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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6
네 백성을 위로하라
사6:1-8, 40:1
영국 왕 죠지 6세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왕 중의 한 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사람들 앞에 자주 나타나길 꺼려했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의 치세 동안 일어났던 그 힘든 2차 세계대전을 잘 견딜 수 있었고 전 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쇠락해 가는 중에서도 나라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52년 잠자다가 56세의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자 전 영국민이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위로를 얻고 소망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BC 740년 경, 유다왕 웃시아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 또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웃시아는 왕으로써 당시 유다의 백성들에게 그늘이 되어 주던 큰 나무였습니다.
그는 16세에 왕으로 즉위해서 52년간이나 유다를 다스렸는데 중농정책을 펴서 농민들을 잘살게 해 주었고, 성을 재건했으며 무기를 개발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웃 강대국들인 앗수르와 이집트와 바벨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서로가 세계의 배꼽인 전략적 요충지 유다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적 위기감이 조성되었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아 왕과 사촌 형제간이면서 왕실 서기관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의 후광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은 혜택을 누리리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왕의 죽음은 이사야 자신에게도 큰 손실이었고 그래서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 컷습니다.
그와 같은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딘가로 갑니다.
대게는 상황과 장소는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산속으로 들어 가 버리는 자연인들입니다.
그곳에서 위로받고 치유받으려 합니다.
기도원이나 인적없는 바닷가나 어두운 카페로 가는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저 또한 목회할 때 자주 한밤중이라도 침낭을 싸들곤 성전 앞 제단으로 가곤 했습니다.
왜 성전어야합니까?
성전에서 이사야가 본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이 (사6: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는 성전에서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왕을 보았습니다..
죽은 왕 웃시아가 아니라 살아계신 왕이신 여호와였습니다.
그 분은 언젠가는 죽고 마는 그래서 통지권도 죽어버리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우리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추억의 왕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었습니다.
유대나라에 국한된 왕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 곧 왕의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였습니다. 절망과 단절의 왕이 아니라 변함없는 소망의 왕이었습니다.
그 왕께서 보좌에 앉으셨고 이사야는 그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자 때문에 성전을 찾은 이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와 같이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지는 날이 되어 낙심될 때면 우리는 성전으로 올라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살아계신 왕이신 우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랍들입니다. 스랍이란 하나님의 보좌의 거룩함을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상, 중, 하, 세 쌍의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나는 데 쓰는 날개는 가운데 한 쌍의 날개일 뿐이고
나머지 상하의 날개 중, 상 날개는 얼굴을 가리고, 하 날개는 발을 가리었습니다.
그리고 입술로는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외쳤습니다. 그러자 그 창화하는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광경에 대한 이사야의 반응이 기묘합니다.
굉장하다던가, 놀랍다던가하는 반응이 아니고 전혀 엉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느닷없이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얼굴과 발을 가린 거룩한 스랍천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자신 웃시아 왕이 살아 있을 때, 왕의 사촌이라는 위세를 믿고 어디에나 얼굴을 내밀고 발로 헤집고 다녔음을 뜻합니다. 그는 여태껏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그래도 된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조차 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너무나도 부끄럽게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는 데 천국 입구엔 문이 없고 큰 거울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으면 누구나가 일단은 천국 입구로 가 보는데 그러면 그 거울에 자기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너무나 더럽고 추하고 흉한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스스로 옆길로 빠져 지옥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간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부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눈을 가지고 볼 것은 안 보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은 보고 다녔구나.
이 코를 가지고 주님의 향기는 맡지 않고 사람 냄새만 맡고 다녔구나.
이 귀를 가지고 거룩하고 복된 소리보다는 왼갓 잡소리만 듣고 다녔구나.
이 입을 가지고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창화하고 선포하고 전도하기보다는 입 다물기 일쑤였고 아니면 거짓말하고 위로하지 아니하고 바른 말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 허물이나 탓하며 그렇게 다녔구나.
또한 이 발 가지고 가야 할 곳은 가지 아니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은 갔었구나.
잠6:18 말씀처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었고,
또한 잠7:11에 이른 대로 ‘떠들며 완패하며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는 계집의 발’처럼 그렇게 싸질러 돌아다녔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평안의 아름다운 복음의 발이 아니라,
오직 나만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발이었구나.
늘상 하나님 보좌에 서 있는 거룩한 천사들조차도 얼굴과 발을 가리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그랬구나.
그런 이유로 이사야의 입술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그가 신음한 것은 천국문 입구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각성 때문이었습니다.어둠이 빛을 보면 사라짐 같이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10:28)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사6:6~7)
갑작스레 상황이 반전된 것입니다.
천사가 단에서 핀 숯 하나를 취하여 이사야의 입에 댄 순간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성전 제단 앞에 피어 있는 숯불이 무엇이기에 그랬던 것입니끼?
그것은 속죄제물을 태우는 곳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주의 죄가 사하여지는 곳입니다.
속죄물이란 대속물입니다. 나 대신 드려지는 제물 말입니다.
그런고로 대속제물인 양이 그곳에서 태워질 때 그것을 드린 자의 죄가 속해지고 태워지고 정결케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제물이 제단 위의 숯불에 놓여 태워지거나,
그 숯불이 제물에 다가와 태우거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와 같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대신한 그 대속의 보혈이 흘렀고
성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의 시뻘건 숯불이 그것을 태워 심판함으로 인해
십자가는 우리를 정케하는 제단 위의 핀 숯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가 놓여지고
우리는 그 십자가를 붙듦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무슨 연유로 갑자기 천사가 숯불을 들고 와 그를 정결케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고백에 나타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의 회개였습니다. 회한이 아니라 회개.
곧 죄인 됨에 대한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는 죄인 됨에 대한 고백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런 고백이 죄사함을 가져옵니다.
이 죄사함의 은총과 절차는 신약 요일1:9 에도 확인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사야처럼 자신을 부끄러워함이 죄사함의 은총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를 소성케 하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전에서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러자 심령에 감동받아 있는 이사야의 귓가에 주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말씀 곧 선포할 뭔가가 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게 뭘까요?
이사야서 전체를 보면 그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심판의 선포, 또 하나는 위로의 선포.
심판과 위로, 이는 십자가와 부활처럼 한 묶음입니다.
심판만이 복음일 수가 없고 위로만이 복음일 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순서상으로 심판이 먼저이고 위로가 다음입니다.
이에 이사야가 답합니다.
‘네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그러면서 이사야가 먼저 묻습니다.
‘심판은 언제까지입니까?’
이에 주님께서 이렇게 답합니다.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11,12)-(약 70년)
그런데 이런 선포 곧 메시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잘 받아들이고 잘 들으려고 할까요?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그들이 눈과 귀가 어두워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이는 심판이 강제집행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제 배쪽에 종기가 하나 생겨 점점 부풀어 올랐습니다.
자꾸 만지작거려 벌겋게 커진 것입니다.
6.25가 막 끝난 때여서 약국도 병원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제 할아버지께서 새끼손가락만한 칼을 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하신 후
그 종기를 찔러 터트리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마구 울어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종기에서 피고름이 쏟아졌고
할아버지께서는 사정없이 그 상처부위를 손으로 짜내셨는데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그리고는 입으로 그곳에 남아 있는 피 고름을 빨아 뱉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 고약을 붙이셨는데 그때의 칼자국이 장년이 되기까지도 남아 있었고
그것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했습니다.
종기가 작을 땐 항생제로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 그렇게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를 거쳐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죄악이 반복되면서
악성종기가 점점 커져버렸고
악의 피고름을 짜내는 심판을 하셔야 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이사야에게 먼저 그걸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심판이 진행되었고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 당한 후 백성들은 끌려가 그곳 여러 강변에 거하면서 70년을 지내며 슬퍼하며 피고름을 짜내는 고통에 울며 회개하며 시온을 그리며 그곳으로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나긴 심판의 기간이 지나면 그들에게 위로를 선포하라 하신 겁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우리 할아버지의 손칼과 입술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였고 그 새로움으로의 회복과 위로를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관점으로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했던 것처럼 보였고 바사국의 다리오 왕에 의해 해방된 것 같아 보였지만 그 모든 일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곧 왕의 왕께서 주관하신 일이었습니다.
악성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진 베토벤이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존경했던 분이 있었는데 바로 헨델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임종시까지도 헨델의 메세아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비록 당시대의 음악가 중에는 바흐가 있었고 음악적으로 훨씬 업적이 더 컸지만 헨델은 오직 한곡, 오라토리오 메시아만으로 여타 모든 음악가들의 명성을 뛰어넘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에 감동을 받아 작곡한 바흐의 ‘천지창조’도 그것에 못 미칩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요?
원래 독일 태상인 헨델(1985.2.23. 작센 태생)은 2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인기를 독차지한 꽃미남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바흐가 독일에서 80플로린의 보수를 받고 있을 때 영국에서 500플로린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영국 앤 왕비로부터 연금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영국 왕실이 하노버 왕조로 바뀌자 여러 가지 사정과 자기 고집으로 작곡과 연주의 거듭된 실패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건강마저 잃고 거의 기동을 못하게 되었던 그의 나이 57세였던 1747년이었습니다. 더블린이라는 지방에 있는 한 자선음악단체인 ‘필하모닉소싸이어티’라는 곳으로부터 자선음악회를 위한 작곡을 부탁받게 됩니다. 그리고 제넨즈라는 사람으로부터 그 부탁받은 음악의 작곡을 위한 가사를 소포로 전달받게 됩니다. 그가 소포를 뜯어보니 모든 가사가 성경 구절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왈칵 눈물을 쏟아졌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리고 그 마지막은 ‘왕의 왕 또 주의 주, 영원히, 영원히, 할렐루야’였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마치 열에 들 뜬 사람처럼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곡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영원히 나를 다스려 주실 만왕의 왕이 계시는구나.
이 땅에서 나를 통하여 찬송 받으실 그분,
내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찬송해야 할 분이 계셨구나.
그래서 마냥 눈물을 글썽이며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대한 예술의 극치라 불리는 그 대작이 24일 만에 완성되었고 더블린에서 1747년 4월 12일 초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69세였던 1759년 메시아 연주를 지휘하곤 졸도한 후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왕의 왕의 품에 안겼습니다.
무엇이 헨델로 하여금 위로의 메시아를 작곡토록 했습니까?
그가 눈으로 본 왕의 왕 또 주의 주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왕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낙심하여 성전에 올라갔으나 오히려 살아 계신 왕이신 여호와를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더럽고도 부끄러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만 그로 인해 오히려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좌절 가운데서 오히려 산 소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의 그 시간 이사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시대적 또는 세기말적 상황도 외면한 채 막연한 낙관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상황에 초조해 있던 이사야의 귓가에 주님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에 이사야가 말했습니다.‘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선포는 심판이 먼저이지만 목적은 회복과 위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두 번째로 하셨던 말씀을 헨델에게도 하셨습나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헨델이 오라토리오를 통해 메시아가 왕의 왕이심과 우리의 위로이심을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선 지금도 우리 귓가에 ‘내가 누굴 보낼꼬’하시며 우릴 재촉하고 계십니다. 그에 대한 우리의 답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심판과 위로 곧 십자가와 부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인 것입니다.