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원 처단
장승원은 칠곡의 부호로 부자가 모두 친일을 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장승원의 아들은 해방 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이며, 전 대통령 김영삼은 장택상의 비서로 정치생활을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16년(기록에는 일제 연호로 대정5년이라 한다) 6월(음력)중에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장승원을 살해하려고 한 일이 있다.
1905년 늦봄 어느날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을 역임하고 비서원승으로 재직하고 있는 허위의 집을 은밀이 찾은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 관직을 구하러 온 것이다. 당시에는 정부의 재정이 고갈상태로 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했었다. 장승원은 경상관찰사직을 20만원에 사자는 것이다. 곧은 성품의 허위의 분노가 폭발하여 부리는 사람을 불러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당시 가장 아끼는 22세의 제자 박상진이 스승을 별실로 모시고 설득했다. 근간 일본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니 불원 관직을 떠나 구국창의를 해야 할 터인데 그때에 대비해서 자금을 준비해야 한다고 간곡히 권한 것이다. 절체절명, 구국을 앞세우니 대쪽같은 허위도 마음을 굳였다. 젊은 박상진이 다리를 놓아 허위는 장승원에게 경상도관찰사의 벼슬을 주선해 주고 대신 장승원은 20만원을 언제라도 필요하여 요구하면 금방 내놓기로 약조를 하였다.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때 군자금1만원의 조달을 요구했더니 장승원이 이에 응하지 아니한 까닭에 허위는 잡혀 사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허위는 장승원과 약속했던 군자금은 써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조국에 한몸 바쳤던 것이다. 그후 허위의 형 성산 허겸이 동생의 뜻을 이어 1913년에 의병을 일으키려고 1만원의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사실을 일제에 고했기 때문에 위험을 느낀 성산 허겸은 결국 동생의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떠나야 했다 그 후 백동규를 보내 군자금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헌병대에 신고하였으며 일제의 토지 수탈 목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이 진행될 때 일인에게 아첨하여 재산을 늘렸다. 그중에 이왕실 토지를 제멋대로 신고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어 불충이란 말을 듣는다. 장승원은 소작인들을 몹시 다루어 일인들의 소작조건보다 가혹했다고 한다. 그리고 왜관에 사는 김요현의 아내 이성녀의 미색에 혹하여 여러가지로 유혹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좁은 방으로 유인하여 실랑이를 벌이다가 반항하는 여인의 머리를 목침으로 쳐서 죽게 하였는데, 일경과 내통하여 남편김씨의 현장접근을 못하게 하고 검시의사를 매수하여 병사로 처리하고 말았다.
그의 큰아들 장길상은 1916년 초대 데라우찌 총독이 2대 하세가와로 경질될때 정준민, 김기영과 함께 소위 조선인 대표란 명목으로 동경까지 가서 하세가와를 맞아 신주처럼 떠받들고 돌아온 자라고 한다.
둘째아들 직상은 합방이 되자 일제의 관료가 되어 식민지통치에 앞장을 섰다고 한다. 이렇듯 장승원에 대해서 깊은 원한을 박상진은 1916년 3월중에 우이견 등이 와서 장승원을 처단하려고 하자, 이들과 상의하여 역량이 남보다 우수한 사람을 골라 실행시키기로 하였다. 이 사람에게 3백원을 주고 가족에게는 1천 원을 주어 중국에 이주시키기로 하고, 그 돈은 박상진이 마련하였다. 그리고 우이견, 권상석, 송아무개에게 각각 1 자루의 권총과 수백 개의 탄환을 주었다. 그들은 2~3회 장승원을 살해하려고 엿보고 있었으나 홍수가 나고 또 공포심도 생겨 실행치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1917년 음력8월 박상진의 집에서 채기중, 김한종 등과 모여 장승원 처단을 결정하고 모범용사를 선발하기로 하였는데, 음력 9월17일 안동읍내에서 채기중, 임세규, 강순필, 유창순이 선발되었다. 이튿날 18일에 왜관으로 가서 세 사람에게 장승원의 집 상항과 부근의 지리, 본인의 재부(在否)들을 조사하라고 시켰다. 채기중은 대구로 가서 박상진을 만나 결행을 보고하고 약목시장으로 와서 세 사람과 만나서 24일, 임세규에게 장승원 집의 상황 과 기타를 조사시켰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25일 과객차림으로 채기중이 장승원의 집에 공모씨라 칭하고 1박하면서 집안 사정을 살펴보고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구미의 이형락과 만나서 가세를 부탁하고 유창순, 강순필과 숨어있는 함께 장승원의 집에서 5리쯤 떨어진 버드나무 숲에서 4명이 회합하여 장승원의 집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형락, 강순필, 유창순에게 권총1정씩 나누어 주며 형락과 순필은 장승원의 거실로 가서 그의 살해를 담당하고 창순은 그 집의 큰 객실 부근에서 망을 보기로 하며 채기중은 “왈유광복 천인시부 성차대죄 계아동포 성계인 광복회”(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聲戒人 光復會 - 오로지 광복을 말하노니 천인이 이를 부친다. 일제를 편든 대죄를 큰소리로 말하노라. 우리 동포에게 경계하노라 이 경계를 말하는 이는 광복회라.)라고 쓴 경고문을 장승원의 집 사람이 볼만한 곳에 붙이기로 하였다.
음력 9월25일 오후8시경에 장승원의 집에 들어가 채기중은 이형락, 강순필을 거실로 인도하여 문을 여니 장승원이 식사를 마쳤을 때였는데 두 사람에게 장승원을 가리켜주고 그 집 대문에 경고문을 붙였다. 3.4회의 총성이 들리고 곧 세 사람은 함께 도주 하였다. 장승원 처단 후 마을사람들이 자기들을 쫓아 올지도 모를 일이니 유창순에게 집에 석유을 뿌리고 방화하라. 그러면 마을사람들이 소화에 정신이 팔려 우리를 쫓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후에 유창순이 석유병은 메쳤으나 손에 부상을 입어 방화는 실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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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북삼면 오태동 장승원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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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답사 및 모의장소 (왜관 약목면 약목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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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12일 장승원이 사망한 구 대구 자혜병원
(현, 경북대학교 병원 본관)
2012.3.23.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첫댓글 오늘 안동 성소병원에 병문안 다녀 왔는대요
회원님 모두 건강 하십시요
핸들을 영덕으로 확 돌리고싶은 날씨고요
이 좋은날에 일본이 가라앉는다는 소식은없네요
장승원 집에 어제 갔는데 주소가 구미시 오태1동으로 바뀌었네요.
그리고 집앞에 경상도관찰사라고 쓴 장승원 비석이 있고,집은 현재 "굼터"라는 한정식 집으로 하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