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鏡虛) 이야기
강 대 춘
나이 들어선지 최근에 머리가 많이 복잡하다. 어떤 때에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다. 괜히 그러냐고? 아니다. 괴로울 지경이 될 일을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어리석다고? 아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늘 그런 일들을 만들어 내고 또 저절로 생기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늘 기쁘고 즐겁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을 스스로 만들고 또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상태를 피할 방법도 없다. 어쩌면 사람 사는 일들이 그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최근에 내게 한 가지 괴로운 일이 생겨서 한동안 힘들게 인내하다가 그것이 잘 안되어 예전에 보던 불교서적들을 다시 꺼내들었다. 언제 한번 많이 힘든 일이 있었을 때에 불교서적을 보면서 나름 치유한 적이 있었기에 다시 그 책들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긴다. 어쩌면 단순무식한 방법이지만 혹 나의 괴로움을 치유해줄 말씀들을 어디에선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불교란 ‘부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 불교 얘기를 할 때는 주로 부처님 말씀을 얘기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속의 괴로움을 없애려면 수양을 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修道, 修行이라고 한다. 사람이 좋은 것을 좋아하고 싫은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둘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앞면을 가지기 위해선 뒷면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는 죽음이, 얻음에는 잃음이, 행복에는 불행이, 사랑에는 고통이 뒤따름을 잊지 말고 담담히 그 양쪽을 모두 받아들이고 또 초월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옛날에 어느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내가 4명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두 번째 아내는 남에게서 빼앗아 온 사랑스런 여인이었고, 세 번째 아내는 가끔 만나는 여인이었으며, 네 번째 아내는 하녀같이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이었다. 그러다가 그 부자가 어느 날 먼 길을 갈 일이 생겨서 네 아내들에게 먼 길 고생길을 같이 하자고 말하니, 첫 번째 아내는 단번에 거절했고, 두 번째 아내도 똑같이 거절했다. 세 번째 아내는 그간의 정이 있으니 성문까지는 같이 가겠다고 했고, 네 번째 아내는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까지라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자! 여기에서 보자! 첫 번째 아내는 우리들의 ‘육신’이다. 두 번째 아내는 ‘재산’이며, 세 번째 아내는 우리들의 ‘부모, 형제, 처자식’이다. 그리고 네 번째 아내는 우리들의 ‘마음’ 즉 ‘평소 지은 공덕’이다. 즉 중생이 죽을 때 육신은 그와 함께 가지 못하고 재산 또한 가져갈 수 없다. 부모, 친지 등은 슬퍼하면서 무덤까지 따라가 줄 수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육신과 재산에 탐닉하고 부모나 처자를 귀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아끼고 보살피지 않아 고통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모름지기 선행을 쌓고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 이런 글이 있다.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을 나를 두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살라하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디 목숨 있는 것을 편안케 해주고 사나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죄업은 다 씻길 것이다. 말로써 남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곧 나에게로 돌아와 나의 죄업이 될 것이다. 그 죄업은 물로써 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업을 씻어내려 하지 말고 미리 죄업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 한 노승과 제자가 길을 떠나 강가에 이르렀다. 강가에는 처녀 한 명이 강물이 깊어 건널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노승은 두 말 없이 처녀를 두 팔로 안고 강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제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대체 스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스승을 따라 십여리 쯤 갔는데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결국 스님한테 따졌다. “스님! 저한테는 늘 중은 계율이 생명이다 라고 하시더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뭘 말이냐?” “아까 거기서 처녀를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무심히 대꾸하였다. “아! 그일! 이놈아! 나는 아까 거기에 처녀를 놓고 왔는데 네 놈은 아직까지 안고 있단 말이냐?” 즉 마음에 그림자가 남는 것이 중생이요, 수행은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제 마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모든 것이 수양 부족인 것이다. 지식만 많으면 뭐 하는가? 수양이 부족하여 좁쌀 한 톨도 지니지를 못하는 것을.....
얼마 전 친구들과 <무소유>라는 책으로 인해 법정스님 이야기를 하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불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해인사에 들러 성철스님의 부도탑을 보고 느낀 게 있었고.....지금 제주도에 한달살이로 왔는데 불현듯 다시 불가의 이야기가 떠올라, 일갈의 선승 임제를 생각하다가 결국 경허에 이른다.
경허(鏡虛)는 한국 근현대 禪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그는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출생해 9세 때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에서 출가하였다. 1879년 동학사에서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라는 한마디에 깨달았다. 그리고는 1880년 지금의 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에 있는 천년고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긴다. 경허는 천장암의 작은방에서 1년 반동안 참선한 끝에 확철대오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라는 오도송을 짓는다. 그리고 천장암에서 ‘三月’로 불리는 그의 수제자들, 수월스님, 혜월스님,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게 된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 등지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때 경허스님과 제자들 간의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1886년 옷과 집기 등을 모두 불태우고 무애행에 나선다. 제자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도 하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에서 1912년 입적하였다. 나이 64세로 저서에는 <경허집>을 남겼다.
경허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로 불리는 수월, 혜월, 만공선사가 있다. 경허 曰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경허는 세 제자들을 두고 수월은 북녘의 상현달, 만공은 중천의 보름달, 혜월은 남녘의 하현달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수월은 북쪽과 만주에서, 만공은 중부지방에서, 혜월은 남부지방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세 제자들은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이 선승들에게 또 뛰어난 선승들이 나오는데 혜월의 제자로는 운봉, 향곡, 진제가 있고, 만공의 제자로는 정강, 고봉, 혜암이 있다. 고봉스님의 제자 중엔 해외에서 한국불교를 알린 숭산스님이 있다. 한국전쟁 때 월정사를 지켰다는 방한암 스님도 경허의 제자이다.
경허에 대한 일화는 엄청나게 많다. 불당에서 한 달 동안이나 여인과 함께 지내던 경허를 두고 만공은 발을 동동 굴렀는데 나중에 여인이 나오는 것을 보니 얼굴이 다 뭉개진 문둥병환자였더라는 일화도 있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강가에서 경허 일행을 만났는데 스님들에게 업어서 건너줄 수 없겠느냐 고 했을 때 경허의 제자들은 정색을 하며 처녀에게 화를 냈다는데, 경허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처녀를 업어서 강 건너편에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에 제자 중 하나가 화를 내며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땡중이 아니냐고 따졌을 때 경허 曰, “이놈아! 난 그 처자를 한참 전에 강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하는 일화하며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또 어느 날 밤, 만공이 등불을 켜고 큰방에 들어가니 경허가 누워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경허의 배 위에 시커먼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길래 크게 놀라 “스님!, 스님 배위에 독사가 앉아 있습니다!” 소리쳤다는데, 그때 경허는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담담히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 두어라” 라고 했다. 그 뒤 독사가 가고 난 뒤에 경허는 만공에게 “큰일을 당했을 때는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되느니라” 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 외 일화는 부지기수이다.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기를 열었던 성우 경허스님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근세불교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막강산이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는 경허 큰스님을 ‘한국의 달마대사’ 라 칭송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제2의 원효대사’로 추앙하기도 한다. 그 선승 경허가 있었던 곳이 바로 서산 천장사이다. 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1번지이다. 이곳은 경허가 17년을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도 길이 구불하고 대중교통편도 없다. 장요리까지 버스를 타고 와도 40분 이상이나 넘게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절 근처에서는 가파른 산길을 숨차게 올라야 한다. 불가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일만한 선지식들이 스쳐 지나간 하늘이 숨겨둔 절 천장암. 하지만 절은 초라하다. 문화재라고 할 만한 유적도 없다. 법당은 낡았고, 그 앞에 쓰러질 듯 세월을 안고 살아온 탑 한 기뿐이다. 경허가 장좌불와했던 작은 방 원성문이 그대로 있고, 최근 그 앞에 경허탑이 조성됐다. 그 옆방에는 수월, 혜월, 만공스님이 경허를 시봉하며 머물렀던 방이 있다. 최근 경허 입적 100주기를 맞아 경허기념관을 짓는다고 한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조선왕조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투철한 깨달음으로 꺼져 가는 禪의 등불을 밝힌 경허 큰 스님, 현대 한국 禪불교의 맥이 경허선사의 제자들과 법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고 꺼져가던 禪의 등불을 밝힌 ‘한국 禪의 달마’ 라 일컫는 그가 요즘 다시 살아나고 있다. 나 지금은 제주에 머물고 있지만 다시 뭍에 나가면 충남 서산의 천장암에 가 보려고 한다. 기독교인이었던 내가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았던 책, 최인호의 <길 없는 길>....그 책에서 경허를 처음 알고, 불교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금씩 불가의 흔적을 접하던 내게 최근 법정의 얘기를 친구들과 하게 되면서 갑자기 관심이 확 쏠린다. 그래서 다시 예전에 알았던 어구들을 다시 접한다. 頓悟漸修, 不立文字, 廓徹大悟, 定慧雙修.....등. 예전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우리네 삶의 결말은 결국 세존의 보리수나무 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