤로 머리만 얼른 숨긴다. 단단히 마음먹은 꿍꿍이 속이 있은 모양이다.
야옹이와는 논밭 길에서 우연히 가끔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다른 들고양이들처럼 급히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부르기라도 한다면 발길을 돌려 금방 다가올 듯 한 표정과 몸짓이었다. 혼자 살던 마을 할머니가 작년 가을 서울 아들집으로 아주 이사를 가버리며 어쩔 수 없이 때놓고 간 고양이었다. 서울엔 데려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농촌에서 누가 맡아 키우려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영문 모르는 채 빈 집에 홀로 떨어져 남게 된 야옹이. 그래서 먹이를 찾아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된 처지었다. 수많은 나날 주인 할머니를 찾아 울며 헤맸을 야옹이. 야옹이가 기다리고 기다렸을 그 할머니는 서울로 떠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이런 사정을 안 후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야옹이가 좋지도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순회하다 다시 우리 집에 야옹이가 오면 검둥이 때문에 멀리 쫓아버리기도 했고 어느 땐 못 본 척 그냥 놔두기도 했다.
검둥이는 또 누군가? 돌아가신 부친이 어디서 억지로 받아와 키우게 된 강아지였다. 온 몸이 검은 털을 입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성견이 된 후에 목줄을 해 두었다거나 우리에 잘 가두었어야만 했는데 그냥 방사했던 것이 큰 낭패를 불러왔다. 검둥이는 내가 귀향한 첫 해에 새끼를 배고 말았다. 겨울 아침 4마리의 강아지를 낳고는 혼자 밖으로 나와 나를 보자마자 자랑이라도 하듯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 댔다. 미물이지만 함께 사는 식구라 여겼기에 그냥 있을 수 없어 미역국을 끓인 후 밥 한 그릇 수북이 말아 먹게 했다. 그런데 농촌에서도 요즘엔 강아지를 잘 키우지 않는 다는 것을 검둥이가 새끼를 낳은 후에야 절실히 알게 되었다. 강아지를 키울만한 사람을 곰곰이 물색해 본 후 전화로 아니면 만나서 강아지를 데려가 키우라고 사정사정해 봤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누렁이 두 마리, 검은 놈 한 마리, 흰 놈 한 마리의 강아지는 나날이 자라 제 어미와 장난치며 눈밭을 뛰놀았다. 하지만 더 정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남의 집으로 보내야만 했다. 동네 분이 말하기를 어미를 끼워 모두 장사에게 팔아버리라 했다. 가끔 작은 화물차를 몰며 지나가는 개장사를 보곤 했기에 처음엔 솔깃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팔아버린다면 강아지들은 그 무지막지한 도살장으로 갈 것이 뻔했다. 어미 역시 곧바로 영양탕 집으로 갈 것이 확실했다. 애써 키울만한 집을 끝까지 찾아 강아지들은 분양하고 어미는 같이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노력한 결과 건너 마을에서, 태백에서, 호산에서, 그리고 절골에 사는 사람이 마지막 남았던 흰둥이를 데리고 갔다. 떠나갈 때 강아지들은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내 팔에 매달리기도 했다. 태백으로 간 누렁이는 나와 친숙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새 주인에게 넘겨지는 순간 내 가슴을 와락 움켜쥐기도 했다. 이만큼 자랄 때까지 먹이를 주었던 나와 든 정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이렇듯 강아지 하나하나 보낼 때마다 다시는 못 올 길을 멀리 떠나는 모습에 내 마음도 짠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새끼들과 생이별한 검둥이는 그 후 알콩 달콩 나와 같이 산 지 4년이 되었다. 순함을 지녔으며 머리도 약간 명석한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을 땐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짖어대며 난리를 치는 성미였다. 빠르기나 날렵하기 또한 보통이 아니어서 크고 작은 쥐를 도합 13마리나 포획했다. 내 차 소리를 용케 알아 외출했다가 마당에 들어설 땐 절대로 짖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달려 나와 앞발을 들고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그러나 방문객의 차가 오면 대들어 물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가끔 야옹이가 방문할 땐 발자국소리를 용케 알아채고는 달려 나와 으르렁 댔다. 그러나 목줄을 한 형편임을 아는지 야옹이는 검둥이를 무시하는 듯 아주 여유 있게 제 볼일을 보고 사라지곤 했다. 이런 검둥이를 키우기 귀찮다고 어찌 쉽게 팔아버릴 수 있을까. 수명사할 때까지 같이 살아보자고 한 검둥이였다.
작년 모내기가 막 시작되던 늦은 봄날이었다. 그런대로 깨끗함을 유지하던 문 앞 툇마루에 누가 묽은 흙 방울을 군데군데 떨어뜨려놓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 그런 흙물로 마루가 어지럽혀 졌다. 몇 며칠 이런 꼴을 당하게 되니 짜증이 나기도 하여 왜 이럴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루 벽에서 지붕과 맞닿은 상단에 손바닥만 한 틈새가 있는데 이곳 아래로 지푸라기가 늘어뜨려져 있음을 발견했다. 가만히 주시해 보니 범인은 다름 아닌 할미새였다. 할미새 암수가 교대로 부산히 들락이며 그 곳에 집을 짓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서 살펴보는 것을 눈치 챈 새 부부는 마당 빨랫줄에 앉아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안절부절 했다. 자기의 둥지를 해코지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멀리 가지 못하고 내 쪽을 바라보며 짖었다. 이 모습을 보고난 후 나는 쉽게 그 집을 헐어버릴 수가 없었다. 농사가 바쁜 늦은 봄, 어느 틈에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한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야옹이었다. 야옹이가 새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높은 위치여선지 야옹이가 그곳 까지는 건들지 못했다. 철 지나자 할미새 부부는 새끼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떠났고 그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나는 마루 청소를 핑계로 어쩔 수 없이 할미새 집을 완전 철거하고 그 틈새를 나무판으로 막아버렸다.
올해 할미새가 다시 돌아와 제 집이 없어졌음을 알고는 새로 터를 정해 지은 집이 고추건조기 상단 빈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불행이도 야옹이가 능히 올라갈만한 높이였다. 야옹이는 할미새 집의 알부터 노렸다. 자기가 텃 주인 마당에 겁 없이 들어와 있는 야옹이의 이런 꼴을 볼 수 없음인지 검둥이는 또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으르렁 댔다. 할미새 부부도 야옹이의 자기 집 침범 위험을 인지하고 건조기와 빨래 줄을 날아 오가며 입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하루 아침에 주인 할머니로부터 버림 받은 야옹이, 이른 봄에 새끼 네 마리를 영문도 모르는 채 전부 떠나보내야 했던 검둥이, 비록 무허가였지만 애써 지은 집을 몽땅 헐려버린 할미새 부부. 슬픈 삶 한 토막씩 다 가지고 있는 이들의 쓰라린 세상사는 애처로웠다. 그러므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삼각 불화를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해야할 위치에 내가 있음을 자각했다. 나아가 이들을 돌려 세우고 마당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중차대한 책임마저 통감해야 했다. 지혜를 지녔다 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들을 잘 말려야만 했었다.
2017.11.10.
농부, 그 깊은 눈을 가진 사람
찜통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나 살을 에이는 한파에도 논밭을 바라보며 내일의 농사를 설계하는 굳센 사람이 있다. 움켰다 폈다 했음을 헤아리기가 전혀 불가능한 손가락은 꺾쇠같이 강하며 손등은 거북등 모양 투박하다. 피부의 단단함이란 왠만한 가시에 긁혀도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질겨졌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옹이로 불거져 반지를 끼기가 어려워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손 내밀기를 머뭇거리거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몽돌처럼 닳아 지문을 남길 수 없을 정도의 매끌매끌한 손바닥이지만 마주 잡으면 온천 같은 따뜻함을 전해준다. 발의 굳은살은 고목의 껍질 같아도 태풍을 가르며 내딛는 다리는 말뚝 같이 튼튼하고 견고하다. 일광에 그을린 얼굴은 청동색이 되었어도 눈빛은 흙처럼 짙고 깊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노을이 하루를 포옹하듯 삶의 어떤 애환도 곰삭히는 넉넉함을 지닌 그 사람이다.
천성적으로 하늘을 조금도 원망치 않으며 인고의 나날을 숙명처럼 지니고 온 사람. 고된 하루하루를 몸의 일부인 것처럼 등에 지고 묵묵히 견디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도 사람이기에 버거운 농사로 가끔 몸 져 누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먼동이 트는 시각이면 억지로라도 일어나 아버지 같이 든든한 산과 마주하여 심호흡을 할 때 그게 약이 되어 신열을 내리게 했다. 고추장 한 종지 짠지 한 접시 그리고 멸치와 배추를 넣은 된장국으로 대하는 밥상이지만 항상 감사함으로 달게 넘겼다.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꿀맛같은 식단, 단지 이런 것만으로도 맑은 피와 큰 탈 없는 건강을 지금껏 유지해 왔다.
겨우내 쉬고 있던 경운기와 함께 늦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는 이른 봄날 덜 녹은 돌밭에 나가 힘차게 땅을 갈았다. 흙 뒤집기를 마친 후 힘겨워 하던 경운기는 잠시 쉬게 하고 괭이로 정성껏 이랑을 낮게 고른 다음 소중하게 씨앗을 묻었다. 변덕 심한 날씨로 인한 냉해를 적이 염려하며 토끼잠 자기를 연초부터 시작했다. 순조로운 기후가 되기를 바라며 한 해 농사는 이렇게 또 막이 올랐다. 온 나라가 봄꽃놀이 축제와 상춘행락의 무리로 물결을 이룬다는 뉴스가 분분했지만 외출이라곤 읍내 목욕탕과 이발소에 갔다 오는 것이 다였다. 그렇다고 흙에 묻혀 사는 처지를 하루 저녁이라도 한탄했다거나 일순간이라도 비관하지 않았다.
장마를 동반한 세찬 바람이 애써 가꾸는 농작물을 마구잡이로 공격해도 굴하기는커녕 뚝심으로 맞받아치며 살아왔다. 걷잡을 수 없는 장대비를 곡식과 함께 고스란히 맞으며 든든한 보호자의 자세로서 그 곁을 굳건히 지켰다. 쓰러지면 세우고 숫하게 발생하는 해충을 퇴치하며 무수히 돋는 잡초를 제거하면서 무더운 여름을 이겨냈다. 흥건히 젖은 옷을 벗어 쥐어짜면 땀 물이 주르르 세탁수 같이 흘러내렸고 흙먼지로 온통 범벅이 된 목덜미였다. 그러나 웃음을 잃지 않은 그는 미세하게 산들거리며 다가서는 바람으로 가을이 옴을 문득 감지했다.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화가 신선한 꽃밭을 꾸미는 산기슭이 커다란 정원이 되어주었다. 주먹만한 주황색 감이 보란 듯 알몸을 드러내고 달덩이 닮은 배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올랐다. 때를 같이하며 머리를 숙이는 벼를 바라보며 농부는 새삼스러운 감격에 젖었다. 계절은 잠시나마 햇나락으로 뿌듯한 보람을 그에게 선사했다. 낡았어도 애지중지하는 목장갑을 벗고 벼에 다가가 알찬 이삭을 맨손바닥으로 살짝 받쳐 들었다. 이 한 톨 맺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가슴 졸인 날들이 불시에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천근만근 같은 어제의 피곤을 이런 가을날 아침이면 까맣게 잊어버렸다. 모로 누운 콩대를 바로잡기 위해 끊어질 듯 결리는 허리를 지체 없이 꾸부리는 그는 자기를 거부하지 않은 땅이 밉기는커녕 고맙기만 했다. 색 바랜 작업모를 이마 위로 슬쩍 올리고 누렇게 변해가는 들녘을 저 멀리 조망했다. 추수할 걱정과 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를 잘 처분해야할 일이 다소 머리를 무겁게 했지만 찾아 올 손자손녀를 그리며 알밤을 줍고 감을 깎아 걸었다. 김장을 마친 후 입동 전에 마늘을 놓아야 할 준비를 위해 그는 다시 또 땅과 거름을 곰곰이 살폈다.
한 해 한 해를 고되게 넘기는 동안 어언 듯 희어지는 머리칼을 거울 속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는 노쇠가 아니라 순응이라고 여기며 관조하는 성품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칠어진 살갗은 고목을 따라 가는 길이라 애써 해석하면서 땅과 함께 우직하게 살아온 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간혹 동네 행사에 참석할 때 차려 입은 행색이 좀 남루한 것 같아 어색했지만 이는 초라함이 아니라 초월의 문턱을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번번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땅은 속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기에 농심은 천심이라는 성현의 말을 상기하며 눈 감는 그날까지 손발에 흙 묻히기를 꺼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거듭했다. 땅에서 태어나 땅과 함께 살다가 땅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여한 없이 바라는 사람. 이렇듯 생애의 맨 나중에 수도자의 마음가짐과 달관의 그림자를 지니게 되는 사람이 농부가 아니라 한다면 달리 또 누구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017.12.05.
생명에 대한 예의
수명이 다 된 반려견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기 힘들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다버렸다 했다. 안쓰러워 그랬다는 것은 얄팍한 면피성 발언이며 말이 궁하여 둘러 댄 견주의 핑계에 불과하다. 긴 세월 동거동락 했다면 쌓인 정이 얼마인가. 가족처럼 함께 살았던 가축이 병들어 아파할 때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잘 보살피는 가운데 마지막을 맞게 했어야 마땅하다. 구제된 반려견은 병원에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눈빛을 머금은 채 가늘게 이어가던 숨을 마감했다.
깨진 화분과 함께 담벼락 밑에 내동댕이쳐졌던 선인장이 가뭄 속에서 한 달이 지났는데도 시들지 않았다. 흙에 겨우 연결되어 있은 하얀 실뿌리 한 가닥. 그 뿌리는 흙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속으로 조금씩 파고들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머리끝 부분에 맺혔던 아주 작은 봉오리가 벌어 꽃 까지 피워냈다. 살아있음을 보이려고 세상으로 보내는 가냘픈 신호였을까.
삶의 방식은 달라도 생존의 애착은 어느 생물체나 위대하다. 이 땅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동시대에 공존한다. 인간만큼은 못하지만 호흡을 하는 동안 동식물의 생성소멸의 원리는 대동소이하다. 모두 다 혈액과 수액의 순환으로 활력과 체력을 유지하며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영위해 감이 그렇다. 이렇듯 생명체 그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세상에 생겨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필요성과 절대성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고유한 개성을 다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조물주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무익한 것은 창조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계획성과 목적성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의 균등함에 따른 그 존귀함이란 어디에 비할 데가 없는 것이다. 하기에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생명은 등가라는 원리적 차원의 동일선상에서 항상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생명 균등사상은 지상 최고의 정점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숭고한 가치관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먼저 앞세워야 할 사항은 모든 생명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우선 되어야 한다. 명약관화한 사실이지만 생명은 단 한번 주어진 유일무이한 선물이다. 일정한 값을 치르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대가없이 주어진 특별한 은혜이며 양도불가의 우주적 존재다. 생명은 어떠한 경우라도 비웃음이나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신묘한 운명으로 유일한 모습을 지니며 세상에 온 나의 생명이 이러하듯 타자의 생명 또한 무한히 귀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의 생살여탈권은 절대로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경건의 대상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존중의 당위성은 그 어떤 관념이나 개념 이념보다 가장 최상위의 도덕적 윤리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 부여한 불가침의 자유가 나오고 권리가 생기며 의무가 수반되는 것이다. 생명존중을 벗어난 자유는 방종이며 무질서고 잔학이다. 생명존중을 망각한 정의는 위장이고 위선이며 횡포인 동시에 독선이다. 생명존중을 무시한 의무이행 촉구의 궁극은 굴종과 속박 노예화일 뿐이다. 생명은 귀천이 없는 것이며 이보다 더 소중하다거나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뭇 생명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는 거부할 수 없는 의무로 지켜져야 한다.
2018.2.05.
6부 : 시설詩說 : 시 같은 소설
셋방살이
신문지로 싼 콩나물 한 봉지를 구멍가게에서 받아든 정아의 작은 얼굴엔 원인모를 기쁨이 살짝 핀다. 갓 내다 놓아 따끈따끈한 두부 한 모도 사며 배고픔에 냉큼 베어 먹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듯 꾹 참는다.
엄마는 건축 현장 공사판에 일 나가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몇 년째 누워 있는 아빠는 늘 울고 있다. 단돈 오백 원이 없어 사탕도 사먹지 못하는 정아는 과자가게 앞을 멈칫멈칫 서성이다가 시간이 늦었음에 깜짝 놀라 돌아선다. 그 틈에 콩나물과 두부가 조금 말라버렸다.
황급히 돌아 온 부엌 냄비에선 끓던 물이 반이나 졸아들었다. 그래도 아빠 엄마가 있음에 기분 좋아라 하면서 정아는 콩나물과 두부를 잘라 한꺼번에 냄비에 후다닥 넣고 콜라 같은 간장을 붓는다. 된장까지 살 돈은 정아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매번 아침을 거르고 현장에 나가 일하는 순이. 허기로 움푹 파이든 배를 채우는 점심밥이 꿀맛처럼 달다. 부르튼 입술 너머로 밑도 끝도 없이 허겁지겁 두 그릇 째의 밥을 끌어넣으면서 눈물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꼭꼭 씹는다. 아빠와 동생을 위해 점심을 적게 먹는 정아 생각에 억새풀같이 가늘어진 목이 호미처럼 자꾸만 꺾인다.
간식으로 나온 퍽퍽한 빵과 차가운 우유가 식귀食鬼같이 목구멍을 유혹한다. 훔친 물건처럼 누가 볼세라 낡은 작업복 바지에 그것을 슬그머니 감추는 꺾쇠 같은 손가락이 싸리나무 가지처럼 떨린다. 칼칼한 입 속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냉수 한 잔을 소화제같이 죽 들이키면서 깨어진 유리창 너머로 잠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소여물가리의 짚북데기 속일망정 낮잠이라도 한번 후련하게 자봤으면 좋겠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감자밭 매던 그때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보다도 더 생각난다. 신혼 적의 봉식이 품이 꿈속처럼 그립다.
작업장에서 금방 돌아와 얼굴을 미처 씻지 않은 순이의 머리칼이 말라 시든 쑥부쟁이 꽃같이 부스스 하다. 그 위로 희뿌연 시멘트와 흙가루가 늦가을 빈 방앗간에 뿌려져 있는 밀가루처럼 을씨년스럽게 달라붙어 서걱인다.
여섯 평 남짓 셋방의 희미한 알전구 아래. 순이가 먹지 않고 품고 온 간식 빵 두개와 우유 두 봉을 두 피붙이가 강아지처럼 달게 나누어 먹는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아이들같이 헤살 대며 베물고 있다.
부모 보다 더 바라보기 힘든 처자식을 옆에 놓고 윗목에 돌아누워 죽은 듯 눈을 꼭 감고 봉식이는 피울음을 삭인다. 그러다가 한숨을 흘리며 힘주어 아내에게로 기어온다. 북어 거죽같이 거칠어지고 노가리 꼬리처럼 갈라진 순이의 손을 어머니 손보다 더 뜨겁게 만지작거린다. “여보 미안해요.”
2007.11.29.
겨울이야기
싸리비로 마구 흩뿌리듯 갑자기 퍼붓는 강설은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삽시간에 하얀 너울이 쫙 깔리기 시작하는 사방 천지로 호수 같은 고요마저 낮게 스며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기만한 작은 도시인데 폭설을 맞는 거리엔 인적조차 일찍 뚝 끊어졌고 택시들만 간간이 오고 갔다. 지인의 생일 저녁식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1시간 정도 산길을 돌아 황지1)에 도착한 날씨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도로변 빈 곳에 조심조심 주차시키고 어깨로 날아와 붙는 눈송이를 탁탁 털며 간판을 살폈다.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이 비쳐 나오는 꽃 가게를 발견하곤 그 집으로 다가가 안쪽으로 문을 밀었다. 첫 대면인데도 반가운 눈짓으로 어디에 쓰일 것인지를 묻는 L녀의 표정은 봄꽃같이 수줍어하면서도 맑은 끼가 감돌았다. 생일축하 꽃이라 대답하고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추우실텐데 포장할 동안 목이라도 조금 녹이라며 녹차를 먼저 내 주었다. 곱게 쓸어 넘긴 머리칼, 하얀 피부, 귀여운 자태의 L녀 였다. 싸늘한 밖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가 따뜻한 실내 온기와 함께 외투 깃에 와 닿았다.
그 녀가 꽃다발을 만드는 동안 구공탄 난로 불을 쪼이며 실내를 살펴보다가 무어라고 조잘대는 잉꼬 한 쌍을 키우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기들만의 말을 주고받다 말고 부리를 쪼아주며 서로의 털을 다듬어주는 몸짓이 앙증맞다 못해 부러웠다. 그들이 파닥대는 조롱 속을 한 참 보다가 문득 나의 작품 *불통不通을 떠올렸다.
“선생님, 이정도면 되겠습니까? 정성껏 해 봤는데…” 꽃 재배와는 거리가 먼 고장이라 이 정도로 넉넉하고 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꽃 색깔의 배합 또한 마음에 쏙 들었다. “선생님, 이것은 선생님 방에 꽂아두고 보세요.” 주문한 생일 꽃다발과 함께 잘 다듬은 작은 꽃묶음 하나를 더 내밀었다. 뜻밖이라 의아해 하며 “이러면 손핼텐데요?” L녀의 눈 표정을 살피며 내가 말했다. “이렇게 눈 내리는데 찾아오신 선생님께 드리는 마음의 표십니다. 그리고 꽃이 눈을 맞으면 추울 테니까 큰 비닐 백으로 한 번 더 싸 드릴께요.” 하얀 치아를 조금 드러내며 살짝 웃는 입가론 섬세한 여정女情이 잔잔한 물 번짐으로 배어 나왔다. 그칠 줄 모르며 눈이 퍼붓는 거리와는 달리 내 손엔 물색 고운 꽃 두 다발이 들려졌다. 내가 L녀를 만난 것은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이렇게 눈 내리는 날이었다.
그 후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 곳 문인협회로부터 문학행사 초청강사로 와 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2-30분 정도의 축하 강의를 위한 원고를 꼬박 이틀을 소비하며 어느 정도 다듬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행사였기에 어둠에 싸인 건물 2층 강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단 현수막 좌우에 놓을 축하화환의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몹시 놀라워했다. “어머 선생님,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꽃집 주인 L녀 였다. “아-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앉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며 나는 반갑다는 반응을 보냈다. “선생님은 오늘 우리행사에 오신 분입니다.” B문협 회장이 나 대신 그녀에게 얼른 대답했다. “그럼 저도 이따가 와서 들을께요. 그래도 되지요?” 얇은 화장을 한 듯 윤기 머금은 피부가 검정색 퀼팅 외투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순서가 되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말을 다 마치고 강단을 내려섰을 때 청중 속에 있던 L녀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투명 셀루로즈 종이로 싼 붉은 장미 여섯 송이 다발을 들고 나와 나를 축하해 주었다.
두껍게 쌓였던 눈이 어느 정도 녹은 후로는 별로 춥지 않은 겨울 날씨가 이어졌다. 그런데 요 며칠째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다시 또 밀어닥쳤다. 유리판같이 말갛게 얼어버린 가곡천 얼음은 수변을 덮다말고 자갈밭까지 밀치고 올라왔다. 산 위의 텅 빈 하늘도 추위에 질린 듯 유난이 새파랬다. 울타리 밖에 줄 곳 서서 겨울을 이고 있는 향나무를 창문으로 바라보다가 화병에 눈을 멈추었다. 장작 지핀 방안 책상 위에는 아직도 싱싱함을 유지하는 여섯 송이 장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꽃잎에 앉은 먼지를 티슈로 조심히 닦다가 문득 휴대폰을 열고 문자를 눌렀다. “춥지요? 그러나 마음만은 얼지 말고 난로 위의 주전자 물처럼 따뜻함을 지니고 있기를 바랍니다.” 커피 잔을 놓고 가수 정00의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를 컴퓨터에서 다운 받아 볼륨을 낮추어 틀었다. 을씨년스러운 농가 마당으로 소프라노의 곱고 긴 음률이 퍼져갔다. “선생님, 지난번 강의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태백에 오시면 자주 들려주세요. 오늘도 옷차림을 두툼히 하시고요. 감사합니다.” 귓속말로 전하려는 듯 간단한 답신이 험준한 태백령을 넘어 와 내 휴대폰화면에 떴다.
꿈둥지 어린이집 동시 강의가 있어 동활 계곡2)을 따라 산 돌고 고개 넘으며 황지를 향해 갔다. 구사터널3)을 지나자 주황색 겨울 노을이 먼 육백산4) 산정을 물들이며 흐르고 있었다. 백문동 푸른 깃이 무너져 내린 산기슭을 포근히 감싸 주는 길옆에 천천히 차를 세우고 문자를 보냈다. “오후 강의가 있어 지금 태백 가는 길입니다. 마치고 잠간 들릴까요?” *미인폭포 물이 흘러 개천을 이루며 지나가는 도계5)가 저 아래로 동화마을 같이 멀리 보였다. “예 선생님, 오늘 일 마치시고 가게에 들리세요. 기다릴께요.”라는 답신문자가 이내 들어왔다.
어두워진 소도시의 노변 한 모퉁이에 주차한 후 ‘에덴 플라워’ 꽃집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전과 같은 조용한 웃음으로 L녀가 일어서 다가오며 맞이했다. 훈훈한 실내에서 환하게 피어있는 생화들을 보자 머리가 맑아지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커피 마시고 나서 고구마 한 개 구워 드릴께요. 그리고 저녁 먹으러 가요.” “나 때문에 가게 문을 일찍 닫으면 안 되는데…” “아니요. 여직원에게 좀 나와 달라고 말해 뒀어요. 괜찮아요 선생님.”
하얀 털외투를 입고 나서는 L녀를 따라 카페를 겸하고 있는 숲 속의 한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옮겨간 카페의 폭신한 의자에 편한 자세로 마주 앉은 후 최근 모 문학지에 실린 나의 작품을 펼쳐 건넸다. 작품을 다 읽은 후 L녀는 고개를 돌려 네온 불 반짝이는 창밖을 보며 한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얇고 작은 입술을 열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잊기보다 더/ 힘들게 기다림 하는 너의 끝은 / 파도를 넘어야 있음인지…<등대라는 시 일부> 어떻게 이런 글이 나와요?” 우수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웨이터가 내온 따스한 차를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셨다.
실내등을 켠 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울로 가는 상행 밤 열차의 바퀴소리가 건너편 태백역 플랫폼에 긴 여운을 남기다가 사라졌다. 하리스 알랙시우6)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카페 사운드 트랙으로 흐느끼듯 가늘게 울려나왔다. 거칠기만 했던 이 곳 탄전지대에 30년 전 어렵게 발을 내렸다고 말했던 L녀의 눈썹가로 알 수 없는 그늘이 구름같이 스치고 있음이 보였다.
태백의 겨울밤 차가운 칼바람은 툰드라의 처마 끝처럼 나뭇가지를 울렸다. 알싸한 밤공기를 마시며 집을 향해 천천히 등을 돌리는 L녀를 불러 세웠다. 되돌아서는 그녀의 실팍한 어깨를 포근히 감싸며 마주 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별나라의 이야기 같은 함박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불통不通
딱새가 자기 말을
한바가지나 쏟아놓는다
수북이 떨어져도
줍지 못할 소리들
한동안 지저귀다가
통하지 않음을 알아챈 듯
솔잎으로 쓸어 담고 숲으로 사라진다
건낸 말이 무엇인지
못 알아들은 내가 미안하다
날아간 데를 바라보며
나무처럼 서 있다
― 제5시집 붉은 입술을 샘에 씻고 23쪽에 실린 시
201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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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원도 태백시 황지黃池
2) 삼척시 가곡면 동활리에 있는 계곡으로 경치가 절경임
3) 강원도 삼척시 신리와 태백시 통리를 이어주는 길이 910미터의 터널
4)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 높이 솟은 산
5) 삼척시 도계읍, 지금은 한산해 졌지만 한 때 석탄산업의 큰 도시로
영동선이 지난다.
6) 그리스의 국민 여가수
7부 : 기독여성신문 논설
태극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다
― 호국의 달에 부쳐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는 태극기다. 먼저 국호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이 나라 대한은 ‘국민의 국가’라는 의미이다. 더 이상 임금의 국가도 아니고 대통령 한 사람의 국가도 아닌 것이며 개개인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나라라는 뜻이다. 즉 국민이 주인인 민주의 나라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국기는 태극기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세계가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존재를 당당히 내다 거는 표징인 것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라가 정한 국경일엔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은 물론 민족의 뿌리와 우리가 지닌 역사의 숭고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날로 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에 대한 존엄성과 고귀성에 대한 국민의 생각은 아주 저조해졌다. 눈비 오는 날에도 게양대에서 볼품없이 젖고 있는가 하면, 거리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태극기가 있어도 이것을 주워 잘 처리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기에 대한 국민의 예가 이처럼 점점 희박해져 버린 지 오래다. 국경일이 휴일로 정해져 있는 관계로 출근 하지 않는다. 이런 휴일을 맞이하여 야유회나 여행을 떠나기에 급급한 나머지 태극기를 잘 게양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도시나 농어촌 모두가 그렇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경계와 각성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치욕의 근세사를 돌아본다. 풍찬노숙의 이국땅에 내몰아져 있으면서도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내 던졌던 애국지사들. 애족충정의 선조들이 그 얼마나 마음껏 흔들어 보고 싶어 했던 태극기였는가. 당당하게 태극기를 내걸 수 있는 그날을 얼마나 안타깝게 기다렸던 나날이었었나. 오죽했으면 옷가슴 깊숙히에 태극기를 숨겨 넣고 살았던 선열들이 아니었든가. 멀리 떨어진 우즈베키스탄의 황량한 불모지에 강제 이주로 끌려갔던 언필칭 고려인[대한민국 동포] 후손 어느 사람은 아직도 태극기를 선조가 물려 준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했다. 그런데 마음껏 자랑스럽게 휘둘러도 아무 말할 사람 없는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 몇몇 단체와 몇 학교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그려보라고 했다 한다. 제대로 그려낸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 했다는 전언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를 지속하면서 세계열강 중에 선진국에 진입한 국가의 국민이라며 어깨에 계속 힘을 줄 수 있을까, 부끄러움이 앞섰다. 다분히 외국에 나간 관광단체가 흔들어 대는 깃발일 뿐, 혹은 운동회 때 흥을 돋우기 위해 마구 내젖는 깃발쯤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 현실이다. 태극기는 축구장에서나 혹은 스포츠 게임할 때만 흔들며 소리치는 그런 응원도구가 아니다. 제나라 국기를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온전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일정한 영토를 보유하며 거기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정통성을 보유한 주권을 가진 집단이어야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인 것이다. 이렇게 3요소가 구성된 후에 바로 정해지는 것이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다. 국토나 국민 수가 적은 민족일수록 국가관이나 민족관이 두렷해할 뿐만 아니라 확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교육과 민족교육을 차세대에 확실하게 실시함으로써 우리민족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더욱 명확히 알게 해야 한다. 역사의식이 희박한 민족이나 나라는 타국가나 타민족에게 소극적 자세는 물론 만사에 천대받기가 십상이다. 이는 세계역사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증명하고 있다. 민족적 수치는 밖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알고 보면 내부의 단결하지 못한 연유로부터 자주 시작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첫 출발로 태극기에 대한 존경심을 항상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진보나 보수의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변치 못할 대한민국의 대 당위다.
지난 6일은 62회 현충일이었고 며칠 후면 6.25 전쟁 발발 67주년이 된다. 갖가지 행사에 앞서 하늘 높이 게양되어 펄럭이는 태극기를 볼 때 마다 뜨거운 민족애와 국가관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또 다시 다짐해야 한다. 6.25의 지옥 같은 전투에서 총열에 태극기를 달고 적진을 향하여 맹호같이 돌격하던 순국병사의 사진이 두고두고 잊어지지 않는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의 일이다. 축구 3.4위전을 일본과 치르고 이겼을 때 한 축구선수는 태극기가 그려진 문구를 들고 라운드를 누볐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의 역사와 의사를 세계에 전하려 했던 강열한 민족정신에 온 겨레의 가슴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태극기는 단순한 깃발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2017.6.27 자 신문
존재의 감사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을 생각하면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 지구별이 인간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거나 인간들을 버리고 날아가 버린 적이 있는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사계절이 있으며 온갖 생물이 자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지구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있다. 그 나라들 어디에서나 산과 강과 숲 등 창조주의 자연세계가 아름답게 존재하니 경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인류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든지 시절을 따라 맛있는 열매를 먹을 수 있듯 자연의 혜택을 마음 것 누리고 있지 않은가. 모두 하나님의 명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련한 자들은 신이 있는가 없는가를 계산하다가 세월을 다 허비한다. 쓸데없는 의심과 불안으로 신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짐승처럼 육신으로만 살아있는 자들이 하는 짓으로 영적으로는 실상 죽은 자의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속히 깨달아야한다. 이 결과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을 파악하고 확고한 믿음 위에 서야 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과 기대의 기쁨으로 감사가 항상 넘쳐야 할 것이다. 인류가 편리와 안락의 문명사회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실상 행복을 저 멀리 차버렸다. 따라서 지구라는 별엔 사랑을 상실한 황폐한 인간들로 가득 차게 돼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루 빨리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힐링의 보약과 감사의 묘약을 찾아 적시적기에 복용해야 할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지도자나 지배층이 먼저 조물주에 대한 감사를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가정의 자녀들과 가족의 일가친척들이 부모의 모습과 어른의 자세에서 배울 점이 있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앞서 감사의 목회자와 감사의 성도들로 넘쳐나야 한다. 감사는 언제나 힘을 주며 희망을 만들고 사랑이 피어나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격할 일인지 모른다. 이러할진데 무엇이 더 부러워 신세를 한탄하며 무엇이 그렇게 부족하여 처지를 원망하는가. 감사의 조건을 따진다면 나에게 주어진 흔한 것 어느 것 하나라도 천하게 여길 만한 것이라곤 없다. 만약 공기를 없애버린다면 단 일 분도 살 수 없다. 우리 몸의 칠십 퍼센트가 물인데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금방 시들고 만다. 햇빛을 거두어 버린 후 남게 되는 암흑천지에 살아남을 자 누구겠는가. 이러한 선물이 지구라는 별 어디에나 있게 하고 마음 것 취하게 하신 이 것 하나로도 얼마나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하고 믿으며 무조건 감사할 일이다. 불평은 사탄이 주는 유혹의 세균이고 감사는 천사가 공급하는 하늘의 명약이다. 크든 작든 그 어떤 사안에도 감사하면 범사가 다 잘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쉬지말고 기도하며 매일매일 감사하자. 그리하면 삼백육십오일 해피데이를 이루리라. 어려운 상황일수록 억지로라도 감사에 감사를 넘치게 하자. 한 해의 농사로 인한 소출보다도 영원한 구원에 들었다는 그 확신이 들 때 오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감사의 인생을 살도록 하자.
2017.10.16자 신문
추수감사절의 실질적 의미
기념일이나 명절은 그 뜻을 쫓아 진심어린 마음과 몸가짐으로 경건하게 맞이하고 지내야 한다. 진정성 없이 매년 하는 정기행사인 양 형식적으로나 타성적인 모습이어서는 원래의 뜻에 크게 어긋난다. 속은 빈 채 겉치레로만 하는 행사라면 차라리 안하는 것만도 못하다.
11월엔 교회마다 추수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추수란 가을에 일 년 내내 가꾸어 온 농작물의 익은 곡식을 곡간에 들이는 일을 말한다. 농사를 해보면 온통 모두가 감사로 가득 참을 알 수가 있다. 농부의 노력은 불과 이십여 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농사엔 기후가 팔십 퍼센트를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기후란 하나님의 섭리 중에 하나라고 여긴다. 자연을 운영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햇볕과 비와 바람과 기온,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조화로 형성되고 작물은 이러한 여건에 따라 결실을 맺는다. 농사에 알맞은 기후가 이어지면 병충해도 적게 입으며 알곡도 실해져서 풍년이 된다. 그 반대면 모든 것이 흉작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풍․흉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풍년이면 다음해에도 그렇게 해 주심을 간구하며, 흉년이라면 다음해엔 풍년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사절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농사에만 추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위한 수입원이 워낙 다양해진 지금에 와서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정이 화목함을, 자녀가 잘 성장함을, 건강을 유지함을, 회사에 잘 다녔음을, 경영하는 기업이 잘 되고 있는 것 등도 동일한 의미의 추수인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아니하다 해도 말씀을 굳건히 따를 때 하나님은 원상회복과 나아가 더 큰 열매의 축복을 주실 것으로 믿어야 한다. 추수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께 진정한 충심을 드린다면 하나님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벗어나 헛되이 외형적으로, 아니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추수감사예배를 드린다면 이것은 위장이며 자신과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추수감사예배는 소를 잡고 돼지고기를 맛보며 음식이나 먹는 그런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상기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이 몇몇 더 있음을 함께 언급한다.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하며 가정에 감사해야 한다. 이 말은 더할나위없이 당연히 해야 할 사회적 기본 질서의 원천이다. 국가나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가 가정이며 질서를 이루게 하는 윤리적, 도덕적인 출발이 부모님과 가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내가 속해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알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혼자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각자가 각 분야에서 일하며 서로가 필요한 재화나 필수불가결한 요건을 상호 메꿔주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며 감사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에 대해서도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크든 작든 간에 국가가 있어야 외세에 조금도 홀대를 받지 아니하며 존재성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기에 자주민족의 국민으로 살아감을 늘 고마워해야 한다. 나라가 없는 족속은 유랑민족에 불과한 것이며 타민족으로부터 처참한 대우를 당해도 발 벗고 나서 보호하고 옹호해 줄 울타리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실상부한 국가가 우리에게 있음을 추수감사절을 맞아 빼놓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끝으로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애써야 한다. 교회에서도 성도 외에 또 달리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하며 부모님의 자녀로써 가정의 일원으로써의 본분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또 국민된 입장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행하며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이 힘들다고 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할 것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실행한다면 그리 힘든 것만은 절대 아니다. 대내외적으로 정말 어려운 현실에 지금 우리가 처해있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자의 태도에서 벗어나 바로 서는 성도와 국민이 되어야 한다. 2017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성도와 교회는 다시금 자세를 다잡고 진정한 마음으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옳을 것이다.
2017.11.21자 신문
아침마다 새롭게
하루를 놓고 보아도 확실히 사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아침이 오고 낮이 되며 저녁을 맞이하는가 하면 곧 밤이 이른다. 일 년 네 계절을 압축한 일정이 하루의 시간이다. 우리에게 하루가 있다는 것은 늘 새롭게 아침을 맞이하라는 뜻이다. 하루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된다. 그래서 일 년은 아침이 삼백육십다섯 개가 된다. 그 의미를 되씹어 보면 뜻이 깊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미 저질러진 허물은 감출 수 없고 또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추한 것을 되돌아보면 전부 못되게만 기억된다. 잃은 고기는 더 크게 여겨져 아쉬울 뿐이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지난 일은 흘러내린 껍질에 불과하다. 땅에 떨어진 껍질은 아무 쓸모가 없다. 버릴 것은 버리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며 새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묵은 것에 억매이면 진정한 새해를 맞이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모습인 것이며 이미 빛나고 선명한 아우라가 영혼을 감싸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사가 모여 역사가 된다. 물론 각자의 선한 이익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 앞서서 공익을 항상 앞에 두어야 한다. 내가 없으면 나라도 없고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것을 희생해야 할 경우의 일이 있다. 이 땅은 누구에게 주어진 선물인가. 나만의 땅이 아니다. 조상이 가꾸며 살았고 모두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곳이며 앞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며 생존할 땅이다. 비록 굴곡지고 상처가 많은 역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당대에 사는 우리는 선대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한다는 굳센 각오로 새로운 앞날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는 선조들의 빛나는 업적도 많이 가지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둘이 있다. 온 국민이 애써 준비하였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펼쳐진다. 88년 서울하계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치며 국가적 위상을 더 높였던 거대한 족적을 가지고 있다. 민족 제2의 도약과 번영을 위하는 길이라면 너와 내가 있을 수 없다. 동계올림픽을 위하여 투입된 엄청난 예산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성실히 납부한 국민 전체의 세금이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태 6:21, 누가 12:34]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뜻이 전적으로 이것만은 아니겠지만 지상의 것으로 해석해 본다 할 때 민족의 마음이 평창에 모아진 것이다. 세계적인 행사에 즈음하여 우리는 옛것을 벗어버리는 진정하고도 새로운 선진국 국민으로써 국격을 다시 한 번 멋지게 격상시켜야 한다.
또 하나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다. 훌륭한 결과보다는 더 많은 비리와 종횡무진의 추한 몰골이 선거에 의해서 얼룩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소득 삼만불 시대로 진입한 대한민국은 민족발전의 가장 기본적이고 튼튼한 기초가 되는 선거를 잡음없이 잘 치뤄내야 한다. 국민의 귀중한 한 표로 선출되는 사회지도자의 마음가짐도 이제 전날의 작태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워져야 한다. 정직하고도 차원 높은 의식구조로 변화되는 각별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케케묵은 사회적 갈등과 아집을 과감히 떨치고 이해와 포용과 화합의 길로 가야한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리라[마가 2:22]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 술은 첫 사랑 같은 맑은 정신의 신선한 것이고 새 부대는 깨끗한 마음의 자루다. 우리 기독교인은 1월 1일에 맞는 그날만 새해 첫날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오는 아침을 새해로 여기고 매일을 경건히 맞이하는 자세를 가짐이 필요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적으로 또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나와 사회와 국가의 참된 현실과 미래를 위하고 공익을 생각하는 품격 높은 기독교인이 가득해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옷깃을 여미고 자기믿음이 진부를 깨고 나오는 늘 새로운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실행하는 산 믿음과 올바른 신념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2018.1.23자 신문
엠마오 길의 동행
부활이란 재생과는 다르다. 속성을 지닌 채 남아 있던 것을 가공하여 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 소멸되었다가 다시 나는 것이 부활이다. 이렇듯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부활이란 인간의 의지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 권역에 속한다. 이 선언적 언약과 실행을 보고자 하는 것이 최고 믿음의 소망이고 불멸신앙의 정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 회로를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의도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운영될 때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어떤 물건이 고장나면 수리하여 사용하는 도구와 같이 우리도 그렇다. 그러나 끝내는 폐차장으로 가는 자동차와 달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주님 안에 영원히 거한다.
즉 어떤 경우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애착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음에 따라[요한복음 14장 6절]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이 직접 그 말씀을 입증해 보이셨다. 부활절을 맞이하며 이 전무후무한 사역의 절정을 성도는 굳게 믿어야할 것이다.
2018.3.28자 신문 부활절 메시지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산다
지극히 기본적인 금언 같지만 그러나 뼈져리게 되새김하며 살아야할 말이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이다. 여기서 수신도 수신이지만 제가가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매우 귀중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는 가정이다. 아버지는 그 가정의 모든 일을 대표한다. 어머니는 내부적인 문제를 총괄하는 깊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정의 필연적 구성원으로 자녀가 있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연결해 보면 그 축소판이 가정인 것이다. 여기서 질서가 생겨나고 윤리가 존재하는 것이며 충심이 싹트는 것이다. 한 가정이 원만하게 유지되려면 위아래 사이에 존중과 존경의 자세가 엄연히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봉건제도하에서도 가정에서의 무조건적 복종과 굴종의 이행만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서 친근함과 사랑과 포옹 단결의 화합을 혈연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가정구성원의 원만한 상호 관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어느 사회나 국가가 잘 되려면 제일 먼저 질서가 서야 하는데 이 질서의 출발이 가정인 것이다. 국민 개개인의 가정이 피폐해지면 나라도 건전치 못하다. 결혼을 하면 곧바로 분가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겨진지 오래다. 이른바 핵가족 물결을 다른 어떤 해결방법이 대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핵가족이지 이러한 세류는 결국 가족과 가정의 붕괴를 재촉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가족관과 사회관, 국가관이 이상하게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국적적인 양상으로 우리의 미풍양속이 어느새 실종 돼버린 상태에 이르렀다. 왜 부모를 돌보아야 되는지, 자녀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전심으로 양육시켜야 하는지, 왜 내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며 힘겹게 희생을 해야 하는지. 가정적 공공적인 것의 정반대인 극도의 개인주의 물결로 인하여 일반적 가치관과 질서의 기초가 되는 윤리관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국민이 지녀야 하는 높은 국가관이 어찌 확고해질 수 있겠는가. 세우고 세우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가르치고 가르쳐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가정교육이다. 이제는 국가가 국민 각 가정의 가정교육을 적극적이고도 대승적으로 지원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따라서 교회도 앞장서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바꾸려 하고 또 바꾸고 있다. 일반 사회적인 현상이 이렇듯 역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마저 비판이나 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가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 확실히 생존하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그리고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지니[골 3:21], 아내들이여 자기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라고 말씀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래야만이 교회가 바로 서고 사회평화가 발전된다는 절대적 언약의 말씀이 먼저 기독교인에게 이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라고 새겨야 한다. 즉 제가齊家하라는 교훈이다.
아무리 위대한 국가에 산다 해도 따뜻한 내 가정이 없다면 무슨 효용이 있겠으며 낙원 같은 사회가 어디에나 펼쳐져 있어도 가정과 국가가 없다면 그 존속 기간이 얼마이겠는가. 온전한 가정이 몇 안 된다면 수십 억의 국민을 보유하고 있다한들 질서 있는 평화를 어떤 국가가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세태가 제아무리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가정 하나하나가 바르게만 선다면 나라가 사는 법이다. 가정을 재건하자고 5월을 가정의 달로 했다. 화려한 옷을 입고 겉치레 행사에만 부지런히 찾아다닌다거나 어디서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멋있고 힘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내가 어떤 기여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선진국의 기독교인이라면 항상 숙고해야함이 마땅할 것이다.
2018.5.23자 신문
에필로그
2017년 12월 30일. 강릉AS병원으로 가면서 빌고 또 빌었다. 초조함과 불안함을 거두게 하시고 정말 힘 솟는 새해가 되게 해 달라고. 그러나 어떤 진단이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이자며 다짐했다. 진찰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우려하던 대로 결국 좋지 않은 판정을 받았다. 라이프 맵life map과 트리트먼트 계획을 의사와 상담하며 좀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 몇 가지 정밀검사를 더해본 후 적극적으로 대치하자는 말을 담담한 심정으로 받았다.
그러면서 단 하나 물어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계실 동안은 어머니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나의 치료는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인지, 또 힘든 농사를 계속해도 되겠는지였을 뿐 그 이상 무엇을 얘기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강릉 정동진 옥계 묵호 삼척을 거치며 가곡의 집으로 오는 길, 내가 살아 온 날들을 간간히 뒤돌아보면서 가장 크게 마음에 걸렸던 것은 어미 없이 사는 미혼인 딸에 대한 걱정이었다.
진단을 받은 후 둘째 날인 2018년 1월 1일 부터였다. 등단하고 나서 틈틈이 써두었던 수필을 모두 끄집어내 겨울 내내 퇴고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분신 같은 시, 수필 등의 작품들이 잘못되면 그냥 버려질 것만 같아 그랬었다. 뿐만 아니라 사정이 여의치 않지만 수필집을 출판해 둔다면 내 방에서는 없어진다 해도 누군가의 서실에 다른 책들과 함께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퇴고를 급히 서두르게도 했다.
처방된 약을 복용하며 매일 밤 수필 다듬기를 거듭하던 어느 날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안식년을 맞은 목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내가 수필집을 준비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문득 출판비가 문제겠구나 하여 염려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분이었기에 나의 형편을 잘 알고 계셨다. 어려운 현재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며칠 후 출판비의 1/3을 산돌선교회의 도움부분과 함께 보내왔다. 고마움에서 잉태된 깊은 숙연감이 나의 생각 전체를 짙게 감쌌다. 선뜻 아무나 결정하고 바로 보내기란 매우 어려운 금전적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퇴고를 다 마치는 동안 모자라는 출판비를 메우기 위하여 조심조심 수소문해 보았지만 바랐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어렵게 겨우 꺼낸 바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 자신에 자괴감이 동반한 민망함만 가득 찼다. 그러던 중 이 권사님이[희망둥지 아동센터장] 강의료 10개월 치를 출판을 위해 선불로 보내 주었다.
여러 방면에서 터놓고 속마음을 주고받으며 근거리에 사는 듯 지내오는 지인이 있다. 이분은 나의 조언에 따라 시집과 자서전을 펴냈던 서울 강서의 지현경 박사[명예]인데 그 며칠 뒤 본 수필집을 위한 지원금을 송금했다.
올해로 50년간, 돈독한 우정의 두께를 더욱 쌓아가는 1968 대학입학동기인 친구가 있다. 잠시 귀국했던 2016년 10월 7일, 탕곡리 나의 농촌 집을 평생 처음 찾아와 하루 밤 꿈같이 묵어가기도 했다. 수 십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생활하고 있는 이 벗의 격려가 이번 출판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조력을 석비에 새긴 것처럼 나는 뚜렷이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89세이신 어머니의 지고한 사랑이 함께 보태져 이 작품들이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음을 뜨거워지는 눈시울로 밝힌다.
겨울을 넘어온 햇살로 봄이 깊어가는가 했더니만 계절의 흐름은 초하를 연두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이제 내가 기다리는 것은 피었다 지는 꽃 소식이거나, 바람같이 왔다가는 사랑 소식이거나, 하루 밤 신기루 같은 출세 소식이 아니다. 가루 모래보다 작은 씨앗이 거친 땅을 뚫고 돋는 생명의 무섭도록 신묘한 이치를 바람결에 틈틈이 전해 듣는 것이다. 그 안에 천天 지地 인人의 어우러짐이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잠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과 함께 위의 분들과 그 외의 고마운 분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알지 못했던 세계에 눈과 귀를 가까이 기울이면서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자 미지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머리 조아려 감사를 드린다.
첫댓글 이용대 시인의 삶과 애환이 담긴 수필집『가곡천 그 여울을 따라』발간을![축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4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드립니다. 앞날에 건강하고 ![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2.gif)
거운 삶이 이어지길 빕니다.
늦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